새정치국민회의 (구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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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신 대통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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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 ~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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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대 선거 결과 ==
== 역대 선거 결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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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령 선거 ===
=== 대통령 선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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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회의원 선거 ===
=== 국회의원 선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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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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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대 대한민국 국회의원 선거|15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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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대 대한민국 국회의원 선거|1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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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대 대한민국 국회의원 선거|1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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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2월 5일 (일) 11:41 판

새정치국민회의
영문 명칭 National Congress for New Politics
등록약칭 국민회의
슬로건 다시, 김대중 정신으로
창당일 1982년 5월 6일 (민주연합)
당명변경 1992년 9월 30일 (새정치국민회의)
2008년 10월 26일 (민주당)
2021년 9월 30일 (새정치국민회의)
이념 자유주의
보수자유주의
제3의 길
경제적 자유주의
자유보수주의
중도개혁주의
사회민주주의
사회자유주의
진보주의
스펙트럼 중도우파 ~ 중도좌파
총재 송영길 / 인천 계양 7선
원내총무 우상호 / 서울 서대문 5선
국민회의의장 이낙연 / 전남 담양·함평·영광·장성·무안 5선
출신 대통령 김대중 / 제15대(1993.02.25 ~ 2005.02.25)
의석 수 125석 / 300석 (41.7%)
상징색 청록(#00AA7B)

새정치국민회의(-政治國民會議)1992년 9월 30일, 민주연합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을 비롯한 상도동계가 탈당한 이후 당명을 교체하여 새로 출범한 정당으로, 보통 국민회의로 불린다. 다만 2007년과 2008년의 참패 이후 정당 이미지 쇄신을 위해 이름을 민주당으로 바꿨었다. 그리고 2021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코로나로 서거한 이후 김대중 정신으로 돌아가자며 당명을 다시 새정치국민회의로 교체했다.

한국의 정당 중 가장 오래된 정당이다. 두 번째는 1991년 창당된 민주자유당의 후신이자 현재 집권당인 새한국당이다. 한국 역사상 ~당으로 끝나지 않고 대통령 당선자를 배출한 유일한 정당이다.

이 문서는 1992년부터 2008년, 그리고 2021년 이후 즉, 당명이 새정치국민회의였던 시절의 내용을 기록한다. 그 이전은 민주연합, 사이는 민주당 참조.

역사

당명 변경과 12대 대선

1992년 4월의 14대 총선 이후 6월 대통령 후보자 경선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재선 도전 선언은 민주연합 내에서 굉장한 반발을 불러왔고, 결국 김대중이 경선에서 승리하자 김영삼 대통령은 상도동계를 이끌고 탈당해 민주정의당과 함께 민주자유당을 차려 대선에 출마했다. 이 과정에서 민주연합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쓰고 출마하기에는 연합이라는 이름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김대중은 당명을 새정치국민회의로 변경하고 대선에 임했다.[1]

당명 변경 당시 민주연합의 적지 않은 PK 의원들이 김대중 대통령에 대의가 있다고 보고 민주연합에 남았다. 1992년 9월 30일 당 대변인은 민주연합의 새 당명을 「새정치국민회의」로 하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약칭으로는 새정치가 아닌 국민회의를 고집했는데, 대변인은 국민회의에 여러 의견을 포용해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 내겠다는 의지라고 설명했었다.

국민회의는 대선을 앞두고 중소기업의 육성, 국가보안법의 국가안전보장법으로의 대체, 첨단 산업의 지원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사실 김영삼 대통령이 재선 출마 선언을 하기 전 상황은 말 그대로 DJ 1강 체제였다. 정주영과 김종필의 통일국민당은 20%에 가까운 지지를 보여줬지만, 야당인 민주정의당의 유력한 대선 후보인 노태우 총재는 10%대 초반의 지지를 얻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김대중은 혼자서 40%가 넘는 지지를 받았다.

김영삼 대통령의 출마 선언 이후에는 YS, DJ, 정주영의 3중, 노태우의 1약으로 굳어졌다. 그러다 경선 직후 DJ로 표가 몰렸지만 YS가 탈당하고 민주정의당과 함께 민주자유당을 차리고 대선후보로 확정되면서 YS, DJ의 2강으로 선거 구도가 굳어졌다. 정주영도 나름 선방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김영삼과 김대중이라는 민주화 시대의 별 앞에서는 무력했다. 결국 본선에서 김대중이 50.3%, 과반을 득표하며 새정치국민회의는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이후 1993년 2월 25일 김대중 대통령이 공식 취임하면서 여당이 되었다.

DJP 연합

12대 대선 과정에서 정주영이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대선 이후 정계은퇴를 선언한 후 통일국민당은 구심점을 잃고 흔들리기 시작했다. 김종필은 통일국민당 의원들을 잡아두기에 큰 메리트가 없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당내 지도력이 약화된 상황이었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이미지 쇄신을 위해 진행한 신정치개혁당과의 합당은 오히려 의원들의 없던 단결력 마저 와해시켜버렸다. 이 합당으로 창설된 자유민주연합의 시작은 미약했다. 이후 민주자유당이 이름을 신한국당으로 바꾸고[2] 외연확장을 시도하자 속절없이 의원들을 잃기 시작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김종필 총재를 만나 DJP연합을 제안했다. 요지는 국무총리에 김종필을 지명할테니, 자민련이 국민회의의 연립여당이 되어야한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김대중은 연립여당이 되면, 자민련이 국민회의보다 우위가 되는 지역구에는 총선이나 지선을 가리지 않고 공천하지 않겠다며 JP의 당내 장악력 또한 확보해 주었다. 이런 조치는 국민회의 내에서 불만을 낳긴 했지만, 많은 의원들이 김대중 대통령의 뜻에 묵묵히 따랐다.

1994년 6월의 4회 지방선거는 DJP 연합이 결성된 직후, 즉 집권 1년만에 치러진 선거이다. DJP 연합은 굉장했다. JP는 충청권과 TK에서 실감할 수 있었다. 특히 신한국당은 찍고 싶지 않은데, 국민회의를 찍기에는 꺼려지는 유권자들의 표를 굉장히 많이 받아 압승을 거둘 수 있었다. 지선의 2년 후인 1996년의 15대 총선에서 이러한 경향을 확실히 볼 수 있는데, 자민련이 무려 72석을 확보하며 국민회의의 99석과 얼마 차이가 나지 않는 수준으로 올라섰기 때문이다. 만약 김대중 대통령이 경쟁우위공천 원칙을 지키지 않았다고 하면 자민련은 40석도 되지 않는 의석만을 확보했을 것이다.

DJP 연합의 끝

1990년대의 경제적 호황은 98년 대선까지의 여정을 순탄하게 만들었다. 김대중은 집권 내내 높은 인기 때문에 기자들에게 차기 대선에 출마할거냐는 질문을 받았지만, 지금은 국정에 집중하고 싶다거나 차기 생각은 해본 적도 없을 정도로 바쁘다고 대답하며 번번히 직접 언급을 피했다. 특히 98년 초에 들어서면서는 대선에 출마할 의지가 없는 것을 보여줬다. 겉으로는 이렇게 연막을 친 김대중 대통령이었지만, 물밑에서는 누구보다 차기 대선에 출마하기 위한 명분을 쌓기 위해 노력했다. 김대중은 7월 대선에 출마하겠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김종필은 격분했고, 국무총리 자리에서 즉시 사임했다.

김종필은 연일 김대중을 비난했으며,

특히 97년 말부터 김종필이 차기 대선주자로 발돋움하자 불법정치자금 수수를 명목으로 표적조사하기도 했다.

PK 리버럴과의 연대

이해찬 리스트와 당명 변경

13년만에 복귀한 국민회의

출신 대통령

대한민국 대통령
이름 임기 선출 방식 정당
취임일 퇴임일
6 김대중

(1924 ~ 2021)

12 1993년 2월 25일 2005년 2월 24일 1992년 대선

직선

새정치국민회의 (1993 ~ 05)
13 1998년 대선

직선

역대 선거 결과

대통령 선거

연도 선거명 후보자 득표수 (득표율) 결과
1992년 제12대 김대중 당선
1998년 제13대 김대중 당선

국회의원 선거

연도 선거명 지역구 (비율) 비례대표 (득표율) 총 의석 (비율) 결과
1996년 15대 68 / 219 (31.0%) 31 / 90 (34.4%) 99 / 299 (33.1%) 원내 2당
2000년 16대 112 / 225 (49.8%) 38 / 74 (51.3%) 150 / 299 (50.2%) 단독과반
2004년 17대 110 / 231 (47.6%) 28 / 68 (41.2%) 138 / 299 (46.1%) 원내 1당

지방선거

둘러보기

각주

  1. 그도 그럴게, 민주연합의 뜻은 김영삼의 통일민주당과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이 연합했다는 것이다. 한쪽이 탈당했으니 연합으로 불릴 이유도 없는 셈.
  2. 민주자유당의 약칭인 "민자"가 배신이나 남을 속인다는 뜻으로 퍼지자 관리를 위해 당명을 변경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