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의 불란서 세계관

대만총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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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대 대만총독
초대 동녕왕
성용권 | 成鏞權
출생 1928년 10월 8일
한성부 동대문구 신설동
사망 2019년 3월 27일 (향년 90세)
대만성 죽림시 동명궁
능묘 대릉(代陵)
재임 13대 대만총독
1962년 8월 13일 ~ 1982년 6월 10일
초대 동녕왕
1987년 1월 1일 ~ 2010년 5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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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한국의 외교관, 정치인. 호는 혜등(慧燈), 자는 금아(金兒). 마지막 관선 성장인 제13대 대만총독과 초대 동녕국 국왕을 역임했다.

약 20년간 대만총독을 역임하면서 후덕한 인품과 능력으로 대만을 안정시켰고 2.28 사건등 조사로 역사문제를 청산하여 대만의 분리독립 움직임을 평화롭게 무마하였다. 중앙정부의 철저한 외면으로 역사문제 청산은 노무현 정권이 들어설 때까지 반쪽짜리 완성에 그쳤지만 그의 성장 재임기에 대만의 경제는 눈부시게 발전했고 민족간의 갈등도 완화되어 대만인의 많은 존경을 받고 있는 거의 유일한 본토계 정치인이다.

생애

청년기

1928년 성기준[1]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성기준은 본래 파주 출신으로 우계 성혼의 후손이다. 창녕 성씨 일가의 남성들은 종갓집의 장남이거나, 봉작을 받은 귀족의 장남이거나, 황제로부터 따로 봉작을 받지 않는한 모두 자작 신분이 주어졌는데 성기준 또한 그러했다. 성기준은 1925년 문과시험에 합격하였고 곧바로 윤정순[2]과 결혼하였으며 한성부 재무수석담당관으로 활동하다 1927년에는 서재필 총리에 의해 천거되어 대한국민당에 입당하였다. 1929년부터 31년까지 불과 스물다섯의 나이로 서재필 내각에서 재무부 차관까지 지내 능력을 인정받았고 세조 황제로부터 효제백 작위를 하사받았다.

혜등은 어릴적부터 상당히 유복한 편이었고 관료에 귀족 가문의 일원으로서 존경을 한몸에 받았다. 그러나 혜등이 10살인 1938년, 아시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성기준 일가는 모든 것을 버리고 황급히 만주로 피신했다. 재산은 거의 챙기지 못했어도 성기준은 꾸준히 정부 부처의 업무를 맡았고 풍족하지는 않아도 그럭저럭 생활을 이어갔으며 학교도 다닐 수 있었다. 성기준 일가는 전쟁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왔지만 저택은 파괴된 후였고 하인도 뿔뿔히 흩어진 상태였다. 어쩔 수 없이 성기준은 서울에 남고 어머니 윤씨와 용권, 남동생 용훈, 여동생 이청은 파주에 있는 친척집에서 생활했다. 그러나 생활이 어려운 것은 친척집도 피차일반이었고 17살의 혜등은 도자기 공장에 들어가 일을 하였으며 저녁에 야간반 수업을 들었다. 1948년 12월, 한성부중앙대학 정치학과(現 서울대학 정치외교학과)에 합격했고 칙령을 통해 특별 장학금 면제생이 되어 심양으로 갔다.[3]

그에게 대학생활은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했던 모양인지 친구와 어울리지 않고 도서관에서 홀로 외교와 군사에 대한 서적을 탐독했으며 영어와 중국어를 습득한 것도 이 시기였다. 1953년 졸업후에는 곧바로 외교관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하고 1956년까지 외무부에서 일하다 남베트남 대사로 발령됐다. 아버지처럼 젊은 나이에 중책을 맡게된 것. 1958년에는 붕따우의 고등판무관으로 전보되었으며 붕따우 정부의 외교 업무를 전담했다. 이 시기 탁월한 행정능력까지 보여주며 중앙정부에 눈도장을 확실하게 찍은 그는 혼란스러운 대만의 분위기를 바꿔줄 기대를 한몸에 받으며 1962년 33살의 젊은 나이에 대만총독으로 임명된다.

대만총독 재임

혜등이 부임했을 당시 대만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대만군정청 통치기에 일본부역자 색출 명분으로 많은 대만인들이 한국군에게 학살당한 2.28 사건이 터지며 대만인들의 한국의 통치에 대한 감정은 크게 악화되어 있었고 남대와 죽림등 대만 남부에는 중국 내전을 피해 약 220만명의 중국 본토 피난민이 들어와 있었으며 이들은 마땅한 직업도 없이 사회 혼란과 침체를 초래했다. 북부는 한국 통치에 호의적인 대만인이 모여 살았으나 남부는 피난민과 하류층 대만인들이 거주하였고 이들은 한국에 저항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혜등의 자서전내 표현을 빌리자면 ‘모든것이 도전받고 있었던' 상태였다. 전임 총독인 유태호 재임기에는 대만을 북위 24도선을 경계로 나누어 남부를 독립시키자는 비관적인 방안까지 논의됐을 정도였다.

북부 대만인들중 상류층으로 이루어진 형식상 의회에서는 혜등의 부임 후에도 연일 남북분리안이 논의되고 있었다. 그러나 혜등은 1962년 8월 22일 성의회 첫 기조 연설에서 남북분리안이 채택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못박았다. 아울러 민중은 분노하고 있지만 아직 임계점을 넘지는 않았으며 설득과 화해를 위한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총독 산하 사면국을 신설하여 황제의 즉위 2주년 기념 사면령을 내리기로 했다. 이듬해 3월 10일 사면국의 심도있는 조사 끝에 기타 잡범은 물론 대만 독립 운동을 하던 청년 36명이 사면되었고 그달 30일에는 독립파 조직과 대담을 실시하였으며 독립파 조직과 다음의 3개조를 협의했다.

1. 2.28 사건의 진상을 재조사 할 것.
2. 대만의 공동발전을 위해 각 민족이 평화롭게 협력하고 발전의 과실을 동등하게 누리게 할 것.
3. 대만성 의회를 평등선거로 구성케 할 것.

대만에 대해 유화적이었던 조봉암 정권의 분위기에 힘입은 덕분에 3개조 합의에 입각한 정책은 일사천리로 수행되었으며 5월 1일, 대만의회에서 2.28사건진상조사위원회 설치법이 가결되었다. 조사위는 1년 2개월간 철저한 조사를 벌였고 1964년 8월 13일, 조사위는 결과 최종 보고에서 46년부터 49년까지 대만군정청 사령관이었던 손원일 제독은 물론 273명의 군 간부급 인사의 청문회 소환을 요구하였으나 실제로 그해 9월 대만의회에서 열린 청문회에 출석한 것은 손원일 제독을 비롯한 14명뿐이었다. 그마저도 청문회에서 손원일 제독은 반역자 색출과 사회 안전을 지키라는 원칙적 명령만 내렸으며 하부로부터 보고를 받고 이상함을 느껴 별도의 조사를 벌이다 본국의 압력으로 중단되었다는 증언을 하였다. 이후 상세조사와 출석인들의 증언을 토대로 조직적인 학살에 가담하고 명령을 내린 34인을 추려냈으나 모두 출석을 거부하였으며 한국 사법기관과 조사기관들도 조사를 차일피일 미루면서 결국 흐지부지되었다.

혜등도 이에 실망했는지 본토 정치인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고 본토에서는 해임론이 부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혜등은 황제에게 직접 대만 상황에 대해 하나하나 보고하며 신뢰를 쌓았고 1965년 4월 7일에는 대북후에 봉해지며 본토의 해임론을 완전히 잠재우기에 이르렀다. 사실상 혜등이 대만에서 중앙정부와 분리되어 독자적으로 전권을 휘두를 기반이 완성된 것. 1966년에는 일부 도시지역을 중심으로 민선 성의회를 선출했으며 기존의 의회는 참의원, 그리고 민선 의회는 민의원으로 양원의회로 개편하였다. 또한 대만의 경제발전을 내세워 대만의 채석장을 대대적으로 개발하여 수출하거나 본토에서 사용될 대리석을 채굴하는 등 채석산업을 발전시켰다. 아울러 대만의 인건비는 낮은 편이었기 때문에 본토의 기업들을 대만으로 유치하는 정책을 펼쳐 여러 기업의 공장들이 대만으로 이전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현상은 1970년에는 현대중공업 같은 굵직한 기업들이 대만 죽림시에 항구를 짓고 대규모 조선소를 이전하면서 더욱 가속화되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는 대만인들의 기술숙련도도 높아지면서 제품의 경쟁력도 높아졌다. 1976년에는 대만성의 1인당 중위소득이 한국 본토의 76%에 달할 정도로 폭발적이고 성공적인 경제발전이 이루어졌다. 집권 후반기에는 공업뿐만이 아니라 관광업 개발에도 집중했다. 대만에서만 통하는 별도의 비자를 발급하여 외국인의 출입국을 쉽게 만들었고 화련군(現 화련시) 및 서해안 몇몇 해안가에 대규모 휴양단지를 개발하여 소득이 높아진 대만인들은 물론 한국 본토의 관광객까지 끌어들였다.

1980년에는 대만 전역을 대상으로 최초의 보통선거가 치러졌다. 81년에는 내년 총독직 퇴임을 공언하며 본토 성들과 마찬가지로 성장을 직접선거로 선출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설문조사 결과 81년 12월 기준 대만에서 혜등의 지지율은 86%에 육박했다. 이러한 대만에서의 성공으로 인해 본토 정계에서도 입당이나 중책을 제안하기도 했으나 이를 모두 거절한 그는 퇴임한지 두달만인 33대 국민원 총선거에서 송안 1구 무소속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스스로도 중앙 정계로부터 멀어진 '변경인'을 자처해온 그는 33대 국민원 임기 내내 2.28 사건의 진상조사와 관련된 의정활동을 수행했다.

동녕왕 즉위

  1. (1904~1988). 한국의 관료, 정치인.
  2. (1901~2000).
  3. 당시 조선반도에 있던 모든 대학들은 사실상 심양이나 장춘에 임시 교정을 두고 있었다. 이런 대학들은 1950년대 중후반이 되어서야 본교정으로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