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 (동방):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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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뒤늦게 신숙희와 정식으로 결혼하였고 신씨는 태자비로 책봉되었으나 1902년 결핵에 걸려 고생한뒤로 몸이 약해져 두차례나 유산하고 만다. 그러다 태자비 신씨는 1914년 36살의 나이로 요절하는데 이후 무종은 문란한 생활을 접고 애인인 유근숙<ref>배우였다. 단천백 유홍서의 딸.</ref>과 동거에 들어갔으며 태자비 신씨는 1925년 신헌장황후로 추존된다. 태자비 신씨가 몸이 약했기 때문에 무종의 아들이자 태자인 [[선종 (동방)|선종]]도 신씨 소생이 아니라 유씨 소생이다. 유근숙은 태자비는 물론 황후 내명부의 어떤 작위에도 오르지 못하며 공식적인 자리에서 배제되다가 1930년에서야 무종과 가례를 올려 황후로 책봉된다.
1899년 뒤늦게 신숙희와 정식으로 결혼하였고 신씨는 태자비로 책봉되었으나 1902년 결핵에 걸려 고생한뒤로 몸이 약해져 두차례나 유산하고 만다. 그러다 태자비 신씨는 1914년 36살의 나이로 요절하는데 이후 무종은 문란한 생활을 접고 애인인 유근숙<ref>배우였다. 단천백 유홍서의 딸.</ref>과 동거에 들어갔으며 태자비 신씨는 1925년 신헌장황후로 추존된다. 태자비 신씨가 몸이 약했기 때문에 무종의 아들이자 태자인 [[선종 (동방)|선종]]도 신씨 소생이 아니라 유씨 소생이다. 유근숙은 태자비는 물론 황후 내명부의 어떤 작위에도 오르지 못하며 공식적인 자리에서 배제되다가 1930년에서야 무종과 가례를 올려 황후로 책봉된다.


[[아시아 태평양 전쟁]]에서 승리한뒤 한성부로 개선하면서 창덕궁에서 연호를 연강에서 정화로 바꾸는 칙령을 내렸다. 일세일원제는 명청대부터 이어져온 것이라 신료들의 반대가 있었음에도 끝까지 밀어붙였다.
[[아시아 태평양 전쟁]]에서 승리한뒤 한성부로 개선하면서 창덕궁에서 연호를 연강에서 정화로 바꾸는 칙령을 내렸다. 일세일원제는 명청대부터 이어져온 것이라 신료들의 반대가 있었음에도 끝까지 밀어붙였다. 1949년 군주의 피휘를 폐지했다. 이는 소급 적용되어서 과거의 모든 문헌에 피휘로 인해 다른 글자로 쓰인 것까지 전부 원래 왕 또는 황제의 본명으로 바꾸게 했다. 동시에 자신의 이름을 본인이 마음에 들어하던 바를 정(正)으로 고쳤는데 이 바를 정이 흔하게 쓰이는 한자라 그냥 피휘하는 관습을 없애버린 것이다.


1949년 군주의 피휘를 폐지했다. 이는 소급 적용되어서 과거의 모든 문헌에 피휘로 인해 다른 글자로 쓰인 것까지 전부 원래 왕 또는 황제의 본명으로 바꾸게 했다. 동시에 자신의 이름을 본인이 마음에 들어하던 바를 정(正)으로 고쳤는데 이 바를 정이 흔하게 쓰이는 한자라 그냥 피휘하는 관습을 없애버린 것이다.
1955년 세종과 문종, 단종을 황제로 추존하였으며 단종의 후손을 자처했다. 전후에 학풍이 자유로워지고 세조가 명분없는 반란으로 왕위를 찬탈한데다가 그리 유능한 군주가 아니었다는 평가가 이어지면서 평소 세조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던 무종이 곧바로 세종, 문종, 단종을 황제로 추존하여 세조를 간접적으로 격하한 것이다.

2021년 8월 23일 (월) 22:19 판


동방의 불란서 세계관

대한국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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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국 4대 황제
무종 장황제 | 武宗 莊皇帝
묘호 무종(武宗)
시호 순명경흥전의효광리정의영사충상무신위흠렬청헌용장황제
(純明景興專毅孝光理定義榮思忠商武神魏欽烈淸憲勇莊皇帝)
칸호
ᠲᠡᠮᠦᠷ ᠵᠣᠷᠢᠭᠲᠠᠢ

토모르 조리그투
출생 1870년 1월 3일
대한국 한성부 창덕궁 대조전
사망 1961년 3월 9일 (91세)
대한국 천도부 평안궁 명정전
능묘 유릉(柳陵)
재위 대한국 황태자
1890년 2월 10일 ~ 1924년 5월 10일
대한국 황제
1924년 5월 10일 ~ 1961년 3월 9일
연호 연강(延康) (1924~1945)
정화(征和) (1946~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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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전주(全州)
이(李)
정(晸 → 正)
부모 부황: 양종 열황제, 모후: 신열태황후 성씨
부인 신헌장황후 신씨(추존)
신현장황후 유씨
자녀 선종 강황제외 5남 8녀

개요

대한국 제4대 황제.

상당히 늦은 나이에 즉위했으며(54세), 노년에 접어들어서도 정력적인 활동을 펼친것, 아시아 태평양 전쟁에서의 승리를 이끌어내었고 여러 후일담 때문에 현대에 들어와 가장 많이 언급되며 많은 존경을 받는 황제이기도 하다.

생애

난봉꾼 태자

섭정기

치세

승하

평가

혼란스러웠던 아시아의 30~50년대를 안정적으로 이끌었으며 한국의 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게한 명군이라는데는 이견이 없으며 서재필, 김창암, 여운형등 유능한 수상들이 연이어 출현하는 호재가 겹치며 평가가 더욱 높아지고 있다.

정당간의 권력 쟁탈전을 이용해 교묘히 헌법제정 이전의 황권에 버금가는 전제적 권력을 휘두른 최후의 황제이지만 의회를 존중하는 행보를 보였고 의회에서 의결한 사항에 대해 반대한적은 거의 없었다. 1934년 의회에서 다수당이 없을때 직접 이동휘를 내각총리대신에 임명하여 혼란을 수습했고 1939년 이승만이 한강 인도교 폭파 사건으로 인기를 잃어버리자 직접 해임한뒤 김창암을 수상에 보임했다.

당시 사회에 큰 충격을 불러올 정도로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성향의 인물이었다. 본인이 황제가 되면 정사는 의회와 정치인에게만 맡기겠다거나 자식은 정략혼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거나 하는 발언을 여러차례 하였으며 성평등에도 지대한 관심을 보여 12.10 운동 시기에는 신분고하, 성별에 관련없이 광범위한 참정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기고문을 익명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제위에 오른 후에는 선황 양종의 모든 후궁들에게 재가를 허가하고 궁을 떠나살 수 있는 권리를 주었다.

성격 및 일화

태자로 책봉된 뒤에 상당히 난잡한 생활을 이어가 부황 양종의 속을 썩였고 태자를 폐하자는 논의까지 이어졌으나 양종은 그것을 모두 물리쳤다.

1899년 뒤늦게 신숙희와 정식으로 결혼하였고 신씨는 태자비로 책봉되었으나 1902년 결핵에 걸려 고생한뒤로 몸이 약해져 두차례나 유산하고 만다. 그러다 태자비 신씨는 1914년 36살의 나이로 요절하는데 이후 무종은 문란한 생활을 접고 애인인 유근숙[1]과 동거에 들어갔으며 태자비 신씨는 1925년 신헌장황후로 추존된다. 태자비 신씨가 몸이 약했기 때문에 무종의 아들이자 태자인 선종도 신씨 소생이 아니라 유씨 소생이다. 유근숙은 태자비는 물론 황후 내명부의 어떤 작위에도 오르지 못하며 공식적인 자리에서 배제되다가 1930년에서야 무종과 가례를 올려 황후로 책봉된다.

아시아 태평양 전쟁에서 승리한뒤 한성부로 개선하면서 창덕궁에서 연호를 연강에서 정화로 바꾸는 칙령을 내렸다. 일세일원제는 명청대부터 이어져온 것이라 신료들의 반대가 있었음에도 끝까지 밀어붙였다. 1949년 군주의 피휘를 폐지했다. 이는 소급 적용되어서 과거의 모든 문헌에 피휘로 인해 다른 글자로 쓰인 것까지 전부 원래 왕 또는 황제의 본명으로 바꾸게 했다. 동시에 자신의 이름을 본인이 마음에 들어하던 바를 정(正)으로 고쳤는데 이 바를 정이 흔하게 쓰이는 한자라 그냥 피휘하는 관습을 없애버린 것이다.

1955년 세종과 문종, 단종을 황제로 추존하였으며 단종의 후손을 자처했다. 전후에 학풍이 자유로워지고 세조가 명분없는 반란으로 왕위를 찬탈한데다가 그리 유능한 군주가 아니었다는 평가가 이어지면서 평소 세조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던 무종이 곧바로 세종, 문종, 단종을 황제로 추존하여 세조를 간접적으로 격하한 것이다.

  1. 배우였다. 단천백 유홍서의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