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의 불란서 세계관
중화연방의 구성국
다이칭 구룬 ・ 대청국
ᡩᠠᡳᠴᡳᠩ ᡤᡠᡵᡠᠨ | 大淸國 | Qing
국기 국장
상징
국가 공금구
국화 연꽃
역사
• 1946년 1월 1일 선통제 즉위
• 1990년 3월 5일 효종의 선위, 한청연합 결성
• 2005년 7월 1일 중화연방 가입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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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성도
최대도시
면적 km2
접경국 대한국, 중국
인문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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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전체 인구 191,662,035명(2020)
민족 구성 한족 86.7%, 기타 민족 13.3%
인구밀도 43.74명/km2
언어 공용어 표준중국어, 만주어
상용어 촉어, 몽골어 등
종교 국교 없음
불교 73.2%, 개신교 7.8%, 가톨릭 6.3%, 이슬람교 3.5%, 기타 종교 8.6%
군사 대청국 국군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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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입헌군주제, 의원내각제, 단원제, 다당제, 성문법주의(대륙법계)
황제 선덕제
정부
요인
의회의장 애회명
내각총리대신 진전화
대법원장 만채문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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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목 GDP 전체 GDP 13조 654억$(2020)
1인당 GDP 53,192$
GDP(PPP)
전체 GDP 13조 9017억$(2020)
1인당 GDP 56,597$
화폐 한국 원(KRW, ₩)
단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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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연호 선덕(宣德), 서력기원
시간대 UTC+6 (서부 시간)
UTC+7 (성도 시간)
도량형 SI 단위계
ccTLD
.wq, .淸
국제 코드
416, KWQ, WQ
국제 전화 코드
+82

개요

대청국(정체자: 大清國, 만주어: ᡩᠠᡳᠴᡳᠩ ᡤᡠᡵᡠᠨ)은 중국 대륙 서부에 위치한 입헌군주제 국가이다. 대내외 통용되는 약칭은 청(清)[1] 또는 서청(西清)[2]이나, 한국에서는 대체로 옹청(雍清)으로 부르며 중공에서는 서중국(西中國)으로 호칭한다.

역사

헌무제가 일으킨 하북 봉기 이전의 역사는 청나라 문서 참고.

광서제한국 황제 광종에게 선양한 후, 그의 이복동생인 애신각라 재풍이 주도하여 일어난 1907년의 하북 봉기가 옹청의 시작이다. 비록 하북 봉기는 실패로 끝났지만 재풍은 한국의 영향력이 닿지 않는 서안으로 무사히 탈출하였으며 장훈등 복벽파 군벌들과 반한파 신료들과 함께 청나라 조정을 재건한다. 황제는 명목상 한국에 있던 광서제였지만 사실상 청 황제를 대리하는 관직인 감국섭정왕을 재풍이 맡으면서 실질적인 국가원수가 되었다. 재풍의 존재는 그 자체로 옹청의 강력한 구심점이 되어주었으며 재풍의 뛰어난 정치적 수완과 휘하 군벌 수장들의 군사적 능력을 통해 1922년 산서 군벌을 정벌하거나, 감숙성과 청해성의 여러 회족 군벌들을 포섭하는 등 그 세력을 불려나갔다. 재풍의 치세 아래 193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옹청은 하남성과 산동성, 안휘성과 강소성 일부에 진출하는데 성공하면서 장강 이남의 국민당과 더불어 중국 대륙을 양분하는 거대 세력으로 성장한 것은 물론 한국의 지원을 받아 지역의 식량사정을 안정시켰으며 지역 군벌을 밀어내고 옹청 중앙군의 영향력을 키우는 등 뛰어난 정치력을 보였다. 이 다시 돌아온 청나라, 재풍에 대한 민심은 날로 높아졌고 국력은 착실하게 성장해갔다. 이에 재풍은 늘 하북을 비롯한 북경의 인근 지방들로 진출하기를 바랬지만 한국의 강력한 통치력, 그리고 한국에게 지원받은 사실로 인해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이에 재풍이 눈을 돌린 곳이 바로 사천성이었다. 사천성은 지역 군벌 유상의 안정된 통치 아래 있었는데 국민당이 어떻게든 사천을 손에 넣으려 여러 방도를 강구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1934년 때마침 국부군의 탄압에 밀려난 홍군이 사천으로 진입하였고 장개석이 유상에게 홍군의 토벌을 명령하면서 상황이 변하기 시작한다.

홍군은 성도 서부의 대설산맥을 따라 북상하였고 사천 군벌은 이들을 쫓아 한중 인근의 광원에 진주하였다. 이에 옹청도 한중으로 진주하였고 옹청군과 사천 군벌이 서로 대치하는 동안 약 수천명에 불과한 홍군은 용남과 천수를 거쳐 난주로 빠져나갔다. 문제는 재풍은 이 홍군을 추격하지 않고 계속 한중 인근에만 군사를 늘렸는데 애초 재풍의 목적은 한중을 통해 사천으로 진입할 기회를 노리는 것이었지, 홍군을 진압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감숙에는 옹청에 협조적인 회족 군벌이 자리를 잡고 있었기에 이들에게 홍군 ‘따위’ 자연스럽게 격파되어 와해될 것이라 보았기 때문이었으나 홍군은 끝끝내 살아남아 신장으로 건너가 소련의 원조를 받으며 세력을 키워나갔으며, 훗날 옹청을 멸망의 위기로 몰아넣게 된다.

한편 청군이 한중에 진주했다는 소식은 삽시간에 사천성 전역으로 퍼졌다. 이미 백성들 사이에서 옹청의 경제 사정이 오랜 분열기에 악화된 자신들의 지방보다 낫다는 소식이 전국에 퍼져있었고 그로인해 사천성에서도 재풍에 대한 기대감과 호감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게다가 군벌들은 백성들을 착취만하고 민심을 그다지 신경쓰지 않은 경우도 상당했기에[3] 재풍의 사천에의 도전은 사천 백성들의 강한 지지를 이끌어냈다. 여기에는 수천명 가량의 일반인으로 위장한 청의 심리전 전문 부대의 공도 있었는데, 이들은 한중에서 험준한 잔도를 넘어 광원과 파중등에 진입한 뒤였다. 이들은 일반 백성들을 상대로 머지않아 백성들을 위하는 구민 군대인 청군이 사천으로 들이닥칠 것이라고 선전했다. 이에 민심은 요동쳤고 사천군벌이 가맹관과 검각등 주요 관문을 지키기 어렵게 만들었다. 1934년 10월 5일, 본격적인 겨울이 오기 전에 검각을 넘어야 한다고 판단한 재풍은 한중에 주둔한 청군 진지에서 불이 난 것을 빌미로 제1군을 이끌고 광원으로 진격했다. 이미 사천군벌은 검각 인근으로 후퇴했고 청군은 손쉽게 광원을 점령했다. 동시에 양양에 있던 제2군도 형주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제2군의 목표는 실제로 중경을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장강을 통해 사천군벌에게 영향력을 미치던 국민당에게 압박을 가하려는 것이었으나 국부군 수뇌의 오판으로 인해 호북의 병력은 한구나 장사에 몰려있었을 뿐 형주에는 소수의 병력만이 있었다. 제2군은 이들을 제압한 뒤 형주를 차지하고 수비병력을 일부 주둔시킨뒤 장강을 따라 중경으로 진격했다. 유상은 긴급히 국민당에게 원군을 요청했으나 사천으로 통하는 요지인 형주를 허무하게 빼앗긴 탓에 섣불리 원군을 보내기 어려웠다. 불과 한달이 겨우 지난 11월 12일 양면전선의 압박을 이기지 못한 검각 방면의 수비군이 철수했다. 재풍은 큰 손실없이 검각을 넘어 면양, 덕양을 거쳐 사천 진입 두달만인 12월 11일 성도에 무혈입성했다. 아울러 중경에 있던 유상은 더이상의 저항을 포기하고 청에 귀순했다.

사천을 장악한 청은 중국 통일에 있어 국민정부를 상대로 상당히 유리한 고지를 점하게 되었다. 하지만 재풍은 지역군벌 세력을 정리하고 청의 안정을 위해 장개석과의 교섭을 택했고, 이 둘은 1935년 7월 19일 남경에서 만나 5개조 협의를 채택한다. 이 5개조 협의는 훗날 중화연방 결성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협의에 따라 청과 국민정부는 남경-합비-한구-형주를 잇는 선을 임시 경계로 삼아 더이상의 무력충돌을 중단하기로 협의했고 각자의 내부 사정을 정리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불과 3년뒤인 1938년 중국은 물론 아시아 역사를 뒤흔들 전쟁이 발발한다. 일본이 한국을 전격적으로 침공한 것이다. 한국은 예상밖의 일격을 맞은 탓에 8주가 채 지나지 않아 수도 한성을 빼앗겼고 반년만에 대동강 이남 조선반도 지역을 일본군에게 빼앗겼다. 한국은 청과 국민정부에게 참전, 또는 적극적 원조를 요청했다. 재풍과 장개석은 여전히 한국에 대한 반감을 갖고 있었으나 한국이 무너지면 다음 표적은 자신들이 될 것을 알았기에 곧바로 참전 요청을 수락했다. 일본은 요동까지 진출한다는 당초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지만 한국의 해군은 오호츠크 해전 이후로 궤멸된 상태였고, 육군도 양산 전투한강 인도교 폭파로 인해 상당수 소모된 상황이어서 전열을 재정비할 때까지 상당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판단했다. 이에 일본은 요동을 통한 육로 침공은 불가능해졌어도 한국이 견제할 수 없는 해상을 통해 중국을 침공하기로 결정, 1939년 새해가 밝자마자 60만명의 대군을 동원해 상해를 공격했다.

역사적 정통성 문제

애신각라 왕조 당시에는 옹청의 역사는 곧 중국 대륙을 통치하던 청의 역사의 연장선이었다. 즉, 1616년이 국가의 건국년도였고 조정의 체계와 국가적 관습을 그대로 따랐기에 청과 옹청은 전성기의 그 규모만 다를 뿐 같은 국가였다. 정치적 문제로 공인되지 못할 뿐, 현대의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옹청을 청과 같은 국가로 분류하는 것이 정설이다.

애신각라 왕조가 유지되던 순성제 치세까지 청 정부의 공식적 입장은 광서제대한국 황제 광종에게 선양한 것은 표면상 그러할 뿐 실상은 불법적인 찬탈이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옹청이 청의 정통성을 물려받은 국가이며 그 정통성은 한국과는 상관이 없다는 입장을 고수해왔다. 한편으로 이런 정통성에 대한 인식외에는 옹청과 한국의 사이는 나쁘지 않은 편인 가운데 70년대 해빙 분위기가 조성되고 북공남민 사이의 관계가 가까워지자 두쪽과 모두 적대하고 있던 옹청은 불안과 혼란에 빠졌다. 순성제의 파격적인 선위도 이러한 배경에서 이루어졌다.

정치

입헌군주제를 채택하고 있는 의원내각제 국가로, 1990년 효종 순성제가 대한국 황제인 익종 경황제에게 대청국 제위를 선위한 뒤로 대청국 제위는 대한국 황제가 잇게 되었다.

황제

대한국 황제가 대청국 황제를 겸하나 현재는 명목상 공위 상태이다. 순성제가 익종에게 선양한 것은 복잡한 정치외교적 상황이 실제 원인이었으나 어디까지나 명목상 이유는 '남성 직계자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4] 그렇기 때문에 2019년 한국이 제위의 여계세습을 인정하게 되었을 때도 옹청에서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으며 정치권에서 숭영제가 계속 제위를 지켜야 할지, 한국 만옹왕을 황제로 옹립할지, 공화정으로 전환할지에 대한 논쟁이 일었다.[5] 하지만 만옹왕은 한국의 제후왕이었기에 제위를 잇기에 부적절했던데다 숭영제가 한국과 옹청 제위를 동시에 내려놓기로 하면서 옹청 한림원은 혜서공주가 대한국 황제로 즉위할 때 '감국세제대왕(監國世帝大王)' 칭호를 올리기를 택했다. 황제의 권한은 이어받지만 권위 자체는 이어받지 못하였고 공식적으로는 대청국 황제는 공위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추후 여계계승이 인정될 수도 있기 때문에 지켜봐야할 것이다.

  1. 티베트, 동돌궐과 서방국에서 주로 이렇게 호칭
  2. 중민, 일본남베트남이 이렇게 호칭한다.
  3. 물론 세력이 어느정도 큰 군벌들은 그 지역의 왕처럼 행세하며 민생에 크게 신경쓰는 행보를 보이긴 했다. 다만 다른 세력과 충돌이 잦을 수밖에 없었기에 민생이 회복되었다 악화되기를 반복했다.
  4. 순성제 슬하에 공주만 셋이 있었다.
  5. 옹청에서도 숭영제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보다 더 강하게 공화정 전환 여론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