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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 World War II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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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에 게양된 하켄크로이츠 (좌)/이오지마 섬에 성조기를 게양하는 미군 | |||||
기간 | 1939년 9월 1일 ~ 1946년 5월 20일 | ||||
장소 | 지구상 전역 | ||||
원인 | 단치히 회랑 영토 문제로 인한 독일과 폴란드의 전쟁 | ||||
결과 | 독일의 승리 | ||||
영향 | 독일의 초강대국 등극, 독일-미국 간 냉전 개막 영국, 프랑스, 소련, 이탈리아, 일본 등 기존 열강들의 몰락 원자시대 도래 중국 등 신흥 강국의 부상 | ||||
교전국 | 추축국 | 연합국 | |||
![]() ![]() ![]() ![]() ![]() ![]() ![]() 기타 추축국 국가 |
![]() ![]() ![]() ![]() ![]() ![]() ![]() ![]() 기타 연합국 국가 | ||||
지휘관 | 추축국 | 연합국 | |||
![]() ![]() ![]() ![]() ![]() ![]() ![]() ![]() ![]() ![]() ![]() 기타 추축국 지휘관 |
![]() ![]() ![]() ![]() ![]() ![]() ![]() ![]() ![]() ![]() ![]() ![]() 기타 연합국 지휘관 | ||||
† 표시는 사망 / 표시는 항복 및 전향 | |||||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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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제2차 세계 대전은 1939년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에 의해 발발하여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 일본 제국 3국을 중심으로 한 추축국과, 이에 미국과 영국, 소비에트 연방, 프랑스가 이끄는 연합국이 맞서면서 1946년 소비에트 연방이 항복할 때까지 총 6년 동안 이어진 전쟁이다. 30개국 이상에서 1억 명이 넘는 군인들이 직접 참전한 총력전이다. 인류 최초로 핵무기가 사용된 전쟁이었다. 대표적으로 유럽 내 파시즘 국가들의 대두와 아시아에서의 일본의 팽창, 그리고 이러한 요인들로 인해 긴장이 고조되며 결국 무력 충돌이 발생한 것이 원인으로 꼽힌다. |
"Deutschland, Sieg Heil!"
독일이여, 승리하라! |
아돌프 히틀러, 1939년 9월 1일, 라이히스탁 개전 연설 中 |
"오늘 아침 베를린의 영국 대사는 "독일이 오전 열한 시 정각까지 폴란드 침공 태세를 철회하지 않는다면 대영제국과 전쟁 상태에 돌입할 것"이라는 내용의 최후통첩을 독일 정부에게 보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이 최후통첩과 관련하여 어떠한 답신도 받지 못하였으며, 이에 따라 우리나라가 독일과 전쟁 상태에 돌입하였음을 선포합니다." |
네빌 체임벌린, 1939년 9월 3일, 對 독일 선전포고 연설 中 |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이탈리아와 유럽, 전 세계는 정의와 항구적인 평화를 얻을 것이다! 이탈리아의 국민들이여! 무장하라! 그리고 제군들의 강인함과 제군들의 용기와 제군들의 정의를 모두에게 보여주어라!" |
베니토 무솔리니, 1940년 6월 10일, 이탈리아 왕국의 연합국 선전포고 후 연설 中 |
"이제 유대-앵글로색슨 전쟁 선동자들과 볼셰비키 모스크바 본부의 유대인 통치자들의 이 음모에 맞서야 할 때가 왔습니다." |
아돌프 히틀러, 1942년 6월 22일, 라이히스탁 독소전쟁 개전 연설 中 |
"독일 파시스트 침략자들에 맞선 소비에트 인민들의 대조국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
유리 레비탄, 1942년 6월 22일, 대조국전쟁 안내 방송 中 |
"어제, 1941년 12월 7일 - 치욕의 날로 기억될 이날 하루 동안, 아메리카 합중국은 일본 제국의 해군과 항공대로부터 기습적이고 고의적인 공격을 받았습니다." |
알프 랜던, 1941년 12월 8일, 진주만 공습 직후 의회 연설 中 |
"짐은 제국정부로 하여금 미·영·지 3개국에 그 공동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하도록 하였다. 대저, 제국 신민의 강녕을 도모하고 만방공영의 즐거움을 함께 나누고자 함은 황조황종(皇祖皇宗, 열성조)의 유범으로서 짐은 이를 삼가 제쳐두지 않았다. 일찍이 미영 2개국에 선전포고를 한 것도 실로 제국의 자존과 동아의 안정을 간절히 바라는 데서 나온 것이며, 타국의 주권을 배격하고 영토를 침략하는 행위는 본디 짐의 뜻이 아니다. (중략) ...너희 신민은 이러한 짐의 뜻을 명심하여 지키도록 하라." |
쇼와 덴노, 1945년 8월 15일, 옥음방송, 무조건 항복 선언 中 |
"처음엔 넌 영웅이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개자식일 뿐이야." |
어느 독일군 병사 |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가 따뜻힌 스튜를 먹을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한 날이 있었다. 그 다음 날, 소련이 독일에 항복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
어느 영국군 병사, 캐나다에서. |
"신질서가 도래했습니다." |
아돌프 히틀러, 승전 연설, 1946년 5월 21일 |
"지금은 새벽이다. 밤 3시다. 오전 3시다. 아아! 죽고 싶지 않다. 외롭다. 왜 이리 외로운 걸까." |
하야시 타다오 |
MARCH 1936 |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을 위반하고 독일군을 라인란트에 주둔시켰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라인란트는 비무장 지역으로 지정되었지만, 히틀러는 이를 무시하고 병력을 이동시켜 유럽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이는 나치의 팽창 정책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었고, 프랑스와 영국은 이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였다. 국제 사회의 방관은 독일의 이후 군사적 행동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
JULY 1936 |
스페인에서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의 주도로 내전이 발발하였다. 공화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이끄는 공화파는 민주주의와 진보적 사회 개혁을 추구했으며, 반란군인 국민파는 보수주의와 권위주의를 지지했다. 독일과 이탈리아는 국민파를, 소련은 공화파를 지원하며 국제적 차원의 대리전이 되었다. 내전은 프랑코의 국민파가 승리하면서 끝났고, 이후 그는 스페인에서 독재 체제를 확립하여 독일의 침공 전인 1947년까지 통치하였다.
JULY 1937 |
중국 베이징 인근 루거우차오(노구교)에서 일본군과 중국군 사이에 발생한 무력 충돌 사건이 발생하였다. 일본군은 한 병사가 실종된 것을 빌미로 교전이 일어났다고 주장하며 중국 측에 진상 조사를 요구했지만, 이를 둘러싼 긴장이 고조되면서 양측이 충돌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중일전쟁의 도화선이 되었으며, 이후 일본의 중국 침략이 본격화되었다.
MARCH 1938 |
히틀러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통합을 목표로 삼았고, 오스트리아 내 나치 지지 세력의 쿠데타와 독일군의 진입으로 오스트리아를 점령했다. 오스트리아 국민의 찬성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가 열렸지만, 대부분은 나치 독일의 압박 속에 진행된 것으로 평가되었다. 이 합병은 베르사유 조약을 위반한 행위였으나 국제 사회는 이를 적극적으로 저지하지 않았다.
JUNE 1938 |
카이펑이 일본군의 손에 넘어가자 장제스의 국민정부는 인근 도시인 정저우를 지키기 위해 황허강의 제방을 무너뜨렸다. 이로 인해 일본군의 진격은 늦춰졌으나, 화북 평야에 막대한 홍수 피해가 발생했다. 89만에 이르는 사망자가 발생하였으며 1200만명 이상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독일은 이를 크게 비난하였다.
SEPTEMBER 1939 |
1939년 9월 1일, 독일과 폴란드의 갈등은 마침내 전쟁으로 치닫았다. 히틀러는 폴란드 회랑 지역과 단치히의 반환을 요구하며 전쟁을 준비했고, 독소 불가침 조약을 통해 소련과 폴란드를 분할하기로 약속했다. 독일군은 전격전을 통해 빠르게 폴란드를 침공했으며, 소련도 9월 17일 동부에서 폴란드를 공격해 양면에서 폴란드를 압박했다. 폴란드는 결국 항복했고, 영국과 프랑스는 이에 대응해 독일에 선전포고하며 전쟁이 본격화되었다.
APRIL 1940 |
독일은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통해 스웨덴의 철광석을 수입하고 있었는데, 이 자원은 독일의 군수 산업에 필수적이었다. 영국과 프랑스가 이를 차단할 가능성을 우려한 히틀러는 스칸디나비아에 대한 사전 장악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또 북유럽 지역에 군사적 교두보를 확보하면 영국에 대한 해상 봉쇄를 피해 영국 본토 공격의 발판으로 삼을 수 있었기에 이른바 베저위붕 작전을 통해 북유럽 진출을 꾀하였다. 덴마크는 독일이 노르웨이로 진출하기 위해 필수적인 통로였기에,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했다. 4월 9일 새벽, 독일군은 덴마크 수도 코펜하겐과 주요 군사 기지에 진입하며 사실상 전투 없이 단 몇 시간 만에 덴마크가 항복했다. 이어 독일은 노르웨이로 향하기 시작했다. 노르웨이는 거친 지형과 해안선으로 인해 저항이 예상되었고, 영국과 프랑스는 노르웨이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미 군사 지원을 준비하고 있었다. 독일은 기습적으로 해군과 공수부대를 투입해 주요 항구인 오슬로, 나르비크, 트론헤임 등을 점령했다. 노르웨이군은 격렬히 저항했지만, 독일군의 압도적인 전력에 밀리고 말았다.
MAY 1940 |
프랑스는 독일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마지노선이라는 강력한 요새선을 구축했으나, 이는 독일과 프랑스 사이의 국경만을 보호할 뿐 저지대 국가 국경은 방어가 취약한 상태였다. 독일 역시 이를 인지하여 마지노선을 돌파하기란 힘들다고 여겨 마지노선을 우회하는 계획을 세운다. 만슈타인의 계획에 따라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를 통해 북쪽으로 신속하게 진입, 프랑스군과 영국 원정군을 포위하는 것에 목표를 두었다. 5월 10일, 독일은 네덜란드와 벨기에에 대규모의 공습과 지상군을 투입해 연합군의 주력을 저지대로 유인하였다. 네덜란드와 벨기에는 저항하였으나 독일군의 공세에 항복하고 말았다. 이어 전차와 보병을 통해 방어가 허술했던 아르덴 숲을 기습적으로 돌파하였다. 프랑스군은 당황하여 속수무책으로 당했고, 최강의 요새 마지노선도 쉽게 무력화 되었다. 독일군은 재빠른 속도로 프랑스군과 영국군을 차례로 포위 및 섬멸해 나아갔고, 결정적으로 프랑스 북부 됭케르크 지역에서 철수를 준비하던 영국군 33만을 섬멸하는 데 성공했다. 영국 육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은 채 유럽 대륙에서 손을 뗄 수 밖에 없었다. 윈스턴 처칠은 이 사태에 책임을 지고 사임했으며, 핼리팩스 경을 필두로 새로운 내각이 구성 되었다. 6월 14일에는 독일이 파리에 진입하였다. 프랑스는 추가적인 저항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독일에 항복했다. 항복 협정에 따라 프랑스는 독일에 점령당했고, 남부에는 괴뢰 정권이 수립되었다. 침공 6주만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