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시움 왕국의 대외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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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일리아 왕국의 대외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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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시아 전쟁
Claysia War | ςLคאรเค ฬคг
□: 엘리시움 왕국 / : 나일리아 왕국
전쟁 전후 클레이시아의 모습. 두 국가의 전후가 완전히 바뀐 모습이다.
기간 1495년 6월 29일 ~ 1507년 11월 12일
(총 12년 4개월 14일)
장소 클레이시아 전역
교전국 엘리시움 왕국 엘리시움 왕국 나일리아 왕국 나일리아 왕국
지휘관 엘리시움 왕국 이칼루스 1세[1]
엘리시움 왕국 이칼루스 2세[2]
엘리시움 왕국 존 T. 프랭클린
나일리아 왕국 토리노 9세
결과 엘리시움 왕국의 승리
반도 조약의 체결
영향 '팍스 엘리시움' 체제의 시작
엘리시움의 클레이시아 패권국 등극
나일리아의 패망, 쇠퇴기 돌입

개요

클레이시아 전쟁은 1495년 6월 29일부터 1507년 11월 12일까지 클레이시아 전역에 걸쳐 엘리시움 왕국나일리아 왕국이 벌인 전쟁이다. 또한, 두 민족의 통일국가가 총력전으로 충돌한 유일한 전쟁이다.[3]

나일리아 왕국은 나일리아 전쟁에 이어 이 전쟁에서도 완패하며 476년부터 자리잡았던 클레이시아의 패권국 자리에서 완전히 물러났으며, 다시 나일리아 반도로 후퇴하였다. 반면 엘리시움은 긴 전쟁 끝에 클레이시아 전역을 차지하면서 새로운 클레이시아의 패권국이 되었으며, '팍스 엘리시움' 체제가 시작되었다.

배경

1489년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나일리아 전쟁에서의 나일리아의 완패 이후, 엘리시움은 전쟁의 승리를 만끽하고 있었다. 승리의 중심에 있던 국왕 이칼루스 1세와 육군총사령관 존 T. 프랭클린은 특유의 냉철한 성격으로 1490년부터 국군 전 병력을 동원하는 나일리아 재침공을 계획하고 있었다. 비록 이전의 나일리아 전쟁에서 나일리아를 완전히 농락하며 완승을 거뒀던 엘리시움이었지만, 거의 대부분의 고위층 인물들, 심지어는 같이 침공을 계획한 존 T. 프랭클린마저 이 침공이 성공할 것이냐는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을 정도로 현실적으로 상당히 어려운 시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종전 후 나일리아 왕국도 더 이상 참사가 일어나지 않기 위해 꽤나 철저한 대비를 했기 때문이다. 나일리아 왕국은 전쟁 이후 토리노 9세를 중심으로 나일리아 전쟁의 패인이었던 군사 기지를 거의 대부분 지역에 설치하고 당시에 국경에 위치했던 제1서부군[4] 등 여러 군단들이 병합되고 분리되면서 체계적인 군사 체계를 갖췄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그동안 패권국이라는 이름 하에 멈춰있던 군 관련 산업들을 전면 가동시키고 이스톨리아와 활발한 교류를 하면서 나일리아 전쟁 이전부터 토리노 9세가 꿈꿔왔던 총기의 보급화를 성공했다. 1436년 리스본의 안드레아 디 나텔리가 발명한 구식 총기를 약 60년 만에 거의 모든 부대에 보급시킨 것이다. 물론 엘리시움도 총기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신흥국인 만큼 나일리아에 비해 비교적 이스톨리아 국가들과의 유대 관계가 부족했기 때문에 리스본의 총기는 받지 못하고, 폴리네시아가 제작한 유사품에 가까운 총기밖에 없었기에 화력에서 완전히 밀릴 것이 확실했다.

하지만 이 침공 시도가 완전히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었는데, 그 이유는 바로 나일리아 왕국은 이전부터 꽤나 긴 침체기를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일리아 왕국의 14세기 초반은 토리노 8세의 정책이 거의 다 실패로 돌아가고 회심의 레트로폴리스 원정에서도 대패하며 경제적으로 크게 몰락하던 시점이었다. 이 상황에서 토리노 6세부터 시작된 대대적인 아케론 신도시 건설 계획도 나일리아 전쟁의 대패에 의해 완전히 무산되어버렸다. 결론적으로 전간기의 나일리아 왕국은 비록 군사력은 이전보다 상승했으나, 사회·경제적으로 문제가 많았으며 군의 사기도 연속된 패배로 떨어진 상황이었다.

이런 나일리아의 침체는 당연하게도 엘리시움 수뇌부의 귀에 들어갔고, 이칼루스 1세는 여러 고위층 인물들이 반대했음에도 불구, 끝까지 자신의 의견을 밀어붙이며 육군총사령관 존 T. 프랭클린를 설득시키는 데 성공한다. 반면 나일리아는 군단 체계화, 총기 보급화 등 여러 업적들을 실현하기는 했으나, 정작 가장 중요했던 '설마 침공할까?' 라는 오만한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일부 극우 세력이 재침공을 주장하며 군대를 소집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대부분의 국가에서 극성 정치 세력의 입지가 그러하듯 수뇌부에 의해 철저하게 무시당해버렸다.

당시 국왕이었던 이칼루스 1세는 자신이 직접 나일리아 전쟁에서 증명했듯, 그 특유의 전략적 판단력으로 존 T. 프랭클린과 함께 거의 모든 작전들을 자신이 직접 계획하였다. 다만 나일리아 전쟁과는 달리 노쇠화로 인해 전장에 직접 나가진 못했으며, 대신 당시에는 왕자 신분이었던 이칼루스 2세가 전장에 투입되었다. 이로 인해 클레이시아 전쟁에서 엘리시움의 국왕이 이칼루스 2세인 것으로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상술했듯 틀린 말이다.

엘리시움의 계획

그레이터리시움 - 센트럴 스테이트 - 이스트식스 - 아이테르시아 - 나일로 - 케토피 - 나일리아 반도

이칼루스 1세가 맨 처음 구상했던 침공 계획. 이 계획은 예측하지 못한 전쟁의 장기화 때문에 기간이 좀 길 뿐이었지 어느 정도 실현되었다.

나일리아 전쟁 직후의 두 국가의 국경은 길고, 넓은 상태였다. 따라서 전쟁 초반에 국경 부분을 빠르게 섬멸하지 못한다면 빈 공간을 통해 오히려 적군이 엘리시움 영토 내로 들어올 수도 있는, 한마디로 침공하기 매우 까다로운 상황이었다. 게다가 국경 근방이 모두 대도시는 없는 변방에 가까웠다.

엘리시움은 우선 리트보아에서 오른쪽에 있는 그레이터리시움 주의 소도시인 뉘베트와 헤이니어를 전쟁 초반의 목표로 세웠다. 조금만 더 진격한다면 수도인 그레이터리시움을 포함한 대도시 권역인 그레이터리시움-센트럴 스테이트 지역까지 도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지역은 당시에는 물론이고 현대까지도 아케론나일리아와 함께 클레이시아 3대 도시권으로 불리는 지역들이다. 또한, 세 도시권들 중 유일하게 가장자리가 아닌 중앙부에 위치해있기에, 초반에 섬멸하기 딱 좋은 지역이었다. 전쟁 발발 직전에 엘리시움은 리트보아 지역에 육군 13만 명을 소집했다.

이칼루스 1세는 방어도 놓치지 않았다. 완벽할 것만 같았던 이 작전의 거의 유일한 돌파구는 바로 엘리시움의 국경과 접경해있는 에이션티하프노스 지역이 나일리아 제1서부군(제5, 제6군단)의 주둔지였다는 점이다. 그나마 이 경계에는 마셸 강이 있었지만, 나일리아는 예전만큼의 명성은 아니지만 예로부터 지구전, 특히 강이나 산 등 지형지물을 두고 싸우는 전투에 굉장히 강했다. 따라서 에이션티와 하프노스 지역의 경계에 제대로 된 방어선이나 요새를 만들어두지 않는다면 제대로 진격하기도 전에 본토가 공격당해 패배할 수도 있었다. 너무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같지만 후술하듯 총기를 '보급화' 시켜 다시 강력한 병력으로 돌아온 나일리아 왕국에겐 가능할 이야기였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칼루스 1세는 전쟁 전부터 이 지역에만 두 군단[5]을 가용하여 대규모 방어선을 구축해놓았다. 이름하여 '에마뉘엘 요새'. 하지만 전쟁 때에는 그렇게 큰 힘을 발휘하진 못했는데, 이유는 전쟁 초반부 전황이 엘리시움 쪽으로 급격하게 기울자 제1서부군도 본토 전투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전쟁이 장기화되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제1서부군은 중부 지역에서 본군을 지원했다. 1502년 말 쯤에는 에마뉘엘 요새도 철수하여 본진으로 참여했다.

전개

엘리시움의 총공세

1495년 6월 29일, 엘리시움 육군은 선전포고와 함께 15만 육군을 총동원하여 뉘베트와 헤이니어 방향으로 나일리아 왕국을 침공했다. 엘리시움의 목적은 오직 하나, '영토' 였기에 초반부 공세를 펼쳐 그레이터리시움 주변 일대를 수복하는 것이 제1목표였다.

나일리아의 반격

전쟁의 장기화

미들웨어 전투 이후, 한 쪽으로 기울다

12년 간의 전쟁의 끝

전선

틀:클레이시아 전쟁의 주요 전선

평가

클레이시아 전쟁의 정세 요약.
흰색이 엘리시움 왕국, 초록색이 나일리아 왕국이다.

역사상 비슷한 사례조차 찾아볼 수 없는[6], 그야말로 압도적인 자이언트 킬링. 이 전쟁 하나로 엘리시움 왕국은 무려 600년 간 클레이시아의 패권국으로 자리잡고 있던 나일리아 왕국을 다시 반도의 변방국으로 밀어냈고 그 자리를 자신이 차지하였다.

나일리아는 물론이고[7] 엘리시움 내부에서도 과연 이 침공이 성공할 수 있을지 의문이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칼루스 1세는 나일리아의 약점들을 정확히 꿰뚫으면서 초반부 크게 진격했고, 비록 중반부 전력 차이로 조금 주춤하긴 했지만 결정적인 미들웨어 전투에서의 승리를 통해 다시 기세를 가져왔고, 결국 1507년 11월 12일 반도 조약을 통해 엘리시움이 승리하면서 12년 간의 전쟁은 끝이 나게 되었다.

전후 및 반응

엘리시움 왕국

반도 조약이 발효되는 것을 실시간으로 본 사람들은 12년 간의 전쟁이 드디어 끝났다는 사실에 안도했으며, 그들에겐 너무나 거대한 존재였던 '나일리아 왕국'을 자신들이 직접 무너뜨렸다는 사실에 감격했다. 엘리시움의 승리는 자국 내에서 큰 파장을 줬으며, 승전을 자축하는 행사가 일주일 넘게 이어졌다.

역사적으로 한 국가의 손에 들어가있던 경우가 많았던 클레이시아는 가이아 제국, 키오피 왕국, 나일리아 왕국을 넘어 이제 엘리시움 왕국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엘리시움 왕국은 이 전쟁을 끝으로 사실상 클레이시아 전체를 지배하는 패권국이 되었으며, 이제 다른 대륙으로까지 영향력을 끼치는 강대국이 되었다. 비록 전쟁 초반부에는 너무 커진 영토와 이칼루스 1세의 사망 등으로 혼란이 있었지만, 직후에 즉위한 이칼루스 2세가 압도적인 업적을 세우면서 혼란을 빠르게 잠재웠다.

엘리시움은 이제 세력을 이스톨리아까지 뻗치기 시작한다. 1515년 엘리시움은 대항해시대 국가들에 밀려 경제적인 위기를 겪고 있던 폴리네시아 왕국에게 막대한 지원을 약속하며 영구적인 동맹을 맺었으며 그 외에도 제노바-오슬리아, 멘부르크 등 비교적 서쪽에 위치한 국가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또 특출나게 적대적인 관계 없이 이스톨리아의 전 국가와 활발한 교역을 했으며, 이는 제1차 이스톨리아 전쟁 전까지 유지되는 엘리시움의 '외교적 중립'의 기반이 된다.

정책으로 보자면 국방비를 대폭 감축시키고 계속 유지되어왔던 완전 징병제를 폐지하고 전시 시에만 징병을 시행하는 부분 모병제 형태로 전환하였다. 또한, 넓어진 영토에 맞춰 수도를 그레이터리시움으로 천도하였으며 국시도 '작은 민족, 작은 왕국'에서 '왕국을 수호하라 (קг๏ՇєςՇ Շђє кเภﻮ๔๏๓)'으로 변경되었다.

엘리시움 왕국의 최전성기는 아쉽게도 이칼루스 시대까지만 유지된다. 이후의 패트릭 1세, 패트릭 2세는 전 국가적인 근대화 정책을 벌였다. 그러나 오히려 엘리시움 산업의 반 이상을 담당했던 농업이 힘을 잃기 시작하고, 불균형적인 경제 속에 1782년 아케론 혁명이 일어나면서 왕정이 종결되고 1784년 공화국 체제가 시작되었다.

나일리아 왕국

더 이상의 저항은 불가했습니다.
토리노 9세, 항복 당시

나일리아는 항복했다. 클레이시아 전체를 지배하던 최전성기의 나일리아는, 두 번의 완패 끝에 과거로 족히 천 년은 넘어가 가이아 정복 이전의 나일리아 반도에 위치한 소국으로 복귀하였다.

미드웨어 전투에서 패배한 것을 기점으로 나일리아 수뇌부는 더 이상의 저항은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1507년 11월 6일 종전 협정을 요청했고 엘리시움의 요청에 따라 1507년 11월 12일 이칼루스 1세가 나일리아에 방문하여 수도인 나일리아에서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전쟁의 패배로 군의 사기와, 나일리아인들의 애국심, 자존심은 전부 바닥으로 떨어져버렸다. 심지어 조약도 나일리아의 영원한 고향이라 불리는 수도 나일리아에서 체결했기에 더욱 더. 나일리아의 중심에서 종전 협정을 체결하는 장면은 나일리아 역사상 최악의 치욕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전쟁 이후 필리피프 왕조가 들어서며 수도인 나일리아를 더 발전시켰고,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로 정책을 변경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1781년 10월 14일 리스피아누 디아블로가 이끄는 제국혁명위원회10.14 나일리아 쿠데타를 일으키며 나일리아 제국을 세우면서 무려 2천 년을 넘게 존속한 나일리아 왕국은 완전히 종결되었다.

나일리아의 패배 이유

관련 문서

각주

  1. 나일리아 전쟁 때는 직접 전장에 나가기도 했으나 노쇠화의 영향으로 클레이시아 전쟁에선 작전 지휘의 역할을 맡았다.
  2. 당시에는 왕자 신분.
  3. 나일리아 전쟁 때는 문서를 참조하면 알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이유 때문에 나일리아 왕국은 총력전을 하고 싶어도 못하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4. 제5, 제6군단이 병합되었다.
  5. 제4, 제5군단이다. 전쟁 때에는 제1남서부방어군이라는 이름으로 두 군단이 통일되었다.
  6. 그나마 자이언트 킬링으로 유명한 나일리아 전쟁이 있지만 여기도 엘리시움과 나일리아의 전쟁이다, 클레이시아 전쟁은 단 한 번의 전쟁만으로 대륙 전체의 패권과 향후 정세를 완전히 바꿔버렸다는 점에서 나일리아 전쟁과는 차원이 다른 자이언트 킬링이라고 평가된다.
  7. 상술했겠지만, 정말 극히 일부를 제외하곤 엘리시움의 재침공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