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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및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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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국가[1]
고대 1차 삼분열 (알바키아 제1왕국 · 우르크 왕국 · 페로시마 제1왕국) · 셀레우로스 왕국 · 멘부르크 독립국 · 키오피 왕국
중세 키오피 왕국
근세 남중 제국 · 라트비아 왕국 · 페로시마 왕국 · 레스코피아 왕국 · 엘리트 왕국 · 멘부르크 제1왕국
근대
주요 사건[2]
고대 센미드 해전 · 우르크 왕국 침공 · 남중족의 아르메노 침공 · 셀레우로스 전쟁 · 가이아 정복
중세 대남 제도 해전 · 키오피-나일리아 전쟁 · 제2차 키오피-나일리아 전쟁 · 남서이스톨리아 대반란 · 리스본 제1제국의 키오피 침공
근세
근대
언어 및 문화
언어 남중어파
사상
[1] 당대 남중족의 패권국은 볼드체 처리.
[2] 문서가 있는 사건만 서술, 남중족 또는 남중족 국가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있는 사건만 서술
틀:알바키아의 역사
틀:멘부르크의 역사
틀:페로시마의 역사
틀:라트비아의 역사
폴리네시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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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메노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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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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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오피 왕국
Kingdom of Kiopi
кเภﻮ๔๏๓ ๏Ŧ кเ๏קเ
건국 초기의 강역
대남 제도 해전 이후 최대 강역
남서이스톨리아 대반란 이후 말기 강역
223년 ~ 1085년
(약 862년)
건국 이전 리스본 제국의 침공 이후
셀레우로스 왕국 남중 제국
라트비아 왕국
페로시마 왕국
레스코피아 왕국
위치 전성기 기준
남서이스톨리아, 남중이스톨리아 전역
클레이시아 일대[1]
스푸트니 제도, 베스트 제도 일부
대남 제도의 대부분 지역
수도 리시니아 (223 ~ 317)
알리칸 (317 ~ 1014)
리시니아 (1014 ~ 1085)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국가 원수 국왕
입법 키오피 귀족원
키오피 민회
면적 약 18,500,000km²[2]
언어 센트리아어
민족 남중족
엘리스족, 나일리족, 가이아족 (~982)
폴리네시아족, 제노바족, 아르메노족 (~1014)
국교 없음 (정교분리)
사실상 센트리아교
주요 황제
주요 사건 223년 셀레우로스 왕국으로부터의 독립
235년 셀레우로스 전쟁
267년 남중이스톨리아 진출
475년 가이아 정복
634년 대남 제도 해전
945년 키오피-나일리아 전쟁
982년 제2차 키오피-나일리아 전쟁
1012년 남서이스톨리아 대반란
1084년 리스본 제1제국의 키오피 침공, 멸망
현재 국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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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키오피 왕국(Kingdom of Kiopi, кเภﻮ๔๏๓ ๏Ŧ кเ๏קเ)은 223년부터 1085년까지 클레이시아이스톨리아 전역에 걸쳐있던 초강대국이다.

키오피 왕국은 223년 셀레우로스 왕국으로부터 독립한 작은 도시국가로부터 시작하여, 셀레우로스 왕국과 남중이스톨의 페로시마, 알바키아 등을 무너뜨리고 가이아 제국과 함께 클레이시아-남이스톨리아 세계를 양분할하는 강대국으로 성장하였다.

이후 5세기부터 가이아 제국과 전쟁을 벌이더니 475년 클레이시아까지 원정을 떠나 클레이시아 북동부 일대까지 장악하는 초강대국으로 발전하여, 클레이시아 남서부의 나일리아 왕국과 함께 클레이시아-남이스톨리아 세계를 다시 양분할한다. 이후로도 대남 제도 해전 등 여러 전쟁을 통해 이스톨리아에서의 영향력을 크게 넓혔다.

그러나 945년 키오피-나일리아 전쟁에서의 참패를 기점으로, 982년 제2차 키오피-나일리아 전쟁에서도 패배하며 클레이시아에서 철수하였다. 이후 1012년부터 1014년까지 진행된 남서이스톨리아 대반란으로 인해 남서이스톨리아 지역에서도 철수, 결국 1084년 리스본 제1제국에게 직격타로 침공을 당하면서 멸망하였고 남중 제국, 라트비아 왕국, 페로시마 왕국, 레스코피아 왕국으로 분열되었다.

역사

 키오피 왕국의 대외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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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년이라는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은 역사를 가졌지만, 그에 비해 수많은 전쟁과 변천을 겪은 국가다.

독립 초기, 셀레우로스 전쟁과 남중이스톨 장악

키오피 왕국의 건국 초기 강역

3세기 초, 지금의 페로시마, 알바키아, 멘부르크 등이 수복하고 있는 남중이스톨리아 남부는 셀레우로스 왕국이 패권을 잡고 있었다. 당시 즉위한 페테르 3세는 자신이 속한 셀레우로스 세력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소수민족들을 탄압하고 국외의 페로시마, 알바키아 등에게 무차별적인 공격을 가하는 등 막장적인 행각을 벌여왔다. 이로 인해 각각의 소수민족들에게 혁명의 분위기가 고조되기 시작했고, 페테르 3세 사후 페테르 4세 시대가 되자 멘부르크 독립국 등을 중심으로 수많은 소수민족들이 각자의 국가를 세우며 독립하였다. 이 능선을 타고 키오피 왕국도 대남해 해안가에 독립국을 세웠다.

키오피 왕국은 민병대 체제로 빠르게 군사력을 증진시켜갔고, 다른 독립국들과는 차원이 다르게 셀레우로스 왕국을 군사력 방면에서 압도하기 시작했다. 결국 235년 셀레우로스 전쟁을 일으키며 지배를 당하던 신세에서 벗어나 고대 이스톨리아 세계의 신흥 국가로 입지를 다졌다.

이후 페로시마 제1왕국, 알바키아 왕국 등까지 무너뜨리고 남중이스톨리아 세계를 평정한 키오피 왕국은 클레이시아남서이스톨리아가이아 제국과 함께 클레이시아-남이스톨리아 세계를 양분할하여 평정하고야 만다.

가이아 제국과의 전쟁

끝도 없이 성장하던 키오피 왕국의 가장 큰 걸림돌은 서쪽의 가이아 제국이었다. 4세기부터 키오피 왕국은 무너지는 가이아 제국을 보고 견제를 지속하였으며, 349년 가이아는 아예 제2차 서이스톨리아 전쟁과 키오피 왕국의 지속적인 공격으로 아예 남서이스톨리아에서 철수하고야 만다.

독립에 성공한 폴리네시아와 아르메노는 폴리네시아 제1왕국아르메노 통일국을 세우지만 10년도 채 가지 못하고 다시 키오피 왕국이 장악하고야 만다.

그러나 가이아 제국은 이 시기까지는 무너지지 않은 상태였다. 이스톨리아에서 철수한 이후인 2차 루나 시대에 황제 중심의 완전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면서 무너져가는 경제와 혼란스러운 정치적 상황을 견뎌냈다.

가이아 정복, 초강대국으로 성장 - '팍스 키오피'

이스톨리아에서 철수한 가이아 제국은 가이아가 철수한 지역에서 키오피 왕국이 클레이시아 지역을 향한 대침공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했고, 견제는 커녕 그대로 방치해버렸다.[4] 키오피 왕국은 계획대로 475년 클레이시아 동부의 모든 해안선에 총공세를 개시했고, 견제는 커녕 군사 준비조차 하지 않고 있던 무방비 상태의 가이아 제국은 단 8개월 만에 클레이시아 전역을 탈환당하게 되었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전역'까지는 아니다. 키오피 왕국이 북동부 전선을 신경쓰던 중 남부의 나일리아 왕국도 영토를 빠르게 확장하여 남서부 지역을 장악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키오피 왕국의 괴뢰국이었긴 하나 위클리아 북부에 동가이아 제국이라는 국가로 살아남았기에 '멸망'도 아니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동가이아 제국이라는 나라 자체도 모르는 경우도 많으며, 학자들도 475년 가이아 정복을 가이아의 끝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동가이아 제국마저도 523년 자멸하며 키오피 왕국에게 흡수합병되었다.

"팍스 키오피"
대남 제도 해전 이후, 키오피 왕국의 역사상 최대 강역 (634 - 945)

가이아 정복 성공부터 키오피-나일리아 전쟁 전까지의 키오피 왕국은 수백 년 간 클레이시아-남이스톨리아 세계를 평정하는 가히 세계 최강대국으로 군림하였다. 물론 나일리아 왕국도 존재했으나, 남서-남중이스톨리아까지 전부 수복하던 키오피 왕국의 아성에는 범접할 수 없다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중론이다. 이게 어느 정도냐면, 키오피 왕국 이후로 이렇게까지 클레이시아와 이스톨리아 세계를 평정하던 국가는 없었다.식민 제국 시대에도 클레이시아 지역은 엘리시움의 아성으로 인해 제2차 이스톨리아 전쟁 당시의 열강들도 건드릴 수 없던 지역이었으며, 근세에는 대항해시대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이 시기에는 한 강대국이 세계를 평정하는 구조가 아닌, 여러 열강들이 각자도생하던 시기였다.[5] 즉, 키오피 왕국은 전시대는 막론하고 근현대사의 그 어떤 국가도 따라올 수 없는 막강한 국제적 영향력을 가졌던 국가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이런 아성으로 인해 고대의 끝이 가이아 제국의 멸망으로 보는 경우가 많은 것처럼, 중세의 끝도 키오피 왕국의 멸망으로 보는 시각이 대부분이다.

키오피 왕국은 단지 영토만이 넓은 것이 아니었다. 유일하게 수복하지 않았던 남동이스톨리아 지역에게도 많은 견제를 했는데 세인트루이스 왕국의 내정에 마구 간섭했고, 리스본 제1제국이 수복하고 있던 대남 제도대남 제도 해전을 통해 정복해오며 끊임없는 견제를 해왔다. 또한 북이스톨리아 지역에도 지속적인 견제와 도발을 진행했고,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길버트 섬도 정복했다는 설이 있다.

가이아 정복 이후로도 여러 섬들로의 원정을 지속하여 영향력을 넓혀나갔고, 634년에는 대남 제도 해전을 통해 거의 대부분의 대남 제도 일대를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6] 그 외에도 전시대 가이아 제국이 정복했던 스푸트니 제도베스트 제도 일부까지 수복에 성공했다.

두 차례의 전쟁

그러나 키오피 왕국의 아성은 안타깝게도 여기까지였다. 토리노 왕조 시대의 나일리아 왕국은 국방비를 대폭 증대하고 군사력을 증진하여, 마치 전쟁을 대비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보였다.

한편 이 시기의 키오피 왕국은 남서이스톨리아의 폴리네시아족아르메노족의 지속적인 봉기를 대응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고, 클레이시아 지역은 뒷전이었다. 이 시기 일어난 폴리네시아족과 아르메노족의 봉기는 이후 남서이스톨리아 대반란의 도화선이 되었다.

결국 940년 나일리아 왕국은 지금의 보헤미안 북부 일대와 그레이터리시움 서부 지역 침공을 시작으로 키오피-나일리아 전쟁을 일으키고야 만다. 토리노 왕조 치하에서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게 된 나일리아 왕국은 팍스 키오피 아래에서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평화를 그저 '즐기고만 있던' 키오피 왕국을 완전히 압도했고, 945년에 끝난 1차 전쟁에서 나일리아 왕국이 보헤미안 북부, 그레이터리시움, 센트럴 스테이트 지역을 탈환하는 데 성공한다.

키오피-나일리아 전쟁 직후의 클레이시아 전선.
초록색이 나일리아, 흰색이 키오피다.

키오피 왕국이 나일리아 왕국에게 군사력으로 압도당했다는 것은 고사하고, 전쟁을 포기하면 클레이시아를, 전쟁에 집중하면 이스톨리아 지역을 자칫 빼앗길 수도 있는 상황에서 나일리아 왕국이 압승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니, 어쩌면 키오피 왕국이 처음부터 이스톨리아 봉기를 보고 이 전쟁을 포기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키오피 왕국은 나일리아 왕국이 한 번 더 침공해올 것이라는 건 예상하지 못했다.

그렇게 키오피 수뇌부와 예상을 완전히 깨고, 나일리아 왕국은 982년 제2차 키오피-나일리아 전쟁을 일으키고야 만다. 전쟁은 커녕 끝이 보이질 않는 봉기와 반란들부터 진압하고 있던 키오피 왕국은 어떠한 대응도 할 수 없었고, 결국 전쟁이 시작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키오피 왕국은 클레이시아 지역에서의 전면 철수를 선언한다.

남서이스톨리아 대반란

982년 클레이시아에서 철수한 이후 키오피 왕국이 맞은 것은 바로 남서이스톨리아 지역에서의 반란이었다. 지금까지 키오피 왕국은 남서이스톨리아 지역의 폴리네시아교, 아르메교를 탄압했는데, 이것이 봉기의 이유가 된 것이다.

이는 11세기 초반에 극에 달해 1012년 남서이스톨리아 전역에서 남서이스톨리아 대반란이 일어났고

리스본 제1제국의 침공, 멸망 및 분열

정치

역대 국왕

행정 조직

각주

  1. 리트보아, 그레이터리시움, 센트럴 스테이트, 이스트식스, 위클리아, 아이스리카, 시베리츠
  2. 추정치이며 2천만 km²를 넘었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3. 전성기 기준
  4. 당시 가이아는 시민들은 물론이고 중앙정부조차 철수까지 한 상태인데 설마 초강대국이었던 가이아의 본토를 건드리겠냐는 안일한 생각으로 아예 동쪽 상황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있었다.
  5. 현재 남이스톨리아가 수많은 국가들로 나뉘어 있는 이유도 키오피 왕국이 멸망하여 수많은 국가들로 분열되었기 때문이다.
  6. 리스본 제1제국이 수복하고 있던 섬 2개를 제외하고 그 넓은 대남 제도를 모두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