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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g>'''융희 로망(隆熙浪漫)/Yunghee Romance'''</big> | <big>'''융희 로망(隆熙浪漫)/Yunghee Romance'''</big> | ||
'''융희 로망'''은 [[대한국 (아침해의 원유관|한국]]에서 [[융희 시대 (아침해의 원유관)|융희 시대]] 초기에(1910~1926)시작된 낭만주의 사조를 뜻한다. | '''융희 로망'''은 [[대한국 (아침해의 원유관)|한국]]에서 [[융희 시대 (아침해의 원유관)|융희 시대]] 초기에(1910~1926)시작된 낭만주의 사조를 뜻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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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display:inline-block; width:100%;margin:0px auto 5px; border-radius: 8px; overflow: hidden;opacity:1;box-shadow:0px 0px 3px rgba(0,0,0,0.6);padding:23px 8px 10px;background:rgba(255,255,255,0.1);"> | <div style="display:inline-block; width:100%;margin:0px auto 5px; border-radius: 8px; overflow: hidden;opacity:1;box-shadow:0px 0px 3px rgba(0,0,0,0.6);padding:23px 8px 10px;background:rgba(255,255,255,0.1);"> | ||
=특징= | =특징= | ||
당대 [[대한제국 (아침해의 원유관|대한 제국]]에서 융희 시대는 임신개혁 이후 본격적으로 팽창한 국세가 안정기에 접어들던 시기로, 이후 파시즘과 변질된 유교 근본주의로 인해 사회 분위기가 경직됬고, 경제성장이 있긴 했으나 대공황과 몽골출병·[[제 2차 동아시아 전쟁 (아침해의 원유관)|제 2차 동아시아 전쟁]] 의 영향으로 살기가 팍팍했고, 미쳐 돌아가기까지 했던 성덕 시대 초기의 1930년대~1940년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일반 대중의 입장에서는 살기 좋은 시대였다. 이 때문인지 한국인들에게는 이 시대에 대한 향수가 꽤나 남아 있으며, 융희시대를 배경으로 한 그 시대의 분위기를 살린 창작물들도 많이 나오는데 이를 융희로망이라고 한다. 유럽의 벨 에포크, 빅토리아 시대나 일본의 다이쇼 로망과 비슷한 느낌으로, 국가적으로 위세를 떨쳤다는 것과 문화적으로 융성했다는 점 등의 이유로 현대에는 곧잘 미화되곤 하지만, 실상은 유럽과 마찬가지로 식민지와 식민지인들에 대한 부당한 수탈로 이룬 번영이었다는 점, 하층민들의 삶은 궁핍했다는 점 등에서 비슷하다<ref>괜히 이 당시가 한국사에서 가장 공산주의 열풍이 강하게 불던 시기가 아니다.</ref>. | 당대 [[대한제국 (아침해의 원유관)|대한 제국]]에서 융희 시대는 임신개혁 이후 본격적으로 팽창한 국세가 안정기에 접어들던 시기로, 이후 파시즘과 변질된 유교 근본주의로 인해 사회 분위기가 경직됬고, 경제성장이 있긴 했으나 대공황과 몽골출병·[[제 2차 동아시아 전쟁 (아침해의 원유관)|제 2차 동아시아 전쟁]] 의 영향으로 살기가 팍팍했고, 미쳐 돌아가기까지 했던 성덕 시대 초기의 1930년대~1940년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일반 대중의 입장에서는 살기 좋은 시대였다. 이 때문인지 한국인들에게는 이 시대에 대한 향수가 꽤나 남아 있으며, 융희시대를 배경으로 한 그 시대의 분위기를 살린 창작물들도 많이 나오는데 이를 융희로망이라고 한다. 유럽의 벨 에포크, 빅토리아 시대나 일본의 다이쇼 로망과 비슷한 느낌으로, 국가적으로 위세를 떨쳤다는 것과 문화적으로 융성했다는 점 등의 이유로 현대에는 곧잘 미화되곤 하지만, 실상은 유럽과 마찬가지로 식민지와 식민지인들에 대한 부당한 수탈로 이룬 번영이었다는 점, 하층민들의 삶은 궁핍했다는 점 등에서 비슷하다<ref>괜히 이 당시가 한국사에서 가장 공산주의 열풍이 강하게 불던 시기가 아니다.</ref>. | ||
광무 시대부터 시작된 서양화의 물결이 한국의 전통과 뒤섞여 '한양조화'(韓洋調和)라는 특이한 문화를 만들어냈기 때문에, 당시 문화는 상당히 독특한 분위기를 냈다. 남성들은 중절모를 쓰고 양장을 입은 뒤, 그 위해 두루마기 등의 한복이나<ref>원단의 종류도 굉장히 다양해져서, 양복원단이나 체크무늬 원단, 눈꽃무늬 원단 등 여러 종류의 한복 원단이 사용되기도 했다.</ref> 서양 코트를 본따 만든 개량한복을 착용하고, 오랫동안 모자를 선호하던 한국의 전통답게 기존의 갓 대신 파나마 햇이나 헌팅캡을 착용했다. 멋내기로 서구식 수염을 기르기도 하였는데, 여성들의 경우 1924년(융희 23년) 종로에서도 양장을 입은 비율이 겨우 2%에 불과했으나, 짧은 장옷을 입고 그 아래에 공간을 더 낸 치마를 입은 뒤, 신발로 부츠나 구두를 신은 신여성 스타일이 크게 유행을 타기도 했다. 교복의 경우, 상대적으로 가격이 비싸 구비가 힘들었던 완전 양장인 학도복과 세일러복이 완전히 보급되진 않은지라, 광무 시대부터 쓰이던 학도복<ref>두루마기에 학생모를 착용한 교복.</ref>이나 한복 교복이 혼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 광무 시대부터 시작된 서양화의 물결이 한국의 전통과 뒤섞여 '한양조화'(韓洋調和)라는 특이한 문화를 만들어냈기 때문에, 당시 문화는 상당히 독특한 분위기를 냈다. 남성들은 중절모를 쓰고 양장을 입은 뒤, 그 위해 두루마기 등의 한복이나<ref>원단의 종류도 굉장히 다양해져서, 양복원단이나 체크무늬 원단, 눈꽃무늬 원단 등 여러 종류의 한복 원단이 사용되기도 했다.</ref> 서양 코트를 본따 만든 개량한복을 착용하고, 오랫동안 모자를 선호하던 한국의 전통답게 기존의 갓 대신 파나마 햇이나 헌팅캡을 착용했다. 멋내기로 서구식 수염을 기르기도 하였는데, 여성들의 경우 1924년(융희 23년) 종로에서도 양장을 입은 비율이 겨우 2%에 불과했으나, 짧은 장옷을 입고 그 아래에 공간을 더 낸 치마를 입은 뒤, 신발로 부츠나 구두를 신은 신여성 스타일이 크게 유행을 타기도 했다. 교복의 경우, 상대적으로 가격이 비싸 구비가 힘들었던 완전 양장인 학도복과 세일러복이 완전히 보급되진 않은지라, 광무 시대부터 쓰이던 학도복<ref>두루마기에 학생모를 착용한 교복.</ref>이나 한복 교복이 혼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