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혁명

아르세도스
Arsedo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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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도리아 제2제국 건국전쟁
계몽혁명 | Colemasn Erenitels
「엣나르헨니아 전투」, 메세르닉 네르스니케론[1] 作, 5309년
기간
5070년 12월 17일 ~ 5080년 8월 15일
3,480일간 진행
장소
클레도리아 제1제국 본토 전역
교전 세력
반란 / 공세
이데리아 연합군
진압 / 수세
제국군
지휘관
에르카사르 시르메닐 카스비르트
에르셀리레 엘라네얀 스트라닌
(그 외 다수)
마르세니클 메시텔 마르카르
케소르니펠 테르세니 코르나티세
(그 외 다수)
병력
1,215,976명~[2]
2,392,100명~[3][4]
피해 규모
군 사상자 129,440명~
민간 사상자 680,500명~
군 사상자 489,105명~
민간 사상자 1,013,100명[5]~
총 약 2,312,155명 이상 사상
결과
시르메닐이 이끄는 이데리아 대공국 주축 반란군의 승리
영향
최후의 황제 메시텔의 자살 및 클레도리아 제1제국 멸망
시르메닐의 즉위 및 클레도리아 제2제국 건국
전선에 의해 오르가이아주 일대 황폐화로 인한 장기적 쇠퇴
카피톨리아 광역권 지역의 장기적 성장
클레도리아 단결주의의 확산 및 서부 지역의 주목
카스비르트 가문의 완전한 중앙집권화로 부분적인 간접민주화 달성
봉건제의 완전한 혁파 및 신분 특권 대폭 완화
사회 분위기 유동화로 인한 다방면의 발전 가속화

개요

계몽혁명(Colemasn Erenitels)은 클레도리아 제1제국 말기의 혼란, 무능, 부패 척결을 내세우고 시르메닐이데리아 대공국의 지원과 조정에 대한 불만을 가진 서부 세력들의 광범위한 지지 하에 훗날 클레도리아 제2제국을 세운 반란이자 혁명 전쟁이다.

6기, 즉 클레도리아 제1제국의 시대와 7기, 즉 클레도리아 제2제국의 시대를 판가름한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근세의 끝과 근대의 서막, 아리에티아 땅에서의 마지막 역성혁명이라 할 수 있는 대사건이다. 클레도리아 역사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손꼽힌다.

배경

과다하고 불합리한 탄압은 늘 역풍을 부추기는 법이다.

당대 클레도리아 제1제국은, 아리에티아 천하를 200년 동안 호령한 끝에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이는 체제의 한계, 국가 통제의 실패, 부패, 그리고 대외적 위협 처리 능력 과부하로 말미암은, 예정된 결말이었다.

5050년대 이후, 플라다리아주는 일대 지역에 쌓여가는 갈등에 놓여 상당히 휘청거리던 상태에 놓였고, 오르가이아주오르세이아주는 노른자 땅임에도 호족들 간 내분으로 인해 건드리기 애매해지기에 이르렀다. 그나마 근방에서 안정적이었던 스트론티아 삼림연방도 농업 생산량이 후달린다는 큰 아킬레스건을 가져 휘청이고 있었다. 나머지 동북부 세력과 남동부 세력은 해상 교역에 매우 큰 관심을 쏟은 마르카르 가문 조정에 의해, 여전히 제국의 직할령이자 직접적인 통치 영향권이었다.

그랬기에 당시에는 엣드라비아를 등에 업고 엄청난 광공업 생산량 및 교역량, 군사력을 보이는 이데리아 대공국클레도리아 제1제국의 최대 지방 독자 세력으로 군림하고 있었으며, 멀리 동북부와 경제를 통한 신경전을 펼치고 있었다.

클레도리아 제1제국아리에티아 통일전쟁을 통해 아리에티아 전체를 통일시킨 국가였다. 수천 년 동안 갈라져 있던 아리에티아를 하나로 모았다는 매우 큰 의의는 가졌으나, 이것이 "전국 정복과 천하통일"이 아닌, '베르데트 클레도리아 왕국 중심의 '매우' 강한 연합'이었다는 점이 크나큰 한계였다. 즉, 아리에티아에서 황실의 직할 통치가 이루어지던 것은 절반 뿐이며, 나머지는 지역 유력자에게 맡겨서 통치하는 방식이었던 것이다[6].

이러한 한계는 황실 조정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제1제국 기간 동안 황실은 강력한 직접 통치 체제를 지향하며 중앙 집권화를 꿈꿔왔다. 그러나, 지방 세력의 권한 약화 정책을 추진하려 할 때마다 "우리가 너희 나라 만드는 데 기여했잖아"라는 논리가 명분이 되어, 지방 세력의 권한을 유지시키는 방패로 작용했다[7]. 게다가 영토가 워낙 넓고 기후도 다양하다 보니 이를 완전히 혁파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으므로, 황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중앙에서 보낸 관리들과 병존 통치하는 체제를 도입하였다.

한편, 당시 이데리아 대공국에서는 기존의 이델리르트 가문과 황실 마르카르 가문의 분파인 슬리네델 가문이 결혼 동맹을 맺어 생겨난 "혼혈 가문" 카스비르트 가문이 공가 혈통을 잇고 있었다. 혈통상 관점을 통해 이들은 자신도 황가의 친척이자 먼 일원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고, 이를 근거로 들어 제1제국에 가장 늦게 합류하고 가장 소극적으로 합류하였다. 이데리아 공국 시절, 이들은 두 차례의 은둔을 진행해 타국과의 교류를 완전히 중지한 적이 있다. 판 경계에 위치해 온천이 많았던 이들은 추운 기후를 버틸 수 있었고, 고원 평지가 많고 이데르강 상류에 위치해 있어 밀 생산량이 꽤 높던 이들은 스스로 자급자족을 할 수는 있던 상황이었던 것이다[8]. 따라서 이 나라는 외지에 굉장히 배타적인 성향을 보였다고 평가받는다. 이 버릇은 이데리아 대공국 말기까지 남아, 클레도리아령 이데리아 대공국에도 그러한 소극성이 관찰된다. 화산지대라 광물이 풍부한 까닭에 위와 같은 신경전을 해낼 수 있던 것.

물론 클레도리아 제1제국 황실, 마르카르 가문이 바보는 아니었다. 제국 성립 초기 때부터 쭉 나머지 지역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이들은 국력으로 찍어내리기, 정치질 등 통상적인 방법 외에 뒷세계 이간질을 시전하였다[9]. 방식은 다양했지만, "조각내 먹기" 정도로 비유할 수 있겠다. 특히 성공적이었던 곳은, 온갖 경제적 이해 관계가 섞여 있던 오르가이아주오르도리아주였다. 원래부터 여러 자그마한 세력으로 쪼개진 꼴을 정확하게 공략하여, 클레도리아 제1제국 중기에 가면 사실상 황실의 직할령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는 어느 정도 부작용을 낳았다. 이 조치를 중부 세력에 먼저 해버린 탓에, 서부 지역의 지역 강국들의 위기의식을 자극해 더욱 단결이 강해지는 역효과가 생긴 것이다. 따라서, 제국 중기 조정은 황실 직할령이 필수적인 해운 항해로를 대부분 장악하였다는 점과, 호족들의 거점은 본질적으로 전쟁으로 힘 빼기 쉬운 서쪽 국경이라는 점을 활용해 여러 번의 무역 방해와 전쟁을 걸어왔다[10].

그러나 달도 차면 기운다고, 300년 가까이 간 광대한 제국도 4980년대쯤부터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제1제국 말기, 이들은 관료제를 꾸준히 늘려나가 거의 전국에 파견하기에 이르고, 더욱 늘어난 직할령에서는 마치 절대왕정을 연상시키는 강력한 황권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어중간한 체제로 인해 조정은 너무 많은 지역 간 내분과 호족의 심복, 이간질에 시달리는 등의 폐해를 맛보게 되었다.

그 와중에, 남부 출신이 많은 마스카르 정권[11]이 부쩍 심화시킨 서부 세력에 대한 반감[12]과 견제가 합쳐져 동서 간 정치적 위치의 균형이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즉, 서부 지역이 동부 조정에게 에르멜리시아와의 교역 통로 내지 방패로 써먹히는 신세로 내몰린 것이다. 당연히 서부 지역 세력들이 이 상화을 좋아할 리가 없었다. 서부 세력들은 여태껏, 물리적인 거리와 "기후의 특수성", "생활 방식의 차이" 등등 핑계를 대며 고도의 자치 체계를 유지시켜왔고, 스트론티아 삼림연방의 "원시림 및 고대 신앙을 포괄하는 특수한 체제의 필수불가결성"과, 이데리아 대공국은 "친족으로서의 가족애와 추운 고지대의 직할 비효율성"을 운훈하며 끝없는 회유를 단행하고 있었다.

타파되지 않는 제국 후기의 위기 상황에 내몰린 조정은, 점점 국내 압박의 수위를 올려가고 있었다. 소빙하기 때문에 제국 북부의 기근을 비롯한 위기가 점점 심해지는 가운데, 줄곧 적당한 관계를 유지하던 접경국가들과의 신경전의 강도도 세져 산발적인 전투를 주고받기에 이르렀다.

여기에다 제국 말기에 일어난 피바람이자 대사건, 가문 분파와 심복에 대한 대규모 숙청이 일어났다. 제1제국이 중앙 집권을 도모한 것은 분명 좋은 의도였으나, 난세임에도 이를 감행한 것은 수많은 유능한 실권자들을 갈아 날려버리는 굉장한 역효과를 낳은 것이다. 상황적으로 몰린 탓에 이렇게라도 부패를 좀 막아보려 했던 메시텔이었지만[13], 아래의 두 전쟁을 치렀던 당시에는 굉장히 잘못된 선택이었다.

신분 제도의 부패

클레도리아 제1제국의 신분 제도는, 후기 기준으로 3개로 나뉘었다. 귀족, 평민, 천민이 이 셋이었다. 이들은 대개 대지주였으며, 부유와 자치로부터 오는 특권을 누리고 살았다. 인구의 극히 소수[14]였으나 전국 재산의 40~45%를 소유하였으며, 토지의 1/3 정도를 소유하고 있었다. 넓게 보면 귀족에 포함되었던 황실은 법률적으로는 "초월귀족"이라 불렸으며, 신(Clenieth)에게 통치권을 양도받은 계약을 하였다는 명분을 가지고 있었다. 귀족이 특별했던 이유는, (부자라는 점 외에) 클레도리아 제1제국 중앙행정 기관인 클레도리아 원로원[15]과 지방에 설치된 유향원 의석에 앉을 권한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하위 정치 세력이었다! 당연히 고위 관직은 여기서 많이 나왔다.

평민은 인구의 80~85% 정도를 차지하였으나 별다른 특권을 가지지도 않았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농민/상인/기술자 등등이었다. 당연히 여론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였고, 삶은 보통 그리 나쁘지는 않았으나 나쁜 귀족에게 얻어걸리면 좌천될 수도 있는 운명이었다. 땅에 예속된 듯한 존재였으나, 그렇다고 농노는 아니었다. 단지 종교적인 가치 때문에 그러했다, 정도. 실제로 이사라던가, 사유 재산권이라던가, 전부 인정은 되었다. 다만 세금 등등은 뜯어갔다. 클레도리아 제1제국 말기 횡포와 대대적인 부패 때문에 큰 피해를 보았으며, 이 계몽혁명이 일어나는 좋은 원인이 되어주었다.

천민은 인구의 나머지 10%~15% 정도를 차지하였던 최하위 계층이다. 다만 노비/노예처럼 재산이 되어 팔리는 일은 없었고, 머슴/하인이 되거나 기피 직종, 잔심부름 등을 하는 역할을 맡았다. 신분부터 달랐던 것을 보면 차별받기도 일쑤. 자신들만 사는 격리된 마을에서 거주하였기도 하다. 물론 환경은 최악. 하지만 그런대로 세금이나 군역 등은 일일이 뜯어갔으니 이 나라가 좋았을 리도 없겠다.

소빙하기와 제8차 에드렐린 전쟁

당시, 아르세도스 행성 전체에 소빙하기가 닥쳤다. 소빙하기뿐이면 다행이었지만, 그것으로 인한 이상 기후로 인해 메르테 대기근[16]이 닥쳤다.

아리에티아도 예외는 아니었다. 북부 지방에 큰 기근이 불어닥쳤고, 비교적 춥고 건조하며, 농업 의존도가 컸던 스테보니아주 일대와 이데리아주 일대에 큰 피해가 간 것이다. 이데리아주는 발빠르게 자신들이 쌓아둔 철 물량을 풀면서 중부/남서부와 교역해서 살아나왔으나, 정치적으로 일종의 분열기에 있었던 스테보니아주 일대 농민들을 중심으로, 각지가 픽픽 쓰러지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스테보니아주 일대에 각종 민란이 일어났으며, 조정은 에르센디아주 쪽부터 시작하여 진합하기에 이른다. 이데리아주는 본디 정치적으로 오래도록 통합되어 있어 "이것은 동쪽의 저주 때문이다"라는 부추김 끝에 별 탈 없이 넘어갔으나, 동부와의 어정쩡한 신뢰 관계는 이 일로 박살이 나기에 이르렀다.

아리에티아 국내는 그나마 따뜻한 해양성 기후 지방이 많아 피해가 덜한 편이었다. 그 피해는, 아무리 심했다 한들 척박한 스텝 지역인 에드렐로 산맥 이북의 에드리아비후리아가 겪은 것과는 비교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유목민들은, 7차 전쟁 이후 소강 상태에 있던 니에비후리아현에서의 농업 수급마저 잃는 참담한 경험마저 해야 했다. 남쪽의 아리에티아계 국가들의 교역마저 스테보니아 소빙하기 반란에 의해 끊겨버리니, 이들에게는 더 이상 가만히 있을 마음이 사라진 것이다[17].

그리하여 동북쪽을 대대적으로 침략하며 수도시 일원 방어에도 경고등이 켜지니, 이것이 제8차 에드렐린 전쟁이 되겠다. 이들의 필사적이고 대대적인 습격 때문에, 동북부의 군인들은 반란 진압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불려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수도가 정말로 털릴 것 같은 지경이 되자, 이들도 필사적으로 싸웠지만 위기감이 심해진 것이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미루던 카드, 아리에티아 전국에서 대기근 때문에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이데리아 대공국의 군사 지원마저도 요청하게 된다[18].

남해를 찾아서, 용치 전쟁

한편 용치 산맥 남쪽 끝에서는 또 하나의 난리가 났다. 용치 전쟁은 5047년에 일어나 5063년에 종전된, 클레도리아 제1제국-루메르스 신성 제국에르멜스 신성 제국이 참전한 15년의 기나긴 전쟁이다. 말 그대로 용치 산맥 근방에서 일어나서 용치 전쟁이라 불린다.

당시, 강한 알리아네샤 토후국의 팽창으로 인해 루메르스 신성제국은 기어코 일리에르센 반도 서쪽을 강탈당하고 만다. 서역은 괴랄한 지형으로 인해 해운을 위해서라면 중앙아메리카 & 카리브해 처럼 생긴 길다랗고 좁은 촉수(?) 사이 에네프샤 해협을 지나야 한다. 이런 만큼, 에네프샤는 해협은 매우 중요한 중계무역 스팟이었다. 대륙의 문물이 섞이는 창구이면서, 번창하는 상업지구였던 에네프샤는 엘리소르샤, 메르데사, 칼레메닐, 케르시멘이라는 네 거대 종교의 발원지이기도 했다. 이곳을 차지한 세력에게는, 엄청난 경제적 이득은 따 놓은 당상인 셈이었다.

한편, 50150년대에 루메르스 신성제국클레도리아령 플라다리아 대공국과 치렀던 전쟁 때문에 플라달렌해 해안선을 뺏긴 에르멜스 신성제국은 굉장히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저곳이 없다면, 하야겔리 대양에 갇혀 자국 무역 상선을 타국에 보낼 수가 없는 처지가 되는 것이다! 때문에 에르멜스 신성 제국은 지리적 문제로 직할을 포기한 대신 그나마 같은 칼레메닐 문화권인 루메르스와의 긴밀한 협동을 통해 항구 통행을 안정적으로 하는 데 굉장한 신경을 쓰고 있었다. 타 종교에 속해 말도 안 통하는 알리아네샤 토후국과의 마찰보다야 훨씬 이득인 것이다[19].

격동의 시대여, 본래 이 해협의 동쪽은 루메르스 신성 제국령, 서쪽은 알리아네샤 토호국령으로 하는 조약이 있었건만, 금세 깨지고 치열한 전쟁이 발발하였다. 수 년의 혈투 끝에 쇠퇴하는 루메르스 신성 제국은 쓸쓸히 종전을 협의하고, 양쪽 영토가 이교도 알리아네샤 토후국에게 점거당하고 만다. 그리고 토후국은 설상가상으로 에르멜스의 상선 출입을 잠가버린다. 해상 무역에 필수적인 통로가 먹통이 된 에르멜스 입장에서는 애가 탈 수밖에.

이렇게 되니, 그들은 동북쪽으로 가는 방법을 찾아보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거기는 헬리나르 대륙 최북단인 장벽 산맥과 북극 해빙으로 가득 차 있다. 고로 실패. 울며 겨자 먹기로 토후국과 교역을 해보려 하지만 해협을 미끼로 값을 뻥튀기 시킨다. 도저히 못해먹겠다 싶어서 육로로 찔러보지만, 클레도리아 제1제국 정부측에 의해 관세 폭탄인 것은 매한가지였다[20].

당시 에르멜스 신성 제국은, 플라델란 반도 항구를 매우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지리적인 문제로 인해, 플라델란해에 맞닿은 항구가 없다면, 에르멜스 신성 제국의 상선은 서쪽으로 3,000km 가량을 추가로 돌아야 간신히 메르데소르해 등등에 진입해 교역을 진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북제국은 최근의[21] 전쟁으로 인해 항구를 루메르스 신성 제국에게 뺏긴 상태라, 산맥 근방 접경 지대 어디든지, 그러한 항구를 탈환하려고 아주 안달이 나 있었다.

물론 루메르스 신성 제국도 이 중요성을 알고 있어 막으려 들었지만[22], 서쪽의 케르시멘교도들, 정확히는 알리아네샤 토후국군이 갑자기 에네프샤 해협을 지나는 에르멜스 신성 제국의 상선 통행을 금지, 에네프샤 탈환을 위하여 돌연 전쟁을 건 상황이었기에, 광대하고 비옥한 평야에서 나오는, 엄청난 인구와 생산력을 지닌 에르멜스를 줄곧 경계하던 옆 나라 클레도리아 제1제국의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원조는, 정확히는 플라다리아 대공국의 강력한 주장 때문에 성립된 것이긴 한데, 조정 입장에서는 때마침 북부 대기근 수습과 성립 직후 일어난 제8차 에드렐린 전쟁에 전념하느라 중앙군을 보낼 여력이 없었다[23]. 그런데 에르멜스 신성 제국은 또 에르멜스대로 막아야 했다. 이 미쳐버리겠는 상황 속에서, 이들은 불가피한 원조를 파기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에르멜스도 소빙하기의 피해를 입은 만큼, 남부 탈환에 혈안이 되어 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칼레메닐 분파가 다른 것에 대한 서로서로의 불만에 힘입어, 이들은 루메르스 신성 제국의 직할 방어가 약한 동방 군정지대를 침략해 대대적인 군대를 보내었다. 이들의 필사적인 투쟁 끝에, 전선은 설상가상으로 용치 산맥을 넘어 플라다리아주헤르노스현 정도까지 넓혀지게 된다.

당연히 플라다리아 대공국은 SOS을 치기에 이르고, "이건 큰일 났다" 하고 스트론티아 삼림연방이데리아 대공국 주둔군, 그리고 오르가이아주의 수많은 지방 세력들이 힘을 모아[24] 플라다리아 대공국을 구제해준 끝에 전선은 차차 회복하여 클레도리아 제1제국의 영토를 벗어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에르멜스의 진심과 광기가 어린 공격에, 항구는 물론이거니와 수많은 사상자, 토지 황폐화를 낳게 된 피비린내 가득한 풍경에 기겁한 제국 조정과 너덜너덜해진 플라다리아 대공국은, 돌연 휴전 선언을 때려버리고 물러나기에 이른다.

제3차 에네프샤 대치에 몰두하던 루메르스 신성 제국 입장에서는, 클레도리아 제1제국의 탈주는 청천벽력이었다. 항구를 뺏기고 싶지 않았던 루메르스이지만, 서쪽이 털리면 당장 수도가 전방이 되어버리는 형세이기도 하고, 어차피 반도이기에 플라델란해를 언제든지 누빌 수 있었기에 씁쓸한 심정으로 휴전 사절을 보내기에 이른다. 어차피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에르멜스 신성 제국은 내심 전쟁을 빠르게 끝내는 것을 원하고 있었다. 때마침 지금 전선이면 항구도 얻었겠다, 그들 입장에선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따라서 흔쾌히 협의에 성공. 그래서 용치 전쟁은 저렇게 끝나버렸고, 결국 홀로 이중전선이 아니었던 에르멜스 신성 제국의 승리가 되었던 것이다.

이때의 탈주로 인해, 루메르스와 클레도리아의 친선 관계는 기세 좋게 작살났다. 루메르스 신성 제국은 더 이상 클레도리아 제1제국을 동맹으로 보지 않게 되었고, 이후 계몽혁명이 한창일 때, 이들은 등을 돌려 제1제국의 원조 요청을 받지 않았고, 시르메닐의 반란군 측을 옹호하기에 이르렀다[25].

두 전쟁 이후

물론 둘 다 방어하는 것에는 성공하였으나, 사실 이 방어라는 게 안 그래도 여러모로 허덕이던 클레도리아 제1제국가 별 것도 아니고 '물량 공세'를 통해 억지로 막아둔 것에 가까웠다. 손실이 막대하다는 점은 여전하였고, 때문에, 이 일을 자초한 무능한 조정[26]은 이제부터 시한부 선언을 받게 된 거나 다름이 없었다. 전쟁 내내 민심은 동요하였고, 평민의 삶마저 피폐해지자[27] 전국에서 항거의 목소리가 퍼져나갔다. 하지만 이들은 서부 지역들의 태업을 비난하며, 분명히 서방의 두 나라 간 싸움이었는데 굳이 자국의 영토에 발 들이게 하여 곤란한 이중전선을 만든 것은 그들이라며 설득하였고, 애꿎은 그곳들만, 전쟁에서 회복하지도 못하였는데 타지에서 쏟아지는 군소리를 맞게 되었다.

용치와 에드렐린의 일은 각자 어찌할 수 없던 처사라는 사실을, 민중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두 개의 동요가 제1제국 체제의 부패와 허점을 참아오던 민중들의 인내심을 마침내 터뜨린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타지의 횡포에 대한 반감이 컸던 서부 지방 평민들과, 자신들의 정치적 의견이 유향원의 존재에도 무시당하기 일쑤였던 서부 귀족들을 중심으로 개혁을 이루고자 하였다.

코르메닐의 집권

이데리아 대공국의 대공이, 재수도 없이 이러한 난세 한중간에 사망하였고, 큰 다툼은 없이 그의 아들 켈리시헤레르 코르메닐 카스비르트이 집권하였다. 그는 유능하고 강경하였다. 좋게 말하면 당당하고 용감한 것이고, 안 좋게 말하면 조심성이 없고 과하게 대담한 성격이었다. 따라서 제도에 맞게 각 지방을 존중하지 않으면 강경하게 나올 것이라는 취지로 서신을 보내었다.

하지만 대공국 내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당시 정치를 같이 보던 코르메닐의 아들, 시르메닐은 서부 귀족들의 자제들이 많이 다니는 헤르산네 철학학교에 다니고 있었다[28]. 그는 서부 나라들의 점진적인 동맹을 추구하기 위해서 스트론티아 삼림연합에르셀리레 엘라네얀 스트라닌과 결혼하였다[29]. 그리고 아버지 코르메닐과 모의해, 여차 하면 전투와 정치에 좋은 감각을 가진 시르메닐이 총사령관 역할을 하기로 하였다.

멜라사니아 왕국의 혁명

에르멜스 신성 제국에 속한 멜라사니아 왕국으로, 북서부에 속해 있는 반도라 별 영향이 없을 것 같았지만, 영국의 명예혁명과 비슷한 사건이 벌어지고 이 일이 퍼져나가며 에르멜스와의 문물 교류로 인한 자체 기술 개발에 목숨을 매던 서쪽 세력들에게는 신세계와도 같은 소식이었다.

전개

헤르산네 철학학교의 결의

5069년 4월 29일, 유명하고 유서 깊은 헤르산네 철학학교에 다니고 있던 에르카사르 시르메닐 카스비르트 등을 비롯하여, 선생과 학생 및 후원 세력들이 이구동성으로 이데리아 대공국 세력이 성명문을 발표하였다. 대략 "무질서한 횡포와 탄압, 지방에 대한 불합당한 차별, 권력욕에 치중한 민중(drothi)의 궁핍 무시를 규탄한다"는 내용이다.

대문 선언

5070년 12월 17일, 이데리아 대공국의 경계 지역인 이데리아의 대문[30]에서 선전포고를 한 사건이다. 즉, 이때부터를 본격적인 계몽혁명의 시작이라 부른다. 여기서의 명언이 하나 있다[31].

"축복받은 그대들이여, 악몽에서 깨어나라!"
"Fenis ern Néeí ah, vilic'ot to thorìa![32]"

<대문 선언서> 中

서클레도리아 봉쇄

대문 선언에 동의하는 여러 세력들이, 특히 서부와 중부를 중심으로 계몽혁명에 동조하여 동북부 세력의 대서(對西) 무역을 막고 군사적으로 대립 선언을 한 사건. 이때 중요한 것은, 마스카르주 서부의 세력들과 오르도리아주 세력들이었다. 이들 덕분에 동쪽의 많은 지역들을 석권할 수 있게 되었다.

엣나르헨니아 전투

클레도리아 제1제국이 자신들을 함부로 하지 못하도록, 농업의 중심지인 오르가이아주로 들어가는 엣나르헨니아현을 점령하여 스테보니아주 방면으로 이데리아 대공국 본토의 공격을 피하겠다는 시르메닐의 제안 하에 이루어진 전투이다. 그리고 이는 곧 굉장히 좋은 수임이 밝혀졌다. 전초기지임과 동시에, 함부로 공격했다간 동진을 단행하여 매우 난처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반군이 나름 노른자 땅인 오르가이아를 점령했다는 사실 자체로도 상당한 동요와 재평가를 도모할 수 있었다.

일타삼피

시르메닐이 보낸 상인, 기술자, 등등으로 위장한 공작원들이 마즈나스시, 오르가르시, 스테보렌시 중심부에서 공작 활동을 하여 그쪽을 거의 동시에 마비시켜버린 사건이다. 쉽게 말해 사보타주. 아무리 엣나르헨니아현을 접수했다지만, 벼랑 끝 전술에 가까워지고 있던 터라 여기서 지체하면 절대 안 되었다. 오르도리아주 서부 세력의 완전한 협력을 받아놓은 당시이므로, 반군의 지배 영역은 상대적으로 남북으로 긴 형세라 볼 수 있었다.

여기서 주요 타격점은 세 곳, 스테보니아주 방면 & 엣나르헨니아현 방면 & 마스카르주 방면이었다. 여기서 까딱했다간 대문 공성전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 동쪽 점령지로 하여 완충 지대(buffer zone)로 삼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사실, 당시 클레도리아는 꼴이 말이 아니었다. 대규모 봉기는 많은 지역에서 일어났고, 영주 살해를 비롯한 일들은 많이 자행되었다. 덕분에 혼란의 틈을 타 쉽게 잠복하여 "정부 시설물" 폭파를 진행하였다.

오늘로부터 정확히 두 번째 하현달이 뜰 때.
hát soli halen enin ernent ra dhern vilis enas.[33].
파견 작전 내용 중

오르가이아 전투

계몽혁명이 10년이나 끈 이유다. 이데리아 대공국 세력이 오르가이아주 전체를 확보하는 데 엄청 오래 걸렸다. 다양한 세력들의 갖가지 회유, 정치질... . 때문에 시르메닐은 4년을 소모했다(5076년!)! 막판에는 결국 오르가르시를 함락시키며 이남/이서 지역을 단절시키는 매우 중요한 전환점을 남겼다.

스테보니아 함락

인구가 적기도 하여 오르가이아주 싸움이 일단락나면 가려고 했던 스테보니아주였으나, 매우 많이 미뤄져서 다급히 준비하여 출정했다. 오르도리아주신틀로리아현 말고 이미 수중에 떨어졌으므로 괜찮았다. 접경지였기 때문에 특별히 조심했는데, 클레도리아 제1제국이 직전까지 국경 넘어 비후르인과 전쟁했던 상태라 껄끄러웠던 반면 시르메닐의 세력은 "비후르와는 평화"를 외쳤으므로 흔쾌히 승낙, 별 위험 없이 전투하여 승리할 수 있었다.

제1차 정반협상

그냥 반란이라고 생각해 해치워야지, 하고 말았던 클레도리아 제1제국 조정의 안일함에서 벗어나 카스비르트 가문이데리아 대공국 세력은 굉장히 일사불란하고 통일된 집단이었으며, 무엇보다도 강력했다. 위기의식을 (드디어) 느꼈는지, 체제 개혁에 대한 회담 자리를 가졌으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불발되었다. 본래부터 부패하여 제1제국군의 사기가 낮았던 탓에, 오히려 반란에 동조하는 자들이 꽤 많았다는 것이 포인트다.

여기에 결정타로, 협상이 결렬되자 시르메닐 측은 "제국은 늙은 호랑이다!"고 퍼트려서 협상의 실패를 과장해 선전하였고, 마침 무언가를 꾸미던 세력은 이 이야기를 듣고...

신틀로리아 반란

지금의 신틀로리아현의 육로 상인들이 제국에 등을 돌리고 독자적인 반란을 일으킨다!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당시 클레도리아 내부 상인들 간 갈등을 알아두어야 한다. (위쪽 용치 전쟁도 참고해야 한다)

클레도리아는 전통적으로 지역색이 강해, 특산물이 갈려 있다 보니 지역 간 교역을 통한 물자 확충이 필연적인 나라였다. 따라서 틀어지면 누구나 "밸브 잠가라"를 시전할 수 있었고, 그것을 서로 굉장히 경계했기에 겉으로는 잘 지내면서도 상당히 고도의 첩보전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34]. 그래서 서로서로의 정보를 염탐하고, 인맥을 뿌리내리며, 무엇보다도 물자를 조달해주는 상업을 중시하는 것은 역사의 밥줄이라 할 정도로 중요했다.

클레도리아의 상인은 두 종류로 나뉘었다. 대외 무역과 연안 지역 운송을 주로 하는 해운 상인들[35]과, 거대한 국내 영토를 잇고 때로는 서역/북역까지 가서 교역을 하는 육로 상인들이 그 주인공이었다.

해운 상인들은 역사적으로 지원을 많이 받았다. 클레도리아 제1제국은 남동쪽에 있는 열대 지방 하르나르 대륙의 국가들과 교역하여 서역에 팔아넘기는 것으로 돈을 많이 벌었고, 그 과정에서 문물 교환도 많이 일어났다. 사상 관련 물의가 일어나면 피해를 입었지만, 보통은 외교를 목적으로 많이 신경쓰기도 하였다. 당시 가장 큰 불만이었던 해협 봉쇄는 외국의 전쟁 문제였고, 덕분에 제국 정부는 그 불만을 외국으로 살살 달래줄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육로 상인들이었다. 필요했다지만, 제국 정부에게 징집되어 용치 전쟁에 싸우러 갔다, 도리어 밀려 오르가이아주 남서쪽까지 적군에게 털리는 모습을 생으로 봐야 했다. 거기에 초토화된 서남부 백성들의 경제 사정 때문에 영 수입을 짭짤하게 벌 수도 없었는데, 對에르멜스 경제제재도 그대로 유지하다 보니[36] 애가 타는 것이다. 그들 입장에선 충분히 정부가 그들의 밥줄을 뺏고 있다고 생각할 만하다. 내부 통치는 부패로 썩어만 가는데, 전쟁에 휘말리고 졸전을 거듭하여 괜히 자신들의 피해만 늘린 제국 정부! 그들이 멀리 동부 교통 중심지인 신틀로리아현에서도 이를 간 것은 이러한 뒷배경이 있던 것이다.

그런데 마침 서부의 반란 소식을 듣게 되었고, 조정은 힘을 주고 사회 동요를 일찌감치 막았다. 그런데 바로 이 도시, 신틀로렌시에서 두 세력의 협상을 열겠다고 했고[37], 반란의 소식을 듣고, 가담하지 않은 상인들까지 마침내 들고 일어선 것이었다.

플라다리아 상륙

마스카르 포위

협상이 불발되자, 시르메닐오르가이아주의 병력을 그 근처 수비대로 빼두고 최전선 대치부는 마스카르주를 진압하러 떠났다. 하지만 당초에 빠르게 항복할 거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마스카르주는 끈질기게 이데리아 대공국의 병력을 들여보내지 않고 농성하고 있었다. 또 마르카르 가문의 연고지인 만큼, 유능한 장군들이 많이 포진해 있어 클레도리아 제1제국에 대한 충성도가 높았다.

에르멜스의 회유와 오르도리아 공방전

카피톨리아 함락

북방의 침공

에셀리아 양동작전

신틀로리아 공방전

반년의 동해 봉쇄

최후, 카피톨리아 함락

결과

10년 동안 200만 명이 사망하는 거친 사투 끝에, 클레도리아 제1제국마르카르 가문은 몰락하고 카스비르트 가문클레도리아 제2제국의 시대로 넘어감으로서 아리에티아를 석권하게 되었다.

영향

전투

기타

  1. Messernic'h Nersniceron. 5287~5312. 남성
  2. Cernathid, fild. (5438) / 케르나시드 등
  3. Cernathid, fild. (5438) / 케르나시드 등
  4. 다만 이 239만이라는 수치는, 나중에 제1제국의 횡포에 질려 이데리아 쪽으로 붙은 사람들이 많다는 점을 감안하고 보자.
  5. 말기 혼란으로 인한 지휘체계 혼선으로 피해가 커짐
  6. 그래도 권력 통제가 서유럽식 봉건제보다는 강했다.
  7. 호족과의 타협으로 만들어진 고려 초기의 정치적 불안정성을 상기시켜보자..
  8. 물론 교역이 아예 없진 않았고, 매우 소극적인 민간 주도 교역만 이루어졌다.
  9. 이 조치를 위해서는 풍부한 정보력이 필요했으므로, 황실은 나름의 첩보 기관을 제국 초기 때부터 보유하고 있었다.
  10. 하지만 이런 대외 관계를 자극하는 "나쁜 손"은 제2제국 때도 남았기 때문에 이후 에르멜스 연방제국클레도리아 제2제국을 다시 공격하는 빌미가 된다
  11. 조선의 붕당에 대입하면 좋겠다. 쉽게 말해 파벌이다.
  12. 마스카르와 플라다리아는 유서 깊은 숙적이다.
  13. 그는 나름대로 유능한 사람이었다. 시대를 잘못 태어났을 뿐.
  14. 많아봤자 3~4%
  15. 자문기관 및 언론기관, 회의 기구.
  16. 5057년.
  17. 본질적으로는 기본적인 숙원인, "남쪽의 풍요로운 농지를 차지하고픈 마음"이 커진 것이 크다.
  18. 그러나 수천 명 정도의 소규모만 보내도 그러려니 해주는 상황이었다.
  19. 항상 이런 건 아니었고, 한참 둘의 관계가 나빴던 4700년대 초반에는 에르멜스 신성 제국치르고네 공화국이 차지하던 시절도 있었다. 당시에는 루메르스 신성 제국이 속는 셈 쳐준 것이었다.
  20. 한편, 1차 인클로저 운동이 서북 멜라사니아 왕국에서 일어난다.
  21. 5010년대.
  22. 자신들의 중계 무역 수득과 큰 영향이 있다.
  23. 마스카르주 주둔군도 멜란이나 리브데보리아, 아레디오르, 레르켓수나 등등의 해적과 무역에 대응하느라 벅찼기에 소수만 보냈다.
  24. 호수 이북 지역들은 동북에 원조를, 호수 이남 지역들은 서남에 원조를 해주었다.
  25. 내심 클레도리아를 장악하려는 마음이 있었으나, 반란군이 중후반 가서 힘도 커졌겠다, 루메르스의 계략도 파악했겠다, 대뜸 내세운 내정간섭 불허의 원칙에 따라 아쉽게 포기하였다.
  26. 플라다리아가 원조 요청을 받은 것이지만, 비후르가 이미 심상치 않은 거동을 보여서 회유를 떠보던 시점에서 전쟁 2개를 하겠다는 선택은 전혀 현명한 처사가 아니었을 테다.
  27. 현대 자본주의 국가에 대입해보면, 중산층이 박살나 서민으로 후퇴한 것이다.
  28. 클레도리아에선 근방 귀족들의 친목과 화평을 증진하기 위해 같은 학교에 몰아넣는 문화가 있다. 보통 가장 강하거나 리더격인 귀족 가문에서, 간섭을 막는다는 명문으로 국경 지대 어느 괜찮은 곳에 설립한다. 이는 사실 그곳의 2세들을 그쪽 국경 방어책으로 써먹겠다는 속셈도 크다.
  29. 그 전부터 이미 좋아하는 사이라 금슬이 매우 좋았다고 전해진다...
  30. 협곡을 따라 지어진 장대한 장성이다.
  31. 관용구 내지 속담이 되었다.
  32. 페니세엔 녜-얗, 빌리콧토 소랴
  33. 햣솔리 할레네니네-넨라 데엔 빌리세나스.
  34. 상호확증파괴... 무한 냉전... 세상에...
  35. 비단 동남해안 뿐만 아니라, 이데르강을 타고올라 오르가르호 연안을 누비기도 하였다.
  36. 이참에 아주 굶어 죽이려는 생각이었다.
  37. 사실 어느 정도, 상인들의 동요를 파악한 시르메닐의 계략이었다. 어디 스트론티아 삼림연방과 쌍대를 이루는 외부 곡물의존국 아니랄까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