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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스비르트 가문 클레도리아 초공황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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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카스비르트 가문은 5080년부터 현재[1]까지, 클레도리아의 국가 원수인 초공황제의 대를 이어오고 있는 가문이다.
클레도리아 신 황실이라고도 불리며, 정치권력을 모두 포기하였음에도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가문으로 평가받는다[2].
생활
초공황제 본인[3]은 정궁 네이르궁에서 살았고, 아이들도 어렸을 때는 그곳에서 살았다[4].
그러다가 어느 정도 나이가 찬 황태자/황태녀[5], 왕/여왕[6]이라는 호칭이 붙는 자제들은, 네이르궁에서 남궁 에셀리아궁으로 이사갔고[7], 카스비르트 가문 설립 에셀리아 학교에서 공부하며 엄격하고 엄격하게 선발되어 황위 계승을 이어나갔다.
외가 친척들은 동궁 그레시아궁에서, 귀빈은 서궁 엘리시아궁에서 지냈으며 궁이 비거나 하면, 친척들이 서궁에서 지내는 일도 허다했다[8].
동서남까지는 들었는데, 북은 무엇에 해당하냐 묻는다면, 테리스 에르센디아구였다. 성벽에 둘러싸인 국가중요기관이 위치한 곳이었기에 북성이라고도 불렀으며, 의미가 확대되어 제3제국 들어서는 정치기관이 모인 곳을 뜻하게 되었다[9].
이 동서남북을 성이나 궁으로 칭하는 지명은 여전히 남아, 카피톨리아 수도시 내에서 케핀소리아 영역[10]과 엘리시아 영역[11]의 경계 지역은 정궁, 시의 동/서 경계는 동궁과 서궁으로 부르는 관례가 남아 있다. 또 에셀리아시로 가려는 사람에게는 "남궁 간다"는 관용구도 아주 많이 쓰인다.
클레도리아 제2제국 때는, 제1제국 및 그 이전 왕위 다툼을 들어 폐단을 지적하며 "황태자/황태녀의 자질"을 중요시하였다[12]. 그냥 혈통만을 근거로로 즉위했다가 특히나 복잡해지고 거대하기에 휙휙 바뀌는 클레도리아 내부 정치 암투에 휘말리거나, 백성들에게 지지를 잃고 1제국 말기처럼 전국 각지에서의 봉기를 맞을 수도 있었기 때문다.
그러한 우려 때문에, 클레도리아 제2제국 때는 황제가 군림하며 통치하지만 그 밑 총리의정[13]까지를 비롯한 몇몇 관료들, 특히 의회는 선거로 뽑는다는 과도기적 체제를 선택하였다. "국민을 대표하여 이들이 뽑은 정치 세력인 클레도리아 제국의회"와 "전통을 유지하며 명맥을 계승하는 황가 세력[14]"이 중앙에서 서로를 견제하며 균형을 이루고[15] 정치를 해나간다는 체제를 채택했다[16].
아무튼, 전통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고 여전히 쥐고 있던 특이한 국가였기 때문에[17] 행정부의 수반이자 국가원수라는 지위를 가지고 있던 황제가 무능하다면 그건 국가 유지에 쓸모가 없는 것이었다. 때문에 카스비르트 왕조에서는 일단 적자우선이었지만[18], 혹독한 훈련과 단련과 엄청난 책임의식을 불어넣고 자질이 있는지 없는지 수십 번씩 확인하며 황태자 시절에 굴린 덕에 실전에서 다들 평타 이상은 칠 수 있었다.[19]
거대한 나라를 포괄해야 하는 입장이었기에 황족임에도 탁상 정치를 굉장히 경계했다. 온실 속 화초처럼 키웠다간[20], "상위 계급의 인식"이 반영되어 선민의식과 기만정책으로 점철되어 안정된 정권을 잃게 된다. 따라서 카스비르트 가문의 자제는 오히려 어릴 때부터 평민[21]처럼 살았다. 클레도리아 황가의 생활이 이상하리만치 검소한 건 이 때문이었다. 물론, 다른 귀족들보다도 재산히 훨씬 많긴 했지만[22] 절대 펑펑 써대지 않았다.
이러한 점들은 대부분 시르메닐이 만들어낸 전통이었다. 본인은 이데리아 대공국 도련이었지만, 시대 탓에 1제국 말 혼돈 속에서 유복했지만 평화롭게 살지 못했다. 그리고 계몽혁명을 일으키며[23], 시르메닐은 어려움 속에서 투쟁하고, 전투[24]를 직접 지휘하며 평민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25] 아주 가까이서 본 신세였다. 즉, 스스로는 귀족 출생이었음에도 삶은 평민과 다르지 않게 살았다[26].
따라서 시르메닐은 결국 쟁취해낸 유복과 정치적 안정 등에 감사하고 오만하게 받아들이지 말란 것을 항상 강조함과 동시에 후손들이 이를 지킬 수 있도록 당부하고 싶었다. 그래서 카스비르트 가문의 자제들은 가정교사가 아니라 학교에서 타인과 섞여서 교육받았다. 귀족들과 같이 다니기는 했지만, 그건 사실 자식들을 볼모로 삼아 중앙집권을 꾀하는 장치였다[27]. 그런데 학교의 위치는 수도가 아니라 에레수리아만을 건너면 나오는 에셀리아시라는 유서 깊은 공업도시였다. 왜 그곳이었는가. 일단, 거기 다니는 사람들에게 "쉽게 정궁에 발 들일 생각은 하지 마라"라는 충고를 주는 것이 있었다[28] 그리고, 수도와 적당히 가깝긴 하니까 유사시 관리하기 가장 편한 곳이었다.
그런데, 전국 유수의 가문 자제들이 모이는 만큼 얼마나 심한 정치질이 존재하려나? 학교의 교수진은[29] 카피톨리아의 세렌도스 학교를 나온 최고의 선생이자 황실에 대한 충신들이었기에 이런 정치질에 흔들리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혹시 모르니까 어떤 음모가 발생했을 때 감시하기 편한 위치이기도 했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클레도리아에서 가장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는 노동자들이 제일 많은 곳이었다. 정부도 이런 곳을 만들어낸 자본가들은 은근 무시하는 태도였지만[30], 산업혁명 시대 공장에서 매일같이 구르는 비참한 평민들의[31] 모습을 직접 보고 이들을 생각하며 정치하라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근대화를 이룩한 왕조였음에도 국민들이 좋아한 왕조였기에 다른 나라보다 양극화를 줄일 수 있었고, 결론적으로 수 세기 이상 집권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권위를 양보"한 것은 아니다. 자신들의 제국 내에서의 위상은 늘 그렇듯 드높였고, 나라가 매우 넓은 만큼 함부로 자신들이 통치하는 중앙정부를 넘볼 수 없게 만들어 영향력을 철저히 배제하였다[32]. 다만, 국민들과 귀족들에게 떳떳하게 호소할 수 있게끔 "솔선수범하고 늘 지혜롭고 자비롭고 유능한 통치가문으로 존속"한다는 의무는 빡빡하게 지켜왔다[33]. 거대한 제국의 지배계층인 만큼, 넓은 지역에 억 단위 인구가 각종 이념과 사상을 가지고 살아갈 것인 만큼, 광범위한 계층의 지지를 얻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덕분에 이들은 지역을 평등하게 대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친히 살피고 그쪽 인재를 등용"하는 것을 소홀히 하지 않아 각 지역의 유력자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일을 하였으며 국민들을 우선으로 하는 정책을 하여 충성을 조리 있게 유도하였다. 덕분에, 이들의 집권기에는 반란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고, 있더라도 이미 각 지방의 국민들이 차가운 시선을 보내 진척을 알아서 방해하고 있어 진압이 아주 수월했다.
즉, 카스비르트 가문의 성공적인 정치판 안착 및 장기집권의 요인은 '혈통'이니 하는 요소들보다도, 산업화와 세속화라는 근대 실정에 맞추어 "현실적이고 실질적으로 어진 통치를 증명함으로서 인정받고 얻어내는 지배자로서의 자격"을 내세운 덕이다.
자신들이 단지 권력을 얻기 위해 집권한 것이 아니라, 그로서의 의무를 성실히 하는 모습을 내세워보였기 때문에 제2제국 초기 1억 5천의 국민들이 그들을 지지하고 "그 모습을 보아, 우리를 통치하는 걸 인정하고 따라줄게" 라는 동의와 지지를 얻어낸 것. 즉, "이들은 자격이 있기 때문에 황족이고 지배계층이며 우리나라의 최고 신분인 것이다"라는 합당한 명분을 불러일으킴으로서 정당성에 이견이 없도록 하여 성공을 이끌어냈다.
의술이 발달한 당대 사정에도 맞물렸는데, 의도적으로 자녀 수를 적게 낳고 계승 자격을 강하게 제한해두어 황위 계승 다툼이 발달하지 않도록 하였다. 형제자매간의 불화는 있었을지언정, 황족으로서 승계에 대해 불복을 한다거나 내란을 벌인다는 일은 일체 없었다[34].
학교 생활은 의외로 검소했다. 특히 직계 황족들의 기숙사는, 평범한 중산층 가정의 가옥과 다를 게 없었다. 현대는 아니라 인권 의식이 부족한 아직 근대였기 때문인지 사람마다 기숙사가 달랐다 할지언정, 가장 낮은 등급에서 황족이 살도록 한 것은 의도한 바였으리라.
개방적이고 민중 친화적인 클레도리아 황가 문화는 8기 성립 당시까지 650년 가량을 이어오던 클레도리아 중심지배세력의 특징이었으며, 이는 현재도 유지 중이고 (통합을 위한 친근한 이미지를 지님), 제2제국 11대이자 공동 12대[35]로 군림했던 세르네세 여제의 활약상은 매우 고평가받는다.
그렇다면, 황제의 권력이 완전히 사라지고[36] 단원제 의회가 정치권력의 중심으로 돌아간 8기의 클레도리아 제3제국 황가는 어떤 삶을 보내는가. 일단, 전통의례 전수는 여전하다. 성대하게 여는 황실 행사는 여전히 진행되고 있으며, 궁궐에서 기품 있는 삶을 보내는 것도 여전하다.
그렇지만, 교육을 열심히 받고 늘 공부한다는 전통도 유지되고 있다. 다들, 황족의 대부분은, 학자가 되었다. 시대를 잘 따라가며 지지를 얻는 여론관리가 중요한 클레도리아 황실 특성상, 카스비르트 가문 설립 에셀리아 학교에서 점점 벗어나고 있으며, 에셀리아 학교는 아예 별도의 학교법인으로 황실과 법적으로 분리해버렸다.
교양을 바탕으로 하여 예술 활동을 하는 황족도 있으며, 통번역 활동을 하는 이도 있고, 과학에 진출한 사람들도 있으며 공학자도 있는 데다가 역사학자, 고고학자도 많이 있다. 논문을 찾아보다가 이름이 카스비르트로 끝나는 것을 보고 기분이 묘해진다.
대외적인 활동을 하는 이도, 신분제가 없어진 만큼 귀족명(미들네임) 말고, 그냥 이름을 쓰는 경우가 많다. 다들 진짜 정체를 알면 지체 높으신 신분 때문에 당황하니까, 평범하게 사람 대하듯 편하게 대하는 걸 좋아한다.
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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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450년
- ↑ 기업 이상의 단위인 국가에서 수 세기 간 재위한 우두머리 가문이며, 단일 군주국가로서는 아르세도스 최대인 것이 클레도리아이다.
- ↑ ...그리고 그의 아내, 황후도.
- ↑ 시르메닐은 계몽혁명을 주도하며 여러 사정 때문에 부모님 정을 영 못 받고 자랐다. 자신의 후손들도 그렇게 만들 순 없다며, 영유아 때에도, 정말 바쁜 게 아니면 가족과 같이 자라도록 했다.
- ↑ 황위 계승권을 가진 자. 군주 의전서열 부동의 1위.
- ↑ 태자/태녀가 아닌 자식들. 간단한 황자나 황녀라는 표현도 있지만, 다들 왕/여왕을 선호한다.
- ↑ 교출이라 부름.
- ↑ 이런 것도 없이 정말로 빈다면, 시민들이 그곳 정원까지 놀러오는 것은 허용했다.
- ↑ 가끔 에세르센디아(산)를 가리키기도 한다.
- ↑ 동부 구시가지
- ↑ 서부 신시가지
- ↑ 마르카르 때는 계승 법칙이 그리 명확하지 않았다.
- ↑ 재상에 해당한다. 당시에는 부통령/국무총리 포지션이었다만 제3제국 들어서는 의원 내각제 국가의 영락없는 총리다.
- ↑ 1제국 황제들의 먼 친척이었다. 정확히는 분가. 이데리아 "대공"이라는 호칭에서 볼 수 있다.
- ↑ 물론, 사법부는 별개다
- ↑ 다 괜찮았는데, 한쪽이 막나가고 폭주하면 막을 수 없다는 게 흠이었다. 그게 7기 말 광양의 폐단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 ↑ 에르멜스에서는 이거 보고 대체 정체가 뭐냐고 깠다.
- ↑ 그리고 실제로도 요절해버린 2명을 제외하고는 적자가 정말로 왕위를 잡았으나...
- ↑ 10대, 11대 황제도 실책이 많았다지만 아예 자질이 없던 암군인 것은 아니었다. 키르메넬은 중기까지는 괜찮았지만, 무리하게 에르멜스 공주를 아내로 들여오는 과정에서 국회 견제를 소홀히 하였고(대립), 선황이 벌려둔 나름 괜찮았던 교역로 사업과 해외 보호령 확장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으며, 거기다 아내가 출산 직후 사망하면서 에르멜스의 빈틈 공략 외교전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결국 스스로도 점점 피폐해졌다가 스트레스나 화병 등으로 요절하였다. 따라서 세르네세가 즉위했을 때에는 이미 망가진 정치판 속에서 균형을 이루어내려 노력한 것이었다. 방법이 이상했다고 욕을 먹지만.
- ↑ 황실이니 이런 능력은 되고도 남겠으나.
- ↑ 중산층.
- ↑ 각종 공기업 운영을 실무정부에서 행하는 만큼 황실의 명의였으니. 세금 정책을 자신들에게도 일부 부과해 국고에 보탰으므로 반발은 덜했겠지만 남은 양도 장난 아니다.
- ↑ 튼튼한 뒷 후원을 아버지께 받았지만, 후방 지원에 가까웠다.
- ↑ 주로 게릴라. 나중에는 서부의 군사를 회유하며 세력을 불려나갔다.
- ↑ 물론 난세라 좀 지나친 예를 보긴 했겠지만지만 언제 이렇게 될지 모른다는 합리적인 불안도 가지고 있었다
- ↑ 특히 청소년기부터 청년기에
- ↑ 참근교대 제도, 아니면 고려의 기인과 비슷할 것이다. 물론, 동시에 경쟁을 시키며 황제의 자식들에게 성실함을 심고 게으름을 날려버렸으며, 귀족 자제들에게도 중앙정부의 견해가 은근히 담겨 있는 내용을 학습시키면서 복종하게 만드는 지능적인 정치적 장치라고 부를 수 있겠다.
- ↑ 위압감 max.
- ↑ 이 학교에는 대학이 없음
- ↑ 제2제국 당시, 농촌은 여유롭게 살아가는 곳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 ↑ 평균 이하. 일부러 극상위권 가문의 자신들과 대조하라고.
- ↑ 귀족과의 싸움은 끝나지 않는다
- ↑ 이 글에 잔뜩 설명된 황족의 공부로 점철된 일상도 여기서 온 것이니.
- ↑ 하지만 이 때문에, 말기에는 자식이 하나밖에 없는 경우도 생겼다.
- ↑ 제3제국 초대
- ↑ 물론 사회적 인식과 전통적 위치 등은 그대로 남아있다. 법으로 어찌할 요소도 아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