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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토 · 세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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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1980년, 쉬르마허 기지 |
노이슈바벤란트(독일어: Neuschwabenland, 영어: New Swabia)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 국방군에 의해 점령된 노르웨이의 남극령 지역인 퀸모드랜드에 독일이 영유권을 주장하고, 피점령 상태의 노르웨이 정부가 이를 인정함으로써 수립된 식민지이다.
역사
Die Geschichte wird nur mit der Waffe des Starken geschrieben. 역사는 오직 강자의 무기로 개척된다. |
-아돌프 히틀러 |
독일이 남극 지역의 일부에 대한 영유권을 최초로 주장한 것은 1938년이었으나, 실제로 그 영유권이 확립된 것은 1940년 독일이 노르웨이를 침공하여 퀸모드랜드의 일부를 할양받은 시점부터이다. 전시였던 당시의 급박한 상황으로 인해, 독일 정부는 탐험대나 관료를 파견하지 않았으며, 노이슈바벤란트에서의 연구 및 개발 활동은 종전 후인 1951년에 이르러서야 공식적으로 재개되었다.
종전 후 이 지역에 대한 독일의 계획은 단순한 영유권 확보의 목적으로 점령이었으나, 곧 독일의 남극 탐험가이자 군사 전략가인 알프레드 리처의 주도 아래 복합적 군사 개발 기지로서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리처는 남극의 혹독한 기후 조건을 연구하며 "노이슈바벤란트는 독일의 군사적 우위를 확립할 새로운 기회"(독일어: Neuschwabenland ist eine neue Gelegenheit, Deutschlands militärische Überlegenheit zu etablieren)라고 이를 강조했다.
1954년, 독일은 국방군과 무장친위대에 보급될 극지 환경에 대응하는 군사 장비를 시험하는 연구 시설을 노이슈바벤란트에 설립하기 시작했다. 이 기지는 독일의 첨단 재식 무장 기술을 개발하는 실험장으로 사용되었으며, 냉전기 기간, 대륙 간 탄도 미사일 개발 계획이 이곳으로 이양되어 극비리에 진행되었다. 한스 카멜러 장군이 이끄는 "남극 고도 방어 및 전략 자원 확보 계획"(독일어: Antarktischer Hochsicherheits- und Strategischer Ressourcenplan)는 무주지였던 노이슈바벤란트를 국방군과 수 많은 연구 인력이 드나드는 군사적 요충지로 전환하는데 핵심 역할을 했다.
1960년대에 접어들며, 핵심 연구 과제의 완료 및 중단 이후 노이슈바벤란트는 독일 본토의 반역자와 군사적 항명자들을 위한 유배지로 취급받기 시작했으며, 영토 관리와 종합 행정의 편의를 위해 자치령으로 승격되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 노르다메리카에서 발생한 폭력 조직 간의 충돌과 남아메리카의 일련의 혼란이 독일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자, 게르마니아는 이 지역에 필요한 물자를 아메리카로 긴급 투입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니더란데 평정 및 모스코비엔 포그롬 사건 등이 겹치면서 노이슈바벤란트의 보급로는 한 번 끊긴 이후 영구히 재개되지 못했다. 이들은 국내 민간 단체들의 후원에 의존해 간신히 유지되었으며, 루돌프 마이어와 정치사무국 군수 장관이자 남극 영토 개발총괄부장인 쿠르트 마이어 사이의 격렬한 갈등과 교신은 이들의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1980년 초, 쿠르트 마이어는 동방 영토의 혼란을 이유로 노이슈바벤란트에 대한 "국가 차원의 추가 지원"을 중단하겠다는 공식 성명을 발표하며, 상황은 더욱 절망적으로 변했다. 같은 해 후반, 노이슈바벤란트는 라이히스웰스에 "완전 독립된 주권적 제휴 국가"라는 명분으로 초청받았으나, 실질적으로 그들의 발언권은 여전히 게르마니아에 귀속된 상태였다.
노이슈바벤란트의 전략적 이용 가치가 소멸했음을 암시하듯, 게르마니아 정부는 유배지 정부의 각료들에게 착취적 정책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부조리하고 기괴한 관계는 퓌러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전임 퓌러 히틀러만큼 이 지역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기에 가능했다. 루돌프 마이어의 사후, 리하르트 하인리히 쉬르마허(독일어: Richard Heinrich Schirmacher) 정권은 독일과의 연관성을 끊으려 했지만, 결과적으로 독일 기업에 의한 재식민화가 이루어졌다. 에르윈 푸세네거와 발렌타인 퍼스타인을 비롯한 남극군 상급사령부 군부는 이들의 결정에 무력을 동원한 항의를 보내려 했으나, 루돌프 마이어에 의해 제지되었다.
1982년 5월 21일, 제2차 대조국전쟁이 발발하고 게르마니아가 소비에트 정합국에 의해 혼란에 빠지면서 노이슈바벤란트는 비로소 쿠르트 마이어를 비롯한 남극 영토 개발총괄부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21세기에 이르러 대조국전쟁과 제3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린 이후, 노이슈바벤란트는 동독일 인종자치판무구역의 관할로 귀속되었다가 소비에트 정합국령 남극 판무부에 합병되었다.
정치
참고
비고(Obsidian)
외부 문서
- ↑ 공식적인 수도는 없으나, 행정부와 인프라의 중심지인 쉬르마허 기지가 수도 같은 역할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