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국 (동방)/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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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대한국의 외교 관계를 정리한 문서.

대한국은 21세기 세계에서 미국과 패권을 양분하고 있는 초강대국이다. 소련 붕괴 이전까지는 제3세계의 맹주로서 서방국들로부터 신생독립국의 이익을 수호 및 대변하며 미소간의 갈등을 중재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소련이 붕괴한 뒤에도 구 제2세계 국가들과 서방국의 갈등을 조정하는 역할을 자처하며 김창암선을 넘어 아프리카와 남미로 정치외교적 영향력을 넓혔다.

한국 외교의 역사적 특징은 적극적 군사개입이나 막후 공작을 통한 내부 교란 보다 외교적 해법을 우선시한다는 점이다. 단기적으로는 국익에 손해를 보더라도 역내 안정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크기 때문에 외교적 해법으로는 도저히 안보나 국익을 지킬 수 없다는 판단이 내려졌을 때만 군사개입이라는 패를 사용한다. 이러한 태도 덕분에 서방국들의 제국주의적 태도에 반발하던 신생독립국이나 반서방 국가들에게서 신뢰를 얻을 수 있었고 현대까지 세계 외교의 중재자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한국이 이러한 외교전통을 갖게 된 것은 20세기 초만 해도 다른 열강들에 비해 국력이 상당히 부족해 역사적으로 외교적 해법을 우선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이 제국주의 성향을 드러냈던 지역이 동아시아에만 국한되었던 점이 다른 제2,3세계 국가들에게 부정적으로 보일만한 소지가 적다는 장점으로 작용했다.

단순히 국가간 중재를 넘어서 특정 국가의 내분에도 깊숙히 관여해 화해를 주선하기도 한다. 1950년대 후반 이란 모사데그 자유주의 정권에 불만을 품은 이슬람주의자들과 여러 정치 세력의 대화를 주선해 문제를 평화롭게 해결하도록 돕거나 라오스 왕국의 공산주의자들이 선거에 참여하도록 유도해 내전 위기를 무마하는 등의 성과가 있었다. 그 때문에 왕국인데 공산당이 집권하거나 공산주의 국가인데 서구식 의회 선거를 실시하는 등 기이한 모습이 나타나기도 했다.

끝끝내 꼬여버린 상황을 군사적으로 해결하더라도 상대국에게 굴욕감을 줄 수 있는 상황 자체를 가능한 피했다. 인니전 전후처리에서 믈라카 해협의 국제수역화, 리아우링가와 몇몇 도서 지역의 한국령 편입, 말라야 연방와 서파푸아 독립 인정과 인니 내 번국들의 자치권 확대라는 목표만 관철시킨 채 한국은 인니를 상대로 배상금조차 요구하지 않았다. 한국은 이후로도 인니와 몇번 더 충돌하지만 경제개발등 여러 지원 또한 병행하며 관계를 꾸준히 개선해나가 현재는 상당히 우호적 관계로 바뀌었다.

미국처럼 적극적인 정치외교적, 군사적 활동을 통해 패권을 유지하기 보다는 경제협력과 민간외교 등의 수단으로 긴 시간을 들여 차근차근 자신의 세력권으로 끌어들이는 외교 전략을 구사한다. 세조 무황제가 황태자 시절 ‘대국(對國)에도 무위의 도가 필요하다.’라는 성지를 공표한 이후 이는 한국 외교의 핵심 전략이 되었다. 물론 이러한 대전략 때문에 한국 외무부는 절대 업무량으로 최고 수준인 미국 국무부에 비해서도 업무량이 훨씬 많다. 온갖 외교전술을 비교분석하면서 가능한 민간 중심으로 비군사적 해법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외무부 소속 외교관이나 연구원들이 과로한다는 지적이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외교전략 덕분에 한국 입장에서 적대하는 국가도, 반대로 한국을 적대하는 국가도 세계에 없다시피하다.

역사

국가/지역별 관계

아시아

한일관계

1945년 아시아 태평양 전쟁이 일본제국의 패전으로 마무리되고 일본 본토는 황폐화됐다. 이때 대한국은 일본 내의 여론을 의식해 1947년부터 원조를 해주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일본은 현재의 강대국 반열에 올라서는 디딤돌을 놓을 수 있었다. 이로인해 현재는 아시아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던 경험이 있는 일부 노년층을 제외하면 일본은 대체로 한국을 지지하고 있다. 하지만 반대로 대한국에서는 아직까지도 일본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1] 물론 현재는 서로에 관한 증오가 많이 희석된 편이며, 문화적 교류도 자주 이루어지고 있는 편이다.

일본은 아시아 태평양 전쟁에서 패전하면서 강제로 군대를 무장해체 당했다. 이후 공산세력 저지를 명목으로 미국이 일본에 최소한의 방어병력을 남길것을 요구하며, 한국에게 일본군의 작전권을 넘기는 대신 일본이 스스로 자국을 방어하기 위한 군대를 보유할 수 있도록 했다. 이후 일본은 자국의 영토를 방어하는 자위대를 조직했으며, 한국산 무기를 다수 사들이며, 자국을 방어할 수 있는 힘을 기르고 있다.

경제규모도 큰편인데, 이는 일본이 동아시아 전쟁에서 패전한 이후 군대 해체를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대한국에 원조를 요구하면서 1947년부터 계속 원조를 해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일본도 막강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사실상 자급자족이 가능한 지역강국 반열에 올랐기 때문에 이후 한국은 원조를 중단했으며, 현재도 동아시아에서 대한국과 중국 다음으로 큰 경제규모를 지니며 동아시아 시장경제에 강력한 파급력을 행사하고 있다.

한중관계

우방국에 속하고 집단안보조약 가입국이지만 한국과의 관계는 미묘하다. 중국 국민에게는 청나라 시절부터 야금야금 자신들의 영토를 빼앗아온 침략자라는 인식과 일제와 서구 제국주의로부터 동양의 가치를 지켜낸 구원자라는 인식이 공존하고 있다. 게다가 아직까지도 해결되지 않은 영토분쟁으로 인해 군사적 동맹국이지만 서로 적대시하는 분위기도 없지 않다.

현 한중간의 영토분쟁은 1920년 1월 체결된 빈하이조약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이 조약에는 한국이 황하 이남으로 진출하지 않겠다는 내용이 담겨있었지만 섬서성과 하북성 북부와 구 청나라의 내몽골 지방의 서부에 대한 명확한 경계가 설정되지 않았다. 현재 내몽골 서부지방은 한국이 실효 지배를 하고 있으며 군부대도 여럿 주둔시키고 있으나 내몽골성에는 편입해놓고 있지 않은 상태이다. 이곳 주민들도 속령 주민에 준하는 대우를 할뿐 한국 본토의 시민권은 부여하지 않는 애매한 통치상태를 이어가고 있다.

2020년 4월 7일 한중정상회담에서 이낙연 총리와 원자바오 총통이 국경분쟁의 종지부를 찍기위한 협상에 들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6월 20일, 1세기만에 국경조약의 타결이 이루어졌다. 한국이 영하성 북부 석취산시와 섬서성 북부의 유림시, 산서성의 여양시 일부, 산서성 북부 일부를 중국에게 할양하고 하북성 북부의 연산산맥 모두와 구 청나라의 내몽골 지역을 모두 한국이 갖는 것으로 협의했으며 북천보호령은 존치되었다. 한국은 할양한 지역에 살던 시민들에게 무상으로 한국 국적 취득권을 부여했다. 또한 중국은 7월말 한국의 주재로 중국, 티베트, 동투르키스탄, 인도 2020년 아시아 국경조약을 체결하고 이를 비준하기로 협의했다.

한-동투르키스탄 관계

1930년 동투르키스탄 공화국이 성립되었을때 중국은 이를 저지하려고 했으나 한국 측에서 동투르키스탄을 침공하려면 한국군부터 격파해야 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고, 마중잉과 성스차이가 이끄는 중국 군벌들이 철수하면서 완전히 독립하였다.
따라서 위구르족은 현재까지도 한국을 각별하게 생각하며 국가간 교류도 매우 많은 편이다.

현재 아시아안보조약기구(ASTO) 가입국중 하나로써 한국과 공동 안보체제를 구축하고 있는 동맹국중 하나이다.

한-티베트 관계

본래 티베트는 머나먼 과거부터 독립국이였으나, 몽골 제국이 아시아의 열강으로 부상하면서 몽골에 합병되게 된다. 이후 몽골제국이 원나라를 세웠으나, 그 위상은 얼마가지 못했다. 원은 점점 쇠퇴했고, 티베트는 이때를 틈타서 창첩 걀첸을 중심으로한 국가를 선포한다. 그러나 이후 린풍파 왕조를 몰아내려는 짱파 가문의 반란으로 티베트는 내전에 불꽃에 휩싸이게된다. 내전은 짱파 가문의 승리로 끝났고, 이들은 정권을 잡고 내전 상태였던 국가를 안정화 시켰다. 하지만 이후 청이 세워지면서 다시 타 국가의 통치를 받게되었다. 그러나 실로 놀랍게도 청은 티베트를 수탈하거나 차별하지 않고, 스승으로 모셨다. 다만 캄 지역을 윈난성의 일부로 재편성하고 이 지역의 조세권을 빼앗긴 했다.

이후 청말이 되면서 청은 점점 몰락의 길을 걷게된다. 그리고 티베트에 주변에도 큰 변화들이 생기는데, 북서쪽에서는 러시아 제국이 남하해 왔고, 남쪽에서는 무굴제국을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영국령 인도를 경영하는 인도제국이 자리잡았는데, 러시아와 영국은 척박해서 자원이 없고, 인구가 적어 시장이 작은 티베트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으나, 당시 영국과 러시아. 양국은 그레이트 게임에서 이기기 위하여, 유라시아 전역에서 서로 맞서 대치하고 있었고, 이들의 사이에 있는 티베트는 양 국가의 침략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는데, 청나라는 이들을 지켜줄 능력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이때를 노리고 영국이 반청귀족층과 합세하여 티베트를 청에게서 떼어내려고 하였다. 그렇게 영국은 네팔왕국을 보호령화하고, 티베트를 침공하며, 영국-티베트 전쟁이 발발하게된다. 결과는 당연히 티베트군의 참패였고, 이후 티베트는 외세의 간섭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잃은것만 있는것은 아니였다. 티베트의 지배층들은 자신들의 전통과 불교, 그리고 권력을 지키기위해서는 근대화를 해야한다고 결심하게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였다. 그리고 청은 영국과의 전쟁이 끝난 티베트에 다시한번 상전노릇을 하러 돌아왔다. 이미 영국과의 분쟁에서 청 조정에게 버려졌던 티베트는 원나라부터 청나라까지 지속해왔던 중화제국의 종속국 노릇을 유지해야 하는 지에 대한 의구심을 계속 키워왔고, 티베트가 외세에 굴복하고 나서야 티베트 땅으로 군대를 보낸 청나라가 티베트 자치정부와 티베트인들에게 강압적인 태도로 나오면서 티베트인들의 청나라에 대한 감정이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결국 청나라는 티베트의 수도 라싸와 주요 거점들을 공격해서 함락시켰고, 그대로 독립은 물거품이 되는줄 알았으나, 1912년 신해혁명이 진행되며, 청을 몰아내고 중국에서 새로운 국가를 세운 중화민국이 도래하며, 티베트인들은 이때를 틈타 독립을 선포했다. 물론 중화민국도 티베트를 합병하고는 싶었으나, 중국각지에 군벌들이 난립하며, 티베트를 점령할 겨를이 없었고, 이후 국공내전이 터지자 또한번 생명을 연장하게 된다. 국공내전은 국민당의 승리로 끝났고, 이제 야 티베트를 침공할 여건이 마련된 중국은 1952년 2월 7일 티베트를 침공한다.

하지만 이 전쟁으로 국제사회에 중국의 만행이 알려지자 국제사회는 중국을 강하게 비판하며, 경제제재까지 가하기 시작했다.[2] 결국 1952년 7월 29일 중국군이 철수하게되면서 티베트는 오늘날까지 독립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 중국에 경제제재를 가했던 국가에 대한국도 포함되었다. 그래서인지 아직까지도 티베트와 한국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또한 2020년대 들어 티베트에 한류열풍이 불면서 두 국가 사이의 관계는 더 우호적으로 변하고 있다.

한국-이란 관계

굉장히 친밀하며 이란도 아시아안보조약기구 일원이다.

1951년 모사데크 총리 집권당시 영국 석유회사를 국유화하는 정책을 펼쳐 이란이 고립되었을때 한국이 친선조약을 통해 군사를 파견하여 영국을 압박했고 석유 시설 인력을 파견하고 이란 기술자들을 교육하는등 여러 지원을 했다.
이후 모사데크 총리를 축출하려는 여러 시도를 꺾는데 한국군이 많은 도움을 주었고 현재까지 이란도 한국을 각별하게 생각한다.
다만 한국은 이란의 세속주의자들과 함께 호메이니등 이슬람주의자들을 탄압하여 일부 이슬람교도들에게 반감을 샀다. 하지만 대부분의 이란 국민들은 세속주의와 서구식 민주주의를 받아들이고 이를 지지하였다.

유럽

한러관계

역사적으로 한러전쟁, 아시아 태평양 전쟁 초기 소련의 기습공격등으로 인해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고 198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소련과 국교를 수립하고 공식적 적대관계는 청산하게 되었으나, 여전히 한국 국민의 러시아에 대한 감정은 그닥 좋지 못하다. 다만 러시아 국민들의 한국에 대한 감정은 한국 문화가 퍼지면서 점차 좋아지고 있다. 또 최근에는 대한국의 인스턴트 라면들이 러시아로 퍼지면서 러시아 국민들, 특히 젋은 세대들에게 상당한 인기를 얻고있다.

현재는 과거에 비해서는 상당히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러시아가 사실상 동아시아에 대한 관심도를 낮추고 동유럽 패권 유지에 더 관심을 두고 있어 현재는 서로 겹치는 이권이 별로 없어 직접적 충돌은 거의 없다.

2024년 10월 즈음부터 대한국과 러시아 사이 만주 국경지대에서 러시아 출신의 공산주의 무장단체 200여명이 인근 마을에 들어가 주거칩입, 절도, 살인, 강간등의 범죄행위를 수십차례 저질러 문제가 되고있다.

미주

한미관계

한미관계의 시작은 1863년, 세인트 메리스호 사건으로 용강포를 개항한 것을 계기로 1865년,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며 수교했다. 이후 2차세계대전이 발발했을때 연합군 편에서 유럽전선에 병력을 파병하고, 아시아 태평양 전쟁 때는 미국과 연합해서 일본을 격퇴시키기도 했다. 전후 냉전이 도래하고 공산주의 열풍이 불자 미국은 대한국이 아시아가 공산화되는 것을 막을 든든한 동지라고 생각하며, 베트남전쟁 당시 파병을 요청했으나, 한국측에서는 중립, 비동맹노선 외교를 천명하며, 파병을 거부했다. 이후에도 미국과는 어느정도 거리를 두었고 소련 붕괴후 현재까지도 이 기조가 유지되고 있다.

이런 미국과의 관계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적도 아니고 친구도 아닌 관계’라고 할수 있겠다.

수교국

관련 문서

  1. 사실 아직까지도 한국이 일본에게 느끼는 거부감이 있는것은 맞지만 이것도 일본과 마찬가지로 한때 전장에서 적국으로 일본을 마주했던 한국 노년층들이 느끼는것이 대부분이다.
  2. 이랗게 국제사회에서의 압력이 강했던 이유는 확전에 대한 공포도 한몫했다. 2차세계대전이 끝난지 얼마 안된 시기였으니 모두가 3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질 수 있는 전쟁은 되도록이면 피하려했기 때문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