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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쓰마국
薩摩国
국기 국장
경천애인
敬天愛人
상징
국가 충성 (忠誠)
국조
오키나와딱따구리 (ノグチゲラ)
국화
해동피 (デイゴ)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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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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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으로부터 독립

  • 세이난 전쟁 1877년 2월 22일
  • 일마조약 1879년 3월 6일
  • 일마결별 1933년 3월 6일
  • 일마전쟁 1940년 7월 13일
  • 민주화 1980년 12월 30일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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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슈리특별시
최대 도시
나하직할시
면적
4,648km²
내수면 비율
1%
인문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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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총 인구
2,000,000명
밀도
430명/km2
인종
사쓰마인 45%, 류큐인 40%, 일본인 10%, 한국인 3%, 기타 2%
출산율
1.96명 / 세계 129위
공용어
일본어
지역어
류큐어, 류큐어
공용 문자
가나 문자, 한자
종교
국교
국교 없음(정교분리)
분포
불교 25.5%, 사쓰마 신토 14.0%, 기독교 5.5%, 무종교 55.0%
군대
사쓰마군
하위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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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시
1개 (슈리)
직할시
6개 (오키나와, 우루마, 이시가키, 우라소에, 나고)
군도
5개 (오키나와, 아마미, 오스미, 미야코, 야에야마)
시정촌
35개 (특례시, 중핵시, 시, 정, 촌)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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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단일국가, 입헌군주제, 의원내각제, 양원제
민주주의 지수
167개국 중 18위 완전한 민주주의
국가 원수 (국왕)
시마즈 타다히로
정부
요인
국무총리
하루카와 마키
국회의장
키리기리 쿄코
대법원장
나루호도 류이치
여당
민주입헌당
원내 야당
사회당, 오키나와 진보당, 아마미 동맹당, 신청당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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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체제
자유시장경제
GDP
(PPP)
전체 GDP
$1,319억
1인당 GDP
$65,950
GDP
(명목)
전체 GDP
$879억
1인당 GDP
$43,950
신용 등급
무디스 Aaa
S&P AAA
Fitch AAA
화폐
공식 화폐
사쓰마 엔 (ST¥)
ISO 4217
STY
단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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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연호
서력기원, 연호
시간대
UTC +9
도량형
SI 단위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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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수교현황
대한민국: 1956년
북한: 1993년
UN 가입
1955년
주한대사관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대로 149 광화문 빌딩 5층
ccTLD
.st, .薩摩
국가 코드
357, ST, STM
전화 코드
+87
여행 경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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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여행주의보
전 지역[1]


개요

사쓰마국(薩摩国)은 동북아시아 난세이 제도에 위치한 입헌군주제 국가이다. 한국에서는 보통 사쓰마살마라고 칭하며, 약자는 "마(摩)"라고 보통 칭해진다.

1879년 일마조약으로 성립된 이래 시마즈 가문의 수장이 국왕으로서 재위하며 일본 제국의 천황에게 충성하는 자치령으로 존재하였으나, 1933년 일마결별으로 인해 일본 제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게 된다. 이후 1940년 일마전쟁을 통하여 일본과는 다른 별개의 국가라는 정체성이 자리잡게 되었고, 전후에는 지리적 이점을 활용하여 동북아 경제 허브 국가로 성장하게 되었다.

역사

난세이 전쟁~일마조약 시기

메이지 6년 10월에 정한론 논쟁 끝에 사이고 다카모리, 이타가키 다이스케, 에토 신페이 3명은 공직에서 사퇴해 메이지 신정부를 떠났다. 한편 권력을 잡은 기도 다카요시와 오쿠보 도시미치를 비롯한 내치파는 40만명의 무사들을 대상으로 1876년 폐도령을 선포해 검을 휴대할 수 있고 사람을 죽여도 처벌받지 않는 무사들의 권력을 폐지했다. 오쿠마 시게노부는 화족과 사족에게 봉록을 화폐로 환산해 지급하는 금록공채를 실시하고 가록을 모두 회수한다. 이로써 전체 사족 가운데 4분의 3이 공채를 받고 가록을 몰수당했는데 이는 무사 계급의 완전한 몰락을 의미한다. 결국 길바닥에 주저앉게 된 무사계급을 중심으로 불만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고 이는 세이난 전쟁의 배경이 된다.

1874년 2월, 사가번의 우국당과 정한당 5,000명이 반란을 일으키고 에토 신페이와 시마 요시타케거 사가번을 점령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오사카 진대가 진압에 나섰고 에토 신페이는 사쓰마(가고시마 현)으로 도망쳤다. 조슈번이었던 야마구치 현에서도 요시다 쇼인의 제자인 마에바라 잇세이가 반란을 일으켰으며 이 역시 실패 후 잇세이는 사쓰마로 도망쳤다. 한편 사이고 다카모리는 관직에서 물러나 가고시마로 돌아간 후 사립학교를 운영했다. 사립학교는 사격대와 포대로 구성되었고 옛 사쓰마 번 근위대가 포진해있었다. 사립학교에는 총 600명의 학생들이 있었고 그 중 포대가 200명으로 대부분 과거 번군 포대 출신이었다. 또한 우국당 반란과 조슈 반란에 가담했던 무사들도 사이고의 비호 아래 사쓰마로 모였다.

그러나 오쿠보 도시미치는 이를 안좋게 보고 있었고 결국 구마모토와 하기성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그곳에 보관된 탄약들을 오사카로 운반해오기로 한다. 하지만 사립학교 학생들이 경시청에서 보낸 정탐꾼을 잡아내 그들로부터 메이지 신정부가 사이고 다카모리를 암살하려는 계획이 있음을 알게 되고 1월 29일에 고츠키가와 상류에 있는 소무타 탄약고를 습격해 탄약 3만발을 탈취한다.

2월 14일, 사학교 학교 옆의 연병장에서, 사이고 다카모리에 의해 1번~5번 대대의 열병식이 행해졌다. 다음 날 15일, 60년 만의 폭설이라 불리던 눈보라 속에서 사쓰마군의 1번 대대는 가고시마에서 구마모토 방면으로 먼저 출발하였다. 세이난 전쟁의 시작이었다. 이후 계속해서 대대가 가고시마를 출발하였다. 17일에는 사이고 다카모리 자신도 기리노와 함께 출발하여, 가지키ㆍ히토요시를 지나 구마모토로 향했다. 이를 배웅하러 간 가쓰라 히사타케는 빈약한 치중대에 대한 걱정과 사이고에 대한 우의에서 서둘러 종군하여, 사쓰마 반군의 대소 마바리 본부장(치중대의 총책임자)가 되었다. 같은 날, 독립부대도 가지키를 출발하였다. 한편 가고시마에서 귀경한 가와무라 중장에게서 사쓰마 반란군군의 문죄 출병 정보를 얻은 정부는 2월 19일, 가고시마 현 반역자 토벌의 조서를 얻어, 정식으로 사쓰마 반란군에 대해 출병하기로 결정되었다.

하지만 사이고 다카모리의 군대가 50일 동안이나 구마모토를 포위했음에도 구마모토 성은 함락되지 않앗고 이는 사이고 다카모리의 군대의 힘을 축소시켰다. 그 사이 신정부군은 3월에 가고시마를 점령해 현청을 장악하고 후방을 공격하려 했다. 이렇게 더 이상 승산이 없어지자 에토 신페이는 사이고 다카모리에게 일본 제국의 속령인 류큐 왕국으로 가서 후일을 도모하자고 했다.

8월, 노베오카 북부의 나가이무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사쓰마 반란군이 패배하자 사이고 다카모리는 포위되기 전에 탈출하기로 결심했고 병력을 항구로 집결시켰다. 신정부군은 이들이 무슨 꿍꿍이가 있음을 깨닫고 빠르게 추격해왔지만 사이고 다카모리의 군대는 이미 류큐 왕국으로 탈출한 뒤었다. 류큐 국왕은 신정부의 압력을 받아 사이고 반란 무리를 쫓아내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거침없이 진격해오는 사쓰마 반란군에게 밀려 항복했다. 에토 신페이와 이타가키 다이스케는 사쓰마 국의 수립을 부르짖었지만 여전히 천황에 대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던 사이고 다카모리는 이를 거부했다.

1878년부터 메이지 신정부와 사쓰마 반란군 사이에 협상이 벌어졌다. 당시 메이지 신정부는 어떻게든 끝까지 추격해서 반란군을 섬멸하고 싶었지만 가고시마 지방의 사이고에 대한 지지와 무사계급의 불만을 고려해 타협을 시도했다. 이 타협으로 시마즈 가를 국왕으로 하는 사쓰마 국은 일본 제국의 자치령이 되기로 했다. 조건은 다음과 같다.

1. 오키나와는 사쓰마 국이라는 이름으로 일본 제국의 자치령이 된다.
2. 사쓰마 국 관료들은 메이지 천황 폐하에게 충성을 맹세할 것. 또한 천황 폐하를 대리하는 총독을 사쓰마 국에 둔다.
3. 사쓰마 국은 일부 항구를 일본 제국 해군에게 개방한다.
4. 사쓰마 국은 5만명 이상의 군대를 보유하는 것을 금지한다.
5. 일본 제국은 사쓰마 국이 자국내 사족들에게 특권을 부여하는 것에 대해 간섭하지 않는다.
6. 사쓰마 국이 타국과 외교 관계를 수립할 때는 일본 제국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사이고 다카모리 역시 천황을 배신할 조건이 없었기에 이 조건을 받아들였다. 이로써 1879년 3월, 일본-사쓰마 조약이 체결되었고 같은 해 류큐 왕국이 무너지고 사쓰마 국이 세워졌다. 이로써 시마즈 가문을 국왕으로 하는 사쓰마 국이 세워졌으며 한동안 사쓰마 국은 일본제국의 자치령 신분에 만족한다.

근대화 시기

사쓰마 국은 사이고 다카모리 섭정의 주도 하에 1884년 영국 헌법을 토대로 헌법을 제정하였다. 또 서구식 복장의 대중화를 추진하고 권장하였으며 입헌군주제를 본격적으로 실시하여 의회의 권위를 높이고 일본 본토보다 빨리 보통선거권을 부여하다. 이타가키 다이스케 주도로 시작된 자유민권운동은 1880년대 중반에 결실을 맺어 정당 정치도 실현되었다. 군사적 개혁도 이뤄졌다. 러시아를 견제할 기지로 사쓰마 국을 활용하기로 한 영국의 지원 아래 사쓰마 국 군대는 해군 중심으로 키웠다. 1880년에는 최초로 자체 제작한 대형군함 우라사호가 생산되었고 얼마 후엔 더욱 발전한 철골철갑함을 생산했다. 다만 이 시기에도 무사계급의 특권과 군대 제한으로 인해 징병제는 실시되지 않았고 군인들은 대부분 옛 무사계급들이 구성했다.

1882년, 사쓰마 최초의 철도가 개통되었고 나카에 조민의 의견을 받아 설립된 공부성은 식산흥업의 중심 부서가 되었다. 제철소와 조선소는 선박 외에도 농산품 가공 기계도 생산하며 민생 발전에도 총력을 기울였고 영국으로부터 광산기계를 도입하고 기술자들을 대거 영입해 기술 혁신을 실현했다. 우편 산업은 곧 민영화 되었고 1888년 이후로는 전화가 민간에도 유통되었다. 교육제도도 근대화 되었다. 에토 신페이가 개설한 학제 조사위원회가 만든 규정에 따라 프랑스식 교육제도를 본떠 전국을 8개 대학구로 구분하고 각 대학구마다 1개 대학을 설립했다. 각 대학구 산하에 32개 중학구를 두고 전국에 총 256개의 중학구를 두어 각 구마다 1개의 중학교를 세웠다. 이러한 근대 교육은 오키나와 주민들로까지 확대되었다.

본토 일본인들도 이 시기에 사쓰마국으로 많이 건너갔다. 이는 사쓰마국이 급격한 근대화로 일자리가 늘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며 특히 부라쿠민들이 많이 건너갔다. 1883년 이전까지 일본제국은 사쓰마국으로어 이주를 엄격히 금했지만 밀항 시도는 많았고 결국 풀어줬다. 그렇게 해서 오키나와 섬에는 원주민 뿐만 아니라 일본 본토 출신 인구도 많이 늘었는데 사쓰마국 정부는 그중에서도 가고시마 현 출신들을 우대했다.

1894년 청일전쟁이 벌어졌을 사쓰마 국은 일본 제국의 요청을 받아 황해해전에 해군을 파견했고 대만 점령 과정에서 육전대 2개 연대를 파견했다. 덕분에 청일전쟁의 승전국이 된 사쓰마도 청나라로부터 배상금을 조금이나마 받아냈으며 러일전쟁 때는 무리해서까지 아예 더 대규모 병력을 파견했다. 그러나 러일전쟁은 별 다른 보상을 얻어내지 못했다. 이로인해 사쓰마의 부채는 늘어갔고 반정부 열기가 타올랐다. 결국 그렇게 되면서 원로였던 사이고 다카모리가 드디어 정계에서 퇴임했으며 이로써 사쓰마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근대 시기

1910년대 이후, 마지막 원로인 에토 신페이마저 정계에서 물러났다. 그 이후 시로가네 미유키 내각이 세워지며 마침내 원로 체제는 끝나고 완전한 의회정치로 나아갔다. 의회는 보수적인 입헌당과 자유주의적인 민주당, 신 세력인 사회당 3당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시로가네 미유키 내각은 아시아 최초로 여성에게도 투표권을 부여해줬다. 또 아시아 역사상 최초의 여성 내각 부총리인 시노미야 카구야도 떴다. 1920년대 중반에는 이치죠 라쿠 내각이 수립되었다. 이치죠 라쿠는 최초의 오키나와 섬 출신 총리로서 사쓰마 출신들 뿐 아니라 오키나와 주민들에게도 보통선거권을 부여해줬다. 당연히 사쓰마계가 중심이 된 입헌당은 반대했지만 이치죠 라쿠 내각은 강행했고 결국 이로인해 전국에서 폭동이 발생했다. 거기에다가 무사계급의 특권을 철폐하고 국민개병제를 실시했다.

하지만 이치죠 라쿠 내각은 1927년 찾아온 쇼와 공황을 이겨내지 못하고 무너졌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카미조 토우마 내각이 수립되었다. 카미조 총리는 대표적인 반제국주의자로서 일본제국의 팽창 행보와 군부의 폭주 움직임에 불만을 품고 있었고 1933년 일본-사쓰마 조약을 연장하지 않기로 함과 동시에 독립을 선언했다. 일본 제국은 반발했으나 이 일로 카미조 내각의 지지율은 매우 높아졌다.

카미조 토우마 내각은 기존 자유방임주의적 정책을 버리고 케인스주의적 해법을 도입했다. 국가 주도로 토목 건축 사업을 대대적으로 수행해 비숙련직 일자리들을 대거 양성했고 이 김에 인프라도 확충했다. 또한 교육 제도를 개편하여 오키나와인들이 사쓰마라는 정체성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노력했다. 일본이 전방위적으로 압박해오는 상황 속에서 사쓰마계 주민들과 오키나와계 주민들은 하나로 뭉쳤다. 거기에다가 대놓고 중일전쟁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했다.

일마전쟁 시기

1940년 7월, 일본 제국군은 야마모토 이소로쿠 장군이 이끄는 연합함대가 사쓰마국 함대를 기습 공격했다. 그동안 건함경쟁 시대를 통해 드레드노트급 전함들을 대거 키워오고 호쇼와 류조 등 해군 항공전력을 키워오며 새로운 전술들을 발달시켜온 일본 제국군에 비해 사쓰마 국 함대는 러일전쟁 당시 수준에 머무는 순양함 중심 함대가 전부였다. 결국 격차는 일방적이었고 사쓰마국 함대는 일본제국군에게 무차별적으로 깨졌다.

이어서 1940년 7월 13일, 일본 제국은 공식적으로 사쓰마국 합병을 선언했다. 하지만 카미조 토우마 총리는 필리핀으로 망명해 임시정부를 세우며 끝까지 저항할 것임을 선언했고 사쓰마계 정당인 입헌당도 일본제국의 폭주에 협력을 거부했다. 그리하여 지하조직들을 중심으로 대규모 테러가 벌어졌고 일부는 중화민국으로 건너가 국부군에 합류하기도 했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벌어지자 일본제국군은 오키나와를 군사적 거점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이에 주민들은 기지 건설 반대 운동을 벌이며 저항했고 1만명 이상의 주민들이 학살당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필리핀도 일본에 점령당함에 따라 카미조 토우마 총리는 미국으로 건너가 끝까지 저항할 것임을 천명했고 오키나와 주민들의 항쟁도 계속되었다. 미군은 상륙 당일인 1945년 4월 1일 오전에 주력 4개 사단이 오키나와 가네데만으로 순조롭게 상륙하였다. 미군은 일본군의 아무 저항 없이 광대한 오키나와 북부 지역을 장악했고 상륙 며칠 동안 일본군은 나타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일본군들은 주로 남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4윌 5일부터 미군이 방심한 사이에 슈리성을 거점으로 우시지마 장군 휘하 일본군의 무수한 동굴 진지들은 미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미군은 수류탄과 화염 방사기로 동굴 진지를 하나하나 제거했는데, 이로 인해 많은 시간이 걸렸다. 4월 7일에는 7척의 남은 연합함대와 야마토 전함이 미군 급강하폭격기의 공격으로 격침되었다. 일본군은 미군이 방어선을 뚫을 때까지 싸우고, 뚫으면 다음 방어선으로 후퇴했다. 즉 미군은 하나씩 점령해야 했다. 미국은 남쪽을 점령하기가 너무 어려워지자 섬의 남쪽에도 상륙을 했다.격렬한 전투 끝에 미국이 슈리성을 장악했고, 일본군은 병력의 절반을 잃었다. 슈리성을 장악한 미군은 계속 일본군을 몰아붙였고 마침내 6월 23일 오키나와 주둔 일본군 사령관 우시지마 미쓰루 중장이 할복자살함으로써 전투는 막을 내렸다. 미국에 머무르던 망명정부는 복귀했으며 1945년 8월 치러진 총선거로 민주당의 이츠카 시도 내각이 수립했다.

현대 시기

냉전이 시작됨에 따라 이츠카 시도 내각은 좌익 세력들을 탄압했다. 그러자 사회당 내 강경파들은 탈당하여 공산당을 결성했고 이들은 파업을 일삼으며 미군에게 저항했다. 하지만 파업으로는 도저히 저항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은 무기고를 털고 관청에 TNT를 설치하는 등 무장투쟁 노선으로 저항했다. 그러자 이츠카 시도 내각은 좌익 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경자유전의 원칙대로 유상매수 유상분배식 농지개혁을 하여 구시대적인 지주-소작농 관계를 폐지하고 본격적으로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의 기틀을 만든 것을 시작으로, 통화 개혁, 소비재 위주의 경공업 투자 확대, 소득세 인하, 그리고 미군에 의해 시행되었던 고정 가격제와 생산 통제 정책도 폐지하였다.

하지만 농촌이라는 지지 기반을 잃은 공산 세력은 갈 수록 더 과격해져갔고 사회는 불안정해져갔다. 어쩔 수 없이 이츠카 시도 내각은 공산당과 협상을 시도했는데 미군은 이를 아니꼽게 봤다. 왜냐하면 당시에 한국전쟁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 거기에다가 이츠카 시도의 뒤를 이은 칸다 소라타 총리도 소련과의 외교 관계를 맺으려는 등 미국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했기에 거슬렸다.

결국 1959년 10월, 야가미 라이토 장군이 이끄는 부대가 쿠데타를 시도했다. 칸다 소라타 총리는 곧바로 축출되었고 모든 정당은 해산되었다. 1960년 출범한 야가미 라이토 비상 계엄정부는 좌파로 의심되는 자들은 모조리 체포하였고 공산 반군에 대해 미군의 지원을 받아 강경 대응으로 완전히 섬멸했다. 그런가 하면 야가미 라이토 정권은 여러 주요 도시들의 고속도로 건설이 시작했고, 정부에서는 항만과 철도 부설 작업 계획을 검토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이북 지역 공업지대 추가 건설 사업이 마무리되어 갈 때쯤에는 동남권 지역을 중화학공업 지대로 개발하는 계획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으나 일단 방침은 중화학공업을 본격적으로 발전시키기 전에 수출 주도 정책을 실시한다는 것이다.

또한, 사쓰마국은 1962년에 효율성을 위해 거점 개발 방식을 채택하였다. 거점 개발을 할 지역으로 채택된 곳은 대규모 항만이 있거나 공장이 많은 일본과 가까운 지역들이었다. 이는 주요 무역 루트가 일본과 태평양이고 거점 개발을 위해서는 대규모 항만이나 공장 지대가 필요했기 때문에 한 결정이었다. 시멘트 공장도 석회석이 많은 지역을 중심으로 건설하기 시작했다. 또한, 기존의 부족한 민간 에너지 연료에 사용할 지원으로 석탄을 활용하는 방식을 채택해서 광산 개발에 더 적극 투자했고 광산에 채굴한 자원의 수송이 안정적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각 지역을 잇는 산업철도를 건설하였다. 또한 야가미 라이토 정권은 내수 위주가 아닌 수출과 무역 주도 성장 전략을 내세우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야가미 정부 시기에는 관세 인하, 주식 매입 규제 완화, 수수료 인하 등의 개방 체제를 만들어서 해외 자본 유치를 성공적으로 이끌어냄과 동시에 지리적 위치를 잘 활용하여 일본 및 미국과의 중계무역을 통해 많은 돈을 벌어들였다.

1960년대부터는 본격적으로 중공업 산업 육성에도 나섰다. 야가미 라이토 정권은 제철 산업 지대를 세웠고, 중공업에 투자하는 기업들에게 감세 등의 혜택을 줬다. 또한, 중공업 발전 과정에도 여러 공기업들을 세우며 국가 주도형 발전 방향으로 나아갔고, 외교적으로는 친미, 친일을 표방하는 친서방 외교를 전개해서 일본과 미국으로부터 차관을 얻어내고 경제적인 교류를 확대해나갔다. 1960년대부터 사쓰마국은 기업경쟁력을 증진하고 내수를 강화하기 위해서 국가중심의 기업투자정책을 실시해야 했다. 그러면서 중화학공업 발전을 추진했다.

기업 정책에 있어서는 대기업으로의 자본 집중을 통해 다수를 차지하던 중소기업이 경제 부문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줄이며 국가경쟁력을 갖춰가고자 했다. 그래서 대기업을 위해 저금리, 소득세 대폭 감면 등 파격적인 대우와 함께 ‘노동자임시특례법’, ‘기업임시특례법’과 같은 노동운동을 규제하는 것과 저임금 일자리 정책이 시행되었다. 본격적인 대기업 중심 경제개발계획 덕분에 중소기업이 차지하던 GDP비율은 40%를 마지막으로 점점 감소하기 시작했으며, 1970~80년대까지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서로 협력하며 안정적인 분업체계를 수행했었다. 다만 아무래도 중소기업쪽의 반발이 아예 없을 수는 없었는지라 1970년대부터는 중소기업쪽에도 혜택을 줘서 불만을 억제하기도 했다. 외교 안보적으로는 바로 앞에 있는 중국과의 대립이 한동안 지속되었다. 해상 지대에서는 여러차례 크고 작은 교전이 있었고, 국내에는 중국의 간첩들이 체포되는 일들도 많았다. 그러다가 닉슨 독트린 시기에 미중대화가 시작되면서 어쩔 수 없이 사쓰마국도 중국과의 대화에 나섰고 1979년에 대만과 외교 관계를 끊고 수교도 맺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시기에 정부는 정부지출 삭감을 통해 가능한 균형예산 확보하였으며 통화 및 여신의 강력 통제, 공정환율의 조기 결정, 양곡수집 및 배급정책 계속, 외화 흭득을 위한 수출산업 진흥, 외국무역상의 한민 내 자유 활동 및 외국자본 도입 허용, 국공유기업이나 정부재산의 운영효율의 극대화 또는 민간에의 불하 등의 성과를 이뤄내며 중공업과 경제가 빠른 속도로 발전하였다.

1960년대 말에는 인프라 확충에 많이 힘썼으며 시멘트공장, 비료공장 등을 연달아 짓는 등 수입대체를 가속화하여 과잉생산 분을 농촌에 투하하는 것을 계기로 농촌재건운동이 시작되었다. 냉전이 격화될 시기에 극동 지역의 소련 해군의 군사력이 크게 증강하고 중소국경분쟁이 터지며 3차대전 가능성까지 거론되자 이에 위협을 느껴서 구상중이던 자주국방 정책을 포기하는 대신 미국, 일본과의 더 적극적으로 협력을 추진하였다. 그래서 1960년대에 미국과의 동맹을 연장하였으며 일본과의 조약을 통해 차관을 받아내는데 성공하였다. 특히나 일본과의 외교 관계를 회복하면서 받은 차관과 일본 기업들의 기술 지원은 경제 성장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거기에 베트남 전쟁에 병력을 파견해 차관, 기술 원조, 남베트남 내 건설사업 참여를 통한 건설 기술 획득, 고속도로 건설 사업에 대한 지원금 확보 등을 모두 이뤄냈다.

전쟁의 막바지에 이르렀던 71년도 수출액이 참전하기 전에 비해 28배, 고도성장의 경제기반을 구축한 이후 77년도의 수출액이 5년 전에 비해 7.1배의 성장을 기록하기도 했다. 남베트남에서 철수한 사쓰마의 건설업체들은 실무경험을 바탕으로 중동시장에 진출하여 여러 건설 사업들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내기도 했으며, 이것을 통해 막대한 자금이 축적된다. 그리고 훗날 이 자금은 경제성장의 원동력중 하나가 된다. 하지만 1970년대 말, 정부에서 적극 투자했던 중화학공업이 중복 투자 등으로 문제점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거기에 물가의 급상승, 부동산 투기 과열이 심해졌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사쓰마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석유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한데, 그때 마침 2차 오일쇼크가 발생하였고 타격을 당연히 피해갈 수 없었다.

1차 오일쇼크 때와는 다르게 야가미 정부는 내놓은 대책마다 전부 실패하며 경제 문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였다. 당연히 국민들의 생활에도 커다란 지장이 생겼고, 정권의 통제를 피해 숨죽이고 있던 반정부운동가들이 다시 시위를 주도하며 투쟁을 일으켰다. 그런 상황 속에서 1978년 야가미 라이토 총리는 정치적 공세 때문에 사태에 책임을 지고 물러나며 정당을 다시 합법화헜고 이어서 국무총리였던 미카미 테루가 대통령직을 맡았으나 상황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여 결국 반정부운동이 더 커지고 말았다.

거기에다가 군인 출신인 미카미 테루는 경제와 사회 등 정책 분야에 있어서는 무능한 모습들을 보여왔다. 그럴 수록 민생은 날이 갈 수록 악화되었다. 이를 본 야당은 정부를 비난하고 나섰고, 광장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는데 그 와중에 토오대학 학생회장 류우가 히데키가 경찰에게 구타를 당해 살해되었다. 사태가 심각해지면서 정부 내부에서도 비판이 일었고 결국 버티다 못한 미카미 테루는 사퇴를 결정했고, 1980년 12월에 대선을 결정했다. 이로써 권위주의 체제는 끝났다. 보수정당인 입헌당에서는 사쓰마계 관료들과 오키나와계지만 온건파인 자들이 당권을 장악하였고, 이에 미카미 테루를 따르는 강경파들이 탈당하여 사쓰마 신당을 창당했다. 오키나와계 지식인들과 사쓰마계 민주계파가 중심이 된 제1야당인 민주당에서는 민족이 아닌 이념으로 좌파와 우파로 나뉘어져서 대립이 벌어졌고, 결국 좌파들은 탈당해 사회당에 합류했다.

이러한 일들로 온건파와 한국계 관료 출신들만 남은 입헌당과 우파들만 남은 통일민주당은 선거에서 질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고, 마침내 합당으로 민주입헌당을 창당했다. 민주입헌당은 치열한 경선 끝에 변호사 출신으로 이름이 유명한 인물인 코미카도 켄스케를 당 대표로 선출했다. 본선은 2강 1중약 체제, 즉 민주입헌당과 사회당의 양당 구도 속에서 사쓰마 신당까지 가담한 3파전 형국에 빠져들었다. 선거 정국 초반에 사쓰마 신당은 기존 정부 지지층의 높은 지지를 얻었으나, 사회당 집권만은 막아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면서 민주입헌당이 이겼고 마침내 코미카도 켄스케가 총리로 선출되었다.

1981년에 들어선 코미카도 켄스케는 민족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는 헌법 조항을 만들며, 사쓰마국은 일본도 오키나와도 아닌 다민족 국가라는 정체성을 재확립했다. 동시에 두발 규제 폐지, 교복 자율화, 통금 해제, 오권분립 체제를 삼권분립으로 개편 등의 정책들을 실시해서 많은 호응을 얻었다. 코미카도 켄스케 내각은 한편으로는 기존의 경제 정책 방향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 경제장관으로 시부사와 에이모치를 등용하였다. 또한, 코미카도 켄스케 총리는 탁월한 경제 관료들이 자신들의 능력을 제대로 쓸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해주기도 했다.

시부사와 에이모치를 비롯 뛰어난 경제 관료들을 등용한 코미카도 켄스케 내각은 임기가 시작됨과 동시에 물가 안정에 온 힘을 쏟았다. 그 덕분에, 1980년대 초반에는 물가상승률이 두 자릿수를 기록할 만큼 심각했지만, 1982년에는 5%대로 내려가면서 크게 성공했다. 그리고 낮은 물가상승률은 금융자산의 안정화를 가져와서 민간의 저축 증대 효과가 나타났고, 저축의 증대로 투자재원이 늘어나서 경제 성장률은 더욱 더 높아졌다. 또한, 시부사와 에이모치는 환률과 금리를 시장에 맡기면서 인플레이션을 잡았다.

코미카도 켄스케 내각의 경제정책은 시장에 대한 정부의 간섭을 기존보다 줄였고 이를 토대로 코미카도 켄스케 내각은 성장, 물가안정, 국제수지 개선이라는 3대 목표를 모두 달성하였으며, 개인의 수익상승률도 높아졌고 중산층도 크게 늘었다. 이를 두고 '3저 호황'이라고 부르며, 그 당시에는 지니계수와 상대빈곤이 좋았던 시기로 빈부격차가 줄어들기도 했다. 이러한 호황기 덕분에 1980~1990년대 사쓰마국에는 누구나 노력하면 취업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구축된 견실한 경제 구조와 나름 준수한 사회안전망 시스템 덕분에 여당인 민주입헌당은 일당우위 구도를 점하였으며, 1980년대 동안에 모든 선거에서 승리를 거뒀다. 이후로도 민주입헌당은 오늘날까지 정국을 주도하는 정당으로 자리잡아있다.

코미카도 켄스케 내각 이후 사쓰마 국은 토미오카 기유, 이구로 오바나이, 렌코쿠 쿄주로 등을 거쳐 1996년 카마도 탄지로 내각이 세워졌다. 그동안 일본 경제는 버블이 붕괴되고 정치권은 민주입헌당의 파벌 다툼으로 혼란스러웠지만 아직까지 위기는 오지 않았다. 하지만 동아시아에 들이닥친 대규모 경제위기는 사쓰마국이 피해가지 못했다. 1997년 경제 위기를 겪으며 사쓰마국은 기업들이 줄줄이 도산하였고 은행들까지도 문닫기 시작했다. 정부에서는 IMF 권고대로 신자유주의적인 경제 해법을 도입해 해결하려고 했으나 자신들의 지위가 약화될 것을 두려워 한 민주입헌당 내 관료파들의 압력에 의해 카마도 탄지로 내각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이때 한편 사회당에서는 햐쿠야 유이치로라는 정치가가 등장했다. 그는 전통적인 사회민주주의가 아닌 제3의 길을 따르는 자로서 경제는 개방, 사회는 진보를 주장했다. 그동안 사회당 내부에서도 전통적인 좌파 이념으로는 민주입헌당을 이길 수 없다는 말들이 많이 나왔기에 햐쿠야 유이치로가 내세운 비전은 많은 공감을 얻을 수 있었다.

1998년, 민의원(하원)이 해산되어 총선이 치러졌다. 여기서 햐쿠야 유이치로가 이끄는 사회당이 카마도 탄지로가 이끄는 민주입헌당을 2배 차이로 누르고 제1당 자리에 올랐다. 햐쿠야 유이치로 내각은 노동시장의 유연화, 사회보장제도 개혁, 기업에 대한 규제 완화 등의 내용을 담은 '경제개혁 2000'을 발표, 시행에 옮겼다. 기존의 경직되어 있던 노동시장을 유연화했다. 해고제한의 적용 범위를 기존의 5인 이상 고용기업에서 10인 이상 고용기업으로 조정했다. 이전보다는 기업들에게 자율권을 좀 더 보장해준 것이었다. 동시에 복지 제도도 대대적으로 개혁을 실시했다. 기존의 32개월이었던 실업수당 지급 기간을 12개월까지 단축하여 실업자들이 다시 일자리를 구하는데 나서도록 적극 유도했다. 저출산 고령화 시대에 대한 대비 정책도 철저하게 시행했다. 연금수령 시기를 67세까지 높이고 실업수당과 사회보장급여 제도를 통합했다. 환자들의 입원 시 1인당 부담금액을 상향조정하고 개인병원의 경우도 환자부담금을 높여 보험가입자의 도덕적 해이를 방지하는 방안까지 마련했다. 최고소득세율 정책은 42%로 낮춰서 소비에 돈이 많이 쓰이는 것을 유도했다.

경제활성화 대책으로는 단순 직종에 대한 마이스터 자격증 제도를 철폐하며 수공업법 개정을 적극 추진했다. 거기다가 복잡했던 1인 자영업자의 창업절차를 단순하게 개편하여 진입장벽을 낮추는 등 각종 불필요한 규제를 철폐하여 전통적 성장기반인 중소기업을 활성화하는 것까지 추진하였다. 취업이나 기술혁신 관련 교육에도 신경써서 우수한 노동력을 육성하는 것까지 이뤘다. 국내적으로는 복지 체계를 생산적/선별적 복지 위주로 구축했다. 다만 장애인에 대한 복지는 많이 늘었고 그래서 햐쿠야 내각의 이러한 정책 덕분에 오늘날 사쓰마는 세계에서 수준높기로 유명한 장애인 복지국가다. 또 대학등록금도 인하되었으며 중소기업 지원 정책으로 서서히 대기업 위주 경제에 변화를 줬다.

외교적으로는 이라크 전쟁에 사쓰마 방위군을 파견하였고 1885년 센카쿠 열도가 사쓰마국 영토에 편입된 것을 근거로 영유권을 적극 주장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당내 좌파들은 반발하였고 햐쿠야 유이치로 총리는 2004년 사임했다. 하지만 그 이후 집권한 사회당 총리들은 우왕자왕 하며 부동산 정책을 망쳤고 그 덕에 2008년 다시 정권은 민주입헌당에게 넘어갔다

지리

사쓰마는 수도인 슈리특별시의 반경 1,000킬로미터 내에는 타이베이, 후쿠오카, 상하이, 푸저우가 있고 1,500킬로미터 내에는 오사카, 서울, 마닐라, 홍콩 등이 있어 동북아시아·동남아시아·일본과의 중간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사쓰마의 국토는 100개의 유인도와 수많은 무인도로 이루어져 있다. 0.01제곱킬로미터 이상의 면적을 가진 섬은 200개이다. 최동단으로부터 최서단까지의 거리는 약 1,000킬로미터이며 최북단에서 최남단까지의 거리는 약 1,000킬로미터이다. 낙도가 많으며 낙도의 의료 환경은 인력 부족과 경제적 이유로 인해 부족한 실정이며 병원이 없이 진료소만 있는 섬도 많다. 그 때문에 낙도에서 치료가 불가능한 응급 환자나 중병에 걸린 환자의 공수는 육군이나 해상보안청이 시행한다.

연간 강수량은 많지만 장마와 태풍에 의한 강우가 많고 매년 편차가 크며 큰 하천이 없이 곧바로 바다로 유입되는 양이 많기 때문에 만성적인 물 부족에 시달렸다. 특히 1950년대부터 인구가 급증함에 따라 물 부족은 더욱 심화되었다. 단수가 일상화되었으며 1956년부터 1957년 사이의 최악의 갈수기에는 326일 단수라는 기록을 세운 바 있다. 그 때문에 지붕 위에 물탱크를 설치한 가정이 많다. 그러나 전국적인 수도 사업이 진행됨에 따라 단수가 되는 일은 거의 사라졌다.

야에야마 제도는 열대 기후로 열대 우림 기후에 속하며 그 이외의 지역은 온대 기후에 속한다. 사쓰마 각 지방 모두 고온 다습하고 연 강수량은 2,000밀리미터 이상이며 연평균 기온은 약 22도이다. 사쓰마는 동아시아에서 생겨난 많은 태풍이 접근한다. 1977년 2월 17일에 구메 섬의 측후소에서 처음으로 눈이 관측되었다[2]. 이 기록은 사쓰마 기상청이 공식으로 발표한 강설 기록인 것과 동시에 사쓰마의 기상 관측사상 최초의 적설 기록이다. 또한 아열대에서 생물에게 매우 적합한 기후를 타고 나 귀중한 동식물이 많다. 이리오모테섬과 이시가키섬의 일부가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서표살쾡이 등의 귀중한 생물이 많이 있다.

정치

국왕


사쓰마국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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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 제2대 제3대 제4대 제5대
타다요시
(1879~1897)
타다시게
(1897~1968)
타다히데
(1968~1996)
노부히사
(1996~2018)
타다히로
(2018~)
시마즈 당주 · 미군정 · 국무총리 · 류큐 공작가
시마즈에는 어리석은 군주가 없다
일본의 속담[3]

사쓰마국은 시마즈 가문이 왕가를 구성하고 있다. 시마즈 가문은 원래 일본 규슈의 사쓰마번을 지배하고 있던 영주 가문 이였지만 제29대 당주인 타다요시가 천거한 이후 국왕으로 옹립되어 1879년 왕가로 격상되었다. 이전의 1~28대 당주, 그리고 타다요시의 아버지 히사미쓰는 모두 국왕으로 추존되었으나, 편의상 제29대 당주 타다요시부터를 1대 국왕으로 지칭한다. 1879년부터 1933년까지는 일본 제국에 속한 왕공가였으나, 1933년 일마결별 이후로 일본 황실과의 관계를 단절하여 독자적인 왕가로 자리잡고 있다.

타다요시의 재위기간 까지는 국왕(과 그 섭정)의 정치적 권한이 강하였으나, 타다시게의 재위기간 동안 입헌군주제가 정착하여 현재 국왕은 정치적 실권이 크게 없다. 그러나 명목상의 권한 뿐이긴 하나 총리 임면권과 민의원 해산권, 정치 중재 권한이 존재하는 데다 권위가 높아 사쓰마국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사쓰마국 국왕의 왕궁은 슈리성이며, 왕족들은 모두 슈리성에 거주하고 있다. 원래는 류큐왕국 국왕이 주거하였으나 1879년 일마조약 이후 사쓰마국 국왕이 주거하게 되었다.

1879년 이후 류큐 왕가인 쇼씨 가문은 일본과 사쓰마국의 공작 작위에 봉해졌고 류큐 공작가로 명명되었으나, 1933년 일마결별 이후로는 일본의 공작 작위는 소멸되고 사쓰마국의 공작 작위만 남아있다.[4] 시마즈 왕가는 정통성과 현지 민심을 확보하기 위하여 쇼씨 가문을 우대하는 모습을 보였고, 당주를 왕실 고문으로 임명하거나 서로 통혼하는 등 교류를 지속하였다. 현재 쇼씨 가문의 수장인 쇼 마모루는 공작 작위를 보유하고 있으며 사쓰마왕립박물관 관장직을 역임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일부 극단적인 류큐 극단주의자들은 쇼씨 가문으로 왕정복고를 이뤄 류큐 왕국으로의 복귀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국무총리

의회

행정 구역

사쓰마국은 군도(群島, Gunto / Subdivisions)를 최상위 행정구역으로 두고 있다. 5개 군도가 있으며 오키나와 군도, 아마미 군도, 오스미 군도, 미야코 군도, 야에야마 군도가 있다. 산하에 광역자치단체인 특별시, 직할시와 기초자치단체인 시, 정, 촌으로 구성되어있다. 시의 일부는 행정상의 특례시, 중핵시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특별시는 수도인 슈리가 지정되어 있고 직할시는 나하, 오키나와, 우루마, 이시가키, 우라소에, 나고 총 6개의 도시가 지정되어 있다.

오키나와 군도는 사쓰마국의 본토라고 할 수 있는 지역으로 거의 사쓰마국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지역이다. 사쓰마국에 있어 오키나와 본도의 위상은 일본의 혼슈, 인도네시아의 자바에 맞먹는다. 정치, 경제, 문화 전반이 오키나와 본도에서 이뤄지고 있다. 수도이자 역사적인 도시 슈리, 제1의 항구이자 슈리의 외항 나하가 오키나와에 위치해 있다. 다이토 제도도 오키나와 군도의 관할 하에 있다.

아마미 군도는 오키나와 군도와 달리 사츠마 번의 시절 직접적인 지배를 받아왔기에 상대적으로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본도와는 이질적인 분위기가 강한 편이다. 오스미 군도는 최북단 지역으로 일본과의 영토 분쟁 지역이다. 산하에 토카라 열도를 포함하고 있으며, 토카라 열도는 풍부한 자연과 독자적인 문화, 천연온천이 많아 낚시꾼, 관광객이 많이 찾아온다.

미야코 군도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기록한 아리랑비가 세워진 것 외엔 특기사항이 없다. 인구도 적어서 자체적인 군도를 유지할 필요가 있냐는 주장도 제기되는 상황인지라 장기적으로는 인근 야에야마 군도와 통합하여 사키시마 군도를 출범할 계획이다.

야에야마 군도는 사쓰마국의 최남단 지역으로 대만의 지척에 위치해 있다. 외진 지역인 만큼 개발이 덜되어 2차 대전의 참화를 피할 수 있었다. 야에야마 군도는 사쓰마국 속에서도 류큐 문화가 잘 보존되어 있는 지역이다. 바나나 산지로 유명한 이시가키 섬이 군도의 중심지로 대부분의 인구가 집중되어 있다. 그외 사쓰마국의 최서단이자 수중유적으로 유명한 요나구니 섬, 살쾡이로 유명한 군도 내에서 가장 큰 이리오모테 섬이 속해 있다. 이리오모테삵은 사쓰마국 전체를 상징할 정도로 유명한 동물로 나하 와일드캣의 마스코트로도 알려져 있다.

센카쿠 열도의 경우 야에야마 군도의 관할하에 있다. 일본 및 중국과의 영토분쟁 지역이다.

국가 정체성

사쓰마국은 사이고 다카모리와 일본 본토 출신 무사들이 세이난 전쟁에서 패하자 와서 세운 국가다. 그래서 초창기에는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등 일본제국의 자치령 개념이었고 후에 카미조 토우마 총리를 거치며 사쓰마라는 독립국가 개념을 세웠지만 여전히 국가 정체성 논란은 남아있다.

현재 민주입헌당과 사회당의 주류는 사쓰마라는 정체성이 옳다는 쪽이다. 민주입헌당은 아예 자신들의 뿌리를 사이고 다카모리에게서 찾고 있고 그 덕인지 국가의 뿌리는 가고시마 현이라는 주장까지도 간다. 사회당은 이 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쓰마라는 정체성에는 동의하고 있다.

다만 사회당 내 비주류와 오키나와 진보당의 의견은 다르다. 사회당 비주류인 하야마 하야토가 권력을 잡았던 시기 전국에 있는 사이고 다카모리 동상이 철거되고 국제공항 이름이 사이고 공항에서 오키나와 공항으로 바뀌었으며 류큐 민족 문화 보존법도 발의되었다. 그래도 하야마 하야토는 국명을 바꾸자는 주장까진 안했지만 오키나와 진보당은 아예 국명을 류큐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명을 류큐로 바꿔야 한다는 쪽은 오키나와계 주민일 수록 지지가 높은데 특히 미군 기지 주둔 반대 시만단체들도 이런 성향이 강하다. 반대로 일본 본토에서 건너온 사람들은 대부분 사쓰마라는 국명이 옳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젊은 세대들도 점점 류큐 문화에 대한 관심이 떨어지고 있다. 심지어 일부 극단파는 다시 일본과 합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제

사쓰마는 자유시장경제와 실용자본주의 체제를 택하고 있으며, 통화단위는 사쓰마 엔이다. 사쓰마는 관세와 부가세가 없는 자유무역지대이다. 한편으로 사쓰마는 무역과 금융에 의존하는 경제형태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즉 철저한 무역의존적 형태를 띄고 있는데, 사쓰마는 자원이 빈약하고 시장규모가 협소한 대신 지리적으로 아시아-태평양의 중심에 위치해있어 이를 중심산업으로 삼은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필연적인 선택 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경제형태는 대규모 판데믹이나 금융위기에 취약하기 때문에 정부 차원에서 대응책을 꾸준히 세워두고 있으며, 특히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와 2009년 인플루엔자 범유행 사태를 겪고 나서 장기적으로 세운 대응방안은 2020년 코로나바이러스-19 범유행 당시 사태대응에 매우 큰 도움을 주었다.

1960~70년대 야가미 라이토 총리의 주도 하 자동차-조선-중화학공업으로 대표되는 제조업이 크게 발달하였다. 1960년대 이후 설비투자의 증대, 기술혁신의 진전에 따라 중화학공업 부문을 중심으로 하는 각종 신흥품목의 공업이 발달하였고 그 결과 나고 등의 도시에 공업 집중이 진척되는 동시에 그 주변지역에 신흥 공업도시들이 확산되어 나갔다. 또한 조선업 역시 1965년 오키나와조선소와 오키나와제철소가 설립되면서 부흥하기 시작했다. 풍부한 조강생산량을 바탕으로 세계유수의 국가에 선박을 수출하기 시작했으며, 1980년대에는 아시아의 조선업 강국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고임금화와 개발도상국의 위협으로 인하여 조선업이 위기를 겪고 있기도 하다.

1990년대 경제 위기 이후 사쓰마 경제는 과거 자동차-조선-중화학공업으로 대표되던 공업화 산업들은 정체되었고, IT 버블 시기를 겪고 난 뒤에는 고부가가치 산업을 중심으로 산업구조가 개편되었다. 이른바 첨단하이텍 산업과 4, 5차 산업의 핵심산업인 우주-항공산업, 정보-전자-통신-컴퓨터 산업, 유통-금융-서비스 산업 등이 국가경제의 중심을 이루는 선진화된 산업구조로 성공적으로 발전하였다. 소프트웨어, 반도체, 에너지, 건설, 유통, 무역, 금융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으로 고부가가치 산업들이 성장하게 되었다.

사쓰마는 세계 최대의 IT강국 중 하나로 인터넷 관련 산업도 유망한 편에 속한다. 인터넷을 통해 물건을 사고 파는 전자상거래의 활성화는 기존의 시장구조를 바꾸었으며, 관광산업과 유통산업은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다. 우선 사쓰마는 지리적인 요인 때문에 IT가 발달할 수 밖에 없었다. 사쓰마에서는 대도시는 물론 작은 섬까지 포함한 전국 모든 곳에서 무선 인터넷 연결이 가능하며 인구대비 인터넷 연결가능성은 세계 최상위권이다.

사쓰마는 굉장히 발달된 도시문화와 동양적 자연주의를 동시에 간직한 관광지로 인기가 높아 관광 산업도 매우 발달했다. 계획적 개발로 분명 도시화는 엄청 잘되어있지만 위성사진에서 보면 절반이 녹지일 정도로 자연보전도 매우 잘 되어 있다. 사쓰마 도심은 건물 반 나무 반 정도로 녹지율이 높고, 도심에서 벗어나 자연보호구역으로 가면 굉장히 잘 관리되고 있는 습지와 숲, 호수를 만날 수 있다. 사쓰마는 '공업화를 기본으로 한 매우 현대적인 도시문화'와 '다른 곳에선 볼 수 없는 자연친화적 관광'이라는 참으로 이질적인 두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다. 더불어 나라 크기가 작은 만큼 전체적인 관광에는 큰 기간이 필요로 하지 않아서 단기 관광이 인기있다.

21세기에 들어서는 북극항로 개척 이후 경제의 몰락을 대비하여 새로운 산업 개발을 꾸준히 추진중이며 중국과의 외교악화로 인해 경제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부분을 최대한 줄이려고 노력하고 있다.

군사

외교

일본과의 관계

역사적으로는 애증의 사이다. 그렇지만 현재는 중국의 위협과 동북아시아의 친미 국가라는 점 때문에 협력하고 있다. 특히 가고시마 현 지방과 교류가 많으며 일본 본토 기업들도 아직 발전 가능성이 많은 사쓰마국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

다만 대립하는 부분도 있는데 그건 바로 센카쿠 열도 문제. 사쓰마국은 1885년 사쓰마국령으로 센카쿠 열도가 편입되었기에 센카쿠 열도는 사쓰마 영토라고 주장하지만 일본은 당시 사쓰마국이 일본제국의 자치령이었던 점과 사쓰마국으로의 편입을 결정했던게 각의였다는 것을 들어 일본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래도 일단 중국 영토가 아니라는데에는 의견이 일치하기에 일본과 사쓰마는 센카쿠 열도 부근에서 매년 같이 합동훈련을 열고는 하며 물품상호제공협정(ACSA)를 맺었다. 또 가까운 국가인만큼 경제적, 문화적, 인적 교류도 많은 편이다.

대한민국과의 관계

사쓰마국은 6.25 공란 당시 한국에게 물자 지원을 했다. 한국전쟁 이후 미국이 반공 기지인 사쓰마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해줬기에 사쓰마가 단기간에 성장할 수 있었기도 하다. 양국은 정보공유협정도 체결했었다. 다만 사쓰마의 국부들이 정한론을 주장했기에 이것에 대한 한국측의 악감정은 있다.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관계

제1도련선 안에서 미국을 몰아내는게 목표인 중국에게 사쓰마의 미군 기지는 상당히 거슬리는 문제다. 그래서 21세기 이후 중국 해군의 성장 목적 중에는 해군육전대를 키워 난세이 제도를 단기간에 장악할 수 있는 전력을 갖추는데 있으며 이에 맞서 사쓰마도 해군력을 증강하고 있다.

중화민국과의 관계

매우 사이가 좋다. 사쓰마국은 중화민국에게 매우 우호적이며 지금도 중화인민공화국의 반발을 무릅쓰고 합동군사훈련을 개최하며 양국 정보부는 첩보망을 공유하고 있다.

미국과의 관계

미국 입장에서 사쓰마는 중화인민공화국 견제를 위해 매우 중요한 곳이다. 때문에 사쓰마에는 계속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며 특히 7함대의 보호를 받는다. 트럼프 행정부 이후로 미국이 본격적인 대중화인민공화국 견제에 나서면서 사쓰마의 입지는 더욱 커졌으며 미국은 일본-사쓰마-대한민국-대만을 잇는 극동 방위선을 구축하고자 하고 있다. 하지만 하술할 미군 기지 문제로 인해 갈등을 겪고 있기도 하다.

미군 기지 문제

2차세계대전 이후 사쓰마국에는 미군이 주둔하고 있다. 또 제7함대가 주로 이용하는 군사적 거점이기도 하며 니미츠급 항공모함인 로널드 레이건호가 주둔하고 있다. 이외에도 공군과 해병대 등 많은 병력들이 주둔하고 있으며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극동의 최전선 중 하나이다.

하지만 지역 주민들은 미군 주둔에 대해 시선이 별로 우호적이지 않다. 이유는 미군 장병과 군무원들이 대민 범죄 및 온갖 사건사고를 워낙에 많이 일으켰기 때문. 거기에다가.처음에 기지를 지을 때부터 총검과 불도저로 땅을 빼앗거나 헐값에 팔도록 강요했었고 대민 범죄를 저질러도 군법회의에 회부되지 않다보니 불만이 많다.

그래서 사쓰마 주둔 미군 기지가 있는 곳에서는 야당인 사회당의 지지율이 높게 나온다. 하지만 중국 해군의 위협에 노출된 안보 상황상 미군을 철수하는 것은 무리기에 여당인 민주입헌당은 유지하자는 쪽이다. 실제로 사회당 총리인 하야마 하야토는 미군 기지를 이전하려고 했지만 타지역 주민들의 반발과 미국 측의 반대로 실패했다.

이렇듯 사쓰마 주둔 미군은 문제가 많지만 그래도 전략적으론 매우 중요하다. 중국 입장에 있어 오키나와는 태평양 진출을 위해 넘어야 할 곳인데 사쓰마 방위군 혼자서는 이를 막을 수 없다. 그래서 미군의 역할은 중요하며 사쓰마 방위군과 미군은 아예 연합사령부까지 차린 상태이다.

대독일국과의 관계

사쓰마국은 미국의 동맹국인 만큼 독일과의 사이는 기본적으로 좋지 않다. 그러나 국제적 무역항이자 금융 중개지라는 사쓰마국의 특성 상 경제적인 교류는 하고 있으며 독일 기업도 대체로 사쓰마국에 아시아지부 본사를 두고 있는 편이다.


  1.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인한 경보
  2. 실제로는 진눈깨비였지만 분류상은 눈과 동일 취급으로서 기록된다.
  3. 시마즈 가문이 대대로 뛰어난 당주를 배출해 가마쿠라 시대부터 메이지 시대, 그리고 현대까지도 번영하였기에 나온 속담이다.
  4. 어차피 1947년 일본에서는 화족제도가 폐지되었기 때문에 별 의미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