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서민원의 원내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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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

326석
신임과 보완

6석
야당

292석

20석

8석

4석

1석
무소속 2석
재적 660석
사회당
社會黨 | Socialist Party
약칭
사회, SOC
표어
사회주의와 민주주의의 밝은 미래로
창당일
1929년 12월 26일
통합한 정당
대백 민주노동당, 대백 좌파공산당
전신
대백 사회주의 노동자당
중앙 당사
대백제국 경성특급시 종로구 삼청동
이념
사회민주주의
민주사회주의
스펙트럼
중도좌파 - 좌익
당수
조형진 / 5선 (23 - 27대)
부당수
강성환 / 3선 (24 - 26대)
원내총무
이병일 / 7선 (21 - 27대)
귀족원
0석 / 120석 (0.00%)
서민원
292석 / 660석 (44.24%)
시주지사
8석 / 18석 (44.44%)
당색
분홍색 (#EF4070)
붉은색 (#DE0000)
당가
노동의 노래
국제 조직
유럽 정당
유럽 사회당 (옵저버)
당원 수
감소 831,957명 (1위)
학생 조직
사회 학생당
청년 조직
사회 청년당
성소수자 조직
사회당 성소수자 위원회
여성 조직
사회당 여성 연합회
당보
사회당보
정책 연구소
신채호 연구소

개요

대백제국의 진보정당이자 제1야당. 1902년 창당된 대한 사회주의 노동자당이 전신이며, 더 뿌리를 짚어 올라갈 시 독립협회도 전신이라고 할 수 있다. 러시아 10월 혁명 이후 좌파 여권이 공산주의와 반공주의 노선으로 분열되자 이를 타파하고자 신채호 태정대신이 1929년 좌파 여권 정당을 통합하여 창당했다.

역사

1900년대~1920년대

사회당의 선조 정도가 되는 독립협회는 1896년 만들어졌지만 현재 실질적인 사회당의 뿌리는 1902년 창당된 대한 사회주의 노동자당이라고 할 수 있다. 대한 사회주의 노동자당은 처음에는 간도의 농민들과 노동자들의 이권 쟁점 정당으로 출발했지만, 사회주의 사상이 인기를 얻으면서 1900년대 후반 들어 조선 북부 뿐만 아니라 경상도 지역에서도 큰 인기를 얻게 되었다. 1911년, 국호 변경에 따라 자연스럽게 당명도 바꾸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반전투쟁으로 잠깐 인기를 잃기는 했지만 러시아 10월 혁명 이후 다시 인기를 얻어 1920년 중추원(現 서민원) 의원 선거에서 19.3%를 득표, 전체 192석중 38석을 얻으면서 의회에 입성했다.

1920년대~1950년대

1920년대 사회당의 의회 투쟁 노선을 비판하며 탈당한 공산주의 성향 당원들이 창당한 좌파 공산당과, 이미 이전부터 민족적 사회주의의 노선을 견지해왔던 대백 민주노동당은 사회주의 노동자당과 갈등을 빚었다. 한편으로는 급진적인 자유주의 정당인 급진당과 1900년대 초반부터 있어왔던 대백 공산당까지 좌파 정당의 분열은 심각했다. 이에 1929년 신채호 태정 대신이 좌파 정당의 중심을 만들기 위해 민주노동당, 좌파공산당, 사회주의노동자당을 통합하여 사회당을 창당한다.

이승만 내각의 대공황 대처 실패로 인한 실각과 뒤이은 신채호 거국 내각의 설립으로 사회당은 1929년부터 1933년까지 여당이었으며, 이 당시 백중전쟁과 블록경제 정책을 통한 경제 부양으로 대백제국은 손쉽게 대공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신채호가 거국내각을 이끌었으며, 이후 여운형이 거국 내각을 이끌면서 2차 대전을 대백제국의 승리로 이끌었다. 2차 대전 이후 사회당의 지지율은 매우 높았으며, 1950년대 초반까지 사회당이 안정적으로 장기 집권하는 기반이 된다. 그러나 1952년 총선에서 윤보선이 당선되면서 정권을 넘겨주다가, 1956년 10.5 노동쟁의로 자유당이 선거에서 참패하고 4년만에 여당의 지위를 되찾으며 1962년까지 정권을 잡았다.

1960년대

1962년, 자유개발당에 정권을 넘겨준 사회당은 김성주-박헌영 공동 지도 체제가 흔들리면서 사회당의 좌경화가 중단되고 이후 최규진을 중심으로 한 사회민주주의 강령의 도입과 우경화가 시작되었다. 이에 반발한 김성주 전 태정대신은 탈당하여 북조선노동당을 창당하나, 1964년 이후 다시 통합하였다. 사회민주주의 도입으로 중도층이 유입되어 지지율이 대폭 상승한 가운데 4.11 안보 투쟁으로 자유당의 인기가 떨어지자 그 틈을 타 사회당이 총선에서 승리하고 함석헌이 태정대신직에 올랐다.

1970년대~1980년대

1973년 함석헌 태정대신이 건강 문제로 사퇴한 이후 약 20년에 달하는 사회당의 암흑기가 도래하였다. 68혁명 직후 사회당에 유입된 신좌파 세력과 구좌파 세력의 대립이 뚜렷해졌으며 또한 사회민주주의자들과 당내 좌파였던 민주사회주의자들간의 노선 차이 갈등으로 공천 문제에서 큰 갈등이 있었으며, 1977년 총선을 앞두고 윤병균 사회당 당수가 당내 좌파 대다수를 출당 조치하자 이에 반발한 일부 사회당 출신 무소속 의원들이 민주사회당을 창당했다. 1977년 총선에서 사회당은 164석을 얻는데 그쳐 참패했고 민사당 역시 44석에서 30석으로 의석이 줄어, 자유당에 크게 밀리는 최악의 참패를 당했다. 이후 1982년 사회당과 민사당이 합당한 이후 지지율이 상승했다.

장춘 노동자 총파업 사건으로 김대중 태정 대신이 사퇴한 가운데 사회당이 압승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으나 당 지도부의 헛발질과 막말로 도리어 지지율이 하락해 자유당이 반대로 압승을 거둔 이후, 사회당 당 내 대대적인 정계 물갈이가 있었으며, 1980년대 후반 김규석 태정대신의 레임덕으로 사회당의 집권 가능성이 커지게 되었다.

1990년대

결국 1991년 무려 18년만에 사회당이 재집권하게 되었고, 노조 운동가 출신의 권영길이 태정대신직에 올랐다. 권영길 태정대신은 태정대신직을 연임하지 않고 태정대신의 임기가 끝나면 노조 운동으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했으며, 이에 1995년 이영호 사회당 사무총장이 태정대신 직에 오른다. 당시 대백제국은 경기 대침체를 극복하던 시대였고 이영호 시대에 대백제국은 대침체를 이겨내는 것은 물론이고 더욱 경제적으로 대백제국을 발전시켜 높은 지지를 얻었다. 반면 자유당은 원외투쟁으로 인기를 잃었으며, 1996년 동시 지방선거에서 광역단체장 1명만을 당선시키는 대참패를 당했다.

이후 사회당은 2002년까지 정권을 잡는다.

2000년대

2002년 노무현 태정대신에게 정권을 빼앗겼고, 이에 2005년 불신임 날치기 투표를 하지만 역풍이 불어 망하고 총선에서 참패했다. 그러나 2007년 노무현 태정대신이 이라크전 참전에 책임을 지고 사임한 이후 김준병이 태정대신이 된 이후로는 지지율이 상승했고, 2009년 7년만에 정권을 탈환했다.

2010년대 이후

2017년까지 여당이었다가 이후로는 야당이다.

이념

영국의 노동당과 마찬가지로 중도좌파 사회민주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우로는 사회자유주의자로부터 좌로는 극좌파 민주사회주의자까지 스펙트럼이 넓은 좌파 빅텐트 정당이다.

최근들어서는 좌경화 현상이 심해지고 있고 당내 좌파가 당권을 잡음에 따라, 일반적인 중도좌파가 아닌 중도좌파~좌익 정당으로 분류되고 있다.

평등 사상을 내세우는만큼, 귀족원의 폐지를 주장하고 있는 정당이다. 그러나 자유당의 반대로 이러한 헌법 개정 시도는 매번 실패하고 있다. 하지만 사회당은 당 내에서만이라도 이 정책을 추구하기 위해, 2002년 자당 소속의 모든 귀족원 의원을 출당조치하였다.

지지 기반

대백제국이 제조업 기반의 국가였던 197~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주요 지지층은 공장 노동자와 노동조합 등이었다. 그러나 이후 대백제국의 경제가 서비스업으로 대체되고 제조업이 힘을 잃으면서, 기존의 제조업 지지층은 점차 극우나 극좌 등 극단파 정당으로 이동하고 반대로 기존 자유당 지지자였던 대도시의 고학력자들이 사회당을 지지하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세대별로는 20대들에서 가장 지지율이 높으며, 노인층에서 가장 지지율이 낮다. 최근 총선에서는 20대들 사이에서의 사회당 지역구 득표율이 60%대를 기록하며 사실상 텃밭이나 다름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역대 당수

주요 인물

여담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