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귀족원의 원내구성
[ 펼치기 · 접기 ]
여당

64석
신임과 보완

7석
야당

22석

2석

1석
무소속 24석
재적 120석

제국서민원의 원내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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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

326석
신임과 보완

6석
야당

292석

20석

8석

4석

1석
무소속 2석
재적 660석
자유당
自由黨 | Liberal Party
약칭
자유, LIB
표어
당신과 나의 자유를 위하여
창당일
1964년 4월 1일
통합한 정당
자유통합당, 자유개발당 (1964년 3월 31일)
전신
보수민주당
중앙 당사
대백제국 선양수도시 봉림구
이념
자유보수주의
사회보수주의
스펙트럼
중도우파
당수
김원홍 / 4선 (24 - 27대)
부당수
박수영 / 6선 (22 - 27대)
원내총무
김철원 / 2선 (25, 27대)
귀족원
64석 / 120석 (53.33%)
서민원
326석 / 660석 (49.39%)
시주지사
8석 / 18석 (44.44%)
당색
파란색 (#00A8F0)
당가
자유당의 노래
국제 조직
국제민주연합
유럽 정당
유럽 인민당 (옵저버)
당원 수
감소 448,372명 (2위)
학생 조직
학생 자유당
청년 조직
청년 자유당
성소수자 조직
자유당 + LGBTQ
여성 조직
자유당 여성위원회
당보
조선신보
정책 연구소
자유당 연구소

개요

대백제국의 보수 성향 여당이다. 대백제국에서 3번째로 오래된 정당으로, 김창암 전 태정 대신이 설립한 자유개발당이 전신이다. 1964년 자유개발당과 군소정당인 자유통합당이 합당하여 자유당이 창당되었다. 현재 원내 1당이자 여당이다.

역사

1950년대

1951년 5개로 쪼개져있던 보수정당중 가장 큰 보수민주당 소속이었던 김창암 전 태정대신이 죽기 직전 우파 정치의 원로로서 우파 정당의 구심점을 만들기 위해 5개 보수 정당을 합침으로서 자유개발당이 창당되었다. 창당 직후 윤보선이 태정대신으로 임명되었으며, 이후 1956년까지 자유당이 장기집권한다. 그러나 1956년 10.5 노동쟁의로 인해 장면 내각이 총사퇴하고 뒤이은 총선에서 보수당이 201석을 얻는데 그쳐 참패함에 따라 정권을 사회당에 내어줬다. 이후 1962년까지 사회당이 집권함에 따라 자유개발당은 야당의 지위로 떨어졌다.

1960년대

그러나 1962년 총선에서 다시 자유개발당이 299석을 얻고 자유통합당과 연정하여 집권했다. 이후 이민우 자유개발당 당수와 양일동 자유통합당 총재가 합의하여 1964년 총선을 앞두고 자유개발당과 중도보수 성향의 자유통합당이 합당되었고, 현재의 자유당이 창당되었다. 1964년 양일동 태정대신의 시대 이후 1967년 다시 장준하 태정대신이 임명되었지만, 4.11 안보 투쟁과 뒤이은 68혁명으로 자유당의 지지율이 폭락하면서 1968년부터 1973년까지 다시 사회당의 함석헌 태정 대신이 국정을 이끌었다.

1970년대

1973년, 함석헌 태정대신이 건강을 이유로 태정대신 사퇴와 의회 해산을 발표했고, 뒤이은 총선에서 자유당이 단 3석 차이로 다수당이 되면서 김대중 태정 대신이 임명되었다. 김대중 태정 대신은 1981년까지 태정 대신을 맡으면서 신자유주의를 기반으로 한 경제 개혁을 이끌었으나 동시에 빈부격차를 조장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대백의 마거릿 대처'로 불리고 있다. 한편으로는 1970~80년대는 사회당 내에서 사민주의-민사주의 논쟁으로 내분이 일어나 당이 2년동안 쪼개지는 등 좌파 야권의 암흑기였기에 김대중 태정 대신이 더욱 국정 업무를 수월하게 할 수 있었던 면이 있었다.

1980년대

1981년 장춘 노동자 총파업 사건으로 자유당의 지지율이 폭락하면서 김대중이 사임하고, 뒤이어 김영삼이 태정대신직에 올랐다. 김영삼 태정 대신의 집권기 내에서 서민원 해산 임기 만료로 1982년에 서민원 의원 선거를 실시했다. 선거 초반까지만 해도 사회당이 49.2%의 지지를 얻으며 불과 20.1%의 지지를 얻었던 자유당을 크게 따돌이고 최대 390석의 압승을 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보수 유권자의 결집과 사회당 김성주 전 태정대신의 막말 논란으로 사회당의 지지율이 대폭 하락해 자유당이 도리어 압승하기에 이른다. 이후 김영삼 태정 대신은 1984년 태정대신직을 재무대신이었던 김종인에게 넘겨준다. 김종인 체제 내에서 최저임금 도입과 기본 복지 실시 등 여러모로 김대중 내각의 입장과 반대되는 정책을 펼쳤으며, 이에 당 내에서 논란이 되자 1986년 김종인이 사임하고 김규석이 태정대신 직에 올랐다.

1990년대

다만 김규석 태정 대신의 유아독존적인 태도로 자유당의 지지율이 떨어져 1991년에는 무려 20년만에 사회당이 선거에서 승리하고 권영길이 태정대신 직에 올랐다. 이후 이영호 태정 대신이 1995년 태정대신 직에 오르자 자유당은 의회 보이콧을 선언했지만 의회 내의 지지율을 더욱 떨어트릴 뿐이었다. 이영호 태정대신은 1997년까지 태정대신직을 역임했고 그동안 이인제 당수의 장외 투쟁 운동은 자유당의 지지율을 매우 낮게 만들었다. 이 때문에 1996년 실시된 통일 지방선거에서 자유당이 상해 단 한 지역을 제외하고 모두 지는 충격적인 성적표를 받기도 했다. 이후 자유당은 입장을 선회해 장외 투쟁을 접고 한창호 당수 지도 하에 사회당을 비판했지만, 1998년 총선에서도 21석 차이로 사회당에 밀리며 위기를 맞는다.

2000년대

2002년까지 사회당이 장기집권하기는 했지만, 2002년 올림픽을 앞두고 노무현 붐이 불면서 2002년 총선에서 자유당이 승리하고 오랜만에 자유당으로 정권이 넘어왔다. 노무현 태정 대신은 임기 내내 지지율이 매우 나빴지만 2005년 사회당의 불신임 투표 날치기로 여론이 노무현 태정대신에게 긍정적으로 기울어 2005년 조기 서민원 의회 선거에서 자유당이 362석을 얻어 압승했다. 이후 수도 이전, 한반도 대운하 등 여러 정책을 시행했으나 2007년 교육 법안이 의회에서 통과되지 못하자 사임했다. 이후 김준병이 태정 대신 직에 올랐으나, 얼마 안가 2009년 총선에서 사회당이 승리해 다시 야당이 되었다.

2010년 이후

2017년까지는 김근표 태정대신 하의 사회당이 집권함에 따라 약 7년간 야당 신세를 지냈지만, 2017년 총선에서 승리하면서 다시 여당이 되었다. 그러나 2018년 박두진이 부패 혐의로 구속되자 김원홍이 태정대신직을 이어받았다. 박두진의 부패 혐의에 6명의 여당 의원이 탈당하면서 과반이 붕괴되었지만 민족민주당이 신임 보완 형식으로 김원홍 내각에 참여해 정권을 간신히 유지했다. 다만 지지율은 사회당에 약간 밀린다. 2020년 코로나 대처의 성공으로 지지율이 올랐지만, 이후 각종 논란으로 지지율이 사회당과 경합이 된 상태다.

성향

사회, 경제적으로 보수적이며 중도우파 성향이다. 당 내에서는 중도파부터 우익까지 다양하지만 주류는 중도우파이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리버럴한 성향을 보이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다. 독일의 기민련과 성향이 비슷하다는 말이 많지만, 동아시아이다보니 기민련보다는 사회 문제에서 조금 더 보수적인 편이다.

세부적으로 경제적으로 신자유주의를 지지하며, 사회적으로는 유교에 기반을 둔 전통적인 가치를 지지한다고 강령에 쓰여져있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로는 신자유주의보다는 조금 더 진보적인 정책을 취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또 사회적으로도 당 내에서 동성애자와 낙태에 상당히 전향적인 입장을 취하는 진보파가 많아짐에 따라 점차적으로 당의 스펙트럼은 중도우파 내지는 우익에서 중도~중도우파로 변하는 중이다.

물론 기본적인 보수 색이 없는 것은 아니라, 공식적으로 낙태나 동성애에 대해서는 매우 제한적으로 찬성하는 편이고, 실제 당 내 여성 조직이나 성소수자 조직도 경직되어있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 외에 친영 친미적이고, 군비 증강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현대 기준으로는 극우라고 볼 수 있는 노선을 추구하며 강경한 매카시즘을 주장하는 의원들도 있었지만 68혁명을 기점으로 서구권도 그렇고 대백제국도 사고관이 열린 사회가 되면서 점점 좌경화가 진행되는 추세다. 그러나 당 내에서는 이런 움직임에 반발하는 우파 인사들도 있다.

김대중 전 태정대신은 사회적으로는 진보적이지만 경제적으로는 강경한 신자유주의를 주장했다. 반면 김종인 전 태정대신은 경제 문제에 대해서는 케인스주의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사회적으로는 김대중보다 보수적이었다. 이렇듯이 당 내에서 경제적, 사회적으로 중도냐 우파냐에 따라 상당히 많은 인사들이 분포해있다는 점에서 자유당은 중도와 극우를 가리지 않고 우파 내에서 꽤나 폭 넓은 지지를 받는다.

역대 당수

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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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 기반

주요 지지 기반은 조선 지역, 간도, 길림, 흑룡강 지역이다. 주로 시골 지역에서 지지를 많이 받는다. 반면 대도시에서는 지지를 별로 받지 못하며, 특히 선양수도시의 경우 당선되는 의원이 3명이 넘지 않을 정도로 지지 기반이 없다. 그러나 대백 최고의 부촌인 상해특급시는 예외로 여기는 사회당이 당선자를 내는 일이 더 드물정도로 자유당 지지 세가 강하다. 반대로 강세지인 남조선 내의 구 경상도 지역에서는 전혀 힘을 못쓰고 있으며, 대구 등 일부 경상도 대도시에서는 원내 정당도 아닌 공산당에도 지지율이 밀리곤 한다.

세대별로 봤을때는 50대 이상에서 지지세가 강하다. 20~30대에서는 지지율이 많이 약하다. 40대는 사회당과 자유당이 경합이고, 50대 이상으로는 자유당이 우세하다. 구체적으로 봤을때 27대 총선에서 자유당은 20대에서 16.3%, 30대에서 20.3%, 40대에서 40.2%, 50대에서 57.3%, 60대 이상에서 67.2%를 득표했다.

성별로는 여느 나라 보수 정당이 그렇듯, 남성에게서 지지율이 높은 편이다. 종교적으로는 무신론자들들에게 지지율이 낮고 불교, 기독교 신자들 사이에서 지지도가 높다.

계층별로는 고소득층일수록 자유당의 지지율이 높지만 이건 케이스 바이 케이스라고 봐야한다. 영국과는 다르게 대백제국은 계층간 계급 투표가 뚜렷하지는 않은 편이라 부촌중에서도 상해는 자유당의 지지율이 높은데, 상해 다음 가는 선양은 오히려 사회당의 압도적 우위일 정도로 계급 투표가 뚜렷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건 예외적으로 다룰 필요가 없다.

계파

의 계파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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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럴 중도우파 우익
사회자유주의
문재인
한태수
김의학
신기대
보수자유주의
김종인
김원홍
박두진
김윤서
자유보수주의
김상학
유승민
문태영
주희숙
사회보수주의
나경원
이중천
이재춘
이인제
자유당 · 사회당 · 중도당

주요 인물

여담

  • 경성에 있는 당사를 한 40년간 사용하다가 이후 수도를 옮기면서 노무현 태정대신의 뜻을 잇는다는 취지로 선양으로 당사를 과감하게 옮겼다. 구 자유당 경성 당사는 현재 미술관으로 개조되어서 사용되고 있다. 반면 사회당은 아직도 경성 당사를 이용하고 있다.
  • 1980년대 Thriller 앨범이 한창 많이 팔렸을때 당 공식 입장으로 퇴폐적인 문화 소비라는 논평을 내 마이클 잭슨의 팬들 뿐만 아니라 해외 언론에까지 보도될 정도의 망신살이를 한 적이 있다고 한다.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