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메노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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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메노 왕국
Kingdom of Armeno
아르메노 내전 및 제노바족·남중족 정벌 이후 최대 강역
기원전 316년 ~ 기원전 195년
아르메노 내전 이전 서이스톨리아 전쟁 이후
고대 에토 가이아 공화국
고대 세인조다로
기타 수많은 도시국가들
위치 아르메노 (지금의 제노바-오슬리아 일대 제외)
수도 세인조다로
정치 체제 왕정 체제
국가 원수 국왕
면적 3,628,730㎢
언어 아르메노어
민족 아르메노족
기타 민족 (제노바족, 남중족)[1]
국교 아르메노교
주요 국왕 아르메노 2세
쿠테프 1세
주요 사건 아르메노 내전
아르메노 2세 암살 사건
아르메노의 제노바족 정벌
남중족의 아르메노 침공
서이스톨리아 전쟁
현재 국가 아르메노 아르메노
하인리히멘 하인리히멘

개요

아르메노 왕국(Kingdom of Armeno)는 기원전 316년부터 기원전 195년까지 남서이스톨리아 아르메노 지역[2]에 존속했던 제국으로, 기원전 316년 아르메노 내전에서 고대 세인조다로가 승리하면서 건립된 아르메노 최초의 통일 왕정이다.

아르메노 역사 중에서는 그 특유의 '아르메노 문화'가 가장 꽃을 피운 시기로서, 동시대 남서이스톨리아를 양분할한 브뤼스 제국과 함께 남서이스톨리아 문화의 전성기를 이루었다.[3] 남쪽의 제노바족과 동쪽의 남중족을 차례로 정벌하면서 강대국이 되는 듯 했으나 쿠테프 1세 사후 남중족의 침공 등으로 쇠퇴하다가 기원전 195년 클레이시아 전체를 집어삼키고 이스톨리아 지역으로 영향력을 넓히려 한 고대 가이아서이스톨리아 침공으로 인해 멸망하였다.

아르메노 왕국은 3천 년의 아르메노 역사상 최초의 통일 국가이자, 아직까지도 유일한 온전한 단일민족국가(아르메노족)이다. 또한, 원기 1146년 아르메노 제국이 세워질 때까지, 아르메노 왕국은 최초이자 유일한 통일 국가였다. 아르메노 제국은 그 당시 추진된 폴리네시아-아르메노 교류 정책을 통해 폴리네시아인들이 많이 들어와있던 상태였으며, 아르메노 제1공화국아르메노 제2공화국은 이미 다민족국가화되있던 상태였다.

역사

 아르메노 왕국의 대외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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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메노 내전 후 통일 왕정의 건립

아르메노의 시작인 문명 체제의 고대 아르메노는 서쪽엔 진보하던 폴리네시아족이, 남쪽에는 활발한 활동을 이어나가던 외침족 제노바족이, 동쪽에는 비슷한 시기에 문명을 발전시킨 고대 알바키아가 있는, 지리적으로 매우 위험한 위치에 있었다. 폴리네시아족과 남중족은 별다른 활동을 이어가지는 않았으나, 아르메노에게 가장 성가신 것은 언제 침공해올 지 모르는 남쪽의 제노바족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대 에토고대 세인조다로는 물론이며 둘의 대립을 제외하고도 다른 도시국가들도 크고 작은 내전을 이어나갔다. 외침족의 침공을 방어하려 연합을 해도 모자랄 판에 자기들끼리 내전을 벌인 것이다. 그럼 이제 어떻게 되겠는가? 문명은 이것을 계속 유지하는 게 신기할 정도로 열악하게 망가져 있었다.

기원전 328년, 제노바족은 전 병력을 총동원하여 아르메노에 거센 침공을 가했으며(제노바족의 아르메노 대침공) 특히 제노바족의 본거지인 남부와 접경해있었던 에토는 도시 전체의 50%가 불에 타고 시민의 3~40%가 사망하거나 중상을 입는 등 막중한 피해를 입었다. 이는 외세의 침공과 내전이 지속되던 고대 아르메노사를 통틀어서도 심각한 피해였다. 고대 에토는 사무엘 알리의 활약으로 겨우겨우 존속하는 데에는 성공하였으나, 북쪽의 세인조다로가 이 틈을 타 아르메노 내전을 벌이면서 고대 에토를 완전히 무너트리고 아르메노 왕국을 건립한다.

하지만 왕국이 건립했다고 해서 대내외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제노바족은 지난 아르메노 대침공에서 크게 승리하면서 세력을 넓히고 있었으며, 고대 알바키아는 서쪽으로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고 있었다. 또한, 제노바족이 무너뜨린 에토를 다시 재건립하는 데에도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세인조다로의 지도자였던 리히텐 1세가 아르메노의 초대 국왕으로 즉위하였으나, 대내외적인 위기를 해결하지 못하고 고령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이후 즉위한 아르메노 1세가 정치 체제를 정비하고 지방 분권적인 체제를 구축하였으며, 당시엔 매우 획기적이었던 체계적인 왕 하위 기관들을 도입하였지만, 그조차도 제노바족의 횡포는 막을 수 없었고 기원전 274년 사망한다.

쿠테프 1세 시대 최전성기를 맞다

아르메노 1세 사후 왕위에 오른 아르메노 2세는 제노바족과 남중족의 정벌을 내정의 주요 정책으로 내세우며, 군비를 증대하고 군단을 다수 추가하면서 제노바족을 강하게 견제했다.

그러나 아르메노 2세는 기원전 269년에 진행된 리히텐 1세의 제례식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제례식에 몰래 참여한 제노바족 한 명이 던진 창에 뒷목을 정통으로 맞으며 즉사했다.

한 나라의 국가원수가, 그것도 활발한 정책 추진을 통해 아르메노의 미래라 불렸던 아르메노 2세가 암살당하자 나라 전체가 큰 충격을 받았다. 왕족들도 이 사건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탓에 암살 후 무려 5일 동안 새로운 국왕이 즉위하지 않았다. 즉, 5일 동안 아르메노 왕국은 무정부 상태였다는 것.[4] 그러나, 정작 창을 던진 피의자 제노바족은 암살 이후 제례식장을 벗어나 도주하여 신원을 찾지 못하였다. 이는 이전까지 아르메노의 국가 보안 체계가 매우 부실했다는 것을 방증한다. 제노바족이 국경을 넘어온 것부터 이미 문제인데[5], 무려 전직 왕의 제례식에 참여하고, 그곳에 참여한 현직 왕을 암살할 때까지 피의자 단 한 명이 제노바족인지를 분간을 못한 것은 보안 체계의 매우 중대한 실책이다. 이 사건의 여파로 사건의 재발 방지를 위해 당대는 물론이고 200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아르메노의 국가원수 혹은 중요인물 보안 체계는 매우 체계적으로 시행되고 있다.[6] 그 정도로 타격이 컸던 사건.
 자세한 내용은 아르메노 2세 암살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국가 전체를 뒤흔든 암살 사건 5일 뒤, 쿠테프 1세가 아르메노 왕국 제4대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아르메노 2세가 향년 42세라는 젊은 나이에 암살당한 탓에 쿠테프 1세의 즉위 당시 나이는 고작 만 17세였다. 이에 국가의 혼란이 빚어질 것을 우려하여 리카르도 알리 등의 강경파 세력이 권력을 요구하기도 했지만, 쿠테프 1세는 어린 나이에 매우 강단있게, 마치 자신의 아버지처럼 부국강병 정책을 시행하였다. 도저히 며칠 전 자신의 아버지를 잃고 그 자리를 대신한 만 17세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7]

비록 우리는 누구에게는 국가의 미래인, 누구에게는 가장 존경하는 사람인, 누구에게는 아버지인 한 사람을 잃고야 말았습니다.
저는 제 좌우명 한 마디로 짧게 연설을 마치고자 합니다.
"어제의 슬픔은 잊고, 내일의 이상을 꿈꾸는 것이 바로 오늘 해야 할 일이다."
쿠테프 1세의 즉위 연설(중략). 전설의 시작[8]

이 사건으로 인해 아르메노 왕국 내에선 원래도 강했던 반제노바·반외세 성향이 더욱 더 강해졌으며, 이에 쿠테프 1세는 기원전 268년 아예 제노바족이 아르메노에 얼씬도 못하게 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쿠테프 1세는 자신이 왕위에 있던 기간인 B.C. 269년부터 214년까지 약 55년을 제노바족 정벌에 바쳤다. 제노바족이 아르메노 남부 전역에 워낙 넓게 분포해있는 민족이다 보니 완벽한 정복에는 실패했으나, 지난 아르메노 대침공 당시 뺏겼던 중남부 도시 베사르를 탈환하고, 남서이스톨리아 최말단 도시인 아스완까지 원정을 다녀오며 제노바족의 사기를 완전히 억눌렀으며 당연하게도 아르메노 왕국의 최전성기를 맞았다.[9] B.C. 230년 전후로는 제노바족은 더 이상 남부 국경 근처에서 일말의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쿠테프 1세가 내정에 관심이 없었냐 하면 또 그것도 아니었다. 쿠테프 1세는 아르메노 1세가 어느 정도 구축해놓았던 행정구역 체계를 재정립하여 완전히 시행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체제는 2천 년을 넘어 현재의 아르메노 공화국도 어느 정도 사용하고 있는 유서깊은 행정구역 체계가 되었다. 또한, 쿠테프 1세 즉위 전후로 권력을 요구하며 지속해서 왕권을 위협한 리카르도 알리 등의 강경파 세력들을 군사력까지 동원하여 완전히 추방시켰다.

아르메노 역사에 길이 남을 압도적인 업적을 세운 쿠테프 1세는 기원전 214년, 향년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10]

쿠테프 1세 사후 혼란기 및 멸망

쿠테프 1세 사후 즉위한 쿠테프 2세 시대에서는 시작부터 큰 혼란을 맞았다. 쿠테프 1세가 사망하자 남쪽의 제노바족이 다시 기승을 부렸으며, 이번에는 제노바족보다 훨씬 더 강력한 조직력과 군사력의 남중족이 동쪽에서 침공해오기 시작했다. (남중족의 아르메노 침공) 당시 남중족은 셀레우로스족을 중심으로 점차 통일의 조짐을 보이고 있던 상황[11]이었으며, 이는 쿠테프 1세 사후 육해군 사이 갈등이 일어날 정도로 조직력이 완전히 붕괴된 아르메노군이 당해낼 수 없을 정도였다. 결국 남중족의 침공에서 극심한 피해를 입으면서 완전히 침체기에 빠지게 된다.

기원전 2세기 (B.C. 199~100)에 접어든 아르메노 왕국은 기본적인 국가의 통치 조직마저 붕괴된 상황이었으며, 권력층들은 이를 방치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저 멸망만을 기다리고 있던 상황에서 가이아 공화국서이스톨리아 전쟁을 벌이며 비슷하게 혼란기를 겪고 있던 브뤼스 제국을 정복하며 동쪽으로 침공해왔고, 이에 휘말리면서 정복되며 아르메노 왕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정치

역대 국왕


아르메노 왕국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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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2대 3대 4대
리히텐 1세 아르메노 1세 아르메노 2세 쿠테프 1세
5대
쿠테프 2세
  • 리히텐 1세 (B.C. 316 ~ B.C. 307)
  • 아르메노 1세 (B.C. 307 ~ B.C. 274)
  • 아르메노 2세 (B.C. 274 ~ B.C. 269)
  • 쿠테프 1세 (B.C. 269 ~ B.C. 214)
  • 쿠테프 2세 (B.C. 214 ~ B.C. 195)

사회

민족

 자세한 내용은 아르메노족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언어

 자세한 내용은 아르메노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종교

 자세한 내용은 아르메노교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각주

  1. 아르메노 왕국 법에 따라 아르메노족이나 폴리네시아족 또는 교역 목적이 아닌 기타 민족들은 입국이 불가능했지만, 일부가 국경 근처에 살고 있었다.
  2. 현재 멘부르크가 위치하고 있는 아르메노 남쪽, 과거의 제노바-오슬리아 일대는 제외다.
  3. 가이아 제국키오피 왕국의 장기적인 집권으로 고대의 문화가 거의 사라진 브뤼스 제국과는 달리 아르메노는 이 시대의 문화를 현재까지도 어느 정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아무래도 더 과거에 아르메노를 지배했던 가이아 제국이 문화 탄압이 키오피보다 심했었고, 아르메노는 가이아 본토와의 거리가 폴리네시아보다 더 멀었기 때문에 이런 가이아의 영향을 다른 식민지보다는 덜 받았기 때문이라는 게 정설.
  4. 정말 다행이게도 이 5일 동안은 외세의 침공 등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만약 이러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제노바족이 한 번 더 거센 침공을 해왔으면 아르메노 왕국의 역사는 50년도 채 되지 않았을 것이다.
  5. 불법체류자와 같은 개념.
  6. 어느 정도냐면 아예 정부 산하 국가행정조직에 '국가보안부'가 있다.
  7. 이건 당연하겠지만 아버지의 영향이 가장 컸을 것이다.
  8. 당시 연설에서 쿠테프 1세는 눈물이 맺히는 모습을 보였다. 하루아침에 부친상을 당하고 곧바로 왕위에 오른 쿠테프 1세에게 세상은 슬픔을 이겨낼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그의 감정은 눈물 몇 방울만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9. 또한, 120년 동안의 아르메노 왕국 역사상 최초로 영토를 넓힌 사례이다.
  10. 5명의 왕 중 가장 큰 업적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향년 72세라는 당시 기준으로 굉장한 고령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심지어 재임기간도 55년으로 5명 중 최장기간.
  11. 이는 고대 페로시마와 알바키아가 침공을 일으키며 완전히 와해되었다. 이후 키오피 왕국이 등장하기까지 남중족은 통일의 기미도 보이지 않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