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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요를 세워 사멸위기에 처했던 거란족을 부활시킨 대영웅

개요

요 조조(遼 祖祖) 야율함사(耶律喊舍)는 후요의 마지막 왕이자, 신요의 태조황제이기도 하다.

즉위 초기

요 조조(遼 祖祖) 야율함사(耶律喊舍)가 세운 신요는 나라의 크기나, 나라의 위치로 봐도 중국에서 매우 변방에 떨어져있었기 때문에, 외부세계와의 교류가 적었고 신요의 건국사실을 알고 있는 나라도 득히 드물었다. 그러나 요 조조는 이런 외부의 저명도에 대해 관심두지않고 나라살림을 키우고 인력을 키우는데 집중하였다. [1] 그는 요나라가 그러했듯이 나라의 주요산업으로 농경을 특히 장려하여, 국가재정의 대부분을 농경으로 충당했다. 1221년 요 조조는 거래에 통용되는 화폐(貨幣)와 조세(租稅)를 농경에서 나는 곡식으로 정하였고, 쌀로 조세를 납부하게 하였다. 또 요나라의 경제정책을 고스란히 계승하여 농민들은 소량의 사유토지를 가질 수 있었고, 대주주와 농민의 관계없이 토지를 가진 자들에게 사유재산을 인정하고 대신에 '토지보유세'를 내게하였다. 또 신요의 토지는 공적인 토지와 개인이 보유하는 사적 토지로 나뉘어져 있었다.

즉위 중기

이외 신요의 평민들은 농경 뿐만 아니라 수수야 강 유역서 야채와 과일을 기르기도 하였고 1223년에는 근처 보이코프 근방을 개발하여 막대한 철을 얻기도 하였다. 이를 토대로 신요는 농경에 사용될 철제 농기구와 철로 만든 그릇,접시,젓가락 등등 식기구, 철로 만든 갑옷등 수공예 적인 면에서도 기반을 잡으며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의 디자인은 모두 요나라 시절의 것들을 고대로 계승하였다. 1228년에는 요나라의 법률을 고대로 계승하여 새로이 신요법전(新遼法典)으로서 제정하였으며, 1234년에는 남서부 네벨스크 구홈스크 구를 평정하여 서쪽 해안을 확보하므로서 수산업 역시 장려하기에 이르렀다. 또 이과정에서 기존의 아이누 족속들을 복속시키면서, 아이누족을 아이누족들만의 전통적 채계로서 다스리게하는 이원(二元) 지배체제를 만들었다. 이는 요나라가 사용하던 남북면제 제도를 고스란히 계승한 것이었다. 요 조조는 이렇게 신요의 기강을 튼튼하게 다지고 1241년에 이르러 종이 나는 병으로 끙끙 앓다가, 마침내 훗날 요 회종이 되는 야율전수(耶律戰隧)에게 칸 자리를 넘겨주고 1245년 사망하였다.

외부링크

  1. 요 조조는 본래 인력이 많아야 나라가 부강해진다는 것을 알고있었고, 그 원동력은 거란민족이 본래 해오던 유목이 아니라 농경이라는 걸 요나라 시절의 교훈으로서 잘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