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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호:회조(懷祖) 시호:강덕백문공황제(康德白文公皇帝)
성:야율(耶律) 휘:월희(月熙)

황제는 여자이지만 강하고 아름다운 군주였다.  아름다운 미모로 백성들에 이목을 사로잡고 모자라 나라의 살림을 안정케해 이 나라를 안정된 국가
로 선도하니 요인(遼人)[1] 역사상 가장 훌륭한 군주라고 해도 무방하다. - 《대요사기》(大要史記)

요 회조 공황제(遼 懷祖 公皇帝)는 태조 야율아보기와 성종 야율융서에 비견되는 성군이다. 그녀의 치적은 거란 역사상 전례가 없는 최고의 치적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거란족 유사 이래 즉위한 최초의 여황제이기도 하다.

생애

초기

회조 황제의 휘는 야율월희(耶律月熙)로 현조 황제의 동생인 기왕(冀王) 야율적영(耶律赤永)의 장녀로 태어났다. 그녀는 13세가 되는 해에 아버지 기왕이 타계하는 비극을 맞게되지만 기왕의 죽음으로 아버지의 왕가를 물려받고 황제로부터 기국군주(冀國郡主)로 봉해지며 이때부터 황실의 일원으로 국사에 참여하게 되어 그녀의 화려한 정치인생을 시작하게 되었다. 유아기부터 총명하단 소리를 들은 그녀는 군주로 책봉된지 얼마안되 황실 원로들의 주선으로 거란왕공족의 자재들과 동문수학도 하게 된다.

황제즉위

서기 1345년 초, 요 현조가 후사없이 붕어하자 조정은 황손의 연장자인 기국군주 야율월희(耶律月熙)를 즉위시키기로 결정하였다. 유례없는 여성황제의 즉위에 반발하는 목소리도 있었으나 평소 영리하단 평을 듣던 터라 그녀는 큰 반발없이 즉위하게 된다. 하지만 당시 거란족은 중원의 원 왕조의 간섭때문에 통치권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하던 시기였으므로 그녀 역시 중원의 왕조가 교체되는 1368년까지는 치세에 두각을 나타내진 못하였다.

원명교체

파일:Khitan female hairstyle - tying the hair into three.jpg

서기 1368년, 중국 대륙에서는 홍무제 주원장이 금릉에서 개국한 명(明)에 의해 원 왕조가 몽골 고원으로 패퇴하게 된다. 이로써 중원은 명조의 치하에 놓인 것이고 원나라는 사실상 멸망하였다. 회조 황제는 원의 지배가 붕괴된 기회를 놓치지 않고 독립을 선언하는데, 마침내 요 회종시기부터 이어진 장장 104년간의 원나라 통치에서 거란이 해방되는 순간이었다. 독립을 선언한 회조는 현조 야율할저 대로부터 내려오던 조정의 시책들을 완성하고 1년 후인 1369년에는 태조 야율아보기가 창제한 요자(遙字)를 공용문자로 도입한다. 또한 국내 잔류중인 원의 잔당들을 축출하여 기강을 확립하였으며 자주독립의 일환으로 외왕내제의 칭호를 체택한다.

기반정비

당시 거란 황제에 복손된 연맹 부족의 추장들은 사실상 조정의 통치가 불가능한 독립적인 지위를 향유하고 있었다. 회조는 조정의 무실화를 우려하여 이들 부족을 직할하길 원하였는데, 선대부터 보장되온 추장들의 지위를 무시하고 급기야는 지방관으로 임명한다는 조칙을 반포하기에 이른다. 부족마다 동요하였으나 당시 회조 황제는 인망이 높았기에 저항할 수 없었다. 그녀가 제부족을 복종시킨 사건은 요의 멸망 이후 설립된 신요가 건국 100여년이 지난 시점에서 마침내 중앙집권적 통치기반을 확보하였다는 의의가 있다. 명실공히 전체 거란의 지존으로 성장한 회조는 중원왕조인 명에 사신을 파견하여 책봉조공의 수교를 성립하였다.

치세확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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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회조 시기 당시 신요인들의 티타임

회조의 치세가 안정적으로 유지된지 수년이 지나자 거란족은 마침내 태평성대를 향유하게 되었다. 황제는 칭송받았으며 거란 역사상 위인으로 추앙받는 이진충, 손만영에 황제가 비견된다는 평판이 확산되었다. 또한 원의 통치와 잔재를 청산하고 신요왕조의 국위를 선양하여 만국으로부터 공경을 받게 하였다는 점은 이전에 실천된 바가 없는 일 이었다. 그녀의 치세기에 성세가 계속되자 거란의 호구는 계속하여 증가하였는데, 거란의 정사인 『대요사기(大遼史記)』에서는 1372년 기준 신요의 인구는 도합 7만호이며 이는 요 조조 이해구의 통치기에 비해 2배 이상 증가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국력이 성장함에 따라 조정은 더욱 강력한 군사전력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를 잘 의식한 회조는 거란 민족이 특화된 기병 양성에 매진하고 동생 이해우를 병마대원수(兵馬大元帥)에 명해 관리토록 하니 이내 정예 기마병의 전력이 3만을 돌파하는 성과를 달성하게 된다. 신요의 군사력이 발달하자 변방의 마적, 도적들은 신요의 상인을 가급적 공격하지 않아 희조대의 교역로는 일본만주로 안전하게 연결되었으며 국력이 쇠락한 북원(北元)에도 사신이 파견되 공물을 제공함으로 성의를 표시하였다.

말기

혁기적인 치세를 이룩한 희조는 서기 1395년 건강이 악회되어 동생 이해우에게 양위한다는 조서를 발표한 후 사망하였다. 황위에 오른 이해우는 회조의 장례를 성대히 거행하여 그녀의 치적을 기려주었다. 여성황제가 통치하였던 영향으로 거란족의 성문화가 개방적인 방향으로 진보하게된 시점에서 거행된 이 예식에는 남녀가 균등히 참석해 희조황제의 명복을 기원하고 조의를 표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그녀의 통치로 인해 성문화를 개방적으로 변혁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녀에 대한 평가

긍정적 평가

세간에는 요자(遙字)를 반포해 백성들의 어문수준을 향상시키고 조정이 능력을 발휘하도록 중앙집권화의 업적을 성취한 것은 요족(遙族) 역사상 전례가 없던 일이므로 희조 황제야 말로 거란족 신요 왕조의 중흥을 이뤄낸 군주이며 그녀를 능가할 군주는 선대에 전무하다는 평가가 있다. 특히 원이 붕괴되는 와중에 단호히 대처하여 그들의 통제력을 무력화시켰으며 편향되지않고 균형있는 외교의 수단으로 외왕내제등을 사용한 수완은 그녀를 능가할 자가 없다. 그녀의 치세동안 상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도 중요한 업적중에 하나이다. 무엇보다 그녀는 거란 역사상 최초의 여성군주로서 국가를 중흥시켰기에 여성인권의 신장에 상당히 기여한 면에서 긍정적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

부정적 평가

회조의 능력이 우수하고 수완이 좋은 것은 사실이나 그녀의 행보는 지극히 수동적이고 능동적인 국정운영이 미흡했다는 평가가 있다. 그녀는 원이 몰락하자 단호히 원의 관리들을 퇴출시키었지만 명에 의해 원이 몰락하기 이전까지는 원의 통치에 대항해 부국강병을 이뤄낼 의사를 보인 적이 없다. 또한 명에 조공하는데 북원에도 조공하여 자칫 국제적 신의를 잃어버리기 쉬운 경망한 외교를 펼친게 아니냐는 부정적 시각도 있다.

외부링크

  1. 거란인을 뜻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