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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대
요 경종 야율현
제7대 황제
982년 ~ 1031년
후 대
요 흥종 야율종진


개요

요나라 최고의 성군중 한명

요(邀族)식 이름은 야율문수노(耶律文殊奴)로 문수보살에서 따 온 이름이다. 한식(漢式) 이름은 야율융서(耶律隆緖). 12세에 즉위하여 어머니 승천태후 소씨의 섭정을 받았으며 이 동안 국력 신장과 내란 수습에 힘을 기울였다.

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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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 조직을 정비하고 신장된 국력을 바탕으로 동서로 원정하여 서쪽으로 티베트위구르 지역, 동쪽으로는 고려에 맞닿을 정도로 영토를 넓혔다. 또한 북송과도 자주 전쟁을 벌여 송군을 연전연파, 황하 이북까지 진출했으나 송군의 저항에 부딫혀 전연의 맹을 맺게 되었다.

이렇듯 요나라의 영토를 크게 넓힌 인물이지만 이상하게 고려에서는 영 힘을 쓰지 못했다. 1차 침입 때 소손녕서희에게 낚여 강동 6주를 고려에게 넘겨주었고, 그 강동 6주 때문에 이후 전쟁에서도 고전했다.[1] 이후에 2차 침입 때는 성종이 친히 40만 대군을 이끌고 나가서 강조의 군사를 격파하고 개경을 함락시키는 등 승승장구하였으나 양규의 게릴라 전술에 큰 피해를 입는 바람에 다시 돌아가야 했다. [2] 그리고 3차 침입 때 군사를 이끌고 나가 고려로 쳐들어갔던 소배압강감찬에게 패하면서 [3] 고려와도 결국 화약을 맺었다.

내정

한국에서는 고려-요나라(거란족) 전쟁의 주동자라서인지 군사적 업적이나 고려와의 전쟁 쪽으로 많이 설명되지만, 실제로는 내치도 훌륭했다. 우선 성종은 법의 집행을 공평히 하였다. 귀천에 따라 법 집행이 다르면 백성의 원망을 받는다는 것을 제기하고는 "황족이나 친척들의 죄는 백성과 똑같이 처벌한다"고 공포했으며, 노비가 죽을 죄를 지어도 "주인이 노비를 함부로 죽일 수 없으며, 관청의 재가를 받아야 한다"는 내용의 법령을 내렸다.

왕정 시대의 군주들은 이런 건 말로만 공포하고 실천하지 않는 군주들이 많았는데, 성종은 이를 직접 실천했다. 한 번은 서북군로사 총령으로 있던 부마 소도옥의 아내인 13녀 금향공주 새가가 노비 한 명을 함부로 죽이자 즉시 금향공주를 공주가 아닌 '군주'로 강봉시켰고, 사위 소도옥은 집안 관리를 제대로 못했다고 파직 크리.

이뿐만 아니라 노비에 대해서 상당히 신경을 많이 썼는데, 새로 '초와부'와 '갈술부'라는 마을을 만들어 요하 동쪽에서 수렵이나 철을 제련하던 노예들을 새로 만든 마을의 평민으로 만들었다. 또한 여진족의 노예들도 각 마을로 편입시켜 평민의 신분으로 살게 했다. 심지어는 비리 문제에도 엄격해서 황족이나 친척들을 모아두고 이런 말을 했다. >"황족이 뇌물을 받았는데도 이를 사면해 준다면 이는 법이 폐지된 것과 같다." >"황족이 뇌물을 받는 일이 적발되면 평민으로 강등시켜 죄과를 치르게 할 것이다." -《요사》 61권

또한 적발된 탐관오리는 한 번 파직하면 죽을 때까지 임용하지 않았으며, 청렴한 관리들은 낮은 지위에 있어도 파격적으로 승진시켰다.

그리고 성종은 거란족의 조세 제도도 개혁했다. 백성을 동원해서 황무지를 개간하도록 하고 이들에게는 10년간 세금을 면제시켜 주었으며, 대대로 농업에 종사해 온 평민들에게는 토지 주인에게 소작료를 내도록 하는 등 나라에도 일정한 세금을 냈다. 그리고 변방 지역의 농민들에게 둔전과 개간 경작을 유도하면서 힘써 이런 황무지를 개간하는 백성들에게는 세금을 부여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이제 막 유목제국 체제 티를 벗지 못한 거란에서 조세 제도를 확립시킨 것과 엄정한 법치를 실현한 것이 성종의 최대 업적이다.

말년과 사망

50년 남짓한 재위기간 동안 나라의 정치, 군사, 문화를 크게 발전시켜 요나라를 동아시아 최강국의 위치로 올려놓은 명군이지만 재위 후반에는 성종도 긴장이 풀어졌는지 방탕해져서 사냥에 빠졌다고 하며, <거란국지>에 의하면 모여서 할 일 없이 술을 즐기고 향락을 누리는 것을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1031년 사망했는데 소갈증(당뇨병)을 오래 앓던 끝에 사망했다고 한다. 우연히도 피터지게 싸운 상대인 고려현종, 강감찬과 같은 해에 사망했다. 고려의 현종이 1031년 5월에, 성종은 그 다음 달인 6월에 승하했다. 강감찬은 그 해 8월에 사망했다. 죽을 때 유언으로 아들 흥종 야율지골(종진)에게 "전연의 맹을 잘 지켜서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있다. 재위기간이 49년에 달하는데 중국의 전 황제를 통틀어 재위기간이 4번째로 긴 황제다. [4]

그래도 《요사》에서의 성종에 대한 평가는 좋은 편이다. 요사에는 "거란의 황제들 중 재위가 길고 훌륭한 이름을 남긴 황제는 오직 성종뿐이다"라고 적혀 있다.

사후의 막장 황실사

사후 황실사가 좀 막장틱하다. 그래도 남북조시대 왕조보다는 훨씬 양반이다 성종의 정실은 본래 인덕황후로 이름은 소보살가(蕭菩薩哥)였는데 성종의 어머니인 승천태후의 조카이다[5] 기록에는 얼굴도 아름답고 성품도 훌륭해서 성종과의 사이는 좋았다고 한다. 아들을 둘 낳았으나 이 아들들은 모두 일찍 죽었다.

뒷날 성종은 소누근(蕭耨斤, 사후 흠애황후)이라는 후궁을 가까이 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들이 바로 흥종이 되는 야율지골이다. 이 아이는 소보살가가 직접 양육했는데 그녀는 자신이 낳은 아들은 아니지만 친아들처럼 매우 아꼈다. 소누근 역시 소보살가를 옆에서 모셨지만 속으로는 그런 상황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성종이 병에 걸려 위중해지자 소누근이 성종의 병수발을 들었는데, 소누근은 대놓고 소보살가를 무시하기 시작했고 성종이 죽고 야율지골이 흥종으로 즉위하자 소누근은 스스로 황태후가 되었고, 소보살가에게 역모 혐의를 씌워서 유배시켜 버렸고 [6] 결국 사람을 보내 그녀를 죽여버렸다. 소보살가는 자신을 죽이러 온 사자에게 "내가 죄가 없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일. 죽기 전에 몸을 깨끗이 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말을 했고 결국 목욕을 한 후 죽음을 당했다.

이 무렵은 고려도 현종이 죽고 덕종이 즉위했을 무렵인데, 덕종 항목에서 볼 수 있듯이 고려사를 보면 거란족 고위 관료들이 대거 고려로 망명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이 정치 혼란 속에서 고려 뿐만 아니라 여진이나 송나라 등의 주변국으로 도망친 거란인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어쨌든 소누근은 황태후로 섭정을 맡아 권력을 행사했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1034년에 동생들을 모아 자신의 차남이자 흥종의 동생인 야율중원을 황제로 세울 음모를 꾸몄다. 그런데 야율중원은 이 음모를 형 흥종에게 알렸고 흥종은 어머니의 태후 옥새를 빼앗았고 유폐시켰다. 그러다가 5년 후에 흥종은 어머니를 유폐한 것을 후회하며 다시 마차를 몰아 어머니를 맞아들여 효도를 다했다고 한다. 결국 소누근은 아들의 효도를 받으며 잘 살다가 1055년에 흥종이 먼저 죽었고, 흥종 사후 2년 뒤에 병사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소누근은 죽고 나서 자신이 죽음으로 몰아넣은 소보살가와 함께 성종의 능인 경릉에 묻혔다.

사극

천추태후에도 등장했데, 여기서는 무슨 폭군처럼 그려졌다. 요나라 역사상 최고의 명군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닌 인물이 이런 다혈질 군주로 나오다니....[7] 지못미. 심지어는 300에 나오는 관대한 대왕님과 비슷하다는 감상도 있었다.

그래도 야율융서는 이 드라마에서 단순히 찌질이로 끝나는 게 아니라 남자다운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이 시대 고려 최고의 장수 중 하나라던 강조를 죽이게 되었을 때 무턱대고 사형에 처한 것이 아니라 "내가 엄선한 갑사 100명을 불러와서 다 쓰러뜨리면 석방한다"는 조건을 걸었다. 강조는 70여명까지 쓰러뜨리고 최후를 맞이했는데, 이러한 강조를 야율융서는 융숭히 장례를 치뤄주었다. 배우는 청년기는 오건우, 중년기는 장동직. 청년기의 성종을 연기한 오건우는 2011년 1월 13일 교통사고로 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중국의 사극이나 무협 드라마에서는 주로 송나라 때의 무인인 양업과 그 아들들의 이야기이자 무용담으로 인기가 높은 <양가장> 시리즈에서 등장하지만 주인공이 송나라 무인들이다보니 적 포지션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어쩐지 성종 본인보다는 모후인 승천태후 소씨가 실질적인 최종보스로 등장하다 보니 어머니의 막강한 포스에 많이 가려진 분위기.

외부링크

  1. 1차 침략은 직접적 침략이라기 보단 후방정리 차원이었고 강동6주는 사실상 무주공산이기에 고려가 점령해도 묵인해주겠다는 것에 가까워서 당시로선 서로 윈윈하는 상황이었지만 고려는 이 강동6주를 완전 요새화 해서 요나라를 엿먹인다.
  2. 이때 양규 장군은 견고한 성채에 웅거해 있으면서도 틈틈히 기병을 보내서 요나라의 후방을 마구 교란했다. 그러나 요나라 군대에게 막대한 타격을 입히던 양규 장군은 침공 막바지에 안타깝게도 전사하고 만다.
  3. 이 여파로 요나라는 사실상 피해복구가 안 되어서 서하나 송과의 전쟁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여진족의 준동을 막지 못하는 등 힘을 쓰지 못한다.
  4. 1위는 청나라강희제(61년), 2위는 청의 건륭제(60년), 3위는 전한무제(53년).
  5. 정확히는 승천태후 남동생의 딸. 성종과는 고종사촌남매가 된다.
  6. 이 와중에 소손녕의 아들인 소필적이 소보살가에게 충성을 다했는데, 그 역시 이 역모사건에 걸려 죽었다. 이 때 소필적의 부인이 여진으로 도망가자고 했지만 소필적은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7. 소배압강감찬에게 발렸다는 소식을 듣고 "얼굴 가죽을 벗겨버려라!"라고 버럭한 데서 인물상을 차용한 것 같다. 물론 진짜 얼굴 가죽을 벗기지는 않았다. 10만명 날려먹었는데 안 그럴 왕도 드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