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조 강황제 이진


대한국 대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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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국 황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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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제4대 황제
성조 강황제 | 成祖 康皇帝
본명
이진 (李𡋤)
태화 (太和)
출생
1899년 6월 29일
대한제국 한성부 창덕궁 대조전
사망
1967년 1월 4일 (향년 67세)
대한국 한성부 창덕궁 흥복헌
국적
대한제국(이전)
대한국
재위기간
대한제국 황태제
1918년 7월 21일 ~ 1922년 2월 2일 (3년)
대한 제4대 황제
1922년 2월 2일 ~ 1967년 1월 4일 (4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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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전주 이씨
아명
만길(萬吉) → 우용(萭鎔)
부모
고종 광황제 이천 (부친)
영선광황후 이씨 (모친)
형제
순종 효황제 이택 (형)
경친왕 이원 (남동생)
정친왕 이영 (남동생)
경선공주 (여동생)
경순공주 (여동생)
배우자
성명강황후 민씨 (정비)
명빈 성씨 (후궁)
의빈 양씨 (후궁)
청빈 송씨 (후궁)
자녀
광종 평황제 이휼 (장남)
의친왕 이율 (차남)
희선공주 이영혜 (장녀)
희진공주 이경혜(차녀)
희예공주 이문혜 (삼녀)
연호
강명剛明
묘호
성조成祖
존호
대인현덕성리광절승온무선[1]
시호
경장평문효헌소열강황제[2]
왕작
성친왕(成親王)[3]

개요

성조 대인현덕성리광절승온무선경장평문효헌소열강황제(成祖 戴仁玄德盛理光節勝溫武宣敬章平文孝獻昭烈康皇帝) 이진은 대한의 4대 황제이다.

순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여 대공황, 2차 세계대전, 냉전, 64 한성올림픽을 모두 겪은 군주이다.

생애

유년기

성조 강황제는 광무 22년(1899년) 6월 29일 고종과 영선광황후 이씨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당시 황태자였던 형 순종이 있어 황위와는 거리가 멀 것이라고 생각되어 비교적 자유롭게 성장하였다.

유년기 성조는 피아노와 그림에 흥미를 붙였다. 공부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하였으나, 반대로 예술에 관해서는 열성적이었다. 고종은 처음에는 이를 말리려 하였으나, 황태자의 만류로 계속 흥미 붙이도록 놓아두었다.[4] 황태자의 자리는 큰형이 확실하게 자리매김 하였으니 비교적 황실임에도 자유롭게 성장하였다.

성친왕

광무 31년(1908년) 황제의 명으로 성친왕에 책봉되었고, 광무 33년(1910년) 아버지 고종이 훙서하였다. 뒤를 이어서 순종이 서른 하나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융희 연간의 성조는 정치적인 행보를 밟지 않으려 크게 노력하였다. 큰형 순종이 즉위 당시에 아들은 전부 요절하여 딸 둘만 있었기에, 변이라도 생기면 황실전범에 근거하여 맏동생인 성조가 즉위할 것이었다. 그렇기에 순종은 겉으로는 그렇지 않았지만 내심 앞으로 태어날 후계자를 위해 성친왕을 의도적으로 제왕교육에서 배제하고자 그의 예술을 더욱 후원하였다.[5]

융희 4년(1914년) 15세가 되는 해에 친왕비를 들였다. 같은해 황족군무학령(皇族軍務學令)에 따라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여 군 교육을 받기 시작하였다. 같은 기수인 인물은 김홍일, 이범석, 안창남 등이 있다. 김홍일의 회고록에 따르면 성조는 황족이라는 지위를 내세우지 않았고, 겸손하게 행동하였으며, 신분에 차등을 두지 않고 사귀었다고 한다. 성적은 우수하지도 않고 뒤떨어지지도 않았다. 성조는 대전쟁에 대한 정보를 동기들과 나누고 토론하기를 즐겼다 하며, 신병기와 비행기에 대한 이야기를 특히 많이 나누었다고 한다. 2년간 무관학교에서 수학하고 소위로 시위대(侍衛隊) 제1대대 참모로 부임하였다. 이듬해에 군에서 떠나 성친왕저로 돌아왔다.[6]

융희 7년(1917년)까지 황자가 태어나지 않자 순종은 사실상 후계자로 성조를 낙점하였다. 궁내부대신이 "태제로 책봉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국무를 행할 줄 알도록 성친왕에게 전 시강원 관리들에게서 교육받게 하라"는 요지의 상소를 올렸고, 다음 해 7월 21일 성친왕은 공식적인 태제로 책봉받았다.

칙명 아래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부터 성조는 유럽의 여러 국가들을 순방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대신들은 융희제의 건강이 좋지 않아지는 가운데 태제를 멀리 보내는 것에 작은 반대를 표하였으나, 총리대신과 궁내부대신이 성조의 부족한 경험을 채우기 위해 순방을 강력히 주장하였고, 순종의 최종 인가를 통해 1921년 3월부터 9월까지 여러 국가들을 차례대로 순방하였다.[7]

황성으로 복귀한 이후에는 건강이 좋지 않은 융희제에 의해 내정에 관한 부분에서 대리청정을 맡기 시작했다. 총리대신 오세창이 성조를 보좌하였으나 순종에 비해 크게 부족한 정치적 감각과 내정 운영 능력으로 많은 걱정을 샀다.

즉위

융희 12년(1922년) 2월 2일 형황 융희제가 급사하였다. 성조는 관례에 따라 세 번 거절하는 절차를 밟은 후 만 22세의 연호를 강명(剛明)으로 하여 즉위하였다.

당대 순종이 누리고 있던 황권은 절대적이었다. 순종은 황실 직속 첩보부인 익문사를 동원해 대신들의 동향을 하나 하나 파악하였으며, 또 부황 고종에게서 물려받은 권위에다가 세계대전으로 인한 경제특수를 통해 치적을 일궈내면서 무소불위의 권좌를 쌓을 수 있었다. 다만 성조는 이러한 권력을 그대로 물려받을 수 없었다. 순종이 익문사를 동원할 수 있던 가장 큰 요인인 익문사 요원들과의 개인적인 감정 교류, 그리고 외척 인사들의 임명이 새 황제임에 따라 사라졌고, 은퇴 이후에도 황제의 꾀주머니 역할을 하는 김옥균 총리와도 면식만 있는 정도였다.[8]

게다가 성조는 어떻게 제국을 운영해야 할지에 대한 명백한 계획조차 없이 형황의 훙서로 급작스럽게 즉위한 터라, 좋건 싫건 황제를 최종 결정권자와 국가의 머리로 여겼던 내각과 각료들은 서서히 자체적으로 국정을 꾸려가기 시작했다. 다만 이는 성조와의 필연적인 충돌을 빚어낼 수 밖에 없었다. 준비되지 않은 군주라도 할지라도 성조는 황권에 대한 인식과 조상들의 유산을 간직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고, 그렇기에 부족한 권력을 쟁취하려 들었다.

삼남소작쟁의에서는 직접 전라도로 행차하여 관리들을 파직하고 철저한 수사를 명하였다. 을축년 대홍수 당시에 정부가 지급하는 것 외에 황제의 칙명으로 구휼미를 내리면서 비난은 정부에게로, 찬양은 모두 황제에게로 가도록 하였다.

다만 강명금융공황, 즉 정묘공황 시점부터 이러한 황제의 권력에 대한 집착은 한 풀 꺾였는데,[9] 다름이 아니라 성조 자신이 바라보기에 충분히 원하는 만큼 정부를 통제할 수 있으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1927년 즈음 들어서면서 한국에 퍼져있던 민간 내각 무용론과 데모크라시에 대한 무관심은 황제에게 이런 생각을 심어주기에 충분하였다. 그렇기에 성조는 브나로드 운동의 파괴와 1932년 이진호 내각 불신임을 끝으로 따로 정치적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10]

전쟁기

이러한 성조의 불간섭은 1936년부터 깨지기 시작하였다. 파고다 참변은 강명 14년(1936년) 1월 일본 출신 마츠쿠라 지로(松倉二郎)가 한성 순방을 다니던 성조에게 폭탄 테러를 감행한 것이다. 당시 시위대원이던 윤봉길의 저지로 이는 실패로 돌아갔다. 허나 당시 경호의 총책임을 지던 경무국과 내각에 대해 이 시점부터 성조는 크게 실망하였고, 한동안 총리대신의 알현을 받지 않아 민주당(民柱黨)의 정치적 몰락을 가져오게 하였다.

허나 황도파들의 2.26 사태가 발생하게 되면서 통제파가 부상하게 되었다. 당시 성조는 계엄령을 내리면서 그 사령관으로는 군부다신 문창범을, 부사령관으로는 원수부 참모부 총장 이병무를 봉하였다. 추가적으로 '황족 장교'이기에 손으로 쓸 수 있겠다 여긴 이강을 계엄사 조사위원장에 임명하였다. 통제파의 일원인 이강은 이동휘, 최진동 등과 의논하여 군의 영향력을 늘리고자 하였고, 이강이 황제와 밀회를 하면서 의석을 꽤나 차지하던 신한청년당을 이용하여 황권을 강화할 수 있으리라 설득하였다.

1936년 2월부터 서울 경기로 내려진 계엄령 가운데 계엄사는 파고다 참변 이후 일본 유신전쟁으로 대표되는 독립운동, 검계로 대표되는 폭력조직들을 경부와 신한청년당 산하 대한민족청년단을 동원해 진압하여 국내의 지지도를 끌어올렸다.[11] 다만 계엄 시기 때 신한청년당의 일원 혹은 삼균주의에 경도된 이로 추정되는 암살자들이 당시 대한당 당수였던 박중양을 암살하면서 수사의 총 인가권을 쥔 성조에게 칼자루가 돌아갔고, 청년당과 이강에게 빚을 달아둘 수 있었다.

9월에 치뤄진 총선거를 통해 민의원이 구성되었고, 의석수가 부족한 대한당과 신한청년당은 연립정부를 이루었다. 총리로 선출된 것은 이강이었으나, 이강의 권력 기반은 대한당과의 연정, 신한청년당 내 조직위원장 이은과의 연줄과 군부, 황제의 지지였다. 그렇기에 이강 내각은 황제 그리고 황국협회로 대표되는 군주의 꼭두각시들에게 정치적 양보를 거듭할 수 밖에 없었다.

허나 이러한 성조의 '목줄쥐기'는 어이없게 끝나게 되었다. 익문사 요원의 감청이 작은 실수로 걸리게 되면서 역으로 황제에게 압박이 들어갔고, 이에 다시금 정치에 질린 성조는 불간섭 원칙을 꺼내들면서 내각에게 정무를 일임하였다. 다만 1937년 한중전쟁 발발 당시에는 이러한 불간섭 원칙을 잠시 깨면서 전쟁의 중단 의사를 내비쳤으나, 이강 총리의 강력한 주장, 그리고 북경정부의 후퇴 등으로 곧 그 뜻을 철회하였다.

1939년 정계에서 이강을 전쟁을 빨리 끝내지 못하였다는 명목으로 연립정권이 무너지자 그를 해임하였으나 곧 정치적 빚을 무효화하기 위해 청년당 단독으로 개각시키는데는 동의했다.[12] 이듬해 총선에서 신한청년당이 47%의 의석을 차지하자, 이강의 혐의를 벗겨주고 다시금 총리로 지명하였다. 1940년 인도차이나 진주와 1941년 진주만 공습에 최종 승인을 내렸으나, 한국군은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패배하였다.

1942년 신한청년당이 전쟁의 원활한 수행을 위해 대연정을 주장한 것을 승인해 사실상 민의원 전체가 하나로 움직이는데 동의하면서 삼권분립을 완전히 파기했다.[13] 1943년에는 일본 공세가 완전히 돈좌되었고, 1944년과 45년을 거쳐가지고는 전략물자와 숙련병이 동나기 시작해 패전이 확실해졌다. 그러나 국체호지와 군주제 유지라는 조건을 내건 채 정부는 끝까지 항복을 반대하였다. 결국 의주와 군산에 핵이 투하된 이후에서야 성조는 항복 반대파를 전부 물리치고 1945년 8월 15일 연합국에게 항복 선언을 하였다.

전후

연합군이 한성에 입성한 이후 성조는 맥아더와 회담을 진행하면서 "전쟁의 책임은 자신에게 있으니 국민들에게 가혹한 징벌을 내리지 말라"고 말하였다. 회고록에서 맥아더는 자신에게 어떤 벌이 내려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불이익을 전부 감수하리라는 용기에 감동하였다고 한다.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의해 한국에서는 기존에 황제가 가지고 있던 모든 권력과 그 기반들이 적출당했다. 맥아더의 계획에 따라 한국 황제는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 뿐이 전락하였다. 내탕금을 비롯한 자산들도 국고로 몰수되었고, 황제와 인척들은 국회에서 예산을 타서 사용하게 되었다.

1947년 대한국 헌법이 반포된 이후 공식적으로 한국 정치에 일절 개입하지 않게 되었으나, 종묘 제례나 전몰자 추모 등의 행사를 진행하면서 존재감을 드러내었다. 다만 일전까지 군림하던 권위는 어디 가지 않았기에, 핵 피해 위문 순행 당시 의주에서 황제에게 '만세'를 연호하는 사람들의 영상을 찾아볼 수 있다.

말년

대전을 거치면서 건강이 안좋아지기 시작한 성조는 50년대 들어서 잔병치레를 하게 되었고 60년대에 들어서자 많은 시간을 침상에서 지내게 되었다. 61년 공식적으로 황태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였다. 1964년 한성 올림픽 개최 이후에는 아예 공식 석상에서 거의 모습을 내비치지 않았다.

강명 45년(1967년) 1월 4일 신년이 지난지 얼마 되지 않던 날에 성조는 숨을 거두었다. 황태자는 종친부에 친히 명하여 묘호를 성조(成祖)라 지어 올렸고 시호로 경장평문효헌소열강황제(敬章平文孝獻昭烈康皇帝)를 바쳤다.

제위는 황태자 이휼이 연호를 논어에서 따와 헌문(憲問)으로 하여 이어갔다.

묘호

종친부(宗親府)에서 회의(會議)하여 대행 대황의 시호를 ‘경장 평문 효헌 소열 강황제(敬章平文孝獻昭烈康皇帝)’로 정하고, 묘호(廟號)는 성조(成祖)로, 전호(殿號)는 위덕(偉德)으로, 능호(陵號)는 완릉(完陵)으로 정했다.
강명 45년(광종 즉위년 / 1967) 1월 5일 첫번째 기사

성조의 묘호에 관해서는 당대에 가장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원래 묘호를 정하는 것은 대한제국 선포 이후 고조를 제외하면 궁내부에서 맡는게 정석이었는데, 광종이 이 전례를 깨고 종친부에서 올리라 명하였다. 심지어 본래 성成이라는 묘호는 한국 역사상 큰 위업을 이룬 군주에게 올리는 것이었고, 조祖는 나라의 중시조에게 올리는 것이었다. 사실 성조는 황제로서 이뤄낸 업적이 그다지 없었고, 다들 쉬쉬하지만 대한제국이 패망하는데 일조한 인물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당시 궁내부대신 이명세가 이러한 묘호에 대해 반대를 제기하였다.

궁내부대신(宮內府大臣) 이명세(李明世)가 상소하기를,

"신이 듣건대, 대행 대왕의 묘호를 조(祖)자로 의정(議定)해 올려 이미 품재(稟裁)를 거쳤다고 합니다. 신자(臣子)의 숭배해 받드는 생각에서는 진실로 최선을 다하지 않는 바가 없어야 하는 것이고 보면 이 조자로 의정한 것이 마땅하다 하겠습니다마는 혹시 의리에 맞지 않고 정론에 부합하지 않는 바가 있을까 염려스럽습니다. 대행 대황의 성대한 공덕으로 볼 때 이 명호(名號)를 받으신 데 대하여 아마 비의(非議)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이 들은 바는 이와 다름이 있습니다.
(중략)
우리 대행 대황께서는 순종(順宗) 의 사랑을 많이 받아 그 도의에 부합하시고자 정도(正道)를 꾀하였고 해동의 예악을 바로 다잡고자 하여 그 뜻을 이루려 하였습니다. 그 성덕을 종(宗)으로써 칭하고자 하는 것은 조(祖)를 올림과 다르지 않고, 또 조를 올림으로써 전례를 무시하며 대행 대황께서 받들고자 하는 선대제들과의 의리와 그 뜻이 흐려지지 않을까 차마 두렵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는 예로부터 통용된 전례이며 내 생각컨데 대행황의 공덕을 기리기에는 종으로써 부족한 부분이 많다. 그대는 사사로운 생각으로 나라의 일을 흐트리려 하지 마라."

라 하였다.
강명 45년(광종 즉위년 / 1967) 1월 12일 3번째 기사

허나 광종은 그러한 반대 의견들을 전부 묵살하고 묘호를 선행한 것으로 유지하라 명하였다. 당연히 성균관이나 남아있는 서원 등지에서도 상소가 올라왔으나, 이를 더 논하지 말라고 엄포를 두었다.

가계

* 증조부: 풍계군 이당
* 조부: 익평대원왕 이희
* 부친: 고종 광황제 이천
* 모친: 영선광황후 이씨
* 형황: 순종 효황제 이택
  • 후궁: 명빈 장씨 (1903 ~ 1929)

평가

즉위 초반기, 고조, 고종, 순종 등의 황제가 구축한 황권을 온전히 이어받지 못한 채 즉위한 상황 속에서 선대가 아닌 자신만의 정치를 하려 한 시점부터 성조의 정치는 불안함을 내포하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익문사를 장악할 수는 있었으나, 내각 관료들과의 교류와 신뢰를 쌓을 수는 없었기에 여러가지 책략을 동원하여 정치적 입지를 다질 수 있었다.

이러한 성조의 정치는 어떤 정책에 흥미를 붙였다가 마는 등 변덕스러움이 자주 보였다. 이러한 문제의 근본적으로 성조가 키를 잡은 시기 대한제국의 문제점에는 성조가 가진 대한제국의 미래 구상이 없었다는 것에서 시작했다. 황제가 나라를 어떻게 꾸려가야 할지에 대한 비책이 없었기에 강명 연간 초반의 정치가 혼란스러웠다. 다만 즉위 3년 즈음부터는 성조가 '수성'과 '견수'라는 명백한 목표를 설정하면서 이러한 혼란은 줄어들게 되었으나, 관료들이 황제에게 보내는 시선은 즉위 초반의 경외보다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정적을 바라보는 것에 가까워졌기에 정치적 입지가 줄어든 상태로 국정을 운용하기 시작하였다.

20년대 말에서 패전 전까지의 성조의 정치는 군림하며 바라보는 군주였다. 그는 여러가지 정책적 실패와 내각에 가해지는 부담을 바라본 후에 정치 자체에 질렸다. 그렇기에 사회와 정계의 핵심적인 문제사항이 아니고서야 왠만하면 내각의 선택을 존중하였다. 이 시기 성조는 '목줄잡기'에 치중하여 황권에 도전하는 이들만 제압하는 것을 선호하였다. 브나로드 진압에 소극적인 것과 군 내 황족 장교들의 진급에 반대하던 이진호 내각을 대놓고 해산시킨 것과, 황제의 명을 미이행하고, 한중전쟁을 장기화시킨 이강의 관직을 추탈한 것에서 목줄잡기는 잘 드러난다.

그러나 30년대와 40년대에 이러한 관망과 사후 개입은 큰 문제를 야기하였다. 확고한 주관으로 황제의 중재와 개입이 필요했던 인도차이나 진공, 태평양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하는 내각의 여론에 설득되어 이를 막지 않았고, 결국에는 제국의 최종 결정자이자 군 통수권자로서의 업을 제대로 수행치 못하고 패전이라는 끔찍한 결과를 불러일으켰다.

전제군주로서의 성조는 선대 군주들과 비교했을 때에 낙제점이다. 확고한 계획을 가지고 나라를 운영하는 것이 필수적인데, 제대로 된 제왕 교육을 받지 못하고 급작스럽게 즉위하였기에 대한제국이라는 열강의 머리로 활동하기에는 부족하였다. 허나 성조의 관망 사실 방관에 가까운 정치는 패전 이후에는 역으로 입헌군주에 적합하였고, 맥아더와 미국 정부가 황실과 군주의 존치라는 결정을 내리게 만들 수 있었다.

여담

  • 성조는 많은 고정관념과는 달리 내향적이었다고 한다. 황제로서 신민 앞에 섰던 것은 의무감이 받들어주었던 것이 컸고, 평소에는 과묵하고 진중한 편. 그러나 자식들이 찾아오면 외향적으로 뒤집혔다고.
  • 장남 광종 평황제 이휼, 차남 의친왕 이율 하고 많은 시간을 보내었다고 한다. 성조 본인이 아버지가 어릴 때 훙하여 상처를 입었는데, 자식들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드러났다.
  • 성조 시대부터 실록이 완전 한글로 작성되기 시작하였다. 이전까지는 진서(眞書)라고 불리던 한자(漢字)가 사용되었으나, 성조가 즉위한 이후[14] 작성된 실록은 전면적인 개편작업을 완료하여 한글로 기록되었다.[15]
  • 권력욕이 강하였다. 황태제로 즉위하여 초기 황권은 선제들보다는 약하였기에, 최대한 배운 것을 이용하여 정계를 뒤에서 조종하였다. 통제파 또한 처음에는 황제의 정부 장악 수단으로 사용하여 하였으나, 그 수단이 통제가 힘들어지자 아예 손에서 풀어버리고 책임이 없는 피해자 행세를 하였다.

창작물에서

  • 대한의 개화기와 세계대전 직후까지를 다룬 대하드라마 "광야"에서 성친왕 시절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피아노를 즐기는 모습으로 나왔으며, 배우는 전주 이씨 은언군파의 이택주[16].
  • 영화 마지막 제국(2012)에서 전쟁에 반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17], 마지막 장면에서 항복조서를 발표하는 모습을 비추었다.
  • 패러독스 인터렉티브가 만든 Hearts of Iron IV에서 대한제국의 군주로 등장. 국민정신으로 존재하는데 안정도를 무려 30%나 올려준다[18]. 중점 루트를 타면서 황도파의 쿠데타가 성공하면 강명유신으로 갈 수 있으며, 공산주의 루트를 타면 한반도를 떠나 만주 쪽에서 내전을 치루는 반군의 지도자가 된다.


  1. 戴仁玄德盛理光節勝溫武宣
  2. 敬章平文孝獻昭烈康皇帝
  3. 즉위 전 고종에게서 받은 작위. 황태제로 책봉되면서 환속되었다.
  4. 성조는 이후에 피아노는 어느정도 손 놓았으나, 유화 그림 만큼은 꾸준히 이어나가 매우 큰 예술적 가치를 자랑하는 그림들을 그려냈다.
  5. 다만 와중에도 눈치없는 사람들이 황태제로 책봉하라고 했다. 순종실록 1권 융희 원년 3월자 발췌.【황제가 말하길. "짐이 겨우 이립을 지났으니 어찌 섣부르게 황태제를 정하겠는가? 영묘께서도 불혹을 넘으신 후에 장조를 봉하셨으니 더 이상 이를 논하지 마라"】
  6. 전직 궁녀였던 김명길씨 회고록에서는 융희황제가 1년 정도 더 군에서 복무하게 할 것을 황후와 대비가 크게 말렸다고 한다.
  7. 이는 순종에게 있어 큰 행운이었는데, 공교롭게도 다음 해 2월에 병으로 급사하니 황태제에게는 마지막 외국행이 됐다.
  8. 이는 전적으로 순종의 잘못으로, 후계자를 봉하는 것이 죽기 5년 전인 것도 모자라, 심지어 3년 간은 후궁에게서 아들이 태어날까 정치적 자산을 물려주는 작업이 이뤄지지도 않았다.
  9. 2004년 KBS특집 "성조는 누구인가" 中정친왕 인터뷰
  10. 1933년 탕산 격전 당시 강인수를 비롯한 관련자들을 전부 처벌하게 한 것은 내각과 의논하여 정한 사항이다.
  11. 강명 14년 당시 신한청년당의 당수는 조소앙, 부당수는 이은이었다. 이은을 통해 황제와 이강, 군 내 통제파는 신한청년당을 조종하였다.
  12. 이는 당시 통제파, 그리고 기성 정계의 줄다리기에서 이강이 희생양으로 총리직을 내려놓은 것이었다.
  13. 사법부 역할인 평리원은 행정부 소속 법부 산하에 있었다. 심지어 평리원 최고재판관의 1/3은 황제가, 1/3은 정부가, 1/3는 의회가 임명하였는데, 사실상 2/3이 국가원수인 군주의 의중이 달려있었다. 이 상황에서 의회까지 행정부와 결부시키니 말 그대로 전제군주권을 얻었다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정부 내 인사들과의 정쟁을 예외로 간주하면.
  14. 사실 순종 중반부터는 실록에서 한문을 빼는 작업이 추진되었고, 후반부 가서는 순한글로 작성되었다.
  15. 참고로 광종 말기부터는 실록 전산화 작업이 추진되어, 광영황제부터는 순한글에 전자실록이 되었다. 물론 책으로 된 실록도 존재는 한다.
  16. 전계군의 3남 덕평군 이변의 후손이다
  17. 이 부분은 역사왜곡이라는 논란이 존재한다.
  18. 물론 옆나라 일본의 쇼와 덴노는 안정도 60%, 정치력 15%, 전쟁지지도 5%나 주는 사기 지도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