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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시대
"만약 새로운 정치 세력이 등장했다면?"을 바탕으로 제작된 시즌제 대체역사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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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동아일보 1면에 실린 박종철 사망사건 발표
(물고문도중 질식사)

1987년 1월 14일, 서울대학생 박종철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목숨을 잃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 때 중앙일보의 신성호가 이 사실을 보도함으로써 모든 신문사가 중앙일보에 전화하여 그 진위를 물었으나 경찰은 병원에서 숨졌다거나 은폐 보도를 하는 등 사건을 축소하느라 바쁜 상황이었다. 이 때 박처원 치안본부 5차장 겸 대공수사처장이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라는 문제의 발언을 함으로써 전 국민을 떠들썩하게 만든다.

언론 기자들은 사건의 행방을 위한 추적을 개시했고, 5공 기간 동안 경찰에 밀려있던 검찰은 부검을 강행한 끝에 고문의 의한 경부 압박 질식, 즉 물고문으로 인한 사망임을 밝혀냈다. 이런 와중에도 5·18 민주화운동 당시 진압부대 특전사령관을 맡은 신임 내무부장관인 정호용은 사건을 수습하겠다며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때리느냐"는 발언으로 논란이 되었고,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2차 수사 결과에서 고문이 있었다고 발표하며 위의 견해를 뒤집고야 만다.

여기에 동아일보 해직 기자였던 이부영은 사건이 축소조작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면서 정의구현사제단에 전달해 김승훈 마티아 신부의 폭로로 은폐를 무위로 돌리는 데 성공한다. 여기에는 고문 경찰이 조한경, 강진규 뿐만 아니라 3명이 더 있었다는 폭로도 있었는데, 정구영 서울지검 검사장은 5월 21일이 되어서야 이를 인정했다. 동아일보에서는 이 사실이 알려지자 경찰의 사건 은폐 사실과 가담자 축소 보도를 대서특필하기에 이른다.

6·29 선언
경향신문 1면에 실린 직선제 개헌 선언
(노대표 직선개헌 선언)

한편 전두환 대통령은 박종철 사망으로 인한 국민적 분노가 민주화로 이어질 것을 우려해 이듬해에 열릴 서울올림픽을 구실로 호헌 조치를 발표하는데, 그 말인 즉슨 대통령 간선제(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선출됨)를 존치하되, 서울올림픽이 끝나기 전까지는 일체의 개헌 논의나 민주화 시위를 중단해달라는 것이었다. 이를 두고 야권과 시민들은 정부가 더 이상 협상할 여지가 없음을 알면서 크게 반발한다.

그러나 항쟁 전날인 6월 9일, 각 대학교들이 사전집회를 열던 중 연세대학생 이한열이 후두부에 최루탄을 맞고 쓰러지는 사건이 일어나고, 학교는 발칵 뒤집힌다. 결국 이 것이 국민적 항쟁으로 번지면서 전두환 정부의 호헌조치와 26년 간 이어진 군사 독재에 종지부를 찍는 결과로 이어졌으며 미국도 정부의 강경 진압에 경고하는 등 외교적인 반발에 부딪혔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민주정의당의 대선 후보였던 노태우는 6월 29일 특별 선언문을 발표한다.

이 선언문에서는 대통령 직선제, 선거법 개정, 시국사범 사면복권, 신헌법에 기본권 보장, 언론 제도 개선, 사회 전반을 비롯한 자치·자율 보장, 자유로운 정당 활동 보장, 사회정화 조치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는데, 노태우는 이 선언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겠다고 밝히자 정부의 특별 담화, 민주정의당의 공식화를 통해 이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은 4·19, 부마항쟁, 5·18, 6월 항쟁 동안 희생으로 일궈낸 민주주의를 되찾아 기나긴 군사 독재를 마무리하였고, 이후 10월 27일 국민투표가 끝에 오늘날(9차) 헌법이 공포되면서 제6공화국은 막을 내린다.

야권 개편
왼쪽부터 김종필, 김영삼, 김대중
시국토론회 도중 고개를 돌리는 김영삼과 김대중

이 때 재야 민주화 세력의 축이었던 김영삼과 김대중은 내각제를 추진하겠다는 이민우 구상의 후폭풍으로 1987년 신한민주당을 탈당해 새로운 정당인 '통일민주당'을 창당한다. 그러나 시작부터 정치깡패들의 방해 사건을 겪으면서 난항에 빠지지만, 6월 항쟁을 주도하여 민주화를 이룩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지속적인 단일화 실패와 계파 갈등이 당의 위기를 불러왔으며 결국 10월 29일 김대중을 포함한 동교동계가 이탈하여 '평화민주당'을 창당, 야권이 분열되었다.

박정희 정부 시절 국무총리를 맡은 김종필은 정계 복귀 이후 박정희의 민주공화당을 계승하겠다며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해 충청권에서의 지지세를 얻고자 총력을 기울이는데 훗날 이 정당은 자유민주연합, 자유선진당 등으로 이어지는 충청권 보수정당의 시초가 된다.


관련 영상

어찌됐든 야권 개편으로 4개 정당이 맞붙게 될 첫 직선제 대통령 선거는 연고지를 바탕으로 한 지역 구도의 강화로 이어졌다. 전국적으로는 노태우가 대경권, 김영삼이 부경권, 김대중이 호남권, 김종필이 충청권에서 우세한 상황이었는데 김대중은 호남을 시작으로 수도권을 공략하기 위해 일명 '4자 필승론'을 내세운다. 뿐만 아니라 김종필을 제외한 세 후보는 여의도에서 세를 과시했으며, 그 과정에서 일어난 수 많은 부정선거와 폭력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인 유세를 이어간다.

1987년 11월 29일, 북한의 소행으로 인한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으로 선거에 판도가 뒤바뀌게 되었고, 이에 북풍 여론이 힘을 얻으며 노태우 후보 측에 힘이 실리게 된다. 이 상황 속에서 치러진 선거는 노태우 후보가 36.64%로 당선되어 군사 정부를 이끈 민주정의당의 정권 연장에 성공했다. 더불어 야권에서는 4자 필승론 붕괴와 충청권 보수 표 분산으로 인해 김대중, 김종필이 부진했지만, 김영삼은 부경권은 물론 전국에서 30%에 근접한 득표율을 얻어 선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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