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차 러시아-튀르크 전쟁 (1915)

  1939: Erster Weltkrieg by Ernst |  데스크톱  크롬  벡터 스킨 지원
제13차 러시아-튀르크 전쟁
러시아-튀르크 전쟁의 일부

보르조미 전투 중 러시아군 참호
날짜1915년 7월 7일 ~ 1917년 12월 10일
장소캅카스, 우크라이나 남부, 크림반도, 흑해
결과

제정 러시아의 패배
러시아 혁명 / 적백 내전의 발발
1917년 차리친 조약의 체결

교전국
오스만 제국 오스만 제국
불가리아 왕국 불가리아 왕국 (1916-)

지원국:
독일 제국 독일 제국
대영 제국 대영 제국
프랑스 식민제국 프랑스 식민제국
러시아 제국 러시아 제국 (-1917)
지휘관

오스만 제국 메흐메트 5세
오스만 제국 메흐메트 탈라트
오스만 제국 이즈마일 엔베르
오스만 제국 아흐메드 제말
오스만 제국 빌헬름 소숑
불가리아 왕국 페르디난드 1세
불가리아 왕국 니콜라 제코프
불가리아 왕국 게오르기 토도로프
불가리아 왕국 블라디미르 바초프
불가리아 왕국 스테판 토셰프
불가리아 왕국 클리멘트 보야드지예프
독일 제국 에리히 폰 팔켄하인
독일 제국 오토 리만 폰 잔더스

독일 제국 콜마르 폰 데어 골츠

러시아 제국 니콜라이 2세
러시아 제국 니콜라이 대공
러시아 제국 알렉세이 브루실로프
러시아 제국 알렉산드르 삼소노프
러시아 제국 파벨 레넨캄프
러시아 제국 니콜라이 루즈스키
러시아 제국 안톤 잘차
러시아 제국 파벨 플레베
러시아 제국 보론초프-다쉬코프
러시아 제국 이반 그리고로비치
러시아 제국 안드레이 에버하르트
소비에트 러시아 블라드미르 레닌
소비에트 러시아 이오시프 스탈린

소비에트 러시아 레프 트로츠키
제1차 세계 대전으로 가는 길
삼국 동맹 1882년
러불 동맹 1894년
제1차 대양함대법 1898년
제2차 대양함대법 1900년
영불 협상 1904년
러일 전쟁 1904년 - 1906년
제1차 모로코 위기 1905년 - 1906년
제3차 대양함대법 1906년
영러 협상 1907년
제4차 대양함대법 1908년
보스니아 위기 1908년 - 1909년
제2차 모로코 위기 1911년
이탈리아-튀르크 전쟁 1911년 - 1912년
제5차 대양함대법 1912년
제1차 발칸 전쟁 1912년 - 1913년
제2차 발칸 전쟁 1913년
사라예보 사건 1914년 6월
7월 위기 1914년 7월
제3차 발칸 전쟁 1914년 - 1915년
제13차 러시아-튀르크 전쟁 1915년 - 1917년
제6차 대양함대법 1916년
러시아 혁명 1917년
적백 내전 1917년 - 1922년
제7차 대양함대법 1922년
방공 협정 1923년
오스트리아-헝가리 내전 1923년 - 1925년
러시아 내전 1924년 - 1926년
독일계 오스트리아 병합 1925년
제4차 발칸 전쟁 1926년 - 1927년
제8차 대양함대법 1928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1930년 - 1931년
세계대공황 1931년 - 1939년
런던 해군 군축 조약 1931년
만주 사변 1932년
베를린 해군 군축 조약  
제2차 러불 협상  
제2차 영러 협상 1935년
제2차 에티오피아 전쟁 1936년 - 1937년
스페인 내전 1937년 - 1939년
루거우차오 사건 1937년
룩셈부르크 위기 1938년
이탈리아의 알바니아 침공 1939년
할힌골 전투  
독-일 조약  
9월 폴란드 위기  
제1차 세계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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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차 러시아-튀르크 전쟁 또는 캅카스 전쟁(러시아어 : Кавказский война, 터키어 : Kafkasya Savaşı)은 1915년 7월 14일 ~ 1917년 12월 10일캅카스 국경분쟁을 도화선으로 일어난 러시아오스만 사이에서의 열세 번째 전쟁이다. 러일 전쟁, 제3차 발칸 전쟁으로 제정 러시아의 군사적 역량이나 대외 영향력의 약화가 현저해지자 오스만 제국1877년부터 1878년까지 치루었던 제12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의 치욕을 씻고 캅카스 일대로 진출하려는 일명, 북진 정책을 수립했다. 이는 전반적으로 제정 러시아군의 상태를 과소평가하고 남부 캅카스의 오스만 친화력을 오스만 군부가 과대평가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긴장 관계 사이에서 1915년 7월 1일, 캅카스 국경 일대에서 오스만 군과 러시아 군 사이에서 소규모 총격전이 있었다. (캅카스 위기) 이를 계기로 오스만 제국에서 남부 캅카스 이슬람계 민족의 자결권을 요구함과 동시에 최후통첩을 보냈다. 러시아는 당연히 이를 거절했으며 이로 인해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의 대부분은 서유럽 열강의 지원을 받은 오스만에 유리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는 동안 러시아 내부 분위기는 급격히 격화되었고, 전쟁 중 10월 혁명으로 볼셰비키의 러시아 혁명이 시작되었다. 이는 적백 내전으로 확전되었고 이에 튀르크와의 전쟁을 지속할 수 없었던 러시아는 오스만과 트빌리시 조약으로 정전했다. 이 조약으로 러시아 남부 캅카스 일대가 오스만에 합병되었고 러시아 내 이슬람 세력의 보호를 약속받았다.

배경

오스만의 경우

제정 러시아1906년에 있었던 포츠머스 조약으로 극동에 강하게 유지하던 영향력을 상실했다. 또한, 제3차 발칸 전쟁에서 독오 동맹에 반하여 전쟁 수행 의지를 거두었고 그 결과 발칸반도에서 행사하던 영향력도 사실상 포기했다. 이에 오스만의 참모부에서는 자신들의 영향력을 캅카스 일대로 다시 확장시키려 했다. 상당 시간동안 오스만에서는 남부 캅카스에 자리잡은 이슬람 세력이 러시아보다 오스만에 친화적일 것으로 판단했고, 따라서 그들은 손쉽게 그들의 봉기를 일으켜 제국의 한 부분으로 통합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커다란 정책 기조에 따라 수립된 것이 북진 정책이다.

이러한 정책을 수립하는 것에 가장 큰 도움을 준 것은 제12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의 굴욕으로 러시아와 오스만 관계는 상당기간 흑해 일대에서 팽팽하게 충돌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는 캅카스 일대에 영향력을 늘리는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러한 정책의 보조자로 독일 제국이 등장한 것이 정책 시행에 가장 큰 추진력이 되었다. 빌헬름 2세3B 정책과 반 러시아 정책 기조에서 오스만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미 1915년 1월부터 발칸에서 있었던 전쟁에 중립을 유지한 대가로 다량의 독일제 무기를 싼값에 구입할 수 있었다. 또한, 독일 군사고문단이 오랜기간 오스만 군의 현대화를 돕고 있었다. 그들은 그들의 군사 체계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고 오스만의 신뢰는 매우 두터웠다.

러시아의 경우

반면 러시아의 경우, 그들의 선택지는 점차 사려져갔다. 러일 전쟁 이후 자신의 이권보호에 소극적인 경향을 보였다. 이러한 상부의 무능함에 국민들의 여론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그러한 국내 상황과는 별개로 남진 정책을 시행할 지리적 요충지는 점차 멀어져갔다. 발칸과 극동에서 더 이상의 진출은 각각 오스트리아-헝가리일본에 의해 저지되었고 영향력마저 완전히 소실했다. 따라서 영국에 맞서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란 방면으로 진출하는 것이 아니라면 오스만 제국을 제압하여 보스포루스 해협의 통제권을 얻어내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악화되는 내부 사항과 상부의 고질적인 우유부단함에 그들은 감히 영국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 수 없었다. 애초에 그들은 영러 협상으로 동맹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물론 발칸 전쟁이 발발하는 과정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러시아와의 협력의 많은 의문을 가지게 되었고 동맹 관계는 조금씩 뒤틀렸다. 니콜라이 2세는 서유럽 동맹국으로부터 신임을 얻기를 원했다. 결과적으로 러시아의 군부는 오스만을 제압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설정했다. 이는 영국에 간접적인 불안을 줄 수 있지만, 중동 방면으로 진출하는 것보다 안전하다고 평가되었다.

하지만, 러시아 내부에서 독일과 재보장 조약삼제동맹의 갱신하면서 반-오스만 전선을 구축하는 것을 주장하는 목소리도 커졌다. 그럼에도 서유럽 열강이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그리스와 러시아의 앞마당인 루마니아를 교두보 삼아서 발칸에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영국이나 프랑스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발칸의 소국들은 러시아를 불신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발칸 영향력이 회복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 분명했다.

도화선에 불 붙이기

1915년 6월에 이르러서는 양측 병력이 캅카스 국경 일대에 배치되면서 상당한 긴장감을 조성했다. 특히 오스만은 현대화가 거의 완료된 육군에 2개 군을 새로이 편제하여 배치하면서 캄카스 진출을 위한 준비를 지속했다. 그러던 도중 7월 1일, 아르메니아 고산지대에서 양측의 정찰대가 조우하였고 총격전이 벌어지면서 캅카스 위기가 있었다. 이 사고로 총 8명의 병사가 사망하면서 전운이 감돌았다. 이 사건으로 양 국가간의 갈등은 극에 치달았다.

오스만 제국에서는 독일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 불가리아 주재무관을 통해 외교 채널을 확보하여 그들의 지원을 확보하려 노력했다. 그러는 동안에 상부에서는 최후통첩을 몇번의 조정을 거쳐 완성한뒤 러시아 측에 전달했다. 7월 12일 전달된 최후통첩의 주요 사항은 남부 캅카스의 아르메니아, 그루지야, 아제르바이잔, 다게스탄, 쿠르디스탄의 독립과 자치권부여, 이슬람교 보호, 이들 지역에 오스만 군의 진주와 같은 것들 이었다. 러시아는 당연하게도 오스만 제국을 제압하기 위해서 전쟁을 일으킬 예정이었고, 여전히 오스만 군의 전력을 얕보고 있었다.

7월 14일에 이르러서 러시아는 루마니아와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영국, 프랑스의 불참 의사를 확인했고 오스만은 독일, 영국, 프랑스의 군수 지원을 약속받았다. 그리고 비공식적으로 오스만은 독일군의 지원을 약속받았다. 독일의 상임군사고문단은 여전히 그들을 지원하고 있었고 1개 사단이 추가로 파견될 예정이었다. 외교적인 사항이 어느정도 확실시된 14일 저녁, 최후통첩에 기재된 시간이 지났고 러시아는 끝내 응답하지 않으면서 전쟁이 발발했다.

전투 서열

러시아 군

 제정 러시아군 전투 서열[1] [ 펼치기 · 접기 ]
제1군 제2군 제4군 제5군 제7군 캅카스 군

예카테리노다르
알렉산드르 삼소노프
장군

  • II 군단
  • III 군단
  • IV 군단
  • XX 군단
  • 제56 보병사단
  • 제1 근위기병사단

블라디카프카스
파벨 레넨캄프
장군

  • VI 군단
  • XIII 군단
  • XV 군단
  • XXIII 군단
  • 제1 소총여단
  • 제4 기병사단
  • 제2야전중포병여단

바쿠
안톤 잘차
장군

  • 척탄병 군단
  • XIV 군단
  • XVI 군단
  • III 캅카스군단
  • 제2 근위기병사단

오데사
파벨 플레베
장군

  • V 군단
  • XVII 군단
  • XIX 군단
  • XXV 군단
  • 제6 기병사단

키예프
블라디미르 니키틴
장군

  • XXII 군단
  • V 캅카스군단
  • 제1 기병사단
  • 제2 기병사단
  • 제3 기병사단
  • 제5 기병사단

트빌리시
보론초프-다쉬코프
장군

  • 제2 보병사단
  • 제2 코사크 소총여단
  • 제1 캅카스 코사크 사단
제3군 제6군 제8군 제9군 제10군

세바스토폴
니콜라이 루즈스키
장군

  • IX 군단
  • X 군단
  • XI 군단
  • XXI 군단
  • 제9 기병사단
  • 제10 기병사단
  • 제11 기병사단

상트페테르부르크
알렉산드르 블라고베셴스키
장군

  • I 군단
  • XXXXII 군단
  • XXXXIII 군단

자포리자
안드레이 셀리바노프
장군

  • VII 군단
  • VIII 군단
  • XII 군단
  • XXIV 군단
  • 제12 기병사단
  • 제2 혼성코사크사단

로스토프 온 돈
플라톤 레칫스키
장군

  • XVIII 군단
  • XIV 군단
  • XVI 군단
  • 근위소총사단

차리친
알렉세이 에버트
장군

  • I 시베리아 군단
  • II 시베리아 군단
  • III 시베리아 군단

오스만 군

 오스만 제국군 전투 서열 [ 펼치기 · 접기 ]
제1군 제2군 제3군 제5군 제6군 캅카스 군

트라브존
제키 바라즈 콜라치
파샤

  • I 군단
    • 제1 사단
    • 제3 사단
    • 제46 사단
  • II 군단
    • 제4 사단
    • 제12 사단
    • 제47 사단
  • III 군단
    • 제9 사단
    • 제11 사단
    • 제48 사단
  • 제19 하노버 사단

아르
메흐메트 베히브
파샤

  • V 군단
    • 제13 사단
    • 제15 사단
    • 제19 사단
  • VI 군단
    • 제16 사단
    • 제20 사단
    • 제26 사단
  • VIII 군단
    • 제21 사단
    • 제25 사단
    • 제27 사단
  • 반 기병여단

이스피르
하산 이젯
파샤

  • IX 군단
    • 제17 사단
    • 제28 사단
    • 제29 사단
  • X 군단
    • 제30 사단
    • 제31 사단
    • 제32 사단
  • XI 군단
    • 제18 사단
    • 제33 사단
    • 제34 사단
  • 제2 기병여단

에르주룸
마흐무트 카밀
파샤

  • XII 군단
    • 제35 사단
    • 제36 사단
  • XIV 군단
    • 제2 사단
    • 제57 사단
    • 제59 사단
  • XIX 군단
    • 제5 사단
    • 제6 사단
    • 제14 사단
  • XXI 군단
    • 제7 사단
    • 제8 사단
    • 제49 사단
  • 제1 기병여단
  • 카르스 요새군

바이부르트
카빗
파샤

  • IV 군단
    • 제10 사단
    • 제39 사단
    • 제40 사단
  • XIII 군단
    • 제22 사단
    • 제23 사단
    • 제37 사단
  • XVIII 군단
    • 제24 사단
    • 제38 사단
    • 제45 사단
  • 에르주룸 요새군

트빌리시
오토 리만 폰 잔더스
야전 원수

  • VII 군단
    • 제41 사단
    • 제42 사단
    • 제43 사단
  • XV 군단
    • 제1 캅카스사단
    • 제2 캅카스사단
    • 제5 캅카스사단
  • XVI 군단
    • 제3 캅카스사단
    • 제9 캅카스사단
    • 제10 캅카스사단
  • XVII 군단
    • 제11 캅카스사단
    • 제36 캅카스사단
    • 제37 캅카스사단
  • 제3 기병여단

불가리아 군

 불가리아군 전투 서열 [ 펼치기 · 접기 ]
제2군 제3군

마이코프
게오르기 토도로프
원수

  • 제1 '소피아' 보병사단
  • 제3 '발칸' 보병사단
  • 제6 '브딘' 보병사단
  • 제7 '릴라' 보병사단
  • 제11 '마케도니아' 보병사단
  • 제1기병여단

노보로시스크
스테판 토셰프
대장

  • 제4 '프레슬라프' 보병사단
  • 제5 '다뉴브' 보병사단
  • 제10 '에게' 보병사단
  • 제12 혼성보병사단
  • 제2기병사단
  • 제5기병여단

전쟁 경과

오스만의 계획

캅카스는 고산지대에 험준한 산맥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방어군에 매우 유리했다. 또한, 오스만 대부분의 병사는 중동의 사막 지역이나 터키 해안부에서 징집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기후에 익숙하지 않았다. 독일 상임군사고문단과 오스만 참모부는 반년 동안 캅카스를 공략하기 위해 계획을 준비했다. 그들은 러시아의 주력군을 자국 영내로 깊숙이 끌어들여서 섬멸한 뒤, 캅카스 일대로 밀고 들어가야 한다는 것에 어느정도 동의했다. 그러나 평지가 아닌 험준한 산맥에서는 기동하여 포위하는 것이 힘들었으니 아라라트 평야 후방으로 펼쳐진 고지대에 방어선을 미리 구축하고 그곳에서 러시아군을 저지할 계획을 수립했다.

원래부터 산간 지역을 담당했던 제3군아르다한이디르에서 수비를 맡고 새롭게 창설된 제6군이 고지대 방어선을 구축하고 러시아군을 저지하는 역에 배정되었다. 마찬가지로 신규 군인 제5군은 전선 중 평야 일대에 초기 공세를 주도하여 아르메니아에 주둔하는 러시아군을 제압하고 반격하는 군을 포위망으로 유도해야 했다.

러시아의 계획

러시아의 참모부는 적절한 조언을 들을 수 없었다. 따라서 내부적인 혼란이 그대로 군사 작전에 반영되었는데, 그들은 여전히 독일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에 대한 강한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따라서 러시아의 상당한 병력은 후방 유럽 전선에 배치되었고 캅카스 일대에서는 -보급 문제도 포함하여- 1개 군만이 전선을 담당하고 있었다. 또한, 러시아 군부는 오스만 군이 크림 전쟁과 마찬가지로 우크라이나 평야 일대로 공격해 올 것이라 예상했다. 따라서 여분의 군대를 우크라이나 해안 일대에 배치하면서 캅카스 방어 병력은 오스만 군의 전력에 비해 상당히 취약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그들은 캅카스 산맥을 일대로 방어선을 구축하고 오스만의 공세를 효과적으로 저지할 수 있다고 믿었다. 애초에 영국과 프랑스와 같은 열강들의 참전없이 치루어지는 전쟁에서 러시아는 질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

공세 초기

하계 공세

전쟁 초기에 공세 주도권을 가진 것은 오스만 군이었다. 이는 전적으로 적의 예상 공세 시작점을 잘못 예측한 러시아 군사 참모부캅카스 방면 러시아군 사령관 알렉세이 브루실로프의 실책이었다. 그는 오스만 군의 주공이 험준한 캅카스로 진군하기 보다는 해군력을 빠르게 투입하여 크림 일대 평야로 상륙해 들어올 것이라 생각했다. 오스만 군이 결정적인 공세 위치에 놓여있었을 때도 그는 크림 반도로의 공세를 보조하는 양동 작전이거나 두 갈래로 분산된 약한 공세라고 생각했다. 이와 다르게 무스타파 케말은 오스만 군의 가용가능한 병력의 8할을 캅카스 방면으로 투입했다. 초기에는 비교적 평탄한 지형이 펼쳐진 자바케티 고원아르메니아 고원으로 수적 우위를 이용한 공세가 펼쳐지면서 유리한 전황이 지속되었다. 15일부터 시작된 공세는 나흘 동안 예레반규므리, 아할치헤 일대에서 러시아 수비대를 패퇴시키고 점령했다. 공세 5일 째에 접어든 오스만 군은 소캅카스 산맥 이남의 모든 지역을 점령했고 곧 산맥을 넘을 수 있었다. 브루실로프 사령관은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도브루자, 우크라이나에 넓게 배치된 러시아 군을 캅카스로 집결시키는 것에 열중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열악한 철도 사정은 그를 궁지로 내몰았다. 이와 함께 캅카스 군을 트빌리시보르조미와 같이 소캅카스 산맥의 관문에 방어선을 구성했다. 방어군은 7월 21일에 이르러 야포와 함께 방어선에 자리잡을 수 있었고, 이는 오스만 군의 첫 걸림돌이 되었다. 산맥을 동쪽으로 넘으려는 오스만 군은 볼니시 일대에서 러시아군 야포에 큰 피해를 입고 격퇴되었고, 북쪽 방면의 진출은 보르조미에서 러시아 군의 강한 저항에 직면했다.

케말은 즉시 오스만 함대와 함께 포니 일대에 리오니 강 삼각주로 상륙 작전을 하달했다. 리오니 강 일대를 따라 진군하면 보르조미 후방을 위협하여 캅카스 군을 캅카스에서 축출하거나 너머로 몰아낼 수 있는 위치였다. -독일영국에서 3척을 양도받아- 5척의 오스만 전함이 24일 포니 앞바다에서 포격하며 상륙의 시작을 알렸다. 이에 -8척의 드레드노트 전함을 필두로 한- 러시아의 흑해 함대는 멀리 떨어진 세바스토폴에서 오스만 함대를 흑해에서 퇴각시키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니 일대에 대한 상륙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일대의 러시아군이 산악지역 방어선을 차출되어 크게 위축된 상태였기에 제대로된 방어전도 불가능한 상태였다. 오스만군은 이내 삼각주를 장악하고 동쪽으로 빠르게 진군하여 이틀동안 쿠타이시까지 진출해 아할치헤 북부의 러시아군을 완전히 고립시키는 것에 성공했다. 그동안 산악 지대에서는 소모전이 지속되어 양측에 상당한 사상자를 만들었다. 오스만의 경우 러시아 야포에 의해 더 집중적인 피해를 입었다. 그럼에도 시시안, 고리스, 세반 호수 일대를 넘어 아제르바이잔 일대의 쿠라-아라스 저지대로 진출하는 것에 성공했으며, 캅카스 군 사령부가 위치한 트빌리시 서쪽 22마일까지 접근했다. 이에 포시에 상륙한 오스만 군까지 동쪽으로 계속 진군하여, 트빌리시를 세 방면에서 압박할 수 있었다.

28일에 이르러서 양측의 보급선은 이미 한계를 넘어선 상황이었다. 러시아의 경우 트빌리시 북쪽으로 난 하나의 보급로와 카스피 해를 통해 바쿠로 연결된 보급선이 전부였다. 이 보급선을 통해서 엄청난 수의 러시아 군과 장비가 추가적으로 투입되어야 했는데 그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오스만의 경우도 비슷했다. 캅카스 군보다 많은 병력을 유지하기 위한 보급품이 거대한 산악 지형을 넘어서 오기란 너무 어려웠다. 그나마 29일부터 포시로 해상 운송이 가능해졌지만, 이마저도 불안하게 유지되었다. 결국 8월 2일이 되어 양측은 기아, 탈진, 동상, 열사 등 다양한 요인으로 전력 공백이 우려될 만큼의 손해를 입어야했다. 이로 인해 8월 5일, 러시아 군이 대캅카스 산맥 일대로 방어선을 후퇴하기로 결정할 때까지 전선은 소강상태가 되었다.

8월 12일까지 오스만 군은 대캅카스 이남 모든 지역을 점령할 수 있었다. 그러나 보급에 커다란 장애가 있었기 때문에 많은 수의 병력을 본토의 방어선 일대로 해상으로 후퇴시켜야 했다. 이는 초승달 계획에 따른 행동이었는데, 다음에 올 러시아군의 대규모 공세를 본토까지 지속시킨 다음 일련의 방어선 라인에서 포위 섬멸한다는 전략의 일부였다. 애초에 러시아 군의 공세가 깊숙이 진행되어야 했기에 캅카스 일대에 병력은 소규모로 남겨두어야 했다. 이에 반해 러시아 군은 러시아 각지에서 철도를 통해 블라디 카프카스, 바쿠, 소치 일대의 병력을 크게 충원했고 캅카스 후방에도 오스만 군을 상회하는 규모의 러시아 군을 주둔시키고 있었다. 이 시기에 오스만 군이 북부로 진출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기에 산악에서 산발적인 소규모 교전만 있었을 뿐, 전선은 대체로 소강상태를 이루었다.

1915년 7월 7~14일 동안 오스만 튀르크군은 캅카스 국경을 넘어 러시아 제국군에대해 선제공격을 감행했다.
1915년 7월 14~20일 동안 아르메니아 고원과 자바케티 고원을 점령했다.
1915년 7월 21~31일 동안 포티에 상륙전을 감행하고 소캅카스를 넘어 진군했다.

흑해 해전

흑해에서 기동중인 레샤디예와 술탄 오스만 1세함
흑해 함대에 막 배속된 임페라트리차 마리야

흑해러시아 해군오스만 해군이 맞부딪칠 수 있는 유일한 전장이었다. 개전과 함께 세바스토폴 모닝콜이라 불린 일련의 오스만 해군의 선제 타격은 러시아 해군의 흑해 제해권을 위험하게 만들었다 -특히, 정치적으로- . 그 이후로 흑해는 오스만 해군에게 있어서 점령한 캅카스 일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흑해를 통한 보급선이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러시아 입장에서는 지난 사건의 보복과 함께 대규모 공세에서 오스만군의 저항을 최소화시키기 위해 이 보급선을 타격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했다. 흑해 함대의 사령관인 안드레이 에버하르트오스만군의 포티 상륙을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없음에 책임을 지고 제해권을 다시 장악해야 했다. 흑해 함대가 오스만 함대에 비해 수적으로는 우세했지만, 오스만 해군은 최근에 건조된 2척의 영국제 전함과 1척의 독일제 전함을 양도받으면서 그 균형추가 크게 흔들린 것은 사실이었다. 전함에서 2척 더 많이 보유한 러시아였으나, 이는 성능적인 면에서 러시아 전함이 오스만의 신식 전함에 대적하기 힘든 것이 명확했다. 에버하르트 또한 전면적인 함대 포격전이 있을 경우 승리를 담보하기 힘들 것이라 생각했다. 따라서 속도가 현저히 느린 전함을 작전에서 배제하고 적의 보급선을 빠르게 타격하고 빠지는 전술을 채택했다.

흑해 함대8월 25일 8월 해상작전 임무를 부여받고 세바스토폴 항구에서 출항했다. 7척의 전함과 2척의 순양함, 호위함들은 작전 반경 밖의 대기 지점으로 이동했으며, 주 타격부대인 구축함 17척이 3개 전대로 분리하여 작전 지역으로 향했다. 17시가 넘어 포티 앞바다에서 오스만군의 보급상선을 발견하는데 성공했다. 그날 구축전대는 상선 2척을 침몰시켰다. 27일에는 3개의 작전 해역에 걸쳐 4척의 상선을 침몰시켰다. 2주일 동안 러시아 해군은 오스만이 해상 보급에 사용하는 상선 배수량의 3할 이상을 침몰시키거나 운행 불능으로 만들었다.

9월 11일에 이르러서 오스만 해군은 반격의 기회를 포착하게 되었다. 오후부터 포티 먼바다에서 3척[2]의 전함과 한 척의 순양함[3]을 주력으로한 포티 부대(P부대)가 대기했고, 2척[4]의 전함을 포함한 이스탄불 부대(I부대)는 북쪽으로 멀리 떨어져 보급선을 호위하며 기동했다. 운 없게도 러시아의 구축전대는 오스만의 두 개 작전 단위 사이로 침투했다. 오후 5시 즈음 오스만의 상선 한 척이 러시아 군의 어뢰에 침몰되면서 해전이 시작되었다. P부대는 즉시 북쪽으로 기동하여 흑해 함대의 본대를 색적했고 I부대는 휘하 후퇴하는 러시아 구축함의 앞에서 세바스토폴로 기동했다. 다음날이 되어서 후퇴하던 러시아 구축전대가 먼발치에서 I부대를 탐지하면서 교전이 시작되었다. 화력면에서 러시아는 확실한 열세였지만, 양측의 명중률이 좋지 못했기 때문에 구축전대는 빠르게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교전지역을 벗어나려했다. P부대는 노보로시스크 먼바다에서 서쪽으로 기동하고 있었는데 1시간 뒤, P부대가 러시아의 구축전대를 가로막으면서 두번째 교전이 시작되었다. P부대는 오스만 해군의 최신예 전함을 포함하였고 특히, 독일에게 양도받은 미딜리 순양함가 활약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오스만 전함 레샤디예의 포격을 시작으로 러시아 구축전대는 굉장한 피해를 입었다. 가장 먼저 공격을 받아야 했던 -구축함 5척으로 이루어진- C전대는 1척이 침몰, 2척이 중파되어 작전 능력을 상실했다. C전대가 두들겨 맞는 동안, 다른 구축함은 회피 기동과 연막으로 몸을 숨기며 북쪽으로 기동했다. 그럼에도 2척이 추가로 중파 되었고 오스만 군의 뇌격에 1척이 추가로 침몰하는 등 불운이 따랐다. 이 교전으로 러시아 구축전대는 총 3척이 침몰하고 1척이 대파, 5척이 중파 되면서 -17척의 구축함 중- 9척의 구축함이 전선에서 이탈했다. 절반 이상의 구축함을 잃은 러시아와는 달리 오스만의 피해는 구축함 1척 침몰, 구축함 1척 중파, 장갑순양함 1척 중파에 그쳤다.

에버하르트는 구축전대가 교전 중임을 2번째 교전이 이루어지는 동안 전해받을 수 있었다. 그는 즉시 흑해 함대에 구축 전대를 구출하기 위해 기동할 것을 종용했지만, 함대의 속도는 너무 느렸다. 그들과 속도가 비슷한 오스만의 I부대는 남쪽으로 이미 방향을 틀었기에 그들이 P부대와 교전에 들어가기에는 시간이 넉넉하지 못했다. 결국 구축전대가 괴멸적인 타격을 받은 이후에야 교전 해역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들은 밤 동안 남쪽으로 느리게 후퇴하는 오스만 함대를 기적적으로 탐지할 수 있었다. 두 함대는 해가 밝아오르자 교전을 시작했다. 속도면에서 빠른 P전대는 빠르게 러시아의 함대를 앞질러 T진형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러시아 함대는 오스만의 위협적 기동을 피하기 위해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야했다. 러시아 함대를 추격하기 위해 일렬로 따라붙은 오스만 함대는 좌측으로 기동하며 일제히 포격을 시작했다. 첫 유효타로 레샤디에가 포템킨에 3개의 명중탄을 기록했다. 이후 2개의 명중탄을 추가로 맞고 포템킨은 주포에 심각한 손상과 화재로 작전불능이 되었다. 다음으로 포격을 받은 전함은 에프스타피였다. 술탄 오스만 1세함이 발포한 유효타에 함교가 타격받으면서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이후에는 러시아 함대가 오스만 함대를 따라 서쪽으로 진열하며 포격을 개시했다. 이제 막 작전을 시작한 임페라트리차 마리야는 러시아 최신예 함선이라는 것을 확인하듯 레샤디에에 2발의 명중탄을 냈다. 레샤디에는 3번 포탑 아래에 화약고가 관통당하며 유폭되며 순식간에 침몰했다. 오스만 구축함은 포격전을 틈타 임페라트리차 마리야에 뇌격을 시도했지만, 1개의 어뢰가 경미한 침수피해만 주는 것에 그쳤다. SMS 괴벤은 이후 이오안 즐라투스트를 두들겨 상부 구조물에 상당한 피해를 입히는 것에 성공했다. 전열의 뒤에서는 시노프미딜리의 뇌격에 침수가 발생하면서 배를 버려야했다. 지속되는 교전으로 러시아측은 포템킨, 에프스타피, 이오안 즐라투스트, 시노프가 대파되었고, 임페라트리차 마리야가 소파되었다. 오스만측은 레샤디에가 침몰되고 술탄 오스만 1세가 중파 되었다.

러시아의 임페라트리차 마리야와 트리 스비아티테리아, 로스티슬라브는 괴멸적인 피해를 입은 함대를 두고 북쪽으로 방향을 틀었으나 I부대가 교전에 참가하면서 선두에 있던 로스티슬라브는 투르구트 레이스에 의해 대파되었다. 그 대신 임페라트리차 마리야가 북쪽으로 강행 돌파에 나서며 응사함에 따라 바르바로스 하이레딘이 중파되었다. 뒤따르던 트리 스비아티테리아 또한 투르구트 레이스의 주포에 치명타를 입히는 것에 성공했다. 결과적으로 양측은 순양함(각각 3척)을 모두 잃었고, 러시아는 전함 7척 중 5척 (대파 5척) 을 잃었고, 오스만은 5척의 전함 중 4척 (침몰 1척, 대파 2척, 중파 1척) 을 잃었다.

흑해 해전 (Черноморское сражение)
러시아 제국 흑해 함대 오스만 제국 오스만 해군
병력 전함 7척, 순양함 3척, 구축함 17척 전함 5척, 순양함 3척, 구축함 4척
노급 전함 임페라트리차 마리야 (소파) 레샤디예 (침몰)
술탄 오스만 1세 (중파)
전노급 전함 포템킨 (대파) 투르구트 레이스 (중파)
에프스타피 (대파)
이오안 즐라투스트 (대파)
로스티슬라브 (대파) 바르바로스 하이레딘 (중파)
시노프 (대파)
트리 스비아티테리아 (소파)
순양전함 ( - ) 야부즈 술탄 셀림 (소파)
순양함 3척 (침몰 1척, 대파 1척, 중파 1척) 3척 (침몰 1척, 중파 2척)
구축함 17척 (침몰 3척, 대파 1척, 중파 5척) 4척 (침몰 1척, 중파 2척)
피해 전함 5척, 순양함 2척, 구축함 7척 전함 1척, 순양함 1척, 구축함 2척
활동 가능 전함 2척, 구축함 8척 전함 1척, 구축함 1척

양측의 공세적인 격돌이 두 해군 모두에게 괴멸적인 피해를 주었다. 특히, 오스만 해군은 전투 후 작전 가능한 군함이 2척으로 중파된 군함들이 수리되기 전에는 어떤 활동도 할 수 없었다. 러시아 해군은 제한적인 작전은 가능했지만, 한 전투에서 전함 5척을 잃으면서 전함 전투에서 불리해졌다. 게다가 러시아 해군에서는 오스만의 전함 4척이 여전히 활동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분간의 우위를 가진 러시아 해군은 이점을 살릴 수 없었다.

러시아의 추계 공세

1915년 9월 22일 ~ 10월 15일 동안 러시아 제국군은 대캅카스 산맥을 넘어 추계 공세를 진행했다.
1916년 3월 20일 ~ 4월 20일 동안 러시아 제국군은 캅카스 남부 고원지대를 확보하여 오스만군을 국경 밖으로 밀어내려했다.
1916년 4월 28일 ~ 6월 9일 동안 오스만튀르크군은 초승달 작전으로 러시아군의 본대를 포위했다.

9월 15일부로 러시아 해군과 오스만 해군은 각각 흑해에서 축출되었다. 브루실로프는 그들의 공세 일정을 앞당겨야 했다. 시간을 끌수록 오스만의 방어선은 더 견고해질 것이라 생각했다. 어느정도 이 생각은 사실이었다. 오스만주재 독일 군사고문단이 캅카스 일대에서 효율적인 방어선을 구축하느라 파견되어 있었다. 주요 길목에는 지뢰 매설을 포함해서 참호 등의 구조물이 자리잡았다. 주그디디, 쿠타이시, 고리, 트빌리시, 예레반과 같은 요충지에는 상당한 규모의 참호가 자리잡았는데, 철조망기관총이 충분히 배치되는 몇 안되는 곳이었다. 브루실로프는 이러한 방어선을 순전히 -오스만이 공세 초기에 했던 것과 유사하게- 물량으로 밀어내 버리려 했다. 이미 9월 중반부터 러시아군이 집결시킨 병력은 캅카스 오스만군을 압도했다. (러시아군은 캅카스 오스만군에 비해 야포는 3배, 보병은 4배에 달하는 물량을 집결시켰다.)

공세는 너무 늦어서 산맥을 넘으며 동사자가 극심하게 발생하기 전에 이루어져야 했다. 그 결과 가장 빠른 9월 22일, 캅카스의 일시적인 새벽 안개가 발생하면서 공세를 시작했다. 가장 대표적인 공세로로는 블라디캅카스와 트빌리시를 잇는 본대의 진격로, 흑해 연안으로 난 우익의 진격로, 바쿠에서 산맥을 넘어 공세를 가하는 좌익의 진격로이 있었다. 안개는 아군을 가려주는 가림막이었지만, 진격하기에 적합하지는 않았다. 주요 진격로는 산맥을 넘기에는 당연한 길목이었기에 해체되지 못한 다량의 지뢰에 의해 시작부터 상당한 피해가 누적되었다.

가장 먼저 저항에 부딪친 곳은 우익이었다. 수후미는 흑해 연안으로 내려가려면 반드시 지나야하는 길목이었다. 이곳은 다음 날 산을 넘어 시가지로 진입한 다음에서 통과할 수 있었다. 9월 25일 러시아 군은 더 강한 저항을 주그디디를 중심으로한 인구리 강에서 맞이했다. 특히 이 지점은 오스만군의 해상 보급로가 이어지는 포티와 가장 가까운 거점이었기에 야포와 함께 상당한 화력을 동원할 수 있었다. 게다가 오스만군은 강 너머에 위치했기 때문에 지리적 이점을 활용할 수 있었다. 본대 또한 상황이 악화된 것은 마찬가지였다. 트빌리시 방어선은 곳곳에 건설된 참호와 야포진지를 통해 러시아군의 공세를 집중적으로 타격할 수 있었다. 러시아군이 진격하기 위해서는 산맥을 넘어서 가야했다. 결국 엄청난 수의 러시아군이 등산하는 동안 지뢰와 비전투부상으로 이탈했으며, 군의 사기는 악화되었다.

10월 5일까지 러시아군은 오스만 군의 방어선을 물량으로 조금씩 밀어붙일 수 있었지만, 산맥을 넘어 쿠타이시, 제스타포니, 고리로 진행된 부가적인 공세는 모두 패퇴당했다. 유일하게 성공한 텔라비를 향한 공세는 오스만 군의 게릴라 전술과 보급 문제로 점령한지 7일 만에 후퇴해야했다. 다음 주까지 격렬한 전투가 지속되면서 트빌리시 북쪽 지역에서 오스만 수비대를 겨우 물리쳐 그들을 트빌리시 시내로 몰아냈다. 그 동안 아제르바이잔 지역에서는 고원 전체에서 산발적인 교전이 지속되었다. 오스만에 의해 징병된 아제르바이잔 이슬람전선이 게릴라 전을 수행하면서 좌익 또한 -다른 방면의 군대보다 적었지만- 상당한 피로가 누적되었다.

10월 12일 우익은 인구리 강을 따라 남하한 지원군의 도움으로 주그디디를 점령하고 겨우 남하할 수 있었다. 다음 날에는 오스만 군이 트빌리시를 포기하고 소캅카스 산맥 일대의 방어선으로 병력을 철수시켰다. 다음 주까지 러시아 군은 겨우 소 캅카스 북부를 수복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지속적으로 지뢰에 의한 피해와 심각해진 보급 문제, 오스만 군의 기습으로 상당한 출혈이 지속되었다. 이때까지 양측의 피해를 보면 러시아군이 오스만 군에 비해 15배에 달했다. 결국 브루실로프는 공세를 중단하고 병력의 절반을 후방으로 후퇴시켰다.

춘계 공세 (1916)

대대적인 추계 공세 이후로 엔베르 파샤는 러시아 외교부에 평화협정을 제안했다. 러시아는 흑해에서의 해군력을 포함해 캅카스 일대에서 제대로 활약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단 수락하려고 했다. 그러나, 니콜라이 2세가 국내 정세가 더 적대적으로 바뀌기 전에 오스만에게서 승리를 취할 것을 종용했다. 따라서 이 제안은 결렬되었다. 브루실로프 역시 다음 공세를 통해 오스만 내로 진군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그랬기 때문에 니콜라이 2세의 재촉에 러시아 군은 겨울에도 전투를 준비해야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캅카스에 겨울이 찾아오면서 각지에 기록적인 강설이 있음에 따라- 표면적인 전선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아제르바이잔 군의 게릴라 전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1월에 계획된 동계 공세 또한 캅카스의 기상 상황이 호전되지 않으면서 어쩔 수 없이 지연되었다. 결국 2월 중반에 접어들어서 공세 준비에 착수했다. 빠르면 3월 5일 공세가 가능한 것으로 보였지만 실제로는 20일에 춘계 공세는 시작될 수 있었다.

트빌리시와 간자 사이에 집중된 병력이 일제히 산맥을 넘어서 규므리, 카르스, 예레반 거점을 확보하여 자바케티 고원아르메니아 고원에서 오스만 군을 패퇴시키는 것이 춘계 공세의 목표였다. 특히, 카르스는 오스만 제국의 국경 너머에 위치했으며 일종의 관문으로, 그곳을 넘으면 에르주룸을 거쳐 제국 깊숙이 진격할 수 있었다. 본대는 산세가 험한 보르조미 일대를 무시하고 비교적 진격로가 넓은 트빌리시 서쪽으로 병력을 밀어넣었다. 실제로 다음 주까지, 자바케티 고원과 세반 호가 러시아군 수중에 떨어졌고, 규므리와 예레반이 집중적인 공세에 노출되었다. 4월 2일, 바나조르에서 오스만 수비군이 밀려나자 규므리와 예레반은 수비 지역을 두배로 늘려야 했다. 압도적인 물량을 겨우 버티던 규므리와 예레반 수비대는 각각 7일, 11일에 괴멸적인 피해를 입으며 산화했다. 이로써 러시아군은 전쟁이 발발한지 8개월 만에 국경 지대로 돌아올 수 있었다. 20일까지 카르스의 오스만 군을 밀어내면서 러시아군의 목표는 완수되었다.

반면 흑해 연안으로 진행되던 부가적인 공세는 오스만 군의 첫 수비대에서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다. 코불레티는 연안을 따라 남하하는 관문이었지만, 전함 야부즈 술탄 셀림의 화력 지원을 받았고, 강을 따라 지어진 참호선은 3중으로 강화되어 있었기에 뚫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결국 3월 20일부터 4월 10일까지 공세는 피해만 입고 후퇴해야 했다. 우익이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음에도 4월 25일, 카르스의 러시아군 본대는 즉시, 에르주룸으로 진군을 계속했다. 브루실로프는 에르주룸을 점령하고 트라브존에 상륙하여 오스만 군을 본토에서 격리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초승달 작전

러시아군이 무리하게 제국 깊숙이 진군하려하자, 케말은 초승달 계획을 하달할 수 있었다. 4월 28일, 제6군제3군은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하여 각각 -남쪽으로 퇴각한- 예레반 수비대와 -북쪽 연안과 산악지대를 지키는 제5군을 도와 러시아가 지난 춘계 공세로 점령했던 지역으로 진격했다. 일주일 동안, 오스만 군은 포티, 고리, 자바케티 고원, 예레반, 세반호 일대를 탈환할 수 있었다. 트빌리시의 러시아 군 사령부는 오스만 군의 진격에 다시 대캅카스 산맥을 넘어 북쪽으로 이전해야 했다. 특히, 자바케티 고원 일대를 빠르게 휩쓸고 내려오면서, 러시아 본대는 보급로를 잃고 오스만 군에게 포위되었다. 그럼에도 에르주룸에 공세를 유지하던 캅카스 군은 5월 7일 에르주룸을 점령했다. 이후 5월 8일, 후방에 자리잡은 오스만 제5군이 카르스에 위치한 러시아 제7군 수비대에 패퇴되면서 오스만 군의 남방 공세는 돈좌되었다. 북방 공세는 지속되어 15일까지 오스만군은 북부로 트빌리시, 루스타비, 간자, 시르반을 장악하며 캅카스 일대를 다시 수복했다. 이에 러시아 군은 즉시 3개 군으로 구성된 방면군을 동원하여 캅카스 북부로 이동시켰다.

5월 20일, 러시아 군은 에르주룸에서 후퇴했고 제일 후방에 있던 제7군이 규므리 방면으로 포위망을 뚫기 위해 진군했다. 규므리의 오스만 제5군은 3일동안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수적 불리함을 이기지 못하고 북부로 퇴각해야했다. 28일에는 아르다한이 러시아군에 점령되었고, 다음 날에는 트빌리시로 진군했다. 이와 함께, 러시아는 바쿠에 집결한 제6군으로 아제르바이잔 일대로 다시 공세를 펼쳤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6월에 접어들자 제2군, 제5군, 제7군, 캅카스군으로 이루어진 48만명의 군대는 보급품 부족으로 전투력을 상당히 소진했다. 거기에 볼니시, 보르조미 일대의 산악지대에 발이 묶여 더 이상 진군할 수 없었다. 오히려 예레반과 에르주룸에서 오스만군이 지속적으로 압박하며 사면에서 공격받고 있었다. 6월 9일 오스만 군에 의해 소치가 점령되었고, 다음 날에는 1달 여일 만에 포위된 러시아 본대가 오스만 군에게 항복하게 되면서 러시아의 잔존 병력과 바쿠 공세를 진행하던 제6군도 캅카스에서 후퇴해야했다.

불가리아와의 갈등

러시아는 무리하게 감행한 작전으로 전쟁 발발 이후로 -항복한 73만명을 포함해- 120만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기록했고, 흑해에서 전함 4척을 잃어 흑해 함대는 반신불구가 되었다. 또한, 흑해 연안으로 침투하는 오스만 군을 막기 위해 유럽 국경에서의 병력을 상당수 차출해야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불가리아는 -러시아가 임차한- 알렉산드루폴리의 임차료를 두배로 올렸다. 러시아 외교부는 즉시 항의했지만, 불가리아 군이 알렉산드루폴리 일대의 러시아 수출품을 압류하면서 대응했다.

러시아는 불가리아가 오스만의 배후에서 작전을 펼친다면 손쉽게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따라서 임차료를 2배로 쳐주는 대신 참전을 요청할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불가리아는 독일과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를 거절해야 했다. 이에 6월 13일 러시아는 구축함 4척과 트리 스비아티테리아 전함을 불가리아 해역으로 무력 시위를 위해 출항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불가리아 국민들의 감정에 반 러시아 성향을 강화시켰다.

제2차 흑해 해전

첫 임무를 배정받은 임페라트리차 예카테리나 벨리카야

오스만 해군은 6월 말에 접어들면서 -몇몇은 포탑 일부를 탈거해야 했지만- 4척의 전함과 2척의 순양함, 2척의 구축함을 작전에 활용할 수 있었다. 러시아 해군은 1척의 드레드노트급 전함을 추가로 취역시키면서 3척의 전함과 순양함 1척, 구축함 10척을 운영할 수 있었다. 러시아 해군이 보충되면서 제해권은 어느정도 회복할 수 있었지만, 오스만 또한 대부분의 함이 수리되어 흑해 연안 도시를 포격하기 위해 움직였다. 6월 말에는 오스만 군이 흑해 연안으로 진격하는 것을 보조하며 겔렌지크, 노보로시스크를 포격했다.

오스만 해군은 러시아 해군을 유인하기 위해, 7월 1일 저녁, 오데사를 다시 기습포격했다. 러시아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흑해 함대를 결국 출항시켰다. 7월 2일 오전 흑해 함대의 구축함이 오스만 함대 위치를 발견하면서 임페라트리차 마리야급 전함 두 척은 순양함과 함께 속도를 올렸고, 트리 스비아티테리아는 뒤쳐지기 시작했다. 바르나 먼 앞바다에서 임페라트리차 마리야의 포격으로 제2차 흑해 해전이 시작되었다. 술탄 오스만 1세와 야부즈 술탄 셀림이 각각 임페라트리차 마리야와 예카테리나를 상대로 포격하며 난타전을 시작하자 미딜리와 오스만 전노급 전함 2척은 선두에 있던 예카테리나를 집중적으로 포격했다. 첫 명중타로 야부즈 술탄 셀림의 조타가 고장나면서 오스만 해군이 불리해지기 시작했지만, 예카테리나의 주포 2개가 작동불능을 일으키며 우측으로 이탈했다. 트리 스비아티테리아는 오스만의 뇌격에 어뢰 2발을 얻어맞으며 침수 피해가 발생하면서 배가 기울었다. 조타가 고장난 야부즈 술탄 셀림은 이후 러시아 구축함의 뇌격에 침몰되었다. 임페라트리차 마리야의 경우 술탄 오스만 1세에 명중타 2개를 기록하며 선전했지만, 다른 전함 2척이 진형을 벗어나자 후퇴해야했다.

동쪽으로 후퇴하던 흑해 함대는 오스만 해군의 기뢰에 예카테리나 함을 잃었고 순양함 1척, 구축함 2척을 추가로 손실했다. 결국 러시아는 이번 해전으로 전함 2척 침몰, 순양함 1척 침몰, 구축함 4척 침몰, 1척 중파라는 처참한 결과를 받았다. 오스만 또한 손실이 컸는데, 전함 1척 침몰, 1척 중파, 순양함 1척 침몰, 구축함 1척 침몰, 1척 중파로 사실상 호위함이 거의 전멸했다.

제2차 흑해 해전 (Вторая Черноморское сражение)
러시아 제국 흑해 함대 오스만 제국 오스만 해군
병력 전함 3척, 순양함 1척, 구축함 10척 전함 4척, 순양함 2척, 구축함 2척
노급 전함 임페라트리차 마리야 (소파) 술탄 오스만 1세 (중파)
임페라트리차 예카테리나 벨리카야 (침몰)
전노급 전함 트리 스비아티테리아 (침몰) 투르구트 레이스 (소파)
바르바로스 하이레딘 (중파)
순양전함 ( - ) 야부즈 술탄 셀림 (침몰)
순양함 1척 (침몰) 2척 (1척 침몰)
구축함 10척 (침몰 4척, 중파 1척) 2척 (침몰 1척, 중파 1척)
피해 전함 2척, 순양함 1척, 구축함 5척 전함 1척, 순양함 1척, 구축함 1척
활동 가능 전함 1척, 구축함 5척 전함 1척, 순양함 1척

7월 20일, 해안에서 0.5마일 떨어진 세바스토폴 해안에서 임페라트리차 마리야가 화약고 화재가 유폭으로 이어져 배가 침몰하면서 흑해 함대는 재건할 수 없는 피해를 입었다.[5] 그들은 오직 구축함 5척으로 흑해를 담당하는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반면 오스만 해군은 드레드노트급 전함, 술탄 메흐메트를 양도했고 바르바로스 하이레딘을 희생하여 술탄 오스만 1세 수리하면서 3대의 전함을 운영할 수 있었다. -추가적으로 순양함 1척과 구축함 1척의 호위를 받으면서-

세바스토폴 상륙

제2차 흑해 해전 이후로 다시 흑해에는 전력 공백이 발생했다. 이를 틈타서 러시아 구축함은 흑해의 오스만 보급선을 끊기 위해 분주히 활동했다. 그러는 동안 노보로시스크 인근 해역에서 기뢰에 2척이 침몰하면서 8월 5일부로 보유 구축함이 3척 밖에 남지 않아 활동이 불가능해졌다. 이에 따라 오스만 보급선은 다시 유지될 수 있었고, 오스만 해군이 다시 활동할 수 있었다. 8월 12일, 오스만 사령부는 캅카스 전선에 가해지는 러시아군의 압력을 덜어내기 위해서 크림 반도로 상륙하기로 결정했다. 이를 위해 15일, 2척의 전함과 순양함 1척, 3개 사단이 출항했다. 이에 맞춰 케르치 맞은 편에서도 해협을 건널 준비를 시작했다. 8월 22일 오전, 칼라미티 만케르치 해협에서 상륙을 실시했다. 러시아의 해안포는 오스만 전함의 포격에 응사했지만, 양측 모두 장거리에서 형편없는 명중률을 보여주었다. 결국, 정오에 이르러서 3개의 사단이 크림 반도에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었다. 케르치를 통해서도 1개 군이 도하에 성공하면서 일주일 동안, 페오도시야, 심페로폴, 아르미안스크에서 격전이 있었고 러시아 수비대를 크림 반도 밖으로 몰아내는 것에 성공했다. 세바스토폴은 요새 도시였던 만큼 공격하기 쉽지 않았는데, 군항에 있던 3척의 구축함과 함께 통째로 봉쇄되었다.

러시아 군의 반격은 처음부터 지연되었다. 본토에서 동원되는 병력은 철도를 통해 전선에 배치될 수 있었는데, 22일에는 가장 중요한 제5차 예카테리노다르 전투가 시작되면서 대부분이 캅카스 전선으로 이동해야 했고, 로스토프 온 돈에서 병력을 차출하기에는 열차 일정에 차질이 생겼기 때문에 거절당했다. 가장 가까운 키예프 수비대와 몰도바 지역의 주둔군을 철도로 수송해야 했다. 결과적으로 24일까지 잔코이 일대로 8만 여명의 병력을 보충할 수 있었지만, 오스만의 18만 명의 병력에 의해 발이 묶였고, 29일 잔코이 인근의 전투를 틈타 오스만 공병대가 철교를 폭파하면서 잔코이 병력은 그대로 보급선이 끊겼다. 또한, 이 때문에 보급은 물론 추가적인 증원 또한 불가능해졌다. 결국 이들은 9월 16일 항복했다. 세바스토폴은 그보다는 오랫동안 버텨서 9월 말에 함낙되었다. 이로써 러시아의 흑해 함대는 공중 분해되었다.

캅카스 전선

1900년대까지 건설된 러시아의 유럽 남부 철도망

6월 27일부터 오스만 군은 러시아 본대의 무장을 해제시킨 다음 약 60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북쪽으로 진군했다. 제2군은 후퇴하는 러시아 군을 따라 블라디카프카스로 진군했고, 제1군은 그 측면의 산길을 따라 알라기르로 진격했다. 제4군은 소치를 넘어서 오스만 해군의 보호 아래 노보로시스크로 진군했다. 그 결과 7월 중반에 이르러서는 캅카스 산맥을 넘어서 아나파, 예카테리노다르, 마이코프, 테레크 강까지 진출하는 것에 성공했다. 그러나 북쪽으로 더 진격하기에는 보급 문제가 심각했고, 러시아 군이 지속적으로 군대를 밀어넣었기 때문에 강한 저항에 부딪쳤다. 7월 13일마하치칼라를 마지막으로 점령하면서 오스만의 공세는 종말점에 달했다. 이것으로 러시아 군은 2개의 군이 카스피 해에 발이 묶이게 되면서 18만 명이 다음 주에 또 항복하게 되었다.

오스만 군의 지속되는 압박에 철도 보급은 퍄티고르스크 이후로 나아갈 수 없었다. 러시아의 작전 반경은 결국 로스토프 온 돈-예카테리노다르 일대로 좁혀지게 되었다. 이런 상황이 합쳐져서 8월 10일까지 예카테리노다르에 대한 4번의 공세로 양측은 다 합쳐 80만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다. 결국 20일 러시아군의 공세로 예카테리노다르를 잃으며 오스만 군은 퇴각했지만, 22일 케말이 직접 지휘하여 일부 독일군, 불가리아군과 함께 재탈환하는 것에 성공했다.

만약 오스만 군이 북쪽으로 85마일 더 진격하면 캅카스 전선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다. 캅카스의 철도가 모두 오스만 손에 넘어가면서 보급에서도 오스만 군이 우위에 있을 것임이 분명했다. 이를 막기 위해서라도 러시아 군은 더 많은 병력을 요구했는데 니콜라이 2세는 7월 위기처럼 독일의 전면적인 참전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총동원령을 허가해줄 수 없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러시아의 수적 이점이 크게 약화되는 것을 야기했다.

불가리아의 참전

소피아 기차역에서 캅카스 전선으로 보내지는 불가리아 예비군

캅카스 일대에 오스만 군이 러시아군의 계속되는 물량 공세에 흔들리자, 빌헬름 2세는 이를 지원하기 위해 불가리아를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마침, 6월 흑해 함대 무력 시위로 촉발된 불가리아 내 반 러시아 감정을 야기했기에 페르디난드 1세도 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음에 양측 모두 이익이 있었다. 8월 30일이스탄불에서 엔베르 파샤를 포함한 3국 대표가 불가리아 참전에 대해 회의를 진행했다. 이는 불가리아가 참전 조건으로 아드리아노플 빌라예트와 캅카스의 자원채굴권을 내걸었기 때문에 회담은 한차례 결렬되었다. 하지만, 9월 5일, 영토 할양 조건을 불가리아가 포기하면서 불가리아는 러시아 제국에 최후 통첩을 보냈다.

최후통첩에 따르면, 러시아는 루마니아에 대한 간섭권을 포기해야 했으며, 알렉산드루폴리의 임차료를 50% 추가로 지불해야 했다. 이에 더하여 도브루자에 설치한 비무장지대를 해제해야 했다. 이를 허용하면 러시아 제국은 루마니아에 대한 보호를 사실상 포기하는 것이었고 이는 그나마 유지했던 발칸반도의 영향력을 완전히 축출당하는 것이었다. 거기에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불가리아 3국의 압박을 러시아 혼자서 모두 받아야한다는 것이었다. 루마니아는 유럽 전선의 유일한 완충지대였기에 이를 지켜야 우크라이나 곡창지대를 방어할 수 있었다. 또한 2달 전 2배로 올린 임차료를 추가로 1.5배 지불하는 것은 말도 안되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불가리아 군이 러시아 본토로 직접 공격하려면 루마니아의 영토를 넘어야 가능했다. 이는 전적으로 러시아가 국경 지대에 병력을 배치할 시간을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9월 11일, 니콜라이 2세가 최후통첩을 거절하면서 불가리아 군도 캅카스 전쟁에 대규모로 투입될 수 있었다.

1916년의 가을

9월 11일까지 러시아 군은 너무 큰 피해를 누적되어 재기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했다. 더 이상 동원되는 수만큼의 병력을 그대로 전선에 투입하기에는 물량 부족에 부딪혔다. 불가리아의 참전으로 러시아의 전선은 몰도바-도브루자에서 시작하여 볼고그라드까지 넓게 펼쳐져 있었다. 이 뿐만 아니라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 제국이 러시아의 동원령을 주시했기 때문에 유럽 전선도 병력을 필요로 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쿠반 강을 따라 오스만 군이 방어선을 구축하는 결과를 만들었다. 9월 15일까지 슬라뱐스크나쿠바니에서 예카테리노다르을 거쳐 라빈스크까지 3중 방어선을 구성했고 캅카스 동부에서는 박산에서 모즈도크까지 방어선을 강화했다. 크림 반도에는 1달 동안 20만명에서 40만명으로 주둔군을 대폭 늘려 북쪽 해안에 주둔시켰다. 그러는 동안 오스만 해군은 아조프 해 연안의 마리우폴타간로크에 대해 포격을 진행했고 이 때문에 러시아군 철도가 일부 마비되기도 했다. 10월이 될 때까지 흑해와 아조프 해 연안 항구 도시는 육지 깊숙이 위치하지 않은 이상 큰 피해를 입어야 했다.

1915년 7월부터 1916년 10월까지 계속된 전쟁으로 러시아군은 병력의 상당수를 잃어 91만 명이 전사하고 약 88만 3000명이 포로가 되었으며 각지에서 파업과 시위가 발생했다. 이러한 사태를 피해 결국 러시아의 짜르 니콜라이 2세가 직접 러시아 제국군 사령관이 되어 최전선 전투 지휘에 나섰다. 이에 따라 국정은 황후에게 맡겨졌고, 황후를 등에 업은 라스푸틴을 중심으로 자연히 되어가면서 국정도 파탄지경에 이르렀다.

브루실로프 공세

평야에서 돌격하는 러시아 카자크기병
브루실로프 공세에 배치된 러시아 예비군

브루실로프 사령관은 10월 말이 되어서야 다시 전선에 설 수 있었다. 그는 지난 2개월 동안 동원한 60만 명을 동계 공세로 밀어붙여 오스만군을 캅카스 남부로 몰아내야 했다. 공세가 이루어질 곳은 이미 캅카스 산맥에서 벗어났고, 쿠반 강과 그 지류인 라바 강에 둘러쌓인 쿠반 분지였기 때문에 작전은 무리 없이 진행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대캅카스 산맥 북부에서 시작하는 카스피 대초원의 지형은 넓게 펼쳐진 개활지로 러시아 군은 대규모 병력을 병목없이 전선 전체에 투입할 수 있었다. 이는 전적으로 오스만군의 진군이 러시아의 철도 보급선을 제어할 수 없는 곳에서 멈춰섰기 때문이었다. 팔켄하인은 독일 첩보원을 통해 11월 3일, 동계 공세로 불리는 일련의 러시아 군의 움직임을 보고 받았다. 이는 즉시 케말과 오스만 참모부에게 전달되었고, 이에 따라 불가리아 군을 포함한 병력 증원과 방어선 강화는 더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오스만의 입장에서 예카테리노다르에서 물러나면 크림 반도에 진출한 4개 군이 위태로워지고 러시아의 보급을 끊어 동부 캅카스 전선도 위험에 노출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작용은 오스만 군을 대 캅카스 산맥 아래로 밀어낼 것이 분명했다. 따라서 서부 캅카스에 집중될 압력을 분산시키기 위해서 페레콥 지협, 총가르 해협을 넘어 가해질 우크라이나로의 공세와 -러시아 철도선의 최전방인 동부에 위치한- 퍄티고르스크로의 공격도 준비했다.

11월 20일, 새벽부터 러시아 포병대가 오스만 참호 진지를 포격하며 흔들었다. 3시간 동안 지속된 포격으로 오스만 군의 참호 곳곳이 무너지거나 기능을 상실했다. 오스만 군이 쿠반 강 후방으로 꽤 떨어지게 건설했기에 포격 중에도 -오사로 100여명이 사상했지만- 러시아 군은 여러 곳에서 도하를 감행할 수 있었다. 러시아 포병대가 포격을 멈추자, 오스만 포병대도 참호 전방으로 응사했다. 이로 인해 러시아 군은 상당한 피해를 입었지만, 러시아의 중포가 오스만 포병진지를 타격함으로써 공세를 감행할 수는 있었다. 도하 과정에서 생각보다 적은 저항을 받은 러시아군은 그대로 오스만 참호로 돌격할 수 있었다. 오스만 군은 2선 방어진지에서 병력을 추가적으로 증원했지만, 그럼에도 1차 방어선은 공세 시작 하루 만에 -라빈스크 후방의 고지대를 제외한- 대부분이 러시아 군의 손에 넘어갔다.

엔베르 파샤는 즉시, 우크라이나와 동캅카스 일대에서 준비된 역공세를 펼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준비 상황이 열악했던 오스만 군은 제대로된 포병대의 화력지원 없이 -러시아군에 비해- 적은 병력으로 공세를 시작해야했다. 이러한 공격은 러시아 참모부를 동요하게 했지만, 공세는 계속해서 진행되면서 흐지부지되었다.

11월 21일, 러시아 군은 즉시 오스만의 두 번째 참호선을 향한 공세를 시작했다. 다만 이번에는 30분의 짧은 지원 포격 이후 곧바로 양측이 맞붙었다. 오스만 군은 포격의 피해가 첫 번째 공세보다 적었기 때문에 러시아에 더 많은 출혈을 강요할 수 있었지만, 전세에서 불리함을 지속되었다. 특히 완전한 평지였던 방어선의 중앙부는 이 날 3번째 참호까지 공세에 노출되었다. 이는 불가리아 제3군이 대대적인 반격을 통해 겨우 피해를 수습할 수 있었다.

11월 28일까지 러시아 군은 누적 120만 명의 병력을 밀어넣으면서 10마일 너머로 오스만 군을 밀쳐냈다. 템류크-아나파 일대와 라빈스크 일대에서는 지형의 힘을 빌려 러시아 군의 반격으로 방어선을 회복할 수 있었지만, 예카테리노다르와 중앙 방어선은 불가리아 1개 군이 투입 되었음에도 3번째 방어선에서 겨우 방어할 수 있었다. 이마저도 러시아 포병대의 탄약 보급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았기에 가능했다. 사상자는 58만 명 중 19만 명을 웃돌며 32%를 넘겼다. 러시아 군 또한 양 측면의 방어선을 무리하게 공략하면서 상당한 출혈을 감내했다. 이는 120만명 중 36만 명으로 30% 수준에 달했다.

그러는 동안 오스만의 우크라이나 방면 공세는 20만 명을 동원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29일 함대 포격과 함께 드네프르 강헤르손을 점령하고 동쪽으로는 멜리토폴을 포위하고 철도선 일부를 파괴했다. 퍄티고르스크에서 시작한 25만명 규모의 캅카스 동부 공세는 라빈스크 방어선의 승리의 영향으로 수비대가 차출된 네빈노미스크을 먼저 공략하면서 브루실로프의 좌익을 강하게 압박해 퇴각하게 만들었다. 방어선 동부에서는 케르치 해협으로 증원된 15만명의 병력으로 슬라뱐스크나쿠바니로 반격했다.

12월 1일에 이르러서 폭설로 러시아의 보급사정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심지어 아르마비르가 적의 공격에 노출되면서 보급소는 뒤로 후퇴해야했다. 결과적으로 두 가지 악재로 인해 러시아는 여전히 가용가능한 80만 명을 다시 공세에 투입하기 힘들게 되었다. 오히려 우크라이나 방면으로의 공세가 격화됨에 따라 20만 명을 추가로 차출해야 했다. 결국, 5일에 이르러서 불가리아의 증원 병력이 도착하고 동부 캅카스군이 라빈스크를 통해 연결되면서 기적적으로 쿠반 강 일대를 회복할 수 있었다. 다만 20일 러시아의 추가적인 공세로 전선의 상황은 브루실로프 공세 이전으로 돌아가게 되면서 양측은 이득없이 엄청난 피해만 입어야 했다.

불가리아의 북진

슈나이더 75mm 야포를 끄는 말과 북진하는 불가리아군

러시아는 브루실로프 공세에서 오스만 군에 의해 패퇴 당하면서 상당한 수의 병력을 포함해서 전쟁 수행 능력에 큰 타격을 입었다. 총 131만 명이 전사했고, 92만 명이 포로로 잡히게 되면서 가용 가능한 병력은 120만 명을 겨우 넘길 수 있었다. 또한 러시아 지역의 폭설로 공세 준비는 점차 늦어졌다. 오스만의 경우도 비슷했는데, 72만 명의 전사자와 12만 명의 포로가 발생했다. 오스만의 경우에는 더욱 심각한 인력난에 내몰렸는데 전선에 배치된 병력은 70만 명에 불과했다. 불가리아 군과 함께 겨우 85만 명 선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전쟁 수행 능력은 이미 제국 혼자서 감당 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지 오래였다. 오스만 내의 반전 목소리가 커졌음에도 정권에 대한 지지도가 최소한을 지키는 것은 그나마 전쟁에서 선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양측은 결과적으로 대대적인 작전을 무리하게 전개하기에는 위험부담이 너무 컸고, 애초에 수행할 능력도 의심스러웠다. 결국 전쟁은 산발적인 교전의 양상을 띄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서 러시아의 철도망은 극심한 습격에 시달려야 했다. 이러한 공격은 지난 공세에 가해진 철도망 손상의 복구를 완강히 저지할 수 있었고 나아가 러시아의 공세 시기를 훨씬 더 늦출 수 있었다. 유일하게 전쟁을 속행할 수 있는 부대는 비교적 최근에 참전한 불가리아 군이었다. 게오르기 토도로프 사령관은 양국 모두 군사 행동이 위축되었을 때, 공적을 쌓기 위해 재정비된 불가리아 2개 군을 캅카스 전선에 배치했다. 불가리아 전체 병력의 70%를 담당하는 2개 군은 제3차 발칸 전쟁에서 얻은 실전 경험을 바탕으로 1월 5일 아르마비르를 시작으로 러시아의 격렬한 저항에도 지역적인 수적 우위를 살려 러시아 철도망을 잠식했다. 이내 1월 12일, 네빈노미스크퍄티고르스크를 포위하고 일부 기병대는 아스트라한 외각을 기습하는 것에 성공했다. 1월 31일에는 살스크에서 러시아 군이 불가리아와 오스만 군을 상대로 20만 명의 병력을 추가로 손실하며 북 캅카스 일대에서 러시아는 더 이상 작전을 펴기 힘든 상태로 내몰렸다. 반면, 오스만과 불가리아는 캅카스 일대를 잇는 철도망과 철도와 연결된 주요 항구를 소유하게 되면서 보급 문제가 빠르게 해결되었다. 이것은 오스만이 더 빨리 재기할 수 있도록 했다.

로스토프 전투 (1917)

로스토프 온 돈북캅카스 지역 최대의 도시이자, 캅카스로 향하는 철도가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었다. 이곳이 오스만, 불가리아 군에게 점령되면 러시아로 가는 대문이 활짝 열린 꼴이었다. 이는 곳 크림 반도에 주둔하는 오스만 군과 함께 러시아의 곡물 창고인 우크라이나가 공세에 노출될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 때문에 북캅카스로 전장이 옮겨진 이후로 꾸준히 방어선을 증강했다. 그러나 1월 31일, 살스크가 2월 10일에는 볼고돈스크에서 러시아 군이 패퇴하며 차리친(현재 볼고그라드)에서 남쪽으로 향하던 철도 선마저 빼앗기며 러시아는 작전 반경을 잃고 동부는 차리친에 서부는 로스토프에 묶여버렸다.

토도로프는 불가리아 군을 볼고돈스크에서 루한스크 방면으로 우회기동시켜 로스토프를 후방에서 차단하길 원했다. 이를 위해서는 크림 반도에서도 마리우폴 방면으로 진군해야 빠른 시일 내에 로스토프에 묶인 다수의 러시아군을 포위할 수 있었다. 케말은 작전 자체는 동의했지만, 로스토프가 양측에게 이목이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적지않은 출혈을 감내해야했다. 오스만은 2월 말까지 캅카스 전선에 20만명, 크림 반도에 20만명을 동원할 수 있었다. 첫 교전은 차리친 외곽 방어선에서 먼저 일어났다. 로스토프에 쏠린 이목을 동쪽으로 돌리기 위한 양동 작전이었다.

2월 28일에 이루어진 차리친 기습은 3월 2일까지 산발적인 교전 이후에 격퇴되었지만, 3월 2일 새벽에 개시된 오스만의 춘계 공세를 효과적으로 보조했다. 오스만 함대의 지원포격과 함께, 아조프, 타간로프에서 본격적인 교전이 일면서 로스토프의 러시아군을 묶어두었고, 불가리아 제2군은 로스토프 후방의 샤흐티로 공세를 진행했다. 3월 4일에는 크림 반도에서 우크라이나를 향한 공세가 시작되었다. 러시아는 즉시 1개 군을 로스토프로 향하는 길목인 마리우폴로 증원했고, 로스토프 수비선에서 병력을 차출하여 샤흐트 전투를 지속했다.

3월 9일까지 오스만 군은 마리우폴과 샤흐티에서 공세를 지속할 수 있었지만, 러시아의 강한 저항에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결국 3월 10일 새벽을 틈타 타간로프로 상륙한 오스만 군에 의해 로스토프와 마리우폴 후방에서 압력을 넣을 수 있었다. 그 다음 날부터, 러시아 전역에 라스푸티차가 발생하면서 러시아의 보급은 처참해졌는데, 이 때문에 3월 17일까지 버티던 러시아군이 돈 강 남부에서 밀려났고, 샤흐티 전투에서 서서히 밀려났다. 다만, 마리우폴은 오랜시간 잘 버틴 덕분에 측면 공격에 위협을 느낀 오스만 군이 후퇴하도록 했다.

마리우폴 수비대는 즉시 로스토프로 진군했지만, 오스만 함대의 계속되는 포격에 상당한 피해가 누적되어 있었고, 타간로크로 증원되는 오스만군의 저항에 작전이 지연됨에 따라 로스토프에 도달하기도 전에 돈좌되었다. 3월 20일, 샤흐트 인근의 노보샤흐틴스크, 노보체르카스크로 밀려난 러시아군은 로스토프에서 북서쪽 평야로 무질서하게 도망쳤다. 결국, 로스토프 수비대는 포위되어 3월 28일, 괴멸적인 피해를 입고 항복해야했다.

이 전투는 러시아에게 28만 명의 사상자를 발생시켰고, 오스만과 불가리아에게는 도합 19만 명의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양측은 계속되는 소모전으로 더 이상 전쟁 속행이 가능한 나라는 없었다. 그러나 러시아 2월 혁명으로 짜르가 패위되고 러시아 임시정부가 정권을 차지하면서 전쟁은 지속되었다. 임시정부를 차지한 자유주의자의 눈에는 전쟁을 지속하는 편이 군대의 반란을 방지하고, 국민을 결집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최종적으로 자본가들이 국가로부터 각종 이득을 취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혁명 기간 동안 전쟁

러시아의 군대는 로스토프를 마지막으로 사실상 와해되었고, 부분동원령에서 더 많은 병력을 징병하기에는 독일에게 참전의 빌미를 주는 것이었기에 전선은 빠르게 회복되지 못했다. 결국, 유럽 국경에 배치된 2개 군을 추가로 끌어서 확충해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만 함대의 사정권 안에 있는 흑해 연안은 오스만의 공세로 사실상 러시아 군이 패퇴했다. 7월 9일, 아스트라한도 점령당하면서 러시아 군의 입지는 내륙으로 점점 후퇴했다. 8월 16일에는 미콜라이프에서 건조가 완료된 채 방치된 임페라트리차 마리야급 전함 3번함, 알렉산드르 III 함이 오스만 군에게 점령되면서 오스만 함대에 나포되었다.[6] 이후 러시아 군은 오스만이 내륙으로 침투하는 것에 저항하여 패퇴시키는 것에서 역할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미콜라이프에서 오스만에 의해 나포된 알렉산드르 3세함
북캅카스에서 작전하는 오스만 소속 쿠르드 병사들
아르메니아군 소속 오스만 포병

결과와 영향

차리친 조약으로 확장된 오스만 제국의 국경
오스만에게 양도되기 전, 마지막으로 항해하는 강구트급 마라

차리친 조약

11월 혁명으로 정권을 장악한 소비에트 러시아볼셰비키 정권은 오스만 군과 불가리아 군의 진격을 막을 수단이 부재했다. 또한 정권의 유지를 위해서라도 전쟁을 끝내는 것이 이로웠다. 결국, 절대적으로 불리한 이 조약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조약의 내용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포함된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오스만에게 남 캅카스 전역과 북 캅카스의 다게스탄주, 크림 반도를 양도한다. 또한 우크라이나 공화국의 독립을 인정한다. 그리고 러시아는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에 대한 모든 이권을 포기하며 이에 따라 북 도브루자에 대한 불가리아의 영유권을 인정한다. 또한, 러시아 해군은 강구트급 전함 불가리아에게 2척을, 오스만에게 1척을 양도해야했다. 독일 장군참모본부가 내놓은 이러한 요구사항은 너무나 혹독해서 오스만측 협상 담당자들마저 놀랄 지경이었다. 폴란드 입헌왕국의 처우는 조약에 명시되지 않았는데, 이는 독일이 폴란드를 대표할 수 있는 집단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가리아는 추가적으로 오스만의 전쟁에 참전한 대가로 제국에 몇몇 조항을 명시했는데, 첫째는 남 캅카스 일대의 자원채굴권을 15년간 가지는 것이었고, 둘째는 1913년 런던 조약에서 인정받았던 에노스-미디아 선 서부의 영토를 할양받는 것이다. 오스만은 협상 초기에 영토 할양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입장이었으나, 북 캅카스 전역에서 불가리아의 필요성과 성과, 나아가 독일의 압박으로 조약은 체결되었다.

조약에 명시된 것과 같이 강구트급 1번함인 세바스토폴과 2번함인 폴타바는 불가리아 해군에 편입되었는데, 이는 개칭되어 짜르 오스포보디텔짜르 페르디난트로 불리게 되었다. 따라서 이들은 기존의 강구트와는 구분되게 짜르 오스포보디텔급 전함으로 명명되었다. 오스만 해군은 강구트급 2번함인 마라술탄 슐레이만 대제의 이름으로 양도받았다. 불가리아 해군은 추가로 러시아 순양함 류리크바가티르급 순양함 2척을 구매했다.

에게해 건함경쟁

그리스 해군제3차 발칸 전쟁를 포함해서 주위의 몇몇 분쟁이 있었지만, 영국, 프랑스, 독일 제국으로부터 총 4척의 전함을 주문하여 양도받았다. 이는 -그리스인들이 자기의 땅이라 주장하는- 트라키아스미르나를 오스만으로부터 되찾는 것을 민족의 염원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 해군은 오스만 해군이 확장될 때, 전함을 추가로 발주해왔다. 그 결과가 1918년 초까지 3척의 드레드노트급 전함과 1척의 슈퍼 드레드노트급 전함이었다. 반면,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와의 흑해 경쟁에서 전함의 절반 이상을 잃으면서 그리스에게 에게 해 패권을 넘겨주어야 했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서 러시아로부터 2척의 드레드노트급 전함을 양도할 것을 강제했다. 그럼에도 3척의 드레드노트급 전함만이 운영가능 했다. 불가리아 왕국은 최근의 발칸 전쟁으로 에게해로 진출할 수 있었지만, 뒷받침해줄 해군력이 전무했다. 이 문제는 러시아-튀르크 전쟁 기간 동안 이루어진 러시아 해군의 무력 시위 사건과 맞물려서 불가리아 군의 주요 쟁점이 되었다. 그러나 운 좋게도 오스만이 러시아로부터 전함을 양도 받기 위해 조약을 수정했기에 불가리아도 조약을 통해 러시아의 드레드노트급 전함을 2척 양도 받을 수 있었다. 이를 통해 불가리아는 에게해 건함 경쟁에 본격적으로 참가하게 되었다.

같이 보기

각주


  1. 정확하지 않음
  2. Reşadiye, Sultân Osmân-ı Evvel, Yavûz Sultân Selîm, Reshad-I-Hamiss
  3. Midilli
  4. Barbaros Hayreddin, Turgut Reis
  5. 독일군의 사보타주인 것이 정황상 확실했다. 실제로 전후 이들에게 철십자 훈장이 수여되었다.
  6. 세바스토폴이 함낙된 이후 흑해 함대가 공중분해되어 수병 대부분이 발트해나 후방으로 차출되었다. 따라서 러시아군이 퇴각 전 공병대가 폭약으로 자침시켜야 했는데, 공병대는 군함 자침 방법을 몰랐고, 장교는 가지고 있던 폭약으로 폭파시킬려고 했다. 하지만, 오스만 군이 군항으로 진군하자 자침을 포기하고 퇴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