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정치계의 큰 영향을 줬던 전례없는 사건
현재 일본의 정치판이 탄생한 사건

2016년 4월 13일 발표되어, 그해 8월 당시 여당인 자유민주당이 두개로 분할되고, 기타 야당들의 대통합과 조직화를 가진 사건. 이 사건으로 보수 본류의 성장당과 중도 계열의 과학당, 진보 계열의 인간진보당과 우익 계열인 극동결사와 기타 수많은 당들이 만들어지게 된다. 본격적인 다당제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것으로 그동안 전 지역에서 우세한 자유민주당의 일당독주체제가 종말을 고하고, 지역단위 정당들이 생겨나게된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배경과 과정

2015년 8월 23일에 이루어진 병역법 개정안 기습 통과로 자유민주당의 지지율은 회생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비록 2014년의 총선거로 246석의 의석을 확보해 두었고, 29석을 보유한 공명당이 내각을 자진 해산하고 새로운 총리를 선출하면 내각불신임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는 발언이 있었기 때문에 우위의 국회는 유지되었지만, 실책을 이유로 2012년 민주당을 압박해 강제로 총선을 열게한 당이 이 중의원을 계속 유지하기란 어렵다는 것이 정론이었다. 따라서 새 총리가 선출되더라도 결국 지난 총선처럼 가미카제 총선을 보게될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했고,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8월 27일에는 결국 지난 들을 뒤에서 조종하기만 하고 언론에의 노출을 극도로 꺼렸던 카토 메구미가 전면에 나서 제73대 내각총리대신에 지명되게된다. 이 지명에도 논란이 많았다. 특히 중의원에서의 카토 파는 20명도 안되는 정도였고, 완전히 당을 장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따라서 총리로 지명되기는 하였지만 과거에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허수아비 총리가 될 가능성이 농후했던 것이다. 그래서 자민당의 최대 파벌인 굉지회의 영수의 자리가 카토 메구미에게는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었고, 당 내에서의 영향력 확장을 시도하던 미사카 미코토와의 충돌은 불보듯 뻔한 것이었다.

카토 메구미는 여러 의원들을 포섭하는데 많은 인력을 동원중이었고 2016년 1월 예정된 굉지회 영수 지명회의에서의 취임을 목표로하였다. 반면 미사카 미코토는 당시 초선의원으로 자민당의 정치적 스탠스나 분위기와는 어울리기 어려웠고[1], 이러한 것을 이미 간파하고 있던 카토는 당연히 영수회에서의 압도적인 지지+자민당 당권 장악을 통한 안정적인 국정운영으로 이전 내각의 실패를 커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2016년 1월 23일, 굉지회의 영수에 카토 메구미가 오르게 된다. 하지만 이것이 모든 정치판을 바꿔버릴 거대한 서막이라는 것은 이때까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미사카 미코토의 분당 선언

안정적인 국정운영을 통해 카토 내각의 지지율은 3월 말에는 30%대로 회복되게 되었다. 하지만 2016년 4월 13일 오후 6시의 중대기자회견에서 미사카 미코토자유민주당의 분당을 선언했다. 하지만 이런 선언에도 주류 언론이나 카토 메구미 총리, 자유민주당 보수 본류 의원들은 전혀 개의치 않는 상황이었으며 초선 의원이 눈에 띄일려고 별 짓을 다 벌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자회견이 진행된지 30분 만에 상황은 역전되었다. 회견장에 민진당오노데라 코사키 대표가 도중에 들어와 신당에 참여할 것이라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90석 대의 민진당[2] 이 무엇을 할 수 있겠냐는 사람들이 많았고, 실제 의원들 대부분이 그렇게 받아들였다. 사실상 미사카 미코토의 당적 이동을 공표한 수준 아니냐는 항의도 있었다. 그런데 기자회견이 진행되던 도중 오후 7시 13분 경 공명당의 대표인 코우사카 키리노가 고심 끝에 이자리에 섰다면서 신당 참여를 선언했다. 이 때문에 대다수 중도 보수 성향의원들이나 중도 성향의원들이 자유민주당과 미사카-민진-공명연합신당을 저울질하기 시작하였으며 이 때부터 돌이킬 수 없는 폭풍이 일본 정계를 강타했다.

이 선언 이후 당연히 민진당 일부 의원들의 반응은 이뭐병. 민진당에 중도성향 의원만 있는 것도 아니고 당연히 폭넓은 의견을 수용하고 그 결정을 대대적으로 홍보했어야한다는 반발이 민진당 내부에서 크게 일었다. 오노데라 대표는 거대 신당이 탄생한다면 주류는 민진당이 된다며, 12년의 참극을 만회할 기회이고 이것을 잡아야한다고 의원들을 설득했다. 결국 민진당의 분파는 두개로 나누어 통합신당파와 독자노선파가 격돌하게 된다.

한편 5월 초에 일본 유신회는 정계개편의 바람을 순풍으로 받아들여 대규모 국민참여 당명변경을 공지했고, 2016년 5월 30일 극동결사를 공식적으로 채택하여 새로운 간판을 달았다. 또 이 과정에서 지금 넘어오는 자민당 의원에게 공천권 확실히 보장이라는 문구를 내세워 자민당 의원을 대거 탈취해가기도 했다. 또한 6월 초에는 사테라 에밀리아를 중심으로하는 무소속 진보세력이 제로당을 구축하여 민진당 분파 의원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자유민주당의 중도 개혁세력도 일부 얻어 원내에서 꽤나 큰 세력을 구축하게 되었다.

민진당은 당내 통합을 위해 최고위원회의를 열었으나 정확히 가부동수가 펼쳐지는 진경이 나와버렸고, 당의 세력은 점점 작아졌다. 자유민주당도 상황은 별반 다를바가 없어 의원의 이탈을 막으려는 카토와 의원을 하나라도 더 데리고 나가려는 미사카의 구조적 싸움이 펼쳐지게 되었다.

과학당 창당

결국 2016년 7월 1일, 미사카 미코토과학당을 창당하며 자유민주당 소속의원 53명, 민진당의 74명, 공명당의 29명을 더한 156석으로 원내 2당으로 오르게 된다. 하지만 결국 통합반대파 민진당 의원 47명이 이탈하여 인간진보당을 세워 일본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을 합당한다.

카토는 이 상황을 좌시하고 있을 수 없었다. 비록 과학당이 민진당 일부 분파의 이탈을 막지 못했다고는 했지만, 이미 자유민주당의 의석수는 과반수에 한참 못미치는 상황이었고, 내각은 단지 새로단장한 각 당들이 재정비할 시간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유지되었다. 또 자유민주당 의원의 이탈을 고민을 하는 도중에도 속속들이 일어나고 있었으니, 말 그대로 시한부 정권이되버린 셈이다. 결국 카토 메구미는 9월 해산, 10월 총선을 총무성을 통해 발표하게 된다.

자유민주당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기에는 징병제 문제나, 현재의 당의 이미지로 볼 때 적합하지 못하다고 판단해 결국 2016년 8월 27일 당명을 성장당으로 변경한다. 이후 본격적인 선거국면으로 돌입하게 된다.

제4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4 13 72 162 159 65
봉사당 제로당 인간진보당 과학당 성장당 극동결사

아무도 200석 이상 얻지 못했다

일본국민들은 결국 카토 메구미성장당도, 미사카 미코토과학당에게도 과반수라는 의석을 넘겨주지 않았다. 또한 어느 당도 우세하지 않아 내각이 구성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도 많았다. 중도진보 계열인 과학당이 비록 원내 1당이되긴 하였지만, 인간진보당과는 껄끄러운 관계인 데다가, 두 정당을 합쳐도 과반수를 넘지 못한다. 성장당 역시 우익 계열인 극동결사를 껴안더라도 과반수를 넘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과거처럼 대연정을 실시하자니, 당장 이 선거가 치러진 이유를 생각할 때 국민적 지탄을 받을 것이 유력해졌기 때문이다.

결국 개표일 오후 10시 긴급 회동을 통해 과학당과 성장당 사이의 연정이 이루어져, 321석의 연립여당이 탄생한다. 당연히 여론의 반응은 이게 무슨이었다. 도로 자민당이라는 비난 여론도 생겨났고, 의석수가 앞서는데 과학당이 총리를 배출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해 지지자들의 뒷통수를 제대로 후려갈겼다. 이 사건의 전말은 결국 2020년 미사카 미코토 문부과학대신 경질 파동에서 까발려지게 되니 해당문서 참조.

어쨋거나 이런 조치는 양당 모두에게 득이 될 것이 없었고 단순히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모습으로도 비춰져 두 당의 지지율은 사이좋게 내각구성과 동시에 폭락했다. 이 과정에서 과학당의 이른바 아웃소싱 세력이었던 아이돌계열이 집단 탈당을 선언, 아이돌 총 연합회를 꾸리는 상황이 발생하는 데 선거 이후의 두 번째 정계개편은 아랫문단 참조.

후발 정계 개편

정치분리주의와 지역주의의 대약진
이념중심의 정당구조의 약화

후발 정계개편은 제4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가 끝난 이후부터 시작된 소분류 개편을 의미한다. 이 개편으로 경기연맹, 아이돌총연합회, 스이메이대학동맹, 카스카베 방위대등이 생겨났다.

일본의 정당은 분열 중

결국 선거가 끝나자 전국단위 정당의 입지가 심각히 줄어들었고, 당 내에서 자기 지역의 이권을 따지는 의원들도 많아졌다. 애초에 현재의 정치판이 자기들끼리 당파싸움하다 이합집산해서 생긴 결과물이었기 때문에, 자기들이한 분당은 대의를 위한 것이고, 남이하는 분당은 모략선동이라고 매도할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속에서 토호쿠를 중심으로 하이큐 동맹회가 인간진보당을 탈당(10월 13일)하였고, 전일본수영회(10월 14일), 일본육상연맹(10월 17일)이 탈당을 선언하면서 이들은 결국 21일 경기연맹이라는 스포츠 중심 지역기반 정당을 창설한다.

이런 분리주의적인 경향이 계속되자 대부분의 정파가 짬뽕된 과학당은 당연히 위기에 직면했다. 자민계와 민진계, 공명계를 다음으로 네번째로 큰 아이돌 계 의원들이 불만을 표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원래 이들은 정치권과 관련이 없었지만 미사카 미코토 총재가 당시 선거 국면전환과 이미지 개선을 위해 받아들인 아웃소싱 세력이었다. 당연히 과반수를 석권하고 정국을 주도할 것이라는 구슬림에 넘어온 이들로서는 제1당이 총리를 배출하지 못한다는 것에 꽤나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아이돌 계열에 성장당 내각에서 어떤 장관직도 주지 않을 것이라는 소식이 들려오자 결국 10월 19일 아이돌 계열이 총 탈당을 선언하여 2016년 10월 22일 창당준비위원회를 꾸리고 10월 29일 아이돌 총 연합회를 창당했다. 아총은 새 지도부를 꾸리기 위한 전당대회를 2017년 1월에 실시할 것을 공지하고 지지기반 확장에 열을 올리게 된다.

한편 극동결사도 이러한 바람을 피해갈 수 없었다. 오사카 중심의 지역의원 모임회인 스이메이대학동문회가 당 운영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뻗치려고 하고 있었고, 주류 세력인 타카나시 세력을 이것을 방어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후 오사카에의 국민경선을 통한 공천을 철회하고 당대표 지명 공천을 실시하라는 압박을, 지역구를 걸고 했다. 당시 간사장인 토가시 유우타의 반응은 당연히 NO였고, 이들은 결국 12월 초 탈당하여 27일 스이메이대학동맹을 차리게 된다. 1월에는 노하라 가문을 중심으로 하는 카스카베 방위대가 각 정당에서 탈당하여 신당을 설립하였지만, 사이타마 현 내에서의 지역정당으로만 자리잡았다.

그리고 1월, 올것이 왔다.

아이돌총연합회의 전당대회가 1월 19일 열리게 된다. 당시 전당대회의 센터 자리를 둔 경선 방식에 아이돌마스터 계열과 러브라이브 계열의 의견이 심한 충돌을 겪고 있었다. 러브라이브 계열은 아이돌 쪽에서 보자면 신생계열이었지만 그만큼 당내 충성도가 앞섰고, 아이돌마스터 계열은 과거부터 내려오는 유구한 전통과 폭넓은 활동으로 여론 지지율이 앞섰던 상태였기 때문이다. 두 세력의 우세 분야가 다르고 정도도 비등해서 경선 방식에 따라서 승패가 갈릴 수도 있는, 그야말로 초접전이었다. 당연히 선거는 진흙탕 싸움으로 번져 네거티브 전이 되었다.

당 경선 중재위원회는 여론조사 질문을 결국 '상임센터로 누구를 뽑는 것(지지도)이 좋다고 생각하십니까?(선호도)'라는 질문으로 최종 결정을 내버린다. 두 계열에서 모두 자기에게 불리하다고 반대했지만 최종 중재위의 결정이라 결국 수용되었고 1월 22일 간토권 여론조사에서 아이돌마스터가 우세하면서 센터자리를 가지게 된다. 당연히 이런 결과에 만족할 수 없었던 러브라이브 계열은 2월 10일 집단 탈당을 선언하고, 러브라이브 전국연합을 23일 창설하게 된다. 이후 러브라이브 계열이 스스로 박차고 나가자 아이돌 총 연합회는 당명을 아이돌마스터 일본지회로 변경해버린다.

이렇게 일본의 정치판을 뒤흔드는 전국 9웅이 탄생한 것이다.

비고

  1. 카토 역시 초선의원이었으나 이전에 조부로부터 정치를 배웠고, 도의원을 지낸 바 있었다.
  2. 4월 12일 기준 총 474석 중 자유민주당 283석, 민진당 90석, 유신의당 59석, 공명당 29석, 사민당 5석, 공산당 8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