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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상하이 사변
第三次上海事変
타이완 해협에서 정비하는 일본 해군
기간 2011년 5월 6일 - 2011년 9월 15일
장소 중화민국 상하이시, 산동반도, 황해, 타이완 해협
원인 도호쿠 대지진에의 중국 언론의 반일 책동, 일본의 상하이 영향력 행사 야욕
결과 일본제국의 전술적 승리, 중화민국의 전략적 승리. 실질적 일본의 패배
  • 칭다오 강화조약 체결
  • 일본군 상하이 철퇴
영향 동아시아 내 일본 패권의 약화. 중국의 대(対)일본 도전
교전국 중화민국
지원국
미합중국
영국
대일본제국
대만주제국[1]
광동국[2]
지원국
타이 공화국
몽강연합국
독일국
지휘관 후진타오
시진핑
웨이펑허[3]
창완취안
아키히토
쓰키야마 아키히로
오리키 료이치
이와타 기요후미
스기모토 마사히코
사이토 하루카즈
야마자키 코우지[4]
요시다 요시히데[5]
병력 지역 방위군 210,532명
  중앙군 459,583명
102,118명[6]
피해 10,658명 전사
13,203명 부상
747명 실종
816명 전사
2,538명 부상
143명 실종

개요

지나의 반일 선동과 조장이 도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특히 도호쿠 진재에 대해 그러한 표현(아쉽게도)을 사용한 것은, 이는 국가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일본 국민 차원에서도 심각한 모멸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제가 군에 상해 공략을 명령한 것은 무력으로라도 이러한 지나의 작태를 중단하고 포악한 행위를 응징하기 위한 정당한 무력행사입니다.
쓰키야마 아키히로 총리. 선공격 후에 중국 응징을 선포하며.

제3차 상하이 사변(第三次上海事変)은 2011년 5월부터 2011년 8월, 산발적으로 2011년 9월까지 중국의 제1도시 상하이에서 벌어진 일본의 침공이었다.

일본의 쓰키야마 아키히로도호쿠 대지진에 대한 중국 언론의 보도 태도를 핑계삼아 구실을 만들고, 이를 통해 상하이를 빠르게 점거하여 중국과 협상을 해 중국의 재 괴뢰화, 그리고 상하이의 경제특구로서의 중국으로부터의 분리 등을 노렸다. 이는 도호쿠 대지진의 실패적 대응에 대한 여론 무마용이기도 했으며 또한 20년 전 잃은 아시아 패권을 다시 가져오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전과 확연히 달라진 중국의 육군력의 벽에 부딪히면서 일본군 창건이래 첫 패배라고 할 만한 결과를 낳았다. 이에 일본은 목표였던 중국 기선제압과 아시아 패권 회복은 커녕 본격적으로 아시아 내에서 일본 일극체제가 끝나는 계기를 제공했다. 다만 사상자 교환비로 볼때는 일본이 압승했다. 이 때문에 중국 역시도 일본이 국가총동원법을 선포하고 전면전으로 나올 경우 감당할 자신이 없어 9월 칭다오에서 강화협상이 맺어진다. 하지만 일본의 권위 실추는 변함이 없었다.

냉전 종식 이후 일본군이 직접 군사행동에 나선 현재까지 마지막 사례이다. 참고로 1932년의 1차 상하이 사변, 1937년의 상하이 전투에 이은 3번째 일본의 상하이 침공이라 하여 제3차 상하이 사변으로 명명됐다. 한편 상하이뿐만 아니라 제2전역으로서 산동반도에서의 전투도 있었기 때문에 "헤이세이 지나 출정"이라는 명칭으로도 불린다. 일본에서는 대체로 상하이 사변보다 후자의 명칭이 대중적인 편.

배경

2011년 3월 일본에서 진도 9.0에 달하는 도호쿠 대지진이 발생하여 약 3만 명이 사망 또는 이재민이 되는 피해를 입고, 여기에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까지 터져서 후쿠시마현 일대에 방사능이 누출되는 등의 일이 벌어졌다. 이때 당시 총리이던 쓰키야마 아키히로 내각은 대응을 성공적으로 하지 못하면서 피해를 키워 국민적 비난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던 3월 29일에 도호쿠 대지진에 대해 한 중국 언론이 "일본에서 지진이 발생해 안타깝게도 3만 명이 죽었다.(日本發生地震,可惜死了3萬人)"라는 기사가 문제의 발단이 되었다. 기사의 늬앙스가 마치 진도 9.0의 지진이 닥쳤는데도 일본인이 3만 명밖에 죽지 않아 아쉽다는 듯한 느낌을 풍겼다.

이에 마침 도호쿠 지진으로 어수선하던 쓰키야마 내각은 이를 정치적 기회로 활용했다. 정부는 해당 언론사가 일본에 대한 심각한 모욕을 했다고 강조하며 중국을 상대로 반일 금지와 공식 사과, 해당 언론사 폐간을 요구했다. 이에 중국은 내정간섭이라고 반발하고 일본의 요구를 무시했다. 이렇게 이 상황이 일본과 중국의 전면적 갈등으로 번졌다.

이에 당시 스기모토 마사히코 대신 하의 해군이 4월 7일 중국 응징을 위해 무력을 투사하자는 제안을 하고, 이어서 중국에 매우 강경하전 육군성도 대중 군사작전에 동의하면서 최종 결정권은 쓰키야마를 비롯한 내각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4월 20일, 내각은 전쟁대신, 육군대신, 해군대신, 공군대신을 포함한 각료회의를 통해 중국에 대해 제한적으로 무력을 투사하고, 그 제1전선을 상하이로 제2전선을 산동반도로 하여, 군사작전의 목표를 칭다오 및 웨이하이웨이의 회복과 상하이의 분리, 중국과의 무역조약 개정으로 한다는 내용의 임전방침을 각의로 결의했다. 쓰키야마로서는 만약 이러한 성과를 실제로 이룰 경우 임기 유지는 고사하고 장기집권도 가능하다고 판단했기에 군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천황 아키히토는 은밀히 쓰키야마를 불러 상하이 공격이 국제적 비난과 중국에 명분만 주는 결과를 초래할것이라고 반대의 성의(聖意)를 표명했지만, 쓰키야마는 이미 내각이 결정했고 군의 능력을 신뢰하고 있다고 강력히 주장하여 천황의 반대를 꺾었다. 당시 이미 80세에 가까운 고령으로 거의 황거에서 생활하고 있던 아키히토는 별 힘이 없기도 했다.

이것이 바로 상하이 사변의 시작이 되는 상해분리공작(上海分離工作)의 시작이었다.

전개

공세 시작

2011년 5월 6일, 갑작스럽게 일본 항공모함과 전투기들이 타이완 해협을 거쳐 상하이 연해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중국은 일본과의 갈등을 단순한 외교적 마찰 정도로만 생각했기에, 영해에 침범한 일본군이 실수를 했다고 판단하고 공해(타이완 해협)로 나갈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일본 측에서 이를 묵살, 곧장 군함이 포격을 가하고 전투기와 폭격기가 발진해 폭격을 시작하면서 기습적인 대중 공격이 전개되었다.

공격을 받은 중국이 어수선한 가운데서, 쓰키야마 아키히로 일본 총리는 공격 약 1시간 만에 세계의 관심이 집중된 가운데 앞선 각의에서 결의된 내용을 발표하고 중국의 "포악한 태도"를 비난하며 응징을 가하겠다는 선언을 했다. 그리고 총리의 발표와 동시에 곧장 상하이파견군이 편성되고 육군 2개 사단이 해군 수송선을 통해 타이완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타이완에서 현지 병력 육군 1개 사단과 합류한다. 이어 5월 8일, 3개 사단 4만여명으로 구성된 일본군이 해공군과 해군 육전대의 지원을 받으며 상하이로 육박해오기 시작했다.

중국의 패주와 반격

일본의 공세는 매우 빨랐고 경이로웠다. 일본 공군은 삽시간에 상공을 방어하는 중국 공군을 분쇄, 상하이의 주요 보급 거점과 군사시절, 그리고 민가까지 닥치는 대로 타격했다. 당연히 압도적인 해공군의 열세 아래서 현지 중국군은 일본군의 상륙 저지에도 실패하고, 5월 9일 충밍을 일본군에 내주었다. 이 첫날에만 중국군은 500여명의 전사자를, 일본군은 약 40여명에 그쳤다.

당시 난징의 후진타오 총통을 비롯한 중국 지도부는 일본의 공격에 대해 긴급 회의를 열고 상하이 현지군이 대응하는 동안 중앙군을 편성해 상하이로 파견, 일본에 맞선다는 방침을 수립했다. 하지만 이미 중국의 피해가 너무 커져서 협상을 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5월 12일 일본군은 바오산을 넘고, 상하이 시내로 돌입하기 시작했다. 상륙 약 5일 만에 거점을 확보한 일본군은 다시 대만에서 1개 사단을 증파해 푸둥신 지역을 공격하게 했다. 일본군이 점점 상하이에서 점령지를 확대하기 시작하자 국제사회의 비난이 시작되었다. 5월 15일 미국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일본에 대해 불법 침략행위를 중단하라고 요구한데 이어 서방국들도 일본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본은 아랑곳하지 않았고, 바로 상하이 시내 8구에 대해 공세를 시작했다. 하지만 이때부터 파죽지세이던 일본의 스탭은 꼬여버리게 된다. 5월 17일부로 중앙군 편성이 완료되어 상하이 방어를 위해 파견되기 시작했다. 상하이 현지군은 일본군에게 영락없이 패주하며 순식간에 해안을 모두 내주었지만, 이제 중앙군이 투입되기 시작하는 이상 상황은 변했다. 또 상하이 시내의 살인적인 고층 빌딩도 방어자인 중국 측의 유리함을 더했다.

이에 일본은 5월 23일부터 중국의 시선 분산 목적과 칭다오 및 웨이하이웨이 재병탄을 위해 무려 3개 사단을 산동반도로 상륙시켰다. 이에 따라 전장은 상하이와 산동반도 2곳으로 확대되며, 거의 양국 전면전 수준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일본군은 공군으로 시내를 분쇄하다시피 공격한 끝에 상하이 중앙시내를 점령하고 자딩구, 민항구, 펑센구를 점거하여 상하이의 주요 기능을 하는 지역을 확보하지만 이것들을 해내는 데만 약 한달이 더 걸려 6월 20일에야 훙커우 공원에 욱일기를 꽂을수 있었다. 궁지에 몰리자 일본은 조선을 통해 1개 사단을 증파하지만, 이는 중국군의 충원 속도를 따라잡을수 없었다. 거기다 약 한달의 맹렬한 공세에도 상하이조차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일본은 공세종말점에 다다르고 만다. 물론 산동반도의 공세 역시 시원찮은 결과로 칭다오와 웨이하이웨이, 그리고 두 도시를 잇는 철도를 따른 선 정도만 장악하는데 그쳤다.

장기화

이미 의기양양하게 상하이를 공격한 기세는 남아있지 않았다. 한달 반이나 시간이 끌린 이상 일본 내부에서는 슬슬 좋지 못한 상황을 감지하기 시작했고 매일같이 반중 선전을 하던 자민당 및 정계에서도 상하이 출정 패배에 대한 우려가 내부적으로는 터져나왔다. 물론 쓰키야마의 지도력에도 의문을 표하기 시작했다.

본래 일본의 계획은 상하이를 빠르게 장악하고 나아가서는 산동반도까지 점거한 뒤, 상술한 조건[7]을 들이밀어 협상을 체결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상하이조차 5주나 걸려 애매하게 점령했고, 산동반도 공격도 망했고 상하이 점령지를 지키는 것조차 불확실해진 이상 이제 절대적인 갑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중국 측이 압승했다고도 볼수 없었다. 전사자 수치부터 일본 816명, 중국은 그 10배가 넘는 10,658명이 기록되었다. 수적으로는 몰라도 질적으로는 중국군은 일본군에 비해 한참 열등하다는 것이 증명된 압도적 교환비였다.

또한 일본에 있어서도 어쨌든 상하이 중심부와 칭다오, 웨이하이웨이는 차지한 이상 성과라고 내세울 만한 전과 정도는 거두었다. 다만 예상보다 상당히 힘들게 진격했고, 난징 공략은 어림도 없다는 것 정도였지 일본의 전술적 승리 자체는 부정하지 못했다. 당연히 중국이 일본 점령지를 탈환하는 것도 언감생심이었다. 이러니 중국도 은근히 타협을 원하는 중이었다.

따라서 쓰키야마를 비롯한 내각은 이 시점에서 중국 측에 요구조건을 보내고 평화협상을 맺어 이권을 챙겨가면 국민에게 할 말은 충분히 있다고 봤다. 7월 9일, 약 2달 간 교착상태의 교전이 계속되는 가운데 각료회의에선 독일에게 중재를 의뢰하여 4월 각의에서 결정된 4대 요구조건(반일금지, 산동반도 장악, 상하이 분리, 무역조약 개정)의 모토에서 평화협상을 단행하기로 결의한다.

협상

지나의 우리 국민에 대한 모멸을 비롯한 반일책동으로 제국군이 이를 응징하기 위해 출정한 지 2개월이 넘었다. 지금에 이르러 용맹한 제국군은 상하이, 칭다오, 위해위에 대한 장악이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였고, 또한 제국의 무력을 통한 대 지나 응징 역시 충분히 이루어졌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대일본제국 정부는 아래에 제시한 요구 사항을 지나가 수용한다는 전제 하에 독일국에 중재를 의뢰하여 교전상태 종식을 꾀하도록 결의하였다.
7월 12일 오리키 료이치 전쟁대신. 중국에 강화를 제안하며.
• 1998년 체결한 일화기본조약을 개정할 것.
• 상하이는 양국이 공동 관리하는 경제특구로 설정할 것. 경제특구의 범위는 현재 중화민국 상하이시로 한다.
• 청도를 일본에 반환할 것.
• 위해위를 일본에 반환할 것
• 앞으로 중화민국 정부 차원에서 반일책동에 제재를 가할 것.
• 양국의 중재는 독일국이 담당하는데 동의할것.
• 상호우호를 위하여 영구적 불가침조약을 체결할것.
주중일본공사관이 난징에 보낸 일본의 7대 요구 조건

일본이 강화를 제안하며 내놓은 7대 조건은 중국으로서는 상당히 충격적인 것이었다. 특히 사변에서 일본을 지지하던 프리드리히 메르츠의 독일에 중재를 의뢰하겠다는 것은 대놓고 독일과 일본이 연대해 일본 측 조건을 최대한 관철시키겠다는 술수였다.

이에 중국은 독일의 중재를 거부하고, 미국에게 중재를 의뢰하자고 맞섰다. 당연히 미국은 당시 일본을 비난하고 중국을 지지하고 있었으므로 이는 중국이 최대한 일본 측 요구조건을 줄여서 협상을 맺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며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독일 측이 과거 중국에 군사 기술을 전수한 적이 있는 라인하르트 되르너 외무장관을 중재단 대표로 내세우겠다는 의사를 표명하면서 공정하게 중재를 진행하겠다고 중국을 달랬고, 미국은 일본과의 지나친 긴장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 중재에 소극적이었다. 이에 7월 17일 중국 측이 독일 중재를 받아들이면서 독일의 중재 하에 협상이 진행됐다.

하지만 협상이 도중 독일은 지속적으로 중국에 7대 요구 수용을 압박했다. 그러나 독일의 편파적 중재에 대해 국제사회에 비판이 심화되자 자신감을 얻은 중국이 7대 요구 중 반일 금지를 반일 지양으로 바꾸고 불가침조약만 수용하며, 일중기본조약 개정은 향후 검토로 하고 나머지 3개는 거부하겠다는 강경한 입장으로 선회했다. 사실상 영토 할양 및 상하이 분리에 관한 제2-4조는 모두 거부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일본 내에서는 차라리 전면전에 들어가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하나, 이미 상하이와 산동반도의 긴 시간 주둔으로 군이 지쳐있었고, 전면전을 벌일 경우 징병제를 재실시하는 점 때문에 여론이 항구적으로 추락해버릴 가능성이 너무 컸다. 즉시 선거의 표가 걸린 자민당은 쓰키야마에게 전면전을 벌일 경우 제국의회는 지지하기 어렵다고 경고하기에 이른다.

결국 9월 1일,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칭다오에서 일중 강화조약이 타결됐다. 일본은 중국이 전면전도 치르겠다는 배수진으로 나오자 1930-40년대 10년간 지나사변의 구렁텅이에서 허우적댔던 트라우마가 되살아났고, 결국 중국 점령지에서의 전면 철수를 수용, 7대 요구는 그중 영토 문제를 제외한 4개만 받아들여지는 것으로 칭다오 강화조약이 맺어졌다. 이후 9월 15일 일본군은 완전히 중국에서 철수하게 된다.

사실상 피를 흘려 아무것도 얻지 못한 대실패로 끝나버린 상하이 출정으로, 쓰키야마 내각은 돌이킬수 없는 정치적 타격을 입고 만다. 물론 일본에선 교환비를 근거로 일본이 우세했던 전투라고 의미부여를 하긴 했으나, 예상 밖의 참패임은 명확했다. 이후 일본의 아시아 패권 약화, 쓰키야마 내각 붕괴, 아베 신조의 집권과 AACR 포위망론[8]확산에 따른 급격한 우경화 등 갖가지 나비효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물론 중국의 입장에서도 일중기본조약의 일본에 유리한 방향으로의 개정, 정부 차원에서의 반일 지양 약속 등 여러 굴욕적인 조건을 받아들이기는 하였다. 하지만 중국군 스스로 일본군을 공세종말점에 이르게 하고 결국은 철퇴시켰다는 점에서 전략적 승리로 평가됐다. 사실상 일청전쟁 이후 117년만의 대일 승리이기도 했다.

반응

일본

중국

미국

독일

기타 국가

후일담

일본 내의 전면전론

전쟁범죄

상하이 사변 때의 일본군은 일반적 이미지와 다르게 군기가 잡혀있고 전쟁범죄가 없었다고 알려진다. 이는 일본이 민주화가 이루어지면서 군대 역시도 이전과 같은 폐쇄적인 분위기이지는 못하였고, 모병제 실시로 말미암아 병력의 질이 높아지게 되었기에 상부의 전쟁범죄 지양 명령은 대부분의 경우 준수되었고 일본군은 상하이와 산동반도 중국인들에게 친절하게 대했다.

이 때문에 일부 중국인은 일본군에 조력하기도 하는 등 중국 내의 반일감정과 별개로 일본군과 현지인의 관계는 나름 우호적으로 되었다.

하지만 알다시피 모병제 실시로 인해 대학에 가지 못한 등의 저질 인력들이 군대를 도피처로 택하여 역으로 질이 낮아지는 경우도 있기에, 일부 인원들은 강간이나 즉결처분 등의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물론 일본은 상하이 사변 당시 전쟁범죄는 일체 없었다는 입장.

  1. 중만국경에서 분쟁 획책
  2. 중국-광동 국경에서 분쟁 획책
  3. 상하이 방위군 사령관
  4. 상해파견군 사령관
  5. 산동파견군 사령관
  6. 4개 사단 상하이파견군 + 3개 사단 산동파견군 + 해군 육전대
  7. 상하이 경제특구화, 칭다오 및 웨이하이웨이 반환, 일중기본조약 개정
  8. 미국(USA), 오스트레일리아(Australia), 중국(China), 러시아(Russia) 포위망 이론. 상하이 사변에서 의외의 중국의 저력이 드러나자 미국과 중국이 중심으로 북방에서는 러시아를, 남방의 호주를 내세워 4면에서 일본을 포위할 것이라는 위협론 겸 음모론이다. 이는 일본 우경화의 결정적 역할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