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대 국회의원 선거 (변화)/배경: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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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변화당은 예상을 뒤엎고 양당의 제안을 단호히 거절해버렸고, 급기야 기자회견을 통해 양당과 선을 긋겠다는 '''비타협 선언'''을 발표, 사실상 '''강경한 비보수-비민주 독자 노선'''을 택하기로 결정한다. 이로 인해 정치권에서는 변화당 의원 전원이 무효표를 던졌을 때 가부(可不)가 똑같이 나올 경우 법안은 무조건 부결되고, 의원 꿔주기를 하지 않는 이상 타협을 해야 하거나 '''자력으로 국회를 이끌어야 한다'''는 우려와 불신의 목소리가 나타났고, 양당은 곧바로 임시 동맹을 맺는다.
그러나 변화당은 예상을 뒤엎고 양당의 제안을 단호히 거절해버렸고, 급기야 기자회견을 통해 양당과 선을 긋겠다는 '''비타협 선언'''을 발표, 사실상 '''강경한 비보수-비민주 독자 노선'''을 택하기로 결정한다. 이로 인해 정치권에서는 변화당 의원 전원이 무효표를 던졌을 때 가부(可不)가 똑같이 나올 경우 법안은 무조건 부결되고, 의원 꿔주기를 하지 않는 이상 타협을 해야 하거나 '''자력으로 국회를 이끌어야 한다'''는 우려와 불신의 목소리가 나타났고, 양당은 곧바로 임시 동맹을 맺는다.


이에 진보, 보수를 불문한 언론과 시민단체들도 합류해 변화당의 비타협 노선 중단을 촉구하는 초당적 행동에 들어가게 되었고, 지지율도 순식간에 급락해 신뢰를 져버리는 신세가 된다. 결국 변화당은 요구를 받아들이며 양당 정치에 사실상 협조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후 변화당은 제3당임에도 불구하고 양당의 눈치를 보면서 '샌드백' 신세를 져야 했으며 유권자들은 당의 무능력함에 실망하여 떠나가는 바람에 점차 지지를 잃어갔다.
이에 진보, 보수를 불문한 언론과 시민단체들도 합류해 비타협 중단을 촉구하는 초당적 행동에 들어가게 되었고, 민주당에 이어 3위를 차지했던 지지율도 순식간에 급락하며 엄청난 피해를 입어야 했다. 결국 변화당은 요구를 받아들이며 양당 정치에 사실상 협조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후 변화당은 제3당임에도 불구하고 양당의 눈치를 보면서 '샌드백' 신세를 져야 했으며 유권자들은 당의 무능력함에 실망하여 떠나가는 바람에 점차 지지를 잃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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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26일 (목) 22:10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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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시대는 "만약 새로운 정치 세력이 등장했다면?"을 바탕으로 제작된 시즌제 대체역사물입니다.

모든 설정은 공식이자 허구임을 밝히며, 자세한 정보는 각 링크를 참고하십시오.

본 문서는 17대 총선의 선거 과정을 다루는 하위 문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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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대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김대중

제15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김대중은 문민정부 후반기에 일어난 외환 위기 사태를 극복한 이후 남북관계 회복, 일본 대중문화 개방, 인천국제공항 개항, 사이버 코리아 21 등 IT 육성 사업 등 수 많은 업적을 남기며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룩했지만, 정현준 게이트를 시작으로 이용호 게이트, 홍삼 게이트, 불법 대북송금 등 여러 의혹들이 터져나오면서 '게이트 공화국'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심각한 부정부패에 휩싸인다.

뿐만 아니라 IMF의 수용 하에 신자유주의를 도입했으나 결과적으론 비정규직의 양산과 양극화를 초래했고, 신용카드 대란, 노동계 폭력 진압, 부실대학 증가, 전두환·노태우 사면 등 각종 실책을 안기면서 지지율 하락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여기에 1999년 발생한 씨랜드 화재 사고 당시 정부가 내장재 관련 법안을 개정하지 않았다며 일부 비판이 일기도 했으며 이는 대구 지하철 참사 이후 4년이 지나서야 국회를 통한 법률 개정에 나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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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모는 "무현을 랑하는 사람들의 임"의 약자이며,
국내 최초의 정치인 팬클럽인 동시에 온라인 활동을 이끈 집단이었다.

이런 와중에 정치권에서는 유력 대선 후보로 떠오른 이회창, 이인제를 두고 그 간의 경선 제도를 개편해 국민이 참여할 수 있도록 바꿈으로써 치열한 경쟁을 보이고 있었다. 한나라당에서는 이회창이 굳건한 지지층과 높은 인지도를 통해 선출되었지만 새천년민주당은 이인제, 정동영, 노무현을 비롯한 후보들이 난입한 끝에 노무현이 이인제를 누르고 최종 후보에 오른다. 민주노동당은 지난 대선에 출마한 바 있는 권영길이 재출마하면서 본격적으로 입지를 넓히기 시작한다.

하지만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이 승리하고, 또 다른 유력 후보인 정몽준이 이회창과 양강 구도를 이루면서 노무현이 3위로 추락하였는데, 이 때 여론조사에서 정몽준과 단일화할 경우 노무현이 이회창을 누른다는 결과가 나옴에 따라 민주당 내부에서는 후보 단일화 협의회(이하 후단협)를 결성, 정몽준과의 단일화에 앞장선다. 그리하여 노무현은 여론조사를 기반으로 한 단일화 결과에서 정몽준을 누르고 공식적인 단일 후보가 되었다.

그러나 선거 전날인 12월 18일, 노무현의 명동 유세에서 발언한 것이 화두가 되어 정몽준 측에서 노무현과의 지지 철회와 단일화 파기를 선언하지만, 한 치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다음 날 선거가 치러진다. 결국 노무현이 이회창과의 접전 끝에 48.9%로 당선되었고, 사실상 정권 연장에 성공했다. 이 선거에서 노사모의 선거 활동, 인터넷이 활약해 외신들의 주목을 받았으며, 노무현의 고향을 포함한 부울경에서 2~30%, 강원도에서 40%의 득표율을 확보하는 등 의미 있는 성적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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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변화당의 제3당 확보가 확실시 되던 16대 총선에서 한나라당과 새천년민주당이 과반을 차지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자, 양당은 새로운 캐스팅보터가 된 변화당에 눈을 돌리게 된다. 여기서 양당(단, 민주당 진영에서는 DJP연합을 반영한 수치)의 의석 수인 115석에 변화당의 의석(35석)을 더하면 무조건 과반이 나올 것이라 예상했는지, 선거 직후 변화당을 끌어들이기 위한 본격적인 경쟁에 뛰어든다.

새천년민주당은 우선 야당인 한나라당을 공동 견제하기 위해 '의정 연대'를 제안했고, 한나라당에서는 '반DJ 연대'가 아니라면 개혁파로서 흡수 합당을 하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는데 문제는 이들과 연합할 경우 반민주당 정서와 개혁 세력을 이용해 보수 진영을 유리하게 만들 것이란 야당의 예측이 깔려있었다. 이러한 방안은 여론조사에서도 두각을 보이게 되고, 당시 응답자 중에서는 '중립으로 위치해야 하는 의견'과 '민주당과 연대해야 한다는 의견'이 팽팽하게 맞선 상황이었다.

그러나 변화당은 예상을 뒤엎고 양당의 제안을 단호히 거절해버렸고, 급기야 기자회견을 통해 양당과 선을 긋겠다는 비타협 선언을 발표, 사실상 강경한 비보수-비민주 독자 노선을 택하기로 결정한다. 이로 인해 정치권에서는 변화당 의원 전원이 무효표를 던졌을 때 가부(可不)가 똑같이 나올 경우 법안은 무조건 부결되고, 의원 꿔주기를 하지 않는 이상 타협을 해야 하거나 자력으로 국회를 이끌어야 한다는 우려와 불신의 목소리가 나타났고, 양당은 곧바로 임시 동맹을 맺는다.

이에 진보, 보수를 불문한 언론과 시민단체들도 합류해 비타협 중단을 촉구하는 초당적 행동에 들어가게 되었고, 민주당에 이어 3위를 차지했던 지지율도 순식간에 급락하며 엄청난 피해를 입어야 했다. 결국 변화당은 요구를 받아들이며 양당 정치에 사실상 협조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후 변화당은 제3당임에도 불구하고 양당의 눈치를 보면서 '샌드백' 신세를 져야 했으며 유권자들은 당의 무능력함에 실망하여 떠나가는 바람에 점차 지지를 잃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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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우리당 창당대회(2003년 11월 11일)

대선 이후 새천년민주당에서는 천정배, 신기남, 정동영을 포함한 소장 개혁파와 영남권 의원들이 낡고 부패한데다 특정 지역의 색채가 강하다는 이유로 쇄신을 요구하면서 '과감한 재창당'을 주장한 신당파와 동교동계 주축의 보수파로 갈라졌다. 신당파들은 의원들을 영입시키기 위해 합의에 나서지만 보수파의 반대로 무산되고, 지속적인 감정 대립과 합의 실패로 지친 신당파들은 결국 탈당을 선언한다.

그 후 개혁국민신당과 한나라당의 '독수리 오형제' 개혁파가 합류해 '열린우리당'을 창당했고, 노무현 대통령은 열린우리당 소속이 되면서 최초의 소수 여당이 탄생했다. 우리당은 창당 이후 상임중앙위원을 선출해 최다 득표를 한 사람을 의장으로 정하는 집단지도체제로 지도부를 형성했으며, 한나라당의 불법 대선자금 논란, 대북송금 특검 등 각종 비리 사건으로 불신에 빠져 있을 때 적극적으로 대처하면서 정당 지지율에 상승세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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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정 사상 첫 대통령 탄핵소추안은 정국을 발칵 뒤집었고,
그리하여 '탄핵 총선'이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흘러가게 된다.

그러나 2004년 3월 12일, 한나라당, 새천년민주당, 자유민주연합을 중심으로 노무현에 대한 탄핵 소추안을 가결시키며 정치권과 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다.새천년민주당은 대통령의 발언이 정치적 중립을 위반했다며 탄핵 소추를 제안했고, 자민련, 한나라당이 동조하면서 탄핵을 주도하게 된 것이다. 이후 탄핵소추안이 헌법재판소로 넘겨지고, 노무현은 대통령으로서의 직무를 정지당해 고건 국무총리가 권한대행을 맡게 되었다.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자 국민들은 "대통령이 사과하고 넘어가야지 탄핵까지 가는 건 지나치다"며 대통령 탄핵 반대, 탄핵 3당 심판, 열린우리당에 대한 동정 여론을 촉발시킨다. 또 '샌드백' 신세로 지지층과 신뢰를 잃은 변화당도 탄핵 세력 비판과 탄핵 반대 성명을 내면서 대열에 합류했고 '2004년 총선 국민연대'는 탄핵 참여자 66명을 전부 낙선 대상자로 지정하여 여당 동정 여론에 힘을 실어주게 된다.

여러분은 지금 변화의 시대를 보고 계십니다. 모든 문서는 공식 설정이자 허구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