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광황제 이천

TLE팀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7월 11일 (월) 11:08 판

대한국 대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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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고종 광황제
大韓 高宗 光皇帝
본명
이천 (李祆)
국적
조선 (이전)
대한제국
성별
남성
가족관계
순조 숙황제 이공 (양조부)
문조 익황제 이영 (양부)
고조 태황제 이환 (양형)
풍계군 이당 (친조부)
익평대원군 이희 (친부)
영명태황후 권씨 (정비)
성빈 이씨 (계비)
순종 효황제 이택 (장남)
성조 강황제 이진 (차남)
경친왕 이원 (삼남)
경순공주 (장녀)
경순공주 (차녀)
생년월일
1860년 12월 21일 ~ 1910년 8월 29일
출생지
조선 한성부 익평대원군 사저
직위
대한제국 황제
소속
대한제국 황실
연호
광무光武
묘호
고종高宗
시호
강문장인무의열성광황제康文莊仁武毅烈聖光皇帝
상태
사망

개요

고종 강문장인무의열성광황제(康文莊仁武毅烈聖光皇帝) 이천은 대한제국의 2대 황제이다.

조선의 방계 왕족 익평군의 서자로 출생하여 궐 밖에서 생뢀하였으며, 소학을 6세에 외고 여러 경전을 10세가 되기 전에 읽으니 당시에 집안에 수재가 태어났다며 많은 소문이 났다.《고조 대제 행장》에 따르면 【가까운 종친 경은군의 그 총명함이 도성에 널리 알려졌으니 학당에서 수학하게 하라】는 기록이 남아있어, 그의 비범함이 남아있다.

생애

유년기

1860년 장조 의황제의 증손자인 익평군의 서자로 태어난 고종은 3세에 아버지 익평군을 여의게 되었다. 원래라면 익평군의 가계를 이어 가주가 되었어야 했으나 어린 나이와 서출이라는 한계로 덕안군이 입양되어 본가의 뒤를 이었다. 덕안군과 고종의 사이는 나쁘지 않았다고 하며, 덕안군은 아버지를 여읜 고종이 딱하게 여겨 그를 부족힘 없이 챙겨주었다.

1867년 고조가 환구단을 쌓고 즉위하면서 사도세자를 장조 의황제로 추존하자 군주의 4대손은 왕족으로 인정한다는 범례에 따라 1870년 경은군에 봉작되었다.

어릴 적부터 학문에 뜻이 깊어 고서를 탐독하였으며 개화 이후 들어온 신식 문물과 서역의 도서를 읽는 것에도 거리낌이 없었다 한다.[1]

1871년에는 황족과 고위층 자제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기관 이화학당이 세워지면서 군의 신분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때 덕평군 이변의 아들 완원군과 완순군, 인양군 등과 자주 어울렸다 한다. 학당에서도 뛰어난 성과를 거두어 칭송을 받았으며 이는 후에 즉위이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1874년 고조가 큰 병을 앓고 후계를 진지하게 고민하자, 경은군은 후계를 고를 때 가까운 종실인 것과 고조가 그의 총명함과 영민함을 마음에 들어하여 1875년 궐로 불러들여 관직을 하게 되었며 1876년 문조 익황제의 양자로 입적시킨 후 황태제로 공식 책봉되었다.

이후 고조가 훙서하자 연호를 광무(光武)로 하여 대한의 2대 황제로 즉위하게 된다.

위기의 시대

즉위를 하였울 무렵 고종의 나이는 고작 만 열 일곱이 불과하였다. 고조에 비하면 충분한 나이었지만, 개화와 격변에 시대에서는 너무 어린 나이었다. 선대가 남긴 노련한 신하들이 보내는 의심의 눈길, 정통성이 부족한 군주, 그리고 외세의 위협까지. 모든 상황이 좋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1878년 즉위 1년 후 운양호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대한제국 정부의 명을 받아 사세보 일대의 해안을 측정하러 갔을 때, 세이난 반군이 운양호를 공격하면서 일어난 운양호 사건은 곧 조정으로 전해지게 되었다. 새로 즉위한 군주의 권위와 제국의 위엄을 드높여야 되겠다 생각한 고종은 곧 사세보로의 전면적인 공격, 일전에 프랑스가 일으킨 을묘양요를 일본에 재현시키기로 하였다.

약간의 피해가 있었지만 선대가 남겨놓은 인재들의 도움으로 규슈를 영향권으로 확보하는 것에 성공한 고종은 황제를 향하는 의심을 지워가기 시작하였다.


가계

조부 풍계군 이당
부친 익평대원군 이희
고종 광무제 이천
장남 순종 효황제 이택
차남 성조 강황제 이진
삼남 경친왕 이원
장녀 경순공주
차녀 경순공주

여담


  1. 물론 서역의 책을 읽는 것과 신문물을 접할 수 있던 것은 전적으로 형인 덕안군의 배려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