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국 대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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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국 황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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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제3대 황제
순종 효황제 | 順宗 孝皇帝
본명
이택 (李𡊾)
태시 (太始)
출생
1881년 3월 25일
대한제국 한성부 창덕궁 대조전
사망
1922년 2월 2일 (향년 40세)
대한제국 한성부 창덕궁 함원전
국적
대한제국
재위기간
대한제국 황태자
1889년 10월 19일 ~ 1910년 8월 29일 (20년)
대한 제3대 황제
1910년 8월 29일 ~ 1922년 2월 2일 (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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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전주 이씨
아명
황길(凰吉) → 춘용(䡅鎔)
부모
고종 광황제 이천 (부친)
영명광황후 권씨 (모친)
형제
성조 강황제 이진 (남동생)
경친왕 이원 (남동생)
정친왕 이영 (남동생)
경선공주 (여동생)
경순공주 (여동생)
배우자
순정효황후 김씨 (정비)
자녀
예안공주 (장녀)
희안공주 (차녀)
연호
융희隆熙
묘호
순종順宗
존호
영정선형원극홍선무형천각[1]
시호
문덕광돈명강인경효황제[2]

개요

대한제국의 3대 황제이신 순종 효황제께서는 1881년 3월 18일 한성부 창덕궁 관물헌에서 고종 광황제와 영명광황후 권씨의 아들로 출생하셨습니다. 아명은 이춘용이셨으며, 곧 이택이라는 휘를 받으시었습니다. 부황이신 고종 대왕의 장남으로 어릴적 황태자로 책봉되어 당시 근대화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대한의 위신을 드높인 황실의 계승자로, 많은 주목을 받았습니다.

연호를 융희로 지으신 대제의 치세에는 비로소 위정자들에게 황권을 위임시켜 제국의 안정을 위해 노력하라 하였으며, 목조 이안사의 대로부터 효황제의 대까지 잃어버렸던 몽골의 칸 작위를 다시 수복하였습니다. 대전쟁의 참상 속에서도, 효황제가 이끌던 대한제국은 그 전화를 피해가며 내실을 다졌습니다.

효황제께서는 1922년 2월 2일 경기도 한성부 창덕궁 대조전에서 훙하셨습니다. 후계는 아들이 없어 아우인 강명제께서 이으셨습니다.

- 인게임 '순종 효황제 이택' 설명

순종 영정선형원극홍선무형천각문덕광돈명강인경효황제(順宗 榮正善炯元極泓宣茂熒天覺文德光敦明剛仁景孝皇帝) 이택은 대한의 3대 황제이다.

대한 고종 광황제 이천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1910년 고종 사후 1922년 훙서할 때까지 대한의 군주로 군림하였다. 찬란히 빛나던 전제군주 고조, 고종의 뒤를 이었으나 자신의 능력에 한계를 느끼고 민주적인 제도를 전면적으로 도입하여 "융희 데모크라시"를 이끌었다.

생애

유년기

1881년 대한제국 한성에서 고종과 황후 권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고조의 태자 이후 최초로 태어난 황실의 적자라 전국적으로 큰 관심을 받았고, 각국의 대사들이 국가를 대표하여 탄생을 축하하였다.

1889년 8세의 나이로 황태자로 책봉되었고 군주로서 성장하게 되었다. 고종의 배려로 외국인 교사에게 교육을 받았으며 이때 서양의 철학과 정치제도 등을 배우면서 당시 기준으로 진보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다.

즉위

1904년 한러전쟁의 승전 이후 건강이 악화되었다는 황제가 황태자에게 대리청정을 시작한다는 것으로 국정운영에 뛰어들게 되었다. 처음에는 부친 고종의 조언에 많이 의지하였으나, 갈 수록 자신의 뜻을 담아서 국가를 통치하기 시작하였다.

고종이 1910년에 사망하자 연호를 융희로 하여 제위에 올랐다. 기존에 황제에게 최종권한이 부여되어 있어 황제가 처리해야 하는 업무가 많은 것을 어느정도 줄여 몇 개의 일들든 부처의 수장에게 윤허를 받고 수장득은 처리한 일의 내용만 황제에게 보고를 올리는 형식의 정부체제를 구성하였다.

또한 기존에 개화와 만주 정복시절에 어느정도 고삐가 풀렸던 정부의 군 통제를 강화하면서 군대가 독단적으로 움직일 수 없도록 만들었다.

1912년 신해혁명으로 청조가 붕괴하자 직예지방과 내몽골 지방에 영향력을 투사하라고 지시하였고 이는 후일 외몽골 출병 때 많은 도움이 되었다.

대전쟁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황제는 엄격중립을 원칙으로 물자를 팔아 제국의 이득을 얻는, 예전 고조-고종부터 내려져 온 실리주의적인 외교를 지향하였다. 이는 1915년까지 중립을 외치다 청도를 얻기 위해 참전하기 전까지 이어졌다.

유럽에서의 군수품이 부족해지자 대한제국은 유럽의 공장역할을 톡톡히 하여 경제적으로 많은 이득을 보았고 당당히 승전국 반열에 들어서게 되면서 비로소 온전한 열강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그러나 항상 좋은 결과만 만든 것은 아니었는데, 대표적으로 국내 제국주의자들의 요구로 청도반환을 원하는 중국과 영국의 말을 무시하여 1901년부터 이어오던 한영동맹이 깨지는 외교적인 실책을 낳기도 하였다.

훙서

많은 시간이 지나도 황자가 태어나지 않자, 40대에 접어들게 된 황제에게도 압박이 들어왔고, 결국 1918년 황태제로 성친왕 이진을 임명하였다. 1920년 좋지 않은 식습관과 술을 자주 마셨던 탓에 간경화를 진단받았고, 결국 때를 돌릴 수 없었다. 1921년 겨울에는 상황이 심각해져 황태제가 대리청정을 맡기까지 하였다. 황태제는 매일 형황에게 인사하며 다시 건강을 회복하여 굳건히 설 수 있다는 말을 하였다.

하지만 결국 병을 이기지 못하고 1922년 2월 2일, 성친왕과 경친왕, 그리고 황후와 두 공주들이 보는 앞에서 훙서하였다.

태제에서 즉위한 성친왕 이진은 형황을 기려 묘호를 순종(順宗), 시호를 문덕광돈명강인경효황제(文德光敦明剛仁景孝皇帝)라 하였다.

가계

  • 황후: 순정효황후 김씨
    • 딸: 예안공주(1901년 ~ 1927년)
    • 아들: 조졸早卒(1904년)
    • 딸: 희안공주(1908년 ~ 1989년)

여담

  • 동생 성친왕 이진을 친자식마냥 키웠다. 성친왕이 1899년 생이고, 순종이 1881년생이니 거의 부모자식 연배와 같기 때문.
  • 야사로 황손이 귀한 것을 한탄하여 황후와 황실의 번영을 위해 힘쓰자는 농을 던졌다고 한다.
The Last Empire
Land of the Light and Night TLE [GWR] TLE [Hoi4] The Last Empire For the Future
  1. 榮正善炯元極泓宣茂熒天覺
  2. 文德光敦明剛仁景孝皇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