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국 대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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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국 황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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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초대 황제
고조 태황제 | 高祖 太皇帝
본명
이환 (李烉)
문응 (文應)
출생
1827년 9월 8일
조선 한성부 창경궁 경춘전
사망
1877년 5월 16일 (향년 49세)
대한제국 한성부 창덕궁 대조전
국적
조선 (이전)
대한제국
재위기간
조선국 왕세손
1830년 10월 31일 ~ 1834년 12월 18일 (4년)
조선국 제24대 국왕
1834년 12월 18일 ~ 1867년 10월 11일 (32년)
대한 초대 황제
1867년 10월 11일 ~ 1877년 5월 16일 (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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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전주 이씨
부모
문조 익황제 이영 (부친)
신정익황후 조씨 (모친)
형제
고종 광황제 이천 (양동생)[1]
배우자
효현태황후 김씨 (정비)
효정태황후 홍씨 (계비)
자녀
효헌태자 이정 (장남)
정녕옹주 이연유 (장녀)
후손[2]
순명공주 이홍은 (손녀)
이동흠 (외증손)
이종흠 (외증손)
이윤덕 (외현손)
금성군 이윤기 (고조고손)[3]
연호
영락永樂
묘호
고조高祖
존호
체천계원조극돈륜정훈홍업계기선
력건행곤정영의홍휴수덕순성흠명
광도돈원창화[4]
시호
문헌무장인익정효태황제[5]

개요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이시자 조선의 24대 국왕이신 고조 태황제께서는 1827년 9월 8일 한성부 창경궁 경춘전에서 문조 익황제와 신정익황후 조씨의 아들로 출생하셨습니다. 대제께서는 이 나라 대한의 창건자이시요, 7천만 대한인의 영원하신 국부이시자 나랏님입니다.

대제의 치세는 그야말로 전 조선의 격동기였습니다. 기계문명을 받아들이는 것에 시동을 가하던 때였으며, 이 전 조선 신민들이 피와 땀을 흘려 후세대를 위하던 때 였습니다. 대제께서는 조선 반도에만 갇혀있던 민족을 해방시켜 저 드넓은 만주 땅을 다시 통일시키는 발판, 심양과 간도 지역을 다시 받아오셨습니다. 또한 단군 이래로 끊어진 민족의 천명을 거두어 연호를 영락으로 지어 만주의 한, 대한제국의 황제, 중화의 천자로서 즉위하셨습니다.

대제께서는 외동아들이신 효헌태자께서 있으셨으나, 태자께선 어린 나이에 요절하시어 영특하기로 자자한 경은군을 문조 익황제의 양자로 입적시키어 제국의 뒤를 잇도록 하시었습니다.

- 인게임 '고조 태황제 이환' 설명

고조 체천계원조극돈륜정훈홍업계기선력건행곤정영의홍휴수덕순성흠명광도돈원창화문헌무장인익정효태황제(高祖 體天繼元肇極敦倫正訓弘嶪係基宣歷建幸坤正營義泓烋修德純聖欽明光道敦元彰化文憲武莊仁翼貞孝太皇帝) 이환은 조선의 24대 국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이다.

1억 대한인들 중 고조의 위업과 그 능력에 대해 부정하는 이는 하나도 없으며, 실질적으로 근대화라는 것을 이뤄낼 수 있도록 한 군주이다.

생애

유년기

1827년 7월 18일 창경궁 경춘전에서 효명세자와 신정왕후의 사이에서 아들로 태어나 왕세손에 책봉되었다.[6]《고조 대제 행장》에 이르면 태몽이 꽤나 비범했다고 하며 출생일에 학들이 떼거지로 날아서 왕비의 품 안으로 들어갔다는 것인데 이걸 궁에서는 기이하다고 했다. 《행장》에 의하면 준수한 외모에 미성을 지녔다고 하며 100일 전에도 벌떡 일어섰다고 한다. 유아기 때 《천자문》100여 자를 뜻을 배우고 외웠다는데 아버지 효명세자는 믿지 못하였다. 이후 소문의 진위 여부를 가리기 위해 시험했음에도 고조는 당당히 통과했고 오히려 아버지 효명세자가 매우 기뻐하며 자신보다 학문을 더 좋아한다고 하였다고 한다.

수렴청정

세손 생활 4년만에 아버지 효명세자가 22세에 비명횡사하듯 갑작스럽게 죽고 고작 4살의 나이에 동궁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할아버지 순조 역시 44세에 죽고 세손이던 고조는 준비도 되지 않은 만 7세의 나이로 즉위하게 되었다. 현재로 따지면 소학교 1학년인 어린 나이에 즉위했기 때문에 순조의 정비이자 고조의 조모인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실시했다.

순원왕후의 수렴청정 시기에 척사윤음(斥私倫音)이 반포되었고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발생했다. 기해박해, 병오박해 등으로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척살되었다. 이 기간동안 삼정의 문란이 극에 달해 민생이 파탄의 직전까지 내몰리고 있었고, 외세의 이양선이 나타나 조선반도를 노리고 있었다.

임자사화

고조가 성년에 달한 1842년부터 대비는 친정을 거두고 군왕에게 권력을 돌려주었다. 조정 내에 제 세력이 없던 고조는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노력을 하였으니, 중비제수로 근왕세력을 키워주고, 초계문신제를 열어주어 확실한 고조의 지지세력을 만든 것이다.

조정 비주류에 속한 이들을 어사, 군수 등으로 파견하여 권력으로 향하는 직접적인 길을 열어주어 근왕파로 만들었고, 친 세도가 인사들을 차근차근 명분을 잡아 제거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1848년 몸을 해치지 말라는 대비의 조언을 듣고 옥체를 돌보았고, 그 해 딸 정녕공주가 태어났다. 1850년부터 고조는 본격적으로 조정을 장악하는 작업에 박차를 나아갔다. 1851년 대대적으로 복권시키고 중용한 익평군과 1852년 초에 한성으로 불러들여 종친부에 작위를 맡긴 영평군, 흥선군은 그 작업의 초석이었다.

그리하여 1852년 한성투서사건을 일어나면서 고조는 세도가를 향해 칼을 꺼내들었다. 본디 한성투서사건은 장동 김문의 모 아전이 사사로이 관청의 재산을 착복하고 있다는 가벼운 신고였다.

평상시였다면 이는 아랫 관리들이 잘 처리할 것이였으나, 이것이 고조에게 전달된 것이 문제였다. 이것을 기회로 잡은 고조는 숙종처럼 막강한 왕권을 세우기 위하여 한번의 환국을 행하기로 다짐하였고, 곧 젊은 종친 흥선군과 국구 익풍부원군 홍재룡에게 수사를 맡겼다.

수사가 진행됨에 따라 세도 세력은 자신들을 향해 군왕이 선전포고를 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남양 홍씨에 대한 탄핵, 흥선군의 옛 행실을 꼬투리잡으며 수사를 필사적으로 방해하였다. 이는 실제로 효과적이어서, 흥선군이 수사관에서 해임되고 익평군이 그 자리로 대체되기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이 모든 상황을 뒤엎을 비수를 고조는 사용하였다. 가장 위험부담이 크지만, 확실한 효과를 보여주는 '역모'였다.

혈기 넘치는 가문의 유생들이 술을 마시며 홧김에 임금의 목숨과 폐주를 운운하며 논하던 것을 엿들은, 평소 이들에게 원한이 있던 가문의 노비가 왕이 보낸 내수사 첩자에게 매수되어 이를 조정에 고발하였다.

고조가 친국 전에 특별히 지령으로 노비는 이들이 단순히 언행을 한 것이 아닌 실제로 역모를 꾀하였고, 이를 위해 관청의 재산을 착복하여 무구를 사려 들었다고 말하라 하였다. 이는 성공하였고, 대신들은 경악을 하였다. 고조는 겉으로는 대노하여 한성부 사대문을 통제하였으나, 쾌재를 불렀다.

결국 이 일로 인해 장동 김문이 힘을 대폭 잃었으나, 친국을 하던 과정에서 여흥 민문 중 다수가 은밀히 천주를 신봉한다는 사실이 들통나게 되었다. 진실로 이를 모르던 고조는 경악하였으나, 이내 무리를 일휘소탕할 수 있다는 생각에 민문까지 묶어 이들도 친국의 대상에 엮었다.

이 사건, 1852년 임자년 일어난 관료, 선비들의 대규모 유배, 파직, 처형이 바로 임자사화다. 이는 조선 역사상 최후의 사화가 되었다. 그러나 이 임자사화는 또 다른 일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친국 후에는, 역모죄를 비롯한 수십가지의 항목으로 세도가와 연관된 이들을 모조리 체포, 국문하였다. 안동 김씨부터 시작해 연관된 이들 중 죄질이 몹시 추악한 이들은 극형을 받았으며, 나머지 친 세도가 인물들은 파직당하거나 귀양을 갔다. 이후 왕은 시파와 남인들을 국정에 등용하면서 조선을 개혁해나가기 시작하였다.

우선 가장 시급하였던 삼정의 문란을 '삼정이정청' 을 설치하면서 직접적으로 개혁해 나갔으며 안동 김씨의 권력장악 수단이 되었던 비변사를 혁파하였다. 또한 많은 인재가 임자사화로 갈려나가자 당파와 귀천을 가리지 않는 능력 위주의 인재 등용을 하면서 국왕 친위세력을 기를 겸 개혁에 힘을 쏟아붓기 시작하였다.

을묘양요

1852년 임자사화의 결과는 다른 일을 불러 일으켰는데, 안동 김문과 엮여있던 풍양 조문과 여흥 민문까지 같이 걸려들면서 이들 사이에 암암리 퍼져있던 천주교도들이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이였다. 이전에도 척사윤음 등의 어명을 내린 적이 있고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임자사화의 불구덩이에서 천주교들은 멀쩡할 수 없었고, 왕권강화와 민심 평정의 목적으로 박해가 시작되었다. 이렇게 1853년 이뤄진 계축박해로 인해 많은 천주교도들과 파리외방전교회 신부까지 사망하였다.

프랑스 선교사의 사망은 알음알음 퍼져 조선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에 의해 본국까지 도착하였고, 프랑스는 <신앙의 자유>와 <탄압받는 형제>들을 구하기 위해 조선을 향해 뱃머리를 돌렸다. 처음 제물포 항에 닿은 프랑스의 군함은 조선 조정에게 신앙의 자유와 개항장의 마련을 요구하였으나, 해안선 가까이 다가온 군함을 공격한 조선군 해안포에 의해 군함이 피해를 입고 후퇴한 후, 프랑스가 다시 더 많은 함대를 이끌고 침공하자 그제서야 신앙의 자유, 항구 지대의 개항 등 여러 조항을 담은 조불수호통상조약을 조선과 프랑스는 맺게 되었다. 조불수호통상조약의 뒤를 이어 조영, 조미 등의 통상조약까지 차례대로 맺은 조선은 비로소 국제사회에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개항

을묘양요, 현대에 부르는 말로 을묘개화의 결과로 조불상호통상조약이 채결되었다. 이 조약에는 영사재판권•무역불간섭 원칙이 있는, 산업이 빈약하던 조선 입장에서 불평등 조약이었으나 협정관세 제도가 있는 등 어느정도 상식을 갖추었긴 하였다.

한편 조선 내부에서도 무력에 의한 개항에 의해 척사파와 개화파의 갈등이 지속되고 있었으나, 임자사화로 권위가 한껏 높아진 이환이 개화던 척사던 일단 더 많은 정보를 얻어야 한다고 진정시킨 후 청, 일본, 그리고 프랑스 및 여러 서방국가들에 시찰단을 보내어 정보를 수집하게 하였다. 일본 쪽에는 조선통신사의 부활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였고, 청나라에는 영선사를 보내었다.

각지의 외국으로 간 조선인 유학생들은 이러한 서양 문물에 충격을 받고, 개화를 지지하였으며, 고조는 프랑스 보빙사로 간 흥선군의 강력한 용이론用夷論에 쇄국 후 실력배양에서 개항과 함께 개혁을 진행하려는 쪽으로 정책의 방향을 틀었다.

185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무역에서 척사파의 말대로 손해만 무지막지하게 볼 줄 알았던 조선은 뜻 밖에 상품을 얻어내었는데, 홍삼이 아편 치료에 큰 효과를 보인다고 알려지면서 청나라에서 크나큰 수요가 생겼다. 이 덕분에 재원을 마련한 조선은 미국, 프랑스 등에서 방직기계와 총기, 화포 등을 들여오면서 근대화의 길을 차근차근 밟아나갔다.

프랑스에 의해 제물포, 삼화, 군산 등이 개항되면서 서역의 물건들이 조선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였고 고조는 이러한 물건들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새로운 기물이 제대로 들어오니 놀랄 수 밖에 없었고, 이를 만든 서역에 대한 흥미와 두려움이 동하였다. 이후 프랑스 정부와의 협조를 통해 외국으로 조선은 박규수 등을 꾸려 사신단을 파견하였고, 이들은 유럽의 진보된 문명을 보고 조선 또한 개항과 이러한 신식 문물들을 받아들이는, 지금으로 말하자면 '근대화'가 절실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이들을 시작으로 유홍기, 김홍집 등의 개화파들이 양성되었으며 조선은 그렇게 근대국가로 발돋움하기 시작하였다. 공장, 총포, 비료 등 생각도 할 수 없었던 문물들이 조선으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하였고 고조는 이런 문명들을 충격을 최대한 적게 받으면서 흡수하기 위해 안간힘을 가렸다. 개혁-개항세력인 젊은 층과 보수-척화세력인 유림의 대립을 겪으면서 조선의 개항은 천천히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조청전쟁

차근차근 서역의 문명을 받아들이면서 조선의 개혁을 시작해가던 고조에게 비보가 들려오게 되었다. 함경도에서 범월인 도적떼들이 조선인 마을을 약탈하자 함경도 포수들이 월경하여 이들을 토벌한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었다. 이전부터 중원에서의 전란을 피해 만주 땅으로 도망오는 이들은 널려있었고, 그 중 조선과의 경계에 있던 이들은 종종 두만강을 넘어 함경도를 약탈하였다. 참다 못한 이들이 범월인을 토벌하였으나, 이 과정에서 만주 땅을 조선인이 밟았고 이것은 청 조정에 귀에도 들어갔다.

당시 두 차례의 아편전쟁으로 위신이 땅에 떨어진 청나라는 이를 세우고자 이 일을 빌미로 조선에 강경한 통첩[7]을 보냈다. 이를 고조가 거절하자, 청은 군대를 보내 조선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다들 알다시피, 청군은 무능하기 짝이 없었고 이는 막 군을 개편하기 시작한 조선군과의 싸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조선군 또한 엉망인건 매한가지였으나 개혁파들의 노력과 아편전쟁으로 군대 양성에 대해 관심을 가진 고조의 지원이 전쟁의 승패를 갈랐다.

청천강 인근에서 청군과 조선군이 한번 크게 붙었고, 조선군이 청군에게 피해를 주면서 조청전쟁의 승기는 조선으로 오게 되었다. 이후 평양성에서 한번의 격전을 벌인 끝에 청군은 조선에서 후퇴하게 되었고, 고조는 이때를 기회로 여겨 한성근과 어제연 등의 무장에게 명을 내려 압록강을 넘으라고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프랑스의 중재로 조선과 청나라는 적대행위를 중지하게 되었고, 평양조약으로 조선과 청은 사대관계 청산, 배상금 확보 등으로 근대화 자금을 모으며 조선의 발전을 가속화시켰다

대한제국

봉천 승운 황제(奉天承運皇帝) 는 다음과 같이 조령(詔令)을 내린다. 짐은 생각건대, 단군(檀君)과 기자(箕子) 이후로 강토가 분리되어 각각 한 지역을 차지하고는 서로 패권을 다투어 오다가 고려(高麗) 때에 이르러서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을 통합하였으니, 이것이 ‘삼한(三韓)’을 통합한 것이다.

우리 태조(太祖)가 왕위에 오른 초기에 국토 밖으로 영토를 더욱 넓혀 북쪽으로는 말갈(靺鞨)의 지경까지 이르러 상아, 가죽, 비단을 얻게 되었고, 북적(北狄)을 통쾌히 징벌하여 화의 덕을 되찾아왔다. 사천 리 강토에 하나의 통일된 왕업(王業)을 세웠으니, 예악(禮樂)과 법도는 당요(唐堯)와 우순(虞舜)을 이어받았고 국토는 공고히 다져져 우리 자손들에게 만대토록 길이 전할 반석같은 터전을 남겨 주었다.

짐이 덕이 없다 보니 어려운 시기를 만났으나 상제(上帝)가 돌봐주신 덕택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안정되었으며 독립의 터전을 세우고 자주의 권리를 행사하게 되었다. 이에 여러 신하들과 백성들, 군사들과 장사꾼들이 한목소리로 대궐에 호소하면서 수십 차례나 상소를 올려 반드시 황제의 칭호를 올리려고 하였는데, 짐이 누차 사양하다가 끝내 사양할 수 없어서 올해(1867년) 9월 14일[8] 백악산(白嶽山)의 남쪽에서 천지(天地)에 고유제(告由祭)를 지내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정하고 이해를 영락(永樂) 원년(元年)으로 삼는다. - 고조실록

1862년의 조청전쟁 승리 이후 조선은 인조와 효종에게 제를 지내며 병자호란의 원수를 갚았다고 선언하였다. 이로써 고조의 권위는 하늘을 찔렀고, 조선이 전쟁동안에 사용한 신무기들이 큰 활약을 하였다는 것을 보여주자 수구파들 또한 척화노선을 틀어 고조의 치세 아래서의 유교질서 유지로 바꾸었다. 1866년 빗발치는 제국 선포 상소를 받아든 고조는 이를 끝내 받아들여 환구단을 쌓으라 지시하였고, 1867년 환구단에 제를 지내며 연호를 영락(永樂)[9]으로, 국호를 대한(大韓)[10]으로 하여 제국을 선포하였다. 또한 다음 해(1868년)부터 서역의 역법을 도입하겠다고 하였다.

왕실 또한 변화가 있었다. 족보상 고조의 직계 4대조인 진종, 정조, 순조, 문조는 황제로 추존되었고, 추가적으로 사도세자 또한 장종으로 추존하였다가 이후 장조 의황제라는 묘호와 시호를 올렸다.[11] 왕실의 명칭은 황실로 개칭되었고, 품계와 제도 또한 재정립하여 제국에 걸맞는 황실 조직을 꾸려나갔다.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에 고조는 기존에 보수파의 반대로 느리게 진행하였던 개화를 대대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새 부대에는 새 술을 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개화파로 공직을 채웠으며 서역과의 인재교류, 신식 학당 설치 등을 하면서 신생 대한제국을 근대국가로 만들어나갔다.

이렇게 국가를 발전시켜가던 고조에게는 말년으로 갈 수록 안 좋은 일이 들려오게 되었다. 대표적으로는 제국 선포 후 황태자로 책봉되었던 태자 이정이 1869년 폐렴으로 사망하여 후계가 불안정해진 것이 있다.

태자가 사망하자 후계가 불안정해져 정부 내에서도 약간의 혼란이 일었으나 고조는 일축하며 다시 정력적으로 일을 하니 다들 쉬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고조 또한 늙어가는 몸을 느꼈고, 후계를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고 대한제국의 어린 황족들을 대상으로 하는 근대교육기관인 '수학원'을 세워 대비를 하기 시작하였다.

1874년 고조는 병을 크게 앓았다. 이를 이겨내긴 하였으나 고조는 몸이 예전만큼 성하지 않음을 느꼈고, 수학원을 다닌 황족 중 한명을 부친 문조 익황제의 양자로 들여 황태제로 삼으려 하였다.

후보는 여럿이 있었으나 총 셋으로 추려지게 되었다. 흥선군의 아들 이재황, 덕평군의 아들 완원군 이재철, 대한제국 선포 이후 추존된 장조의 4대손인 경은군 이재성이 있었다.

이중 이재황과 이재철은 부친이 살아있어 정치를 하는 것에 많은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여겨졌고, 결정적으로 경은군의 총명함과 열정이 고조의 눈에 들어왔기에 경은군은 문조 익황제의 양자로 들여 고조의 황태제로 정식 책봉되었다. 1876년 이 당시 경은군은 만 16세였기에, 고조는 자신의 건강을 고려하여 척신들에게 경은군을 잘 보좌할 것을 명하였고 경은군에게도 자신의 정치방법에 대해 직접 전수하였고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치국정론》이라는 제목의 책을 써 황태제에게 주었다.

그렇게 후계까지 준비를 다 해놓은 고조는 1877년 5월 16일 천붕하였다. 황태제와 척신들이 임종을 지켜보았으며 유언으로 '상복은 3일만 입고, 죽은 후에는 효헌태자의 능 앞에 묻어달라' 하였다.

묘호는 기계문명을 받아들이고 인묘와 효묘의 원수를 갚은 공로를 사 고(高), 주명과 삼한의 천명을 계승한 점을 사 조(祖), 그리하여 고조(高祖)로 결정되었다.

가계


여담

  • 야사에 따르면 고조는 계비 삼간택 때 김재청의 딸인 경빈 김씨를 무척 마음에 들어했다. 하지만 자신의 의사와 달리 할머니 순원왕후와 어머니 신정왕후 조씨가 홍재룡의 딸인 효정왕후 홍씨를 계비로 간택하자 3년 뒤에 경빈 김씨를 후궁으로 간택했다고 한다. 그러나 경빈 김씨는 계비 삼간택에 참여한 적이 없기 때문에 야사라고 한다. 고조는 경빈 김씨를 위해 친히 낙선재를 지었을 정도라고 한다.
  • 《고조실록》 1권에서 '외모가 준수하고 명랑하며 큰 목소리가 마치 금석(金石)에서 나오는 것 같다'고 기록되어 있다. 얼굴은 준수한 건 물론이고 목소리도 좋았다는 뜻이다. 다만 17세 때 천연두를 앓은 기록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고조가 즉위할 때 신하들이 절실하고 시급한 여섯 가지 일들을 아뢰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중 궁위를 엄하게 하라고 하는 내용이 나온다. '더욱이 어리신 나이라 보통 한가로이 계실 때쯤 무리들과 쉽게 친숙해지고 자질구레한 장난감으로 이러한 무리들은 쉽게 유혹하니 심지를 고혹시켜 성공에 누를 끼침은 모두 이에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입니다. 선묘께서는 어린 나이에 즉위하셨으나 환시를 거느리심이 매우 엄해 항상 말을 붙이지 아니하시어 전하께서는 힘쓰소서.'라면서 언급된다.(《고조실록》 1권, 고조 즉위년 12월 16일 병오 1번째기사) 고조가 미남이라 젊은 궁인들이 승은을 입기 위해 유혹했다는 설이 있는데 이는 아마 앞서 말한 《실록》에 언급된 내용을 '미남이라 궁인들이 유혹하기에 안달났다' 이런 뉘앙스로 호사가들에 의해 널리 왜곡되어 알려진 것 같다. 《실록》을 보면 알다시피 '고조가 미남이라 궁인들이 유혹했다'보다는 '젊은 나이에 즉위해 궁인들이 쉽게 유혹을 해서 누를 끼친다' 이런 식으로 실제로 얘기했기 때문이다. 당시 젊은 임금은 외모와 상관없이 궁인들의 관심 대상이었는데 승은 받기가 더 수월한 이유도 없지 않아 있다.
The Last Empire
Land of the Light and Night TLE [GWR] TLE [Hoi4] The Last Empire For the Future
  1. 공통조상은 장조 의황제 이훤. 장조의 3남 은언군의 손자 익평군의 아들이 고종이다.
  2. 현존하는 고조의 후손은 전부 모계 쪽 후손이다.
  3. 부계 쪽은 고조의 8촌 동생인 고종 광황제 이천의 차남인 성조 강황제 이진의 둘째, 의친왕 이율의 장남인 정연군 이형주의 독자 상영군 이우혁이 된다. 고조의 장녀 정녕옹주의 딸, 안유은의 딸인 이세정의 둘째가 유현수의 모친이다.
  4. 體天繼元肇極敦倫正訓弘嶪係基宣歷建幸坤正營義泓烋修德純聖欽明光道敦元彰化
  5. 文憲武莊仁翼貞孝太皇帝
  6. 고조의 증조부 정조 이후로 처음 책봉된 왕세손이었으니, 정통성은 말도 안될 정도로 강하였다.
  7. 조선왕이 직접 북경에 입조하여 황제께 조아리라는 것을 시작으로 조선에 청군을 주둔시킬 것, 조선 공주를 황제의 후궁으로 보내게 할 것 등이 있었다.
  8. 양력 10월 11일
  9. 옛 고려(고구려)의 광개토왕이 썼다 알려진 연호로, 국가를 중흥시키겠다는 뜻으로 사용하였다.
  10. 옛 삼한(三韓. 고구려, 백제, 신라)의 땅에서 일어났다고 하여 이를 택하였다.
  11. 고조의 증조부인 정조의 소망을 이룬 것이었다. 참고로 이 결정으로 인해 경은군에 봉작된 황족이 있었는데, 그가 곧 대한 제2대 황제인 고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