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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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공화국
1861년 9월 17일 ~
국기 국장
이름
공식 명칭 스페인어. República Argentina
영어. Argentine Republic
중국어. 阿根廷共和国(Ā gēn tíng gòng hé guó)
한국어. 아르헨티나 공화국
통일과 자유
(스페인어: En Unión y Libertad)
역사
성립일 1861년 9월 17일
해체일
전신 정체성상 전신
아르헨티나 연방
지리적으로 통합된 국가(지역, 집단)
부에노스아이레스국
후신 정체성상 후신
아르헨티나 연방
주목할 만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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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립 1861년 9월 17일
인문 환경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
국교 가톨릭
공용어 스페인어
데모님 아르헨티나인
총인구 약 20,616,000명 1960년 집계
경제
화폐 아르헨티나 페소
경제권 없음
정치
독립성 주권국
지도자 국가 수반 제28대 - 에델미로 훌리안 패럴 대통령 1944년 2월 25일 ~ 1946년 6월 4일
제29대 - 후안 도밍고 페론 대통령 1946년 6월 4일 ~ 1955년 9월 21일
제30대 - 에두아르도 로나르디 대통령 1946년 6월 4일 ~ 1955년 9월 21일
제31대 - 페드로 유제니오 아람부루 대통령 1955년 11월 13일 ~ 1958년 5월 1일
제32대 - 아르투로 프론디시 대통령 1958년 5월 1일 ~ 1962년 3월 29일
제33대 - 호세 마리아 기도 대통령 1962년 3월 29일 ~ 1963년 6월 21일
제34대 - 로돌포 마르티네스 대통령 1962년 6월 21일 ~ 1963년 10월 12일
제35대 - 비센테 솔라노 리마 대통령 1963년 10월 12일 ~ 1964년 4월 21일
제36대 - 호세 에밀리오 비스카 대통령 1964년 4월 21일 ~ 1964년 5월 21일
제37대 - 후안 도밍고 페론 대통령 1964년 5월 21일 ~ 1974년 7월 1일
정부 수반
여당 PL 1908년 10월 5일 ~ 1911년 3월 29일 | 1918년 6월 21일 ~ 1918년 11월 28일 | 1931년 6월 29일 ~ 1934년 5월 19일
PJ 1911년 3월 29일 ~ 1913년 6월 14일 | 1918년 11월 28일 ~ 1919년 10월 6일
UCRI 1913년 6월 14일 ~ 1913년 7월 17일
군대 아르헨티나군

개요

아르헨티나 공화국(스페인어: República Argentina)은 남아메리카 남부에 존재했던 연방체제 공화국 이다.

역사

1945년, 아르헨티나의 대통령 에델미로 훌리안 패럴미국으로부터 연합국에 합류하고 독일일본에 선전포고하라는 압력을 받았으나, 독일이 워싱턴 D.C.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고 참전을 거부하였다. 이듬해 1946년, 후안 도밍고 페론이 대통령에 취임하자 외교 기조는 급격히 전환되었다. 페론은 독일과의 관계를 강화하며 삼국동맹에 가입했고, 미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단행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접어든 상황에서 그는 포클랜드 제도를 기습적으로 점령했다.

1952년 페론은 국민적 인기를 구가하던 아내 에바 페론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고 재선에 성공하였으나, 1955년 들어 가톨릭 교회와의 충돌이 격화되면서 군부 및 보수층의 지지를 상실하였다. 결국 1955년 9월, 군부 쿠데타로 인해 정권을 상실한 그는 파나마로 망명했고, 이후 페론주의는 불법화되었으며 관련 정치 세력은 숙청되었다.

1958년, 아르투로 프론디시 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그는 페론주의자들의 암묵적 지지를 일부 흡수해 에너지 및 산업 부문에 대한 대규모 투자 유치를 시도하였으나, 군부의 지속적인 개입과 보수 세력의 방해로 인해 개혁은 난항을 겪었고 결국 1962년 사임하였다. 프론디시의 사임 이후, 연이은 정치 공백 속에서 알레한드로 고메스리카르도 발빈이 사임하자 대통령직 승계서열 1순위였던 호세 마리아 기도가 마지못해 대통령직을 수락하게 되었다.

기도는 본래 대통령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으나, 프론디시가 군부에 의해 투옥되면서 법적 정통성과 쿠데타를 막기 위한 대법원과 전직 대통령들의 전략적 판단에 따라 대통령직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내무장관 로돌포 마르티네스 의 조언에 따라 경제부 장관으로 명망 있는 정치인이자 보수 세력과도 타협 가능한 페데리코 피네도 를 임명하였으며, 이는 군사적 반발을 피하고 정권의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기도는 피네도를 개인적으로 탐탁치 않아 했지만, 현실 정치의 복잡성을 무시할 수 없었고, 결과적으로 그의 선택은 군부 쿠데타를 무산시키고 아르헨티나 민주주의의 연명을 가능케 했다.

그러나 기도 정권 하에서 실권은 사실상 마르티네스 내무장관이 장악하게 되었고, 그는 기도의 측근과 군사 동맹 세력을 제거하며 실질적 통치자로 군림하였다. 이후 기도는 외교관 직으로 전환되었으며, 마르티네스는 아르헨티나 민주주의를 군부로부터 구하려는 명분 아래 권력을 행사하였으나, 동시에 페론주의가 부활할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62년 아르헨티나 군부 내부에서는 페론주의를 온건하게 수용하려는 청색파(Azules)와 이를 철저히 배제하려는 적색파(Colorados) 간의 격렬한 권력 투쟁이 벌어졌고, 무력 충돌 끝에 청색파가 군 내부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군부는 정치 개입을 지속하되 보다 유화적인 청색파 노선을 채택하였고, 1963년 실시된 대선에서는 국민전선의 후보 솔라노 리마가 당선되었다.

리마는 사실상 페론의 귀국을 위한 길을 닦기 위해 출마한 인물이었으며, 그의 임기는 짧았지만, 페론이 아르헨티나로 돌아올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다. 이후 페론이 귀국한 뒤 임시 대통령으로 선출된 호세 에밀리오 비스카 는 새 선거 제도와 헌법 하에 치러진 선거를 주관하였으며, 이 선거에서 후안 도밍고 페론이 연임에 성공했다. 이 선거는 호세 에밀리오 비스카 대통령의 지시로 의해 반쯤 형식적으로 치루어진 선거였다.

정치

기타

상징물

사용기간 쓰임 설명
1861년 9월 17일 ~ 1965년 4월 27일 국기 건국 초기부터 사용됨.
1965년 4월 27일 ~ 페론의 두번째 임기때 사용됨.

참고

비고(Obsidian)

외부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