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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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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백제국
大白帝國 | Empire of Great Paik
파일:대백 국장.png
국기 국장
음과 양의 조화
阴阳和谐
국가 황제행진곡
국조 봉황
국화 무궁화
위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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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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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선양수도시
최대 도시 경성특급시
면적 1,326,230 km2
접경국 몽골, 중화민국, 소련
인문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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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총 인구 411,027,110명
밀도 309.92명/km2
민족 한국계 42.3%, 중국계 35.1%, 혼혈 14.2%, 일본계 5.0%, 기타 3.4%
공용어 한국어, 중국어
지역어 몽골어, 만주어, 일본어
공용 문자 한글, 한자 (번체자)
종교 국교 없음 (정교 분리)
분포 불교 30.2%, 기독교 29.4%[1], 도교 5.4%, 무속 신앙 2.1%, 이슬람교 1.1%, 기타 1.0%,무종교 30.8%
군대 대백제국군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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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제 입헌군주제, 의원내각제, 양원제, 단일국가
국가 원수 (황제) 건락제
정부
수반
태정대신 김진표
외무대신 강경화
재무대신 유승민
대법관 최명건
국회의장 진명육
여당 자유당
연립 여당 민족민주당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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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제 자본주의적 시장 경제
GDP
(PPP)
$22,606,491,050,000
1인당 $55,000
GDP
(명목)
$22,606,491,050,000
1인당 $17,883,789,556,100
무역 수입 $510,003,215,000
수출 $600,000,200,000
신용 등급 무디스 Aa3
S&P AA
Fitch AA-
화폐 공식화폐
ISO4217 GPW
단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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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연호 대백 황력, 서력기원
시간대 UTC+08:00 ~ 09:00
도량형 SI 단위
ccTLD
.gp
국가 코드
EGP, GP, 821
전화 코드
+47
  1. 개신교 14.4%, 가톨릭 13.0%, 기타 2.0%

개요

대백제국 (중국어: 大白帝國, 영어: Empire of Great Paik)은 동아시아에 위치한 입헌군주제 국가이다.

개혁 5개 칙령을 통해 급속한 근대화를 이룬 조선은 1900년 대한제국을 건국하였으며, 1911년에는 한일전쟁을 치뤄 일본제국의 영토 확장 야욕을 분쇄하고 한반도와 간도 일대를 차지한 제국이 되었다. 1920년 국명을 백의 민족이라는 뜻인 대백제국으로 개칭하였다. 이후 1920년대 후반 반장전쟁으로 인해 혼란스러워진 중국 본토를 빠르게 습격해 황해안 연안과 만주 일대를 점령지로 삼았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으로 싸웠고, 승리한 이후 규슈 지역을 할양받아 현재의 영토를 갖추게 되었다.

입헌군주제, 의원내각제 국가이며 제도는 영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국가 원수인 천황은 건락제이며 사실상의 정부 수반인 태정대신은 김진표이다.

황해안을 중심으로 인구가 많이 분포해있으며, 만주 및 개마고원 등 내륙 지역은 인구가 적다. 다민족 국가이지만 대다수의 국민이 중국계와 한국계다. 주요 종교는 불교 및 기독교이다.

수도는 선양수도시이며 최대 도시는 경성특급시이다.

상징

국기

대백제국의 국기
명칭 대백기 / 大白旗
고안자 고조 건국제
지정 1924년 5월 5일
법률 국가 상징물에 관한 법규 3호

대한제국 건국 당시에는 태극기를 사용하였다. 현재 사용되는 대백기와 다른 점은 색상 뿐이며 기본 디자인은 동일하다. 디자인을 고안한 사람은 건국제이며, 제작자는 이응준이다. 대백제국이 건국된 이후 '대백에 맞는 깃발'을 만들자는 명목으로 2024년 태극기에서 색상만을 바꾼 현재의 대백기를 공식 국기로 받아들였다. 건곤감이는 자연세계의 기본 요소를 상징한다. 중심의 음양은 해와 달의 조화를 뜻한다.

국호

대백제국의 국호
한국어 대백제국
중국어 大白帝國
일본어 大白帝国
몽골어 Их Пейкийн эзэнт гүрэн
영어 Empire of Great Paik
스페인어 Imperio del Gran Paik
아랍어 إمبراطورية بايك العظمى

대백제국이란 백의 민족을 뜻하는 백(白)을 국호에 넣은 것이다. 이후 중국과 일본 등으로 영토를 넓히면서 다민족 국가가 되었음에도 대백제국이라는 국호를 유지하고 있다. 대백제국 이전의 국호는 대한제국이었으나, 1920년 대백제국으로 개칭했다. 중국과 일본의 일부 지역주의자들은 대백제국이란 국호를 폐지하고 아시아 합중국 등의 이름으로 바꿔야한다고 주장하나, 대체로 많은 국민들이 익숙함을 이유로 대백제국이라는 국호를 더 선호한다.

국가

대백제국의 국가
파일:페니 레인.png

명칭 황제행진곡 / 皇帝進行曲
작곡 승준혁 (1867년 2월 13일)
지정 1970년 1월 2일
법률 국가 상징물에 관한 법규 4호

1867년 작곡되었으며, 1970년 국가로 지정되었다. 그 이전에는 <상뎨는 우리를 됴으쇼셔>가 국가였다. 군주제 개혁 운동이 일자 왕정주의 색체가 짙은 기존 국가를 폐지하고, 이전에 황실 찬가로 자주 쓰이던 황제행진곡을 국가로 지정했다. 가사는 없으며 곡조만 존재한다. 최근에는 탈권위주의, 탈국가주의 분위기로 황실 행사를 빼면 잘 연주되지는 않는다.

역사

대한제국 선포와 한일 전쟁

1880년대 이후 적극적인 외래 문물 수입 정책을 도입한 조선은 1900년 청나라로부터 자주독립을 하자는 취지로 대한제국을 선포한다. 이에 따라 왕이 황제로 격상되었고, 탈청 운동을 국가 주도로 벌이게 되었다. 대한제국은 김옥균 태정대신의 주도 아래에 행정구역, 정치, 사법 체계를 대대적으로 정비했다. 또 경인선, 경의선, 경부선 등 철도를 설치하고 미국 등과 동맹을 맺으면서 적극적인 산업화 및 외교 정책을 펼치게 된다.

당초 조선을 장래의 식민지로 보고 있었던 일본은 대한제국의 이런 산업화와 근대화를 경계하였으며, 1904년 강화도 전투로 대한제국과 조약을 맺기도 했다. 그러나 1906년 이완용 태정대신이 강화도 조약을 무효화시키고 대한제국 자주화 정책을 취하자 일본과 대한의 관계는 급속히 냉각되었다. 그러던중 1909년 10월 26일, 일본의 전 내각총리대신이었던 이토 히로부미안중근에 의해 암살되는 사건이 일어났고, 이에 일본은 대한제국에 전쟁을 선포했다. 이것이 약 2년간 이어진 한일 전쟁이었다.

초반에는 일본제국군이 경상도 일대를 점령하는 등 크게 선전했지만, 대한제국의 동맹국이었던 미국이 일본에 대한 무역 규제 조치를 내리면서 일본 측 민심이 동요하였다. 또 1910년 5월 신돌석 장군이 이끄는 대한제국군이 문경에서 승리를 거둔 것을 시작으로 대한군이 일본군을 꺾고 승리하게 되었다.

비록 경상도 지역의 공단이 파괴되어 피로스의 승리로 끝나긴 했으나, 일본으로부터 불가침 조약을 받아내는데 성공했다.

대백제국 선포, 중국 진출

1911년 한일 전쟁이 끝나자, 박은식 내각은 무너진 경제를 되살리는 정책에 열중하였다. 본래 역사를 전공하여 역사책 여러권을 저술한 바 있었던 박은식 태정대신은 민족성을 강조하며 민족주의 가치를 이곳 저곳에 주입하는 정책을 폈는데, 이 정책의 일환으로 백의 민족이라는 정체성에 맞춰 국호를 대한제국에서 대백제국으로 바꾸게 되었다. 박은식 태정대신이 1921년 노환으로 인해 물러나자, 그의 정치적 후계자라고 할 수 있는 안창호가 태정대신직에 올랐지만, 이내 자유당이 총선에서 승리해 이승만이 태정대신 직에 오른다.

이승만 내각은 초반에는 강력한 친미 정책으로 인기가 높았지만, 1929년 대공황을 수습하는데 실패해 결국 이승만 태정대신이 3년만에 사퇴하는 일이 일어났다. 또 조선 공산당 등 사회주의를 추종하는 극좌 정당들의 지지율이 높아져 사회가 불안정해졌다. 이에 거국 내각의 태정대신으로 선출된 신채호는 중국을 공격해 고구려의 영역을 되찾고 자원을 활용해 대공황을 극복하자는 정책을 냈다.

신채호 내각의 결정이 내려진 직후였던 1930년 12월, 대한제국군은 반장 전쟁으로 혼란했던 중국을 급습해, 황해안과 만주 지역을 사실상 전부 장악했다. 신채호는 본래 좌파 정당 출신이었지만 미국과의 친선을 통해 미국이 대백의 중국 점령을 묵인하게 하기도 했다. 또 신채호 내각의 강력한 블록 경제 정책으로 인해 대백제국은 1930년대 중반 대공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그러던 1939년 9월, 나치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독일의 동맹국이었던 일본제국도 얼마 안가 백일 불가침조약을 폐기하고 대백제국과 중화민국에 전쟁을 선포했다. 중국 진출로 앙숙이었던 중화민국과 대백제국이었지만, 중백 합작으로 일본에 맞서게 되었다. 2차 세계대전 초반기인 1941년에는 기습 공격으로 일본이 수원까지 진출하기도 했지만, 진주만 공격으로 전선이 둘로 나뉘면서 일본이 불리한 형국이 되었다. 1942년 대백제국군은 대전을 탈환했고, 중국군과 합세하여 대만 상륙작전을 개시하기도 했다.

1943년 11월 여운형 태정대신이 연합국 수장의 자격으로 카이로 회담에 참석하여 일본 분할을 제기했고, 이에 따라 규슈는 대백에, 시고쿠는 영국에, 홋카이도는 소련에, 다이완은 중국에, 혼슈는 미국에 나눠주고 도쿄는 분할통치하기로 합의되었다. 1944년 3월, 대백제국군은 기타큐슈 상륙작전을 감행, 1944년 7월 구마모토를 함락시키고 혼슈 전역을 점령했다. 1945년 6월 히로시마와 나가노에 미국의 핵폭탄을 맞은 일본은 결국 항복했고, 1948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통해 연합군이 철수하면서 규슈는 영구적으로 대백제국에 할양되게 되었다.[1]

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의 일원으로 싸우며 강력해진 대백제국은 유엔의 창립 멤버가 되었다. 다만 중국에 밀려 상임이사국이 되지는 못하였다.

4.11 안보 투쟁과 정치 개혁

2차 대전 이후 더욱 빠른 경제 발전으로 민생이 안정화되었지만, 반대로 급속한 산업화로 인해 농촌이 몰락하였으며 빈부격차가 증가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도시민들이 1956년 북경, 장춘, 경성 등지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으니 이를 10.5 노동쟁의 사건이라고 한다. 이 사건으로 장면 내각이 총사퇴했고, 조봉암이 이끄는 사회당이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게 되었다. 조봉암 태정대신은 취임 직후 농지 개혁과 노동법 개정으로 사태를 수습했으며, 의료 복지와 노동 복지제도를 도입해 '대백의 클레멘트 애틀리'라고 불리고 있다.

1960년대 대백의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비틀즈, 밥 딜런 등 신세대 음악가들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 문화적인 진보가 이뤄지게 되었다. 서구 문물의 영향으로 인한 젊은이들의 의식 진보화에도 불구하고, 유교 가치관을 믿고 있었던 기성 세대는 이런 움직임을 반항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던 1967년 대백제국 정부가 미국의 요청에 따라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기로 결정하면서 대백의 젊은이들이 대대적으로 이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4.11 안보 투쟁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일종의 히피 운동으로 분류되고 있다. 비록 안보 투쟁을 주도했던 경성제국대학교, 장춘대학교 학생부가 구속되면서 실패하긴 했으나, 안보 투쟁은 사회적인 반향을 일으켜 대백제국이 진보화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또 황실의 부패한 일상이 미디어를 통해 공개되면서 황실 개혁의 요구가 일기도 했다. 이에 대백 정부는 황실 찬양 색체가 짙은 기존 국가를 폐지하기도 했고, 법을 개정해 황실의 연봉을 깎고 권한을 대폭 축소하였다.

1980년대의 삼저호황

1970년대 초반 중진국 함정에 빠져 경제 침체기에 접어든 중화민국을 밀어내고 유엔 상임이사국이 된 대백제국은 공업화에 이어 서비스 산업 등 3차 산업에 적극적으로 돈을 투자하였다. 삼저호황을 통해 연 5%에 달하는 높은 경제 성장률을 유지함에 따라, 1981년에는 소련의 경제 규모를 추월하고 제2의 경제 대국으로 올라섰다. 1989년 불경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대백이 10년 안에 미국을 뛰어넘을 것이라는 예측까지 나왔을 정도였다.

대내적으로는 세계적인 경제 추세에 맞춰 신자유주의 정책이 시행되었다. 김대중 태정 대신은 '아젠다 1990'을 발표, 1990년까지 공기업을 대거 민영화하고 민간 기업을 지원하는 낙수 효과 정책을 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만주에 위치한 공단 지역이 몰락해 대규모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결국 폭동의 영향으로 김대중 태정대신이 사퇴하기도 했으나, 그의 최측근이었던 김영삼이 태정대신에 오르게 된다. 이러한 추세는 1989년 '어둠의 화요일'이라고 불리는 주가 대폭락 사태로 끝나게 되었다.

잃어버린 10년과 극복

1989년 밤의 화요일 사태로 대백제국의 경제는 추락했고, 소련 해체 직후의 러시아와 함께 실패 국가의 대명사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1990년대 집권한 이회창 태정대신의 긴급 경제 부양 정책으로 경제 피해를 최소화하였고, 1999년 심각한 수준이었던 국가부채를 어느정도 줄이는데 성공해 1989년부터 1999년까지의 잃어버린 10년이 끝나게 되었다.

2000년에는 장춘에서 올림픽을 개최해 대백제국의 경제적인 부활을 알리기도 했다. 또 2006년에는 경성에서 월드컵을 개최했다.

현대

1999년 경제 위기를 극복한 대백은 경제적으로 빠르게 발전하고 있으며, IT 기술의 집중적인 투자로 현대에는 미국과 함께 IT 기술의 가장 선진적인 사례로 꼽히고 있다.

  1. 다만 영국과 미국은 자신들의 점령지를 일본에 반환했다. 홋카이도는 소련의 영토였다가, 1970년대 소련의 경제적 형편이 나빠지자 일본에게 팔아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