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중국해 해전 (푸른 오얏꽃2)

한혁성 (토론 | 기여)님의 2021년 5월 26일 (수) 11:50 판
동중국해 해전
파일:동중국해 해전.png
날짜 1916년 5월 27일 ~ 5월 30일
장소 동중국해
결과 일본 제국의 승리 및 해상 봉쇄 개시
[[대한제국 (푸른 오얏꽃2)|대한제국의 해상 봉쇄와 함대결전사상이 와해됨
대한제국의 재해권 상실
교전국
일본 제국 파일:대한제국 국기 (푸른 오얏꽃2).svg 대한제국
지휘관
가토 도모사부로
가미무라 히코노조
시마무라 하야오
마쓰다이라 유타카
파일:대한제국 국기 (푸른 오얏꽃2).svg 신순성
파일:대한제국 국기 (푸른 오얏꽃2).svg 유항렬†
파일:대한제국 국기 (푸른 오얏꽃2).svg 김근상
파일:대한제국 국기 (푸른 오얏꽃2).svg 강승의
병력 전함 6척
순양전함 3척
장갑순양함 12척
경순양함 16척
구축함 28척
방호순양함 4척
총 69척
전함 6척
전투순양함 1척
전도급 전함 3척
장갑순양함 10척
경순양함 14척
방호순양함 7척
구축함 23척
총 64척
피해 규모 418명 전사
915명 부상
56명 포로
전함 1척 침몰
순양전함 1척 침몰
장갑순양함 2척 침몰
경순양함 1척 침몰
구축함 8척 침몰
4043명 전사
5354명 부상
1789명 포로
전함 4척
전도급 전함 2척
장갑순양함 7척
경순양함 6척
방호순양함 7척
구축함 15척
2척 나포


개요

동중국해 해전은 1916년 5월 27일 ~ 5월 30일 사이에 벌어진 제1차 세계 대전, 그리고 세계 해전 사상 유틀란트 해전과 함께 드레드노트급 함대가 서로 부딪친 대해전이다. 일본 측에서는 동지나해 해전이라 부르며, 조선에서는 '충무공의 굴욕, 20세기의 칠천량 해전'이라는 수식어가 존재한다. 이 해전의 패배가 황립군과 대중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배경

대한제국삼국간섭 이후 해군력을 급속히 키워가며 일본에게 아시아의 해상 지배권을 다투겠다는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러던 중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대한과 일본은 각각 독일과 영국의 동맹임을 내세우며 1차 대전에 참전한다. 대한제국 원수부백두산 계획을 실행하며 대한령 대마도와 제주도에 신예 도급 전함을 배치하고, 일본군이 아예 맥을 못 추게 만들었다. 원수부는 대한이 해상을 봉쇄하는 한 일본이 러시아와 연계할 수 없다고 판단했고, 유럽에 병력을 집중한 러시아도 극동의 동원령이 선포되기까지 다소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했다. 그리하여 여순 상륙을 감행하고, 이에 포격 지원을 맡은 HKMS 충무HKMS 전주가 서해로 빠졌지만 여전히 대한의 함대는 일본에게 위협적이었다.

러시아의 오판으로 여순 상륙에 성공한 대한제국 황립육군은 만주에서 승승장구하며 1915년 하얼빈을 눈앞에 두었다. 일본은 나날이 악화되는 전황에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러시아 혼자 만주의 상황을 이겨내는 와중에, 만주로 육군을 수송하기엔 대한제국 함대의 봉쇄를 뚫어야 했기 때문이다. 일본 해군은 이 교착 상태에 빠진 전황을 타개하기 위해 대한제국 함대를 동중국해로 일부 끌어내 축차적으로 전력을 소모시키려는 전략을 세웠다.

진행

대한제국 해군은 총 2개의 함대가 제주도에서 합류해 동중국해로 항해했는데, 먼저 신순성 제독이 지휘하는 진해 함대는 대한 해군이 자랑하는 최신예 도급 전함 3척과(HKMS 세종, HKMS 충무, HKMS 을지[1]) 전도급 전함 3척, 장갑순양함 4척, 경순양함 7척, 구축함 17척으로 구성되었고, 김근상 제독이 지휘하는 평택 함대는 전투순양함 1척(HKMS 안동)과 전주급 전함 3척이 주축이었다. 이들이 해상 봉쇄와 육군부대의 수송을 호위했다.

1916년 4월 19일 가토 도모사부로 제독이 지휘하는 순양전함 2척과 노급 전함 2척(공고, 히에이, 카와치, 셋츠), 경순양함 6척, 1개 수뢰전대(구축함 12척)로 구성된 제1함대가 사세보를 나섰다. 제1함대의 목적은 순항하듯 동중국해를 돌면서 대한제국 황립해군의 주의를 사는 것이었다.

1916년 5월 초 대한 해군은 제주도 해역에서 작전을 실행 중인 일본의 제1함대를 포착한다. 함내 장교들 사이에선 추격 및 격침, 단순 순항 목적으로 의견이 갈렸다. 일부 장교는 일본의 덫이라는 걸 간파했지만, 많은 지지를 얻지 못했다. 진해 함대 사령관이었던 신순성 제독은 '이참에 왜구와 막고라를 떠보자.'라는 생각으로 동년 5월부터 진해, 평택 함대의 모든 함선을 순차적으로 대한령 대마도와 제주도의 해상 봉쇄중인 본함대로 출항시켰고, 일본 제1함대를 추격했다. 마지막까지 본토에 남은 함선은 전도급 전함 4척, 경순양함 2척, 방호순양함 3척, 그리고 다수의 어뢰정이었다.

결과 및 영향

대한제국은 이 해전의 패배로 주력함 대부분이 동중국해에 수장되었으며, 해전에서 살아남은 주력함도 큰 손상을 입어 수리 및 전열 복귀가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렀다. 제3차 하얼빈 전투에서의 패배로 지상에서도 열세로 몰린 대한제국은, 더는 승리를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1917년 12월, 기타큐슈 조약으로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이탈할 때까지 대한 해군의 활동은 소극적이었다.

여담

신순성 황립 해군 대장은 패전의 책임을 물어 격노한 고종 태황제에게 한직으로 좌천당했다.

  1. 충무급 2번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