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조 강황제 이진

TLE팀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7월 18일 (월) 01:12 판

대한국 대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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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성조 강황제
大韓 成祖 康皇帝
본명
이진 (李振)
국적
대한국 (마지막 제국)
성별
남성
가족관계
고종 광황제 이천 (부친)
성명강황후 민씨 (정비)
광종 평황제 이휼 (장남)
의친왕 이율 (차남)
희선공주 (장녀)
희원공주 (차녀)
희진공주 (삼녀)
희예공주 (사녀)
희수공주 (오녀)
생년월일
1899년 6월 4일 ~ 1967년 1월 4일
출생지
대한제국 경기도 한성부 창덕궁 대조전
직위
대한국 황제
소속
대한제국 황실
연호
강명剛明
묘호
성조成祖
시호
경장평문효헌소열강황제敬章平文孝獻昭烈康皇帝
상태
사망

개요

성조 경장평문효헌소열강황제(敬章平文孝獻昭烈康皇帝) 이진은 대한의 4대 황제이다.

순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여 대공황, 2차 세계대전, 냉전, 64 한성올림픽을 모두 겪은 군주로, 격동의 시기 대한의 군주로 군림하였다.

생애

유년기

성조 강황제는 고종 23년(1899년) 6월 4일 고종과 후궁 성빈 이씨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당시 황태자였던 형 순종이 있어 황위와는 거리가 멀 것이라고 생각되어 비교적 자유롭게 성장하였다.

유년기의 성조는 서역에서 들어온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에 흥미를 붙였다고 하며, 이는 친왕, 황제에 위에 올라서까지 즐겼다. 부친 고종이 일찍 훙서하자 순종이 성조의 아버지 역할을 대신하였고[1] 성조 또한 아들이 없는 순종의 아들과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복형제 경선공주, 경친왕 등과의 사이도 친형제와 같아 황실의 우애가 좋은 것이 널리 알려지기도 하였다.

성친왕

융희 2년(1911년) 형 융희제가 칙명으로 어린 황족들에게 군호를 내릴 때, 성친왕으로 책봉되었다. 당시 황제가 만 서른이 다 되었는데도 자식이라곤 딸 둘 뿐이 없자 황실과 정계에서는 성친왕을 황태제로 삼으라는 압박을 하였다. 어린 성조 또한 이를 잘 알고있고 형에게 충분히 거슬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아 행동을 조심하였으나, 순종은 그런 성조의 모습을 안타까이 여겨 황태제로 책봉하라는 이들에게 경고하였고, 성조에게는 지금과 같이 행동하라고 하였다.[2][3]

경종시절에야 있을 법한 일 때문에 성친왕 시절에는 별 다른 행동 없이 조용히 지냈으며, 시간이 지나며 순종에게 아들이 태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융희 9년(1918년) 만 19세의 나이로 황태제에 봉해졌다. 이후 순종이 융희 12년(1921년)에 쓰러지자 대리청정을 하였고, 다음해 2월 융희제가 훙하자 황제로 즉위하였다.

즉위

관례에 따라 세 번 거절하는 절차를 밟은 후, 만 23세의 성조는 연호를 강명(剛明)으로 하여 즉위하였다. 당시 불혹을 겨우 넘긴 황제의 죽음으로 전 세계가 충격받았으며, 기존까지 별로 알려지지 않은 성친왕에 대하여 한 순간에 많은 관심이 쏟아졌다. 제국 내부에서는 젊은 황제에 대해 기대와 걱정의 시선을 보냈지만 성조가 진중하고 기존 융희제가 마련해놓은 민주주의라는 토대를 존중하는 것을 보여주니 그 걱정은 줄어들게 되었다.

그러나 융희제 시절 야망이 있던 성조는 황제가 되자 청년기에 못하였던 정치에 점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였으며, 20년대 중반 여러가지 문제점, 예를들어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제국 내부에서 공산주의 세력이 준동하자 치안유지법을 비롯하여 여러

전후

훙서

가계

여담


  1. 사실 순종이 1881년생, 성조가 1899년생이라 나이차이가 무려 18살이 나서 아버지-아들 뻘이기도 하다.
  2. 순종실록 1권 융희 2년 3월자 발췌.【황제가 말하길. "짐이 겨우 이립을 지났으니 어찌 섣부르게 황태제를 정하겠는가? 영묘께서도 불혹을 넘으신 후에 장조를 봉하셨으니 더 이상 이를 논하지 마라"】
  3. 물론 그리 말하였다고 한들 성조는 정치적으로 자신의 입지가 위험해질 수 있기에 조심히 행동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