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조 강황제 이진

TLE팀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7월 18일 (월) 01:36 판

대한국 대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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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성조 강황제
大韓 成祖 康皇帝
본명
이진 (李振)
국적
대한국 (마지막 제국)
성별
남성
가족관계
고종 광황제 이천 (부친)
성명강황후 민씨 (정비)
광종 평황제 이휼 (장남)
의친왕 이율 (차남)
희선공주 (장녀)
희원공주 (차녀)
희진공주 (삼녀)
희예공주 (사녀)
희수공주 (오녀)
생년월일
1899년 6월 4일 ~ 1967년 1월 4일
출생지
대한제국 경기도 한성부 창덕궁 대조전
직위
대한국 황제
소속
대한제국 황실
연호
강명剛明
묘호
성조成祖
시호
경장평문효헌소열강황제敬章平文孝獻昭烈康皇帝
상태
사망

개요

성조 경장평문효헌소열강황제(敬章平文孝獻昭烈康皇帝) 이진은 대한의 4대 황제이다.

순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여 대공황, 2차 세계대전, 냉전, 64 한성올림픽을 모두 겪은 군주로, 격동의 시기 대한의 군주로 군림하였다.

생애

유년기

성조 강황제는 고종 23년(1899년) 6월 4일 고종과 후궁 성빈 이씨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당시 황태자였던 형 순종이 있어 황위와는 거리가 멀 것이라고 생각되어 비교적 자유롭게 성장하였다.

유년기의 성조는 서역에서 들어온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에 흥미를 붙였다고 하며, 이는 친왕, 황제에 위에 올라서까지 즐겼다. 부친 고종이 일찍 훙서하자 순종이 성조의 아버지 역할을 대신하였고[1] 성조 또한 아들이 없는 순종의 아들과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복형제 경선공주, 경친왕 등과의 사이도 친형제와 같아 황실의 우애가 좋은 것이 널리 알려지기도 하였다.

성친왕

융희 2년(1911년) 형 융희제가 칙명으로 어린 황족들에게 군호를 내릴 때, 성친왕으로 책봉되었다. 당시 황제가 만 서른이 다 되었는데도 자식이라곤 딸 둘 뿐이 없자 황실과 정계에서는 성친왕을 황태제로 삼으라는 압박을 하였다. 어린 성조 또한 이를 잘 알고있고 형에게 충분히 거슬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아 행동을 조심하였으나, 순종은 그런 성조의 모습을 안타까이 여겨 황태제로 책봉하라는 이들에게 경고하였고, 성조에게는 지금과 같이 행동하라고 하였다.[2][3]

경종시절에야 있을 법한 일 때문에 성친왕 시절에는 별 다른 행동 없이 조용히 지냈으며, 시간이 지나며 순종에게 아들이 태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융희 9년(1918년) 만 19세의 나이로 황태제에 봉해졌다. 이후 순종이 융희 12년(1921년)에 쓰러지자 대리청정을 하였고, 다음해 2월 융희제가 훙하자 황제로 즉위하였다.

즉위

관례에 따라 세 번 거절하는 절차를 밟은 후, 만 23세의 성조는 연호를 강명(剛明)으로 하여 즉위하였다. 당시 불혹을 겨우 넘긴 황제의 죽음으로 전 세계가 충격받았으며, 기존까지 별로 알려지지 않은 성친왕에 대하여 한 순간에 많은 관심이 쏟아졌다. 제국 내부에서는 젊은 황제에 대해 기대와 걱정의 시선을 보냈지만 성조가 진중하고 기존 융희제가 마련해놓은 민주주의라는 토대를 존중하는 것을 보여주니 그 걱정은 줄어들게 되었다.

그러나 융희제 시절 야망이 있던 성조는 황제가 되자 청년기에 못하였던 정치에 점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였으며, 20년대 중반 여러가지 문제점, 예를들어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제국 내부에서 공산주의 세력이 준동하자 치안유지법을 비롯하여 여러 정치적 문제에 관해 발언을 하였고, 이는 결과적으로 문민정부의 약화와 급진파 군 세력의 강화를 불러일으켰다.

강명 9년(1931년)에 대한국 북방군이 예산을 목적으로 한 외몽골 출병을 시작으로 대한제국은 멈출 수 없는 군국주의라는 길에 빠져들게 되었고, 이는 강명 15년(1936년)에 일어난 테러로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사건의 여파는 근황을 기치로 일어난 황도파의 궐기로 2.26 사건이 발생시켰고, 군국주의 파벌인 통제파가 이를 진압하는 것과 동시에 문민정부를 무너뜨리면서 결국 대한제국에서의 민주주의와 평화는 깨지게 되었다.

통제파의 수장 이강은 근황파와 문민정부를 장악하는 것을 비롯하여 황제의 수족을 잘라내기 시작하였고, 강명황제를 옥새만 찍는 허수아비로 이용하려 하였다. 물론 성조 또한 이를 가만히 두고볼 수는 없어[4] 끊임없이 통제파와 이강을 견제하였다.

물론 이러한 견제 시도는 이강과 통제파가 신한청년당을 통해 명목상으로나마 합법적으로 집권을 하면서 실패로 돌아갔고, 결국 군국주의 세력들에게 어느정도 동조하기 시작하였다. 강명 16년(1937년) 한중전쟁의 승인이 바로 그것 중 하나였으며, 강명 20년(1941년) 일어난 태평양 전쟁의 승인도 마찬가지였다. 이 선택은 최악으로 치달았는데, 그러한 성조의 결정은 지속된 전쟁으로 대한제국이 패전하는 것의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어찌되었든 이러한 묵인과 동조는 의주, 군산에 핵이 투하되기 전까지 유지되었고, 1945년 8월 14일 저녁에 몰래 성조가 항복선언을 녹음하여 공포한 후에서야 종료되었다.[5] 다음날 8월 15일, 대한제국은 공식적으로 연합국에 항복하였다.

전후

훙서

가계

여담


  1. 사실 순종이 1881년생, 성조가 1899년생이라 나이차이가 무려 18살이 나서 아버지-아들 뻘이기도 하다.
  2. 순종실록 1권 융희 2년 3월자 발췌.【황제가 말하길. "짐이 겨우 이립을 지났으니 어찌 섣부르게 황태제를 정하겠는가? 영묘께서도 불혹을 넘으신 후에 장조를 봉하셨으니 더 이상 이를 논하지 마라"】
  3. 물론 그리 말하였다고 한들 성조는 정치적으로 자신의 입지가 위험해질 수 있기에 조심히 행동하였다고 한다.
  4. 성조가 개인적으로 이강을 썩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형 순종이 성조에게 민주주의의 수호를 부탁하였고, 가까운 종친인 이강이 혹여나 황실을 위협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 《성조 대제 행장》, 《승정원일기》 및 한성대학 이성준 박사의 논문인 《2차 대전과 대한제국의 정치상황에 관한 연구》에 근거.
  5. 이강을 추종하는 몇몇 항전세력의 눈을 피하여 몰래 항복선언을 녹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