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카부 (신질서의 황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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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25일 (목) 21:35 판

Destiny634, 2024 - | CC-0


대일본제국
도도부현주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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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부(府)
大阪府 (おうさか ふ)
오사카부 | Osaka Prefecture
부기(府旗) 문장(紋章)

지도를 불러오는 중...

부청 소재지 오사카시 주오구 오테마에2초메 1-22
국가 일본
지역 간사이
최대도시 오사카시
면적 1,905.14km2
하위 행정구역 33시 9정 1촌
인구 9,238,019명[1]
인구밀도 8,032.28명/km2
GDP(명목) $5,803억 6,930만
1인당 GDP $62,824
시간대 GMT+09:00
부지사 유신 요시무라 히로후미
(吉村洋文, 재선)
부의회
(94석)
유신 58석
공명 20석
자민 14석
입헌 1석
무소속 1석
중의원
(21석/650석)
유신 17석
공명 3석
자민 1석
참의원
(9석/384석)
유신 5석
자민 2석
공명 2석
상징 부화 앵초
부목 은행나무
부조 때까치
ISO 3166-2 JP-27
도메인 .osaka.jp, .osa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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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사카시.
▲ 오사카 최대의 번화가.도톤모리

개요

일본 간사이 지방에 위치한 부(府). 일본에서 도쿄와 게이조에 이은 제3의 도시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도도부현별로는 도쿄도, 게이조부, 가나가와현에 이어 4위다.

역사

17세기 도쿄에 에도 막부가 설치되기 전까지 일본은 천황이 수도였던 나라, 교토가 중심이었고 근교도시인 오사카, 사카이를 중심으로 하여 긴키 지방을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 오사카시는 예로부터 천황이 있는 천년 수도 교토와 가까운 점과 사카이시라는 무역항이 있었기에 그 경제력을 바탕으로 외항으로 성장하여 오랫동안 일본의 상업 중심지로서 기능했다. 오사카시 바로 남부에 위치한 사카이시 역시 오사카, 고베 등과 경쟁하던 긴키의 주요 외항이었으며 닌토쿠 덴노의 능으로 알려진 다이센 고분이 위치해 있는 등 상고~고대 시대에는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도시였다.

과거 율령국 기준으로는 셋쓰노쿠니(摂津国)의 동부, 가와치노쿠니(河内国), 이즈미노쿠니(和泉国)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고대에는 소가씨와 대립했던 유력 호족 가문인 모노노베씨의 근거지(가와치)이기도 했으며, 헤이안 시대에는 세이와 겐지의 미나모토노 요리미쓰[2]와 그 동생 요리노부가 각각 셋쓰와 가와치 일대를 거점으로 삼았는데 가마쿠라 막부를 세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무로마치 막부를 세운 아시카가 다카우지 등은 요리노부의 후손들인 가와치 겐지 출신의 인물들이다.[3] 그 외에도 남북조 시대의 유명한 무장 구스노기 마사시게도 가와치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등 유력한 무장과의 연관이 많은 땅이었다.

무로마치 막부 이후로는 호소카와, 하타케야마의 양대 간레이 가문이 이 지역을 다스렸으나 오닌의 난을 전후해 양 가문 모두 치열한 가독 분쟁으로 인한 혼란에 휩싸였고 이 과정에서 사카이의 부유층 세력이 자치 도시를 형성하고 대표적인 무역 도시로 성장하기도 했다. 또한 이 시기 정토종의 중흥조로 알려진 렌뇨(蓮如)가 오늘날의 오사카성 일대에 이시야마 혼간지를 건설하고 세력을 확장했는데 오사카라는 지명이 최초로 등장한 것은 바로 이 렌뇨의 기록이 최초이며, 혼간지의 세력 확장과 함께 점차 오사카라는 이름이 정착되기 시작했다. 혼간지는 이후 11대 종주인 겐뇨의 대까지 이 지역에서 굳건한 세력을 보유했으나 오다 노부나가와 무려 10년간의 대립 끝에 결국 항복하고 이후 교토로 근거지를 옮긴다. 이는 오사카는 당시 북부는 요도가와강 동부는 히라노강, 서부는 바다, 남부는 평원이라는 천혜의 요새에 가까운 지형이었다.

16세기 후반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 천혜의 요새에 가까운 오사카를 자신의 세력권으로 삼고 사카이시에도 영향을 가하며 막대한 금은보화를 쌓았다. 1583년 천하인에 가까운 히데요시는 자신의 엄청난 재력을 투자해 축성한 오사카성[4]을 쌓고 이곳에 머물렀고 천하인이었기에 모든 다이묘가 상락을 하러 오면서 행정적 중심지의 역할까지 겸하며 짧게나마 명실상부한 일본의 중심 도시가 되었다.

그러나 히데요시 사후 정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히데요시에게 받았던 호조 가문의 옛 영토 간토 6주와 대평야를 받은 뒤 훌륭한 치적과 내정을 바탕으로 에도(지금의 도쿄)에 성을 짓고 이후 세키가하라 전투, 오사카 전투 승리를 끝으로 도요토미가 멸문, 도쿠가와 가가 천하를 잡게 되면서 오사카가 정치 중심지로서 누리는 영광은 오래가지 못하고 끝났다. 에도 시대에도 오사카는 상업도시로서 일본에서 에도 다음가는 중심지였으나 에도가 번영하면서 대체로 중요성이 조금씩 준 편이다. 게다가 1869년 대정봉환 이후 에도를 도쿄로 개칭하고 천황이 교토에서 도쿄로 옮겨가 그곳이 제국의 수도로 발전하며 긴키 지역의 위상은 더욱 축소되었다.

이후 대일본제국의 시대가 시작되자 도쿄, 교토와 함께 3개인 부(府)로서 위상을 다졌으며, 1945년 승전을 이룬 뒤엔 도시는 급격히 성장하여 네온사인과 빌딩숲이 된 현재 오사카의 모습을 갖추었다. 한편으로는 1910년 조센 병탄 이후 도쿄와 함께, 아니 도쿄보다도 조센계 이주민이 많이 들어온 도시라 오늘날 오사카 인구의 10% 이상이 조센계이다. 이 때문에 오카사가 "열도 안의 반도"라고도 불리기도 한다.

1971년까지 일본 제2의 도시 자리를 지켰으나, 이후로 게이조부에 역전당하여 3위 자리를 지키게 되었다. 2024년 현재는 총 생산량, 1인당 GDP 등 모든 지표에서 게이조에 밀렸다.

  1. 추계 인구 2024년 1월 1일 기준
  2. 슈텐도지를 토벌한 설화로 유명한 미나모토노 라이코가 바로 이 사람이다.
  3. 에도 막부를 세운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마쓰다이라-도쿠가와 가문이 가와치 겐지의 일파 중 하나였던 닛타 겐지의 방계 세라다 가문의 후손임을 주장하여 정이대장군에 오르긴 했지만 이쪽은 뚜렷한 증거가 없어 사실상 자칭으로 여겨지고 있다. 어쨌든 쇼군에 취임하기 위해 세이와 겐지 중에서도 무가 최고의 가문으로 꼽히는 가와치 겐지의 권위를 빌렸다는 점은 과거의 막부 정권들의 사례와 일맥상통한다.
  4. 현재 남은 오사카성도 크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지은 오사카성은 이보다 훨씬 큰 규모의 성이었다. 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오사카성 전투에서 승리한 후 성의 규모를 대폭 축소하였고, 이후 1970년대에 현대식으로 개조하여 오늘날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