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대 국회의원 선거 (변화)/배경

 3.5 / 5

변화의 시대는 "만약 새로운 정치 세력이 등장했다면?"을 바탕으로 제작된 시즌제 대체역사물입니다.

모든 설정은 공식이자 허구임을 밝히며, 자세한 정보는 각 링크를 참고하십시오.

본 문서는 15대 총선의 선거 과정을 다루는 하위 문서입니다.
(제목 추가 바람)

관련 영상

제14대 대통령을 선출하는 14대 대선은 민간인 출신인 김영삼-김대중-정주영의 삼파전으로 진행되었다. 총선 패배 이후 민주자유당의 당권을 잡은 김영삼은 "신한국 창조"를 내세워 지지를 호소했으며 김대중은 "여당 견제, 정권 교체"를, 현대그룹의 재력과 총선 돌풍을 일으킨 통일국민당의 정주영은 "경제 대통령, 통일 대통령"을 강조하는 동시에 파격적인 공약으로 승부를 걸었다. 이 외에도 박찬종, 이종찬, 백기완 등 군소 후보들도 대선에 뛰어들었다.

이 때 1992년 12월 11일 부산직할시 대연동의 '초원복국'에서 정부 인사들이 지역 감정을 부추기도록 한 사건이 터지면서 선거는 최악으로 치닫았지만, 나중에 통일국민당 관계자의 불법 도청으로 밝혀진데다 정주영의 역풍, 김영삼 쪽에서는 영남권에서의 지지율 상승으로 나타나며 사실상 삼파전에서 YS-DJ 양자 구도로 굳어진다. 그렇게 김영삼은 41.96%의 득표율로 당선되었고, 경쟁 후보였던 김대중은 33.82%, 정주영 후보는 16.31%, 박찬종 후보는 6.37%로 낙선했다.

대선 이후 김영삼은 대통령에 취임해 '문민정부'를 선포했고, 김대중은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정계를 은퇴한 뒤 아시안태평양평화재단(아태재단)의 이사장을 맡는다. 초원복집 사건의 여파로 역풍을 맞은 정주영은 선거 이후 조작임을 주장했다가 현대그룹의 세무조사, 대통령선거법 위반,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위반 등의 혐의로 정치인으로서의 생명이 사실상 끝나버렸다.

(제목 추가 바람)
자유민주연합 창당대회(1995년 3월 30일)

3당 합당 이후 민주자유당의 계파 가운데 공화계는 김종필 당시 대표위원을 비롯하여 신민주공화당 인사들로 구성되어 있었음에도 두 계파에 비해 가장 세가 미미했다. 그러나 민주계를 이끌던 김영삼의 당권 장악을 계기로 김종필과 충돌했고, 민주계 내부에서는 김종필을 "개혁 정권에 어울리지 않는 구시대 인사", "세계화를 위해 김종필을 비롯한 구세대 정치인들이 나가야 한다"라고 몰아세우며 퇴진을 요구했다.

결국 1995년 2월 김종필을 비롯한 공화계 인사들이 집단 탈당을 선언했고, 같은 해 3월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한다. 자민련은 민자당의 행태를 두고 "당을 쫒아내는 게 세계화냐", "다른 지역에서도 충청도를 핫바지로 보고 있다" 등 지역감정을 자극할 만한 충청도 핫바지론과 자신들이 원조보수라는 점을 내걸어 강원도와 수도권 보수층의 지지를 얻어낸 후, 대경권 공략을 위해 문민정부에 반발한 구 민정계 세력을 대거 영입시켰다.

충청권 보수정당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자민련은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광역단체장 4석, 기초단체장 24석을 확보하며 충남의 맹주가 부활했다 싶을 정도로 돌풍을 일으킨다. 비록 충북 지역에서는 지사직을 얻었음에도 이렇다 할 성적은 아니었지만 강원도와 대구, 경기 일부까지 세를 넓히는 데 성공하는데, 이를 바탕으로 이듬해 총선에서 '녹색 돌풍'을 통한 60석 확보 가능성이 커질 것으로 보인다.

(제목 추가 바람)
새정치국민회의 창당대회(1995년 7월 18일)

대선 패배로 정계를 은퇴한 김대중은 1995년 7월 18일 기자회견을 통해 정계 은퇴를 번복한다. 끝내 9월 구 평화민주당의 구성원과 재야 인사들을 모아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게 되었으며, 대통령중심제를 추구하되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 대중적인 정당을 표방하기로 했다. 새정치국민회의라는 명칭은 인도의 '인도 국민 회의'에서 영감을 얻었고 이는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낼 것이란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PK를 중심으로 노무현, 이기택 등이 포진해있는 민주당은 잔류를 결정하면서 개혁신당과 함께 통합민주당을 구성하게 된다. 하지만 세 정당이 중심인 삼김이라는 정치적 특성을 고려하면 지역 기반도 없고 제4당을 유지할 수 있는 당세 또한 높지 않았기에 향후 선거에서의 성적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였으며 오히려 '개혁 정당'이라는 정체성 또한 변화당에게 밀리고 있었다.

(제목 추가 바람)

1995년 6월 27일 치러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지난 지방선거에서 우세를 점한 민주자유당이 경인 지역, 영남권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에서 패배했고, 그 자리에 무소속 의원들이 당선되는 이변이 나타났다. 민주당은 서울에서의 선전으로 여당을 압도했고, 충청권과 대구에서는 자유민주연합의 '녹색 돌풍'으로 제3당 안착에 성공했는데, 첫 선거에 참여한 변화당은 다른 정당과는 달리 단 한 석도 얻지 못하였다.

결국 변화당은 선거 패배의 책임과 과감한 혁신을 위해 부정부패 및 지역주의 타파정치 개혁을 새로운 당론으로 정하고, 기존 노선으로의 탈피를 시도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동시에 문민정부와 더욱 날을 세우기에 이른다. 여담으로 변화당은 이 때부터 정책연구소(개혁), 중앙당 후원회와 청년당 등 당 내 조직을 설치하면서 당시 시대를 앞서갔다는 평이 많았지만 기성 정치에서는 9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이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제목 추가 바람)

15대 총선을 앞둔 1995년은 직할시를 광역시로 개편하는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선거구 획정이 필요해졌고 여야는 전체적인 선거구 획정을 다음으로 미루는 대신 14대 총선 당시의 선거구 몇몇을 조정하는 것으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렇게 조정된 지역구는 260석, 전국구는 39석으로 나타났는데 문제는 선거구의 최대 인구와 최소 인구의 편차가 6:1로 나타나면서 표의 등가성 문제가 일어났다. 또 충청북도에서는 게리맨더링까지 불거지는 등 논란이 지속되었다.

이에 헌법재판소는 동년 12월 27일 인구 상한선과 하한선의 비율을 4:1로 낮출 것을 판시했는데, 여야 내 기싸움이 벌어지면서 여러 우여곡절을 겪었다가 여야 합의 끝에 야당안을 수용함으로써 선거구 획정에 관한 논란은 일단락되었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지역구 253석, 전국구 46석으로 의석이 조정되었다.

여러분은 지금 변화의 시대를 보고 계십니다. 모든 문서는 공식 설정이자 허구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