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대 국회의원 선거 (변화)/배경: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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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28일 (수) 14:46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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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시대는 "만약 새로운 정치 세력이 등장했다면?"을 바탕으로 제작된 시즌제 대체역사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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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서는 17대 총선의 선거 과정을 다루는 하위 문서입니다.
흔들리는 국민의 정부
제15대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김대중

제15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김대중은 문민정부 후반기에 일어난 외환 위기 사태를 극복한 이후 남북관계 회복, 일본 대중문화 개방, 인천국제공항 개항, 사이버 코리아 21 등 IT 육성 사업 등 수 많은 업적을 남기며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룩했지만, 정현준 게이트를 시작으로 이용호 게이트, 홍삼 게이트, 불법 대북송금 등 여러 의혹들이 터져나오면서 '게이트 공화국'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심각한 부정부패에 휩싸인다.

뿐만 아니라 IMF의 수용 하에 신자유주의를 도입했으나 결과적으론 비정규직의 양산과 양극화를 초래했고, 신용카드 대란, 노동계 폭력 진압, 부실대학 증가, 전두환·노태우 사면 등 각종 실책을 안기면서 지지율 하락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여기에 1999년 발생한 씨랜드 화재 사고 당시 정부가 내장재 관련 법안을 개정하지 않았다며 일부 비판이 일기도 했으며 이는 대구 지하철 참사 이후 4년이 지나서야 국회를 통한 법률 개정에 나서게 된다.

노사모는 "무현을 랑하는 사람들의 임"의 약자이며,
국내 최초의 정치인 팬클럽인 동시에 온라인 활동을 이끈 집단이었다.

이런 와중에 정치권에서는 유력 대선 후보로 떠오른 이회창, 이인제를 두고 그 간의 경선 제도를 개편해 국민이 참여할 수 있도록 바꿈으로써 치열한 경쟁을 보이고 있었다. 한나라당에서는 이회창이 굳건한 지지층과 높은 인지도를 통해 선출되었지만 새천년민주당은 이인제, 정동영, 노무현을 비롯한 후보들이 난입한 끝에 노무현이 이인제를 누르고 최종 후보에 오른다. 민주노동당은 지난 대선에 출마한 바 있는 권영길이 재출마하면서 본격적으로 입지를 넓히기 시작한다.

하지만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이 승리하고, 또 다른 유력 후보인 정몽준이 이회창과 양강 구도를 이루면서 노무현이 3위로 추락하였는데, 이 때 여론조사에서 정몽준과 단일화할 경우 노무현이 이회창을 누른다는 결과가 나옴에 따라 민주당 내부에서는 후보 단일화 협의회(이하 후단협)를 결성, 정몽준과의 단일화에 앞장선다. 그리하여 노무현은 여론조사를 기반으로 한 단일화 결과에서 정몽준을 누르고 공식적인 단일 후보가 되었다.

그러나 선거 전날인 12월 18일, 노무현의 명동 유세에서 발언한 것이 화두가 되어 정몽준 측에서 노무현과의 지지 철회와 단일화 파기를 선언하지만, 한 치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다음 날 선거가 치러진다. 결국 노무현이 이회창과의 접전 끝에 48.9%로 당선되었고, 사실상 정권 연장에 성공했다. 이 선거에서 노사모의 선거 활동, 인터넷이 활약해 외신들의 주목을 받았으며, 노무현의 고향을 포함한 부울경에서 2~30%, 강원도에서 40%의 득표율을 확보하는 등 의미 있는 성적을 거두었다.

사실상 변화당의 제3당 확보가 확실시 되던 16대 총선에서 한나라당과 새천년민주당이 과반을 차지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자, 양당은 새로운 캐스팅보터가 된 변화당에 눈을 돌리게 된다. 여기서 양당(단, 민주당 진영에서는 DJP연합을 반영한 수치)의 의석 수인 115석에 변화당의 의석(35석)을 더하면 무조건 과반이 나올 것이라 예상했는지, 선거 직후 변화당을 끌어들이기 위한 본격적인 경쟁에 뛰어든다.

새천년민주당은 우선 야당인 한나라당을 공동 견제하기 위해 '의정 연대'를 제안했고, 한나라당에서는 '반DJ 연대'가 아니라면 개혁파로서 흡수 합당을 하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는데 문제는 이들과 연합할 경우 반민주당 정서와 개혁 세력을 이용해 보수 진영을 유리하게 만들 것이란 야당의 예측이 깔려있었다. 이러한 방안은 여론조사에서도 두각을 보이게 되고, 당시 응답자 중에서는 '중립으로 위치해야 하는 의견'과 '민주당과 연대해야 한다는 의견'이 팽팽하게 맞선 상황이었다.

그러나 변화당은 예상을 뒤엎고 양당의 제안을 단호히 거절해버렸고, 급기야 기자회견을 통해 양당과 선을 긋겠다는 비타협 선언을 발표, 사실상 강경한 비보수-비민주 독자 노선을 택하기로 결정한다. 이로 인해 정치권에서는 변화당 의원 전원이 무효표를 던졌을 때 가부(可不)가 똑같이 나올 경우 법안은 무조건 부결되고, 의원 꿔주기를 하지 않는 이상 타협을 해야 하거나 자력으로 국회를 이끌어야 한다는 우려와 불신의 목소리가 나타났고, 양당은 곧바로 임시 동맹을 맺는다.

이에 진보, 보수를 불문한 언론과 시민단체들도 합류해 비타협 중단을 촉구하는 초당적 행동에 들어가게 되었고, 민주당에 이어 3위를 차지했던 지지율도 순식간에 급락하며 엄청난 피해를 입어야 했다. 결국 변화당은 비타협 선언을 철회하며 어떤 상황에서든 양당과 협조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는 기자회견을 통해 일단락되었으며, 여기에 김대중 총재와의 회동에서 의정 연대의 조건 하에 정부와 협조하라는 의견을 수용하며 자연스레 친민주당 진영에 들어가게 된다.

이 사건 이후 16대 국회는 국회의장단 구성에 대한 합의가 마무리되어 아무런 파행 없이 개원이 완료되었지만, 제3당이자 캐스팅보트 역할을 해야 할 변화당이 힘을 쓰기는 커녕 양당의 방패막이에 이용당하는 바람에 샌드백이란 오명을 남기면서 당의 정체성이 크게 변질되었고, 향후 총선 승리 가능성이 불투명해졌다. 일각에서는 양당이 여러 수단을 동원해 변화당을 압박했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비타협 파동 이후 급격한 태도 변화가 문제였기에 변화당 내부에서도 논쟁이 끊이질 않았다.

미니 여당의 등장
열린우리당 창당대회(2003년 11월 11일)

대선 이후 여당인 새천년민주당에서는 천정배, 신기남, 정동영을 비롯한 소장 개혁파와 영남권 의원들이 "낡고 부패한데다 특정 지역(호남)의 색채가 강하다"는 이유로 쇄신을 요구했는데, 이 일을 계기로 과감한 재창당을 주장한 신당파와 동교동계 주축의 보수파로 갈라진다. 신당파들은 이들을 설득하고자 합의에 나서지만 보수파의 반대로 무산되고, 지속적인 당 내 감정 대립과 당권 협상 실패로 신당파들은 끝내 분당을 선언한다.

그 후 유시민, 문성근, 김원웅 등 친노가 이끄는 개혁국민정당과 한나라당의 '독수리 오형제' 개혁파가 합류해 총 47석에 달하는 열린우리당을 출범했고, 대통령 신분이던 노무현도 여기에 합류해 최초의 소수 여당이 된다. 2004년이 되면서 우리당은 1인 지도부가 아닌 상임중앙위원을 통해 의장을 선출하는 집단지도체제로 전환했고, 한나라당의 불법 대선자금 논란, 대북송금 특검 등 각종 비리 사건으로 정치권이 불신에 빠져 있을 때 이를 적극적으로 대처하면서 지지율에 상승세를 보인다.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 소추
헌정 사상 첫 대통령 탄핵소추안은 정국을 발칵 뒤집었고,
그리하여 '탄핵 총선'이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흘러가게 된다.

그러나 2004년 3월 12일, 한나라당, 새천년민주당, 자유민주연합을 중심으로 노무현에 대한 탄핵 소추안을 가결시키며 정치권과 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새천년민주당은 대통령의 발언이 정치적 중립을 위반했다며 탄핵 소추를 제안했고, 여기에 자민련, 한나라당이 동조하면서 탄핵을 이끌게 된 것이다. 결국 본회의장에서 열린우리당과 야권의 대치로 아수라장이 되었고, 탄핵소추안이 헌법재판소로 넘겨지는 동시에 노무현 대통령의 직무가 정지당했다.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자 국민들은 "대통령이 사과하고 넘어가야지 탄핵까지 가는 건 지나치다"며 대통령 탄핵 반대, 탄핵 3당 심판, 열린우리당에 대한 동정 여론을 촉발시켰는데, 이 과정에서 등장한 2004년 총선 국민연대는 탄핵 참여자 66명을 전부 낙선 대상자로 지정하여 야당 심판 여론에 큰 역할을 하였다. 또 비타협 파동 이후 샌드백 취급을 받으면서 양당의 눈치를 보던 변화당도 탄핵 반대 성명을 내고 합류를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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