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대 국회의원 선거 (변화)/배경: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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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28일 (수) 14:47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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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시대는 "만약 새로운 정치 세력이 등장했다면?"을 바탕으로 제작된 시즌제 대체역사물입니다.

모든 설정은 공식이자 허구임을 밝히며, 자세한 정보는 각 링크를 참고하십시오.

본 문서는 19대 총선의 배경을 다루는 하위 문서입니다.
참여정부와 노무현의 죽음
노무현 서거 이후 치러진 대통령 국민장 영결식

참여정부 출범을 통해 탈권위주의 정치 문화와 개혁을 추진했던 제16대 대통령 노무현은 2004년 17대 총선에서 압승한 열린우리당을 통해 국정 동력을 얻었으나, 야당과의 충돌, 임기 내 불거진 논란 등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위기를 겪기 시작한다. 또 이 시기 추진했던 경제 정책이 좌우파의 비판을 받은 것은 물론, 부동산 정책을 이행했음에도 집값 상승으로 인한 양극화를 초래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결국 임기 4년 차가 되던 시점에 제17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고, 민주 진영의 압도적 참패와 10년 만의 정권 교체로 참여정부는 막을 내린다. 그러던 2009년,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의 뇌물수수 논란과 정관계 비리로 인해 본인을 비롯한 일가, 정치인들이 검찰 수사를 받게 되자 언론과 검찰의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5월 23일 투신으로 생을 마감한다. 이 사건으로 정치권을 비롯해 여론이 크게 요동쳤고, 검찰 수사에 대한 사회 각계각층의 비판이 잇따랐다.

야권에서는 참여정부 말기 '폐족'이란 소리를 들었던 친노가 이 사건을 통해 부활하게 되는 원인을 제공하였는데, 이후 유시민을 비롯한 참여정부 인사들을 주축으로 국민참여당을 창당함으로써 무너진 위상을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지난 18대 총선에서 패배한 야권이 다시 힘을 얻음으로써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의 심판론이 다시 살아나게 된다.

2008년 광우병 논란을 둘러싼 촛불집회, 그리고 노무현, 김대중의 서거로 정국이 요동치자, 심각한 고민에 빠진 여당과 다시 힘을 얻은 야권 간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한다. 야권에서는 이명박 정부를 심판하고자 단일화로 의견이 모아졌지만 각 정당의 입장 차로 전국 단일화는 포기하되, 후보 단일화를 희망하는 지역에서만 성사하는 것으로 그친다.

이번 지방선거에서는 교육감 직선제 실시로 1인 8표제가 처음으로 도입되었지만 정치권에서는 4대강 사업 논란, 세종시 행정수도 이전 문제, 무상급식 논란 등 각종 이슈로 뜨거웠다. 야권은 정부 심판과 서민 친화적인 정책을, 여당은 일자리 창출과 경제 회복으로 맞서며 치열한 경쟁이 펼쳐졌으나, 2010년 3월 26일 천안함 피격 사건에서 나타난 북풍의 향방을 예측하지 못한 채 선거가 치러지게 된다.

선거 결과 한나라당은 서울특별시장, 경기도지사를 접전 끝에 지키는 데 성공했으나, 충청권에서의 궤멸, 경상남도와 강원도에서의 패배로 사실상 야권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그간 이명박 정부를 지켜왔던 한나라당은 적잖은 타격으로 쇄신의 목소리가 나타난 반면 민주당을 비롯한 야권은 MB정부에 대한 국민의 심판이라며 승리를 만끽했다. 또 처음으로 실시된 교육감 선거에서는 보수 성향 후보가 10곳, 진보 성향 후보가 6곳에서 당선되었고 교육의원 82명을 배출했다.

환호하는 박원순 서울특별시장 당선인 내외

2010년 12월 1일 서울특별시의회에서 무상급식 조례안을 통과시키자 당시 서울특별시장이던 오세훈이 주민투표로 결정하자는 제안을 내비쳤는데, 2011년 2월부터 그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서울시는 시민들의 꾸준한 투표 서명을 통해 주민투표를 발의하였고, 최종 투표일을 8월 24일로 확정했다. 이에 오세훈은 33.3%에 미달한다면 시장직에서 물러나겠다는 결단을 내렸으며, 보수 진영을 중심으로 투표 참여 운동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주민투표 결과 예상보다 크게 못 미치는 25.7%로 나타나 오세훈은 예고대로 서울시장에서 물러났고, 결국 하반기 재보궐선거는 기초단체장 1석을 선출하기 위한 대형 선거로 부상한다. 한나라당에서는 경선 끝에 최종 후보로 나경원을, 야권에서는 안철수·박원순의 서울시장 출마로 큰 변수가 되었지만 단일화 경선 투표를 거쳐 박원순이 최종 후보가 되면서 서울 민심의 향방을 남겨둔 채 선거를 앞두고 있었다.

선거 결과, 야권 후보인 박원순이 53.4%로 당선되면서 한나라당은 기초단체장 선거를 이기고도 광역단체장 선거 패배로 인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민주당은 호남 지역을 제외하면 기초단체장 선거에서 패했을 뿐, 서울시장 선거에서의 승리에 안도감을 느꼈지만 인제군수 선거에서 지난 재보궐선거 때 합의했던 민주노동당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아 표가 분산되는 바람에 야권 지지층 일부의 비판을 받았다.

정치권의 변화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 간 야권연대는
이명박 정부 심판여소야대를 목적으로 성사되었다.

서울시장 선거를 승리로 이끌었던 야권은 2011년 11월 한나라당의 한미 FTA 다수결 처리로 인한 지지층 결집을 빌미로 차기 총선에서의 여소야대를 노리게 되고, 그 해 12월 민주당은 시민통합당과 연합하여 민주통합당을, 민주노동당은 새진보통합연대(진보신당 탈당파), 국민참여당과 함께 통합진보당을 출범시킨다. 두 정당은 2012년 3월 10일 야권연대 협상을 타결시키고,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후보 단일화를 통한 야권연대 후보 선출을 마무리한다.

한편 여당에서는 정부의 레임덕과 전당대회 돈봉투 살포 사건으로 위기를 맞게 되자 2011년 12월 박근혜 전 대표를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추대한다. 박근혜는 이준석 등 개혁적이고 젊은 인사들을 영입시키고, 김종인이 주장한 경제민주화를 당론으로 내걸었으며 2012년 2월에는 당명도 '새누리당'으로 바꾸면서 당 쇄신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에 친이 의원들이 공천 과정에 반발하여 대량 탈당할 것으로 예측되었으나 대부분 불출마로 끝난다.

이명박 정부가 4년 차에 접어들면서 박근혜가 이끄는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통합진보당 야권연대의 경쟁 구도로 재편된 정치권은 19대 국회와 대선을 통한 새 정부 출범을 위해 여야의 치열한 경쟁을 예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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