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조 강황제 이진 (부치지 못한 편지)


대한국 대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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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국 황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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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제4대 황제
성조 강황제 | 成祖 康皇帝
본명
이진 (李𡋤)
태화 (太和)
출생
1899년 6월 29일
대한제국 한성부 창덕궁 대조전
사망
1967년 1월 4일 (향년 67세)
대한국 한성부 창덕궁 흥복헌
국적
대한제국(이전)
대한국
재위기간
대한제국 황태제
1918년 7월 21일 ~ 1922년 2월 2일 (3년)
대한 제4대 황제
1922년 2월 2일 ~ 1967년 1월 4일 (4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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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전주 이씨
아명
만길(萬吉) → 우용(萭鎔)
부모
고종 광황제 이천 (부친)
영선광황후 이씨 (모친)
형제
순종 효황제 이택 (형)
경친왕 이원 (남동생)
정친왕 이영 (남동생)
경선공주 (여동생)
경순공주 (여동생)
배우자
성명강황후 민씨 (정비)
명빈 성씨 (후궁)
의빈 양씨 (후궁)
청빈 송씨 (후궁)
자녀
광종 평황제 이휼 (장남)
의친왕 이율 (차남)
안친왕 이신 (삼남)
예친왕 이견 (사남)
명친왕 이균 (오남)
송친왕 이풍 (육남)
은친왕 이담 (칠남)
희선공주 이영혜 (장녀)
희진공주 이경혜(차녀)
희예공주 이문혜 (삼녀)
희문공주 이성혜 (사녀)
희완공주 이균혜 (오녀)
희민공주 이빈혜 (육녀)
연호
강명剛明
묘호
성조成祖
존호
대인현덕성리광절승온무선[1]
시호
경장평문효헌소열강황제[2]
왕작
성친왕(成親王)[3]

개요

성조 대인현덕성리광절승온무선경장평문효헌소열강황제(成祖 戴仁玄德盛理光節勝溫武宣敬章平文孝獻昭烈康皇帝) 이진은 대한의 4대 황제이다.

순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여 대공황, 2차 세계대전, 냉전, 64 한성올림픽을 모두 겪은 군주이다.

생애

유년기

성조 강황제는 광무 22년(1899년) 6월 29일 고종과 영선광황후 이씨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당시 황태자였던 형 순종이 있어 황위와는 거리가 멀 것이라고 생각되어 비교적 자유롭게 성장하였다.

유년기 성조는 피아노와 그림에 흥미를 붙였다. 공부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하였으나, 반대로 예술에 관해서는 열성적이었다. 고종은 처음에는 이를 말리려 하였으나, 황태자의 만류로 계속 흥미 붙이도록 놓아두었다.[4] 황태자의 자리는 큰형이 확실하게 자리매김 하였으니 비교적 황실임에도 자유롭게 성장하였다.

성친왕

광무 31년(1908년) 황제의 명으로 성친왕에 책봉되었고, 광무 33년(1910년) 아버지 고종이 훙서하였다. 뒤를 이어서 순종이 서른 하나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융희 연간의 성조는 정치적인 행보를 밟지 않으려 크게 노력하였다. 큰형 순종이 즉위 당시에 아들은 전부 요절하여 딸 둘만 있었기에, 변이라도 생기면 황실전범에 근거하여 맏동생인 성조가 즉위할 것이었다. 그렇기에 순종은 겉으로는 그렇지 않았지만 내심 앞으로 태어날 후계자를 위해 성친왕을 의도적으로 제왕교육에서 배제하고자 그의 예술을 더욱 후원하였다.[5]

융희 4년(1914년) 15세가 되는 해에 친왕비를 들였다. 같은해 황족군무학령(皇族軍務學令)에 따라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여 군 교육을 받기 시작하였다. 같은 기수인 인물은 김홍일, 이범석, 안창남 등이 있다. 김홍일의 회고록에 따르면 성조는 황족이라는 지위를 내세우지 않았고, 겸손하게 행동하였으며, 신분에 차등을 두지 않고 사귀었다고 한다. 성적은 우수하지도 않고 뒤떨어지지도 않았다. 성조는 대전쟁에 대한 정보를 동기들과 나누고 토론하기를 즐겼다 하며, 신병기와 비행기에 대한 이야기를 특히 많이 나누었다고 한다. 2년간 무관학교에서 수학하고 소위로 시위대(侍衛隊) 제1대대 참모로 부임하였다. 이듬해에 군에서 떠나 성친왕저로 돌아왔다.[6]

융희 7년(1917년)까지 황자가 태어나지 않자 순종은 사실상 후계자로 성조를 낙점하였다. 궁내부대신이 "태제로 책봉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국무를 행할 줄 알도록 성친왕에게 전 시강원 관리들에게서 교육받게 하라"는 요지의 상소를 올렸고, 다음 해 7월 21일 성친왕은 공식적인 태제로 책봉받았다.

칙명 아래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부터 성조는 유럽의 여러 국가들을 순방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대신들은 융희제의 건강이 좋지 않아지는 가운데 태제를 멀리 보내는 것에 작은 반대를 표하였으나, 총리대신과 궁내부대신이 성조의 부족한 경험을 채우기 위해 순방을 강력히 주장하였고, 순종의 최종 인가를 통해 1921년 3월부터 9월까지 여러 국가들을 차례대로 순방하였다.[7]

황성으로 복귀한 이후에는 건강이 좋지 않은 융희제에 의해 내정에 관한 부분에서 대리청정을 맡기 시작했다. 총리대신 오세창이 성조를 보좌하였으나 순종에 비해 크게 부족한 정치적 감각과 내정 운영 능력으로 많은 걱정을 샀다.

즉위

융희 12년(1922년) 2월 2일 형황 융희제가 급사하였다. 성조는 관례에 따라 세 번 거절하는 절차를 밟은 후 만 22세의 연호를 강명(剛明)으로 하여 즉위하였다.

당대 순종이 누리고 있던 황권은 절대적이었다. 순종은 황실 직속 첩보부인 익문사를 동원해 대신들의 동향을 하나 하나 파악하였으며, 또 부황 고종에게서 물려받은 권위에다가 세계대전으로 인한 경제특수를 통해 치적을 일궈내면서 무소불위의 권좌를 쌓을 수 있었다. 다만 성조는 이러한 권력을 그대로 물려받을 수 없었다. 순종이 익문사를 동원할 수 있던 가장 큰 요인인 익문사 요원들과의 개인적인 감정 교류, 그리고 외척 인사들의 임명이 새 황제임에 따라 사라졌고, 은퇴 이후에도 황제의 꾀주머니 역할을 하는 김옥균 총리와도 면식만 있는 정도였다.[8]

게다가 성조는 어떻게 제국을 운영해야 할지에 대한 명백한 계획조차 없이 형황의 훙서로 급작스럽게 즉위한 터라, 좋건 싫건 황제를 최종 결정권자와 국가의 머리로 여겼던 내각과 각료들은 서서히 자체적으로 국정을 꾸려가기 시작했다. 다만 이는 성조와의 필연적인 충돌을 빚어낼 수 밖에 없었다. 준비되지 않은 군주라도 할지라도 성조는 황권에 대한 인식과 조상들의 유산을 간직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고, 그렇기에 부족한 권력을 쟁취하려 들었다.

삼남소작쟁의에서는 직접 전라도로 행차하여 관리들을 파직하고 철저한 수사를 명하였다. 을축년 대홍수 당시에 정부가 지급하는 것 외에 황제의 칙명으로 구휼미를 내리면서 비난은 정부에게로, 찬양은 모두 황제에게로 가도록 하였다.

다만 강명금융공황, 즉 정묘공황 시점부터 이러한 황제의 권력에 대한 집착은 한 풀 꺾였는데,[9] 다름이 아니라 성조 자신이 바라보기에 충분히 원하는 만큼 정부를 통제할 수 있으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1927년 즈음 들어서면서 한국에 퍼져있던 민간 내각 무용론과 데모크라시에 대한 무관심은 황제에게 이런 생각을 심어주기에 충분하였다. 그렇기에 성조는 브나로드 운동의 파괴와 1932년 이진호 내각 불신임을 끝으로 따로 정치적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10]

전쟁기

이러한 성조의 불간섭은 1936년부터 깨지기 시작하였다. 파고다 참변은 강명 14년(1936년) 1월 일본 출신 마츠쿠라 지로(松倉二郎)가 한성 순방을 다니던 성조에게 폭탄 테러를 감행한 것이다. 당시 시위대원이던 윤봉길의 저지로 이는 실패로 돌아갔다. 허나 당시 경호의 총책임을 지던 경무국과 내각에 대해 이 시점부터 성조는 크게 실망하였고, 한동안 총리대신의 알현을 받지 않아 민주당(民柱黨)의 정치적 몰락을 가져오게 하였다.

전후

말년

묘호

종친부(宗親府)에서 회의(會議)하여 대행 대황의 시호를 ‘경장 평문 효헌 소열 강황제(敬章平文孝獻昭烈康皇帝)’로 정하고, 묘호(廟號)는 성조(成祖)로, 전호(殿號)는 위덕(偉德)으로, 능호(陵號)는 완릉(完陵)으로 정했다.
강명 45년(광종 즉위년 / 1967) 1월 5일 첫번째 기사

가계

* 증조부: 풍계군 이당
* 조부: 익평대원왕 이희
* 부친: 고종 광황제 이천
* 모친: 영선광황후 이씨
* 형황: 순종 효황제 이택
  • 후궁: 명빈 장씨 (1903 ~ 1929)

평가

여담

  • 성조는 많은 고정관념과는 달리 내향적이었다고 한다. 황제로서 신민 앞에 섰던 것은 의무감이 받들어주었던 것이 컸고, 평소에는 과묵하고 진중한 편. 그러나 자식들이 찾아오면 외향적으로 뒤집혔다고.
  • 장남 광종 평황제 이휼, 차남 의친왕 이율 하고 많은 시간을 보내었다고 한다. 성조 본인이 아버지가 어릴 때 훙하여 상처를 입었는데, 자식들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드러났다.
  • 성조 시대부터 실록이 완전 한글로 작성되기 시작하였다. 이전까지는 진서(眞書)라고 불리던 한자(漢字)가 사용되었으나, 성조가 즉위한 이후[11] 작성된 실록은 전면적인 개편작업을 완료하여 한글로 기록되었다.[12]
  • 권력욕이 강하였다. 황태제로 즉위하여 초기 황권은 선제들보다는 약하였기에, 최대한 배운 것을 이용하여 정계를 뒤에서 조종하였다. 통제파 또한 처음에는 황제의 정부 장악 수단으로 사용하여 하였으나, 그 수단이 통제가 힘들어지자 아예 손에서 풀어버리고 책임이 없는 피해자 행세를 하였다.

창작물에서

  1. 戴仁玄德盛理光節勝溫武宣
  2. 敬章平文孝獻昭烈康皇帝
  3. 즉위 전 고종에게서 받은 작위. 황태제로 책봉되면서 환속되었다.
  4. 성조는 이후에 피아노는 어느정도 손 놓았으나, 유화 그림 만큼은 꾸준히 이어나가 매우 큰 예술적 가치를 자랑하는 그림들을 그려냈다.
  5. 다만 와중에도 눈치없는 사람들이 황태제로 책봉하라고 했다. 순종실록 1권 융희 원년 3월자 발췌.【황제가 말하길. "짐이 겨우 이립을 지났으니 어찌 섣부르게 황태제를 정하겠는가? 영묘께서도 불혹을 넘으신 후에 장조를 봉하셨으니 더 이상 이를 논하지 마라"】
  6. 전직 궁녀였던 김명길씨 회고록에서는 융희황제가 1년 정도 더 군에서 복무하게 할 것을 황후와 대비가 크게 말렸다고 한다.
  7. 이는 순종에게 있어 큰 행운이었는데, 공교롭게도 다음 해 2월에 병으로 급사하니 황태제에게는 마지막 외국행이 됐다.
  8. 이는 전적으로 순종의 잘못으로, 후계자를 봉하는 것이 죽기 5년 전인 것도 모자라, 심지어 3년 간은 후궁에게서 아들이 태어날까 정치적 자산을 물려주는 작업이 이뤄지지도 않았다.
  9. 2004년 KBS특집 "성조는 누구인가" 中정친왕 인터뷰
  10. 1933년 탕산 격전 당시 강인수를 비롯한 관련자들을 전부 처벌하게 한 것은 내각과 의논하여 정한 사항이다.
  11. 사실 순종 중반부터는 실록에서 한문을 빼는 작업이 추진되었고, 후반부 가서는 순한글로 작성되었다.
  12. 참고로 광종 말기부터는 실록 전산화 작업이 추진되어, 광영황제부터는 순한글에 전자실록이 되었다. 물론 책으로 된 실록도 존재는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