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사회당 (신질서의 황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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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사회주의-혁신 정당
대정익찬회
(개별 합류)
일본사회당 사회민주당
(재창당)
입헌양정회
(개별 합류)
일본사회당
日本社会党
등록 약칭 사회(社会)
영문 명칭 Japan Socialist Party (JSP)
슬로건 基礎生活向上
기초 생활 향상
창당 1990년 9월 17일
해당 2013년 2월 16일 사회민주당으로 재창당
중앙집행위원장 오우치 게이코 / 9선 (, 40~49대)
부위원장 마쓰아키 부겐 / 5선 (, 44~48대)
서기장 이와모토 가이산 / 12선 (, 37~48대)
이념 사회민주주의
사민자유주의(리버럴)[1]
진보주의

분파: 민주사회주의
혁명적 사회주의[2]
좌익대중주의
중도주의
스펙트럼 중도 ~ 극좌

주류:중도좌파
참의원 2석[3] / 384석 (0.5%)
중의원 4석[4] / 650석 (0.6%)
당색 파란색 (#173283)
하늘색 (#01A8EC)
당원 수 43,945명 (해당 시)
국제조직
청년조직 일본 사회주의 청년 동맹[5]
노동조합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6]
기관지 사회신보
홈페이지 현재 폐쇄
SNS 현재 모두 폐쇄

2013.02.16 기준

개요

일본사회당 (日本社会党, にほんしゃかいと)는 1990년부터 2013년까지 존재했던 일본의 좌파 사회주의, 리버럴 정당이었다.

상세

1990년 공영권 붕괴와 냉전 종식으로 대정익찬회가 몰락하고 민주화가 된 이후, 대정익찬회 내의 진보 세력을 주축으로 대거 합법화된 지하와 재야의 무산 계급들을 중심으로 결성되었다.

사회당은 90년대 일본자유당, 일본국민당과 함께 거대 3당의 하나였소 97년 이후로는 자민당과 함께 거대 양당의 하나였다.

당내 파벌의 경우 대체로 익찬계는 중도좌파의 경향이 강했고 무산 계열은 좌파 ~ 극좌까지 있었다. 공산당은 여전히 불법이었기에 일부 극좌 세력은 사회당에 합류하여 혁명적 사회주의 노선을 추구했으나 이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대체로는 자민당이 호헌/용미/세계화 입장이었다면 사회당은 개헌/반미/자강으로 정리된다. 즉 사회당은 "사민주의 일본"을 이룩하고 비동맹주의 국가로 향하는 것을 추구했다. 사실 일본의 체급에 자강이 안될 것은 없긴 했으나 공영권도 깨진 마당에 자강을 택했으면 국민의 삶의 질은 낮아졌을 것리다.

역사

잃어버린 10년의 혼란 속 무산정당을 표방하며 일본이 성공적인 사회민주주의의 귀감이 되는 것을 주장했다. 초반에는 자유당과 국민당을 비롯한 보수계 정당에 그 세력이 밀렸으나, 1997년 일미태평양평화조약반미투쟁을 계기로 당세를 크게 불려, 그해 치러진 제41회 총선에서 제1당이 되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보수 세력이 보수합동을 통하여 자유민주당을 창당하면서, 1997년부터 2009년까지에 이르는 자민당과의 양당 체제를 구축했다.

자민당과 사회당 양대 정당이 각축한 이 시기 12년을 모리간 시대[7]라고 했다.

그러나 말이 양당제지 97년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는 자민당의 정권이 안정적이었다.

한편, 1999년 제42회 총선 이후로 당에 혼란이 일었다. 당시의 에다 사쓰키 집행부의 극좌 기조로 자민당에 참패하자 우파 계열의 도요타 다이쥬가 당을 장악해 자유적 사회민주주의 이념을 도입하는 등 우경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이를 두고보지 못한 당내 좌파가 2001년 7월 7월 종파사건을 벌이고 도요타 다이쥬를 위원장 직에서 축출해버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 우파가 대거 탈당해 좌우결렬신사회당으로 분당하며 사회당은 사실상 완전히 무산 사민주의정당이 되었다.

그러나 이런 상태에서도 아소 다로 내각 이후 자민당이 지속적으로 실점했으며, 급기야 2007년에는 제6회 참의원 통상선거를 승리하며 집권에 한층 다가갔다.

2008년 3월 제45회 총선에서 마침내 307석을 확보하고 공명당과 연립정부를 결성, 간 나오토 내각을 구성하여 여당이 되며 전성기를 맞이한듯 했다.

하지만 간 내각이 자민당에 비해 경제정책 면에서 전문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지속적으로 있어서 사회당 내각은 사실상 시작하자마자 지지율이 하락세에 봉착했다. 특히나 2008년 세계 금융위기가 강타하며 사회당은 지지율에 큰 타격을 입고 재총선을 압박받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불식시킬 대사건이 터지고 사회당은 그대로 공중분해되고 말았는데, 바로 2009년 9월 그 실체가 드러난 사회당 내란 사태다.

이는 사회당 내 무산파벌들이 개헌과 천황제의 무력화, 사회주의 도입을 목적으로 지하 공작을 준비하다 적발된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사회당내 무산파벌은 모조리 체포 및 구속되면서 당이 붕괴했다. 의원의 3분의2 이상은 구속됐으며, 호소카와 모리히로, 하토야마 유키오 등 익찬계열은 민주당으로, 좌파 익찬계열은 민진당으로 분화하게 되었다. 간 나오토도 검찰의 조사를 받았으나 그는 연루되지 않았음이 밝혀졌다.

사실상 2001년 이후 너무나 두드러진 당의 좌경화가 낳은 대참사였다.

2009년 11월 치러진 제46회 총선에선 불과 6석으로 추락하며, 당이 군소정당화 되었다. 이후에도 명맥은 유지하며 제47회 총선도 치르긴 했으나 이땐 4석으로 추락하면서 아예 망했고, 2013년 2월 재개편과 일신의 차원에서 당을 해체, 사회민주당으로 재창당하였다.

  1.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위원장이 주창한 이념으로, 사회민주주의와 리버럴의 중간 정도에 있는 자유사회주의의 일종이다.
  2. 극좌파 계열은 신사회당으로 대부분 이탈했기에 당 내에 소수만이 남아있었다.
  3. 지역구 1석, 비례대표 1석
  4. 지역구 2석, 비례대표 2석
  5. 내란 사태 이후 강제해산.
  6. 동맹 등 다른 지지 노조의 수도 많았으나 일단 사회당의 공인 노조는 총평 하나 뿐이었다. 내란 사태 이후 강제해산.
  7. 모리 요시로로 시작하며 나오토로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