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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中華民國
국기 국장
삼민주의
三民主義
위치
상징
국가
삼민주의가
(三民主義歌)
국화
매화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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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건국
지리
수도
난징
위치
지구
중국 지역 중남부
접경국
중화합중국,홍위병단,태평천국
인문환경
총 인구
약 3억 명
공용어
중국어
민족
한족 71%
객가족 12%
기타 17%
종교
다원주의
군대
국민혁명군
법정연호
민국 (1911년)
정치
정치 체제
군사정부 체제
일당독재
국가 원수
장제스 총통
행정 수반
왕징웨이 행정원장
우방국
대한-일본 이중제국
적대국
홍위병단, 중국 공산당
경제
경제 체제
없음
통화
민국 위안

개요

중화민국은 동아시아에 위치한 공화정 국가로, 1911년에 세워진 북양정부를 무너뜨리고 민주주의를 파괴한 전체주의 국가 중화제국 정권이 무너지고 세워진 신정부이다.

정부의 정통성을 1911년의 신해혁명으로 세워진 북양정부로 두고 있으며, 지금까지 존재하던 위안스카이의 홍헌체제로 인해 성립된 독재 정권을 부정하는 입장이다. 수 차례의 혁명과 과도한 군벌 토벌, 제국 정부와의 내전으로 인해 내부적으로 상당히 불안정한 국가지만, 중국 특유의 많은 인구와 생산력 덕분에 빠른 전후 복구와 더불어 해외 자본을 이용해 양성한 내실있는 공업력을 바탕으로 경제 성장을 이룩하고 있는 유망한 국가이다.

하지만 전후 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해 중앙 통제가 느슨해진 사이를 틈타 각지의 지방 정권들이 독자적인 노선을 타기 시작하면서 주요 경제발전과 인프라 구축은 중앙 정부의 행정력이 닿는 곳에서만 이루어지고 있다.

1952년의 시점에선 장제스의 국민당 내부 장악과 뒤이은 과도한 대외 개입으로 인해 내외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지만, 장제스 총통과 대립하고 있는 왕징웨이 행정원장에 의해 나름 안정적으로 산업화를 이룩하고 있는 추세이다.


역사

신해혁명 직후

1911년 10월 10일 신해혁명으로 우한에 임시 정부가 세워지고 초대 총통으로 쑨원이 선출되었다. 청나라 조정은 그들을 막으려 군통수권자였던 위안스카이에게 명령을 내려 반란을 진압하려 해보지만, 진작에 쑨원과 내통하여 후대 총통자리까지 약속 받은 위안스카이 입장에선 들어줄 필요가 없었다. 그는 도리어 청나라 황제를 폐위시키고 황실 일가 전체를 국외로 추방하는데 이 과정에서 그들을 체포하려던 쑨원의 임시 정부와 마찰을 빛게 된다.


결국 신해혁명 이후 약속한 대로 초대 총통인 쑨원이 임기를 마치고 물러나고, 위안스카이에게 총통직이 유임된다. 하지만 청나라 시절부터 위안스카이의 파벌 독재 정치는 이미 심각한 수준이였고, 새로운 신정부에서도 파벌이 나뉘게 되어 서로 싸우기 시작한다. 결국 봉천 파벌, 직예 파벌, 안휘 파벌로 나뉘어있던 국민정부 내부의 파벌 싸움이 이미 데드라인을 넘어 내전에 가까운 상황까지 격화된다.[1] 이에 위안스카이는 정국의 안정을 명목으로 내세우고 친위 쿠데타를 벌이며 반대파를 숙청하고 정권을 모두 장악, 1914년 12월 10일 자신을 황제로 한 중화제국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쑨원과 제정 반대파들은 이러한 위안스카이의 극단적인 조치를 용납할 수 없었고, 위안스카이의 정권 장악에 반발한 군벌들을 규합하여 중화혁명군을 만든 쑨원은 1915년 12월 25일 자정 무렵 위안스카이에게 전달한 최후통첩이 무산되자 저장성의 위안스카이의 북양군을 공격한다. 이는 훗날 1차 호국전쟁으로 불리는데, 오합지졸에 가깝던 군벌들의 모임인 중화혁명군에 비해 위안스카이의 북양군은 총전력에서 절대적인 우위에 있었고 정면 돌파가 불가능하다고 깨닫게 된 쑨원은 후일을 기약하며 위안스카이의 권력이 닿지 않는 북부를 향해 군벌들을 이끌고 잠시 잠적한다.


위안스카이 정권

1915년 1월 15일, 중화제국 정부는 내부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대한-일본 이중제국의 속령인 산동 반도와 독립국인 외몽골을 공격하며 동맹국으로 참전한다. 하지만 이러한 위안스카이의 국수주의적인 대외 행보는 외교적인 고립을 더욱 심화시켰고, 위안스카이가 동맹국에 편에 서겠다고 선언하자 이에 반발심을 가진 내부 파벌이 모여 쿠데타를 계획하기 시작한다.

한편 전쟁이 지속되면서 한국군과 일본 해군에 비해 열세에 있었던 중국군은 비대한 인력 구조와 비교적 뒤떨어진 군사 교리로 많은 전사자와 피해를 낳았고, 설상가상으로 북부에서 잠적하던 쑨원의 혁명군이 이중제국과 불가침 협정을 맺고 남하를 시작하면서 전쟁은 더욱 악화일로를 걷는다.

1917년 8월, 위안스카이에 반대하는 내부 파벌의 불만은 전국적인 봉기와 쿠데타를 통해 터진다. 젊은 장교들과 관료들이 주도한 1917년의 봉기는 훗날 8월 혁명으로 불리게 되며, 뒤이어 국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통해 난징에 무혈입성한 쑨원이 중화민국 체제를 부활시키면서 위안스카이 정권은 종말을 맞게 된다.

그러나 한일 이중제국의 동부 해안 공세와 내부 쿠데타, 전국적인 봉기로 인한 행정력 상실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였고, 몇 차례의 내부 반란과 명령 불복종으로 중화민국은 광주연방정부를 비롯한 여러 군벌세력들의 독립을 용인하게 된다.[2] 쑨원은 이에 확고한 통치로 중국에 안정을 가져오기 위해 중화혁명당을 현대적인 정당으로 개편시키고 당군인 중화혁명군도 국민혁명군으로 개칭하고 당군에서 국군으로 소속을 옮겼다.


장제스 정권

1차 세계대전은 결국 핵전쟁으로 종결되었지만, 비교적 피해가 적었던 아시아에선 핵전쟁의 참화를 조금이나마 피해갈 수 있었다.

1925년, 쑨원이 간암 치료 휴유증을 치료하지 못해 사망하고 냉동인간이 되면서 장제스가 쑨원의 후임 총통으로 집권한다. 하지만 장제스의 무자비한 반공주의적인 행보와 국민당 극단주의자들의 무리한 요구로 쑨원이 이루어낸 빅텐트 국민당은 붕괴되기 시작했고, 공산당의 지도자였던 마오쩌둥이 반정부 무장투쟁을 시작하면서 국민당 내부의 갈등은 최고조에 이른다.

이를 타파하고자 1927년 4월 12일 장제스는 상하이에서 극좌파의 세력의 근거지를 뿌리뽑기 위해 공비토벌을 선언하고 수차례 초공 작전을 시작한다.

장제스는 이를 계기로 여러 차례 서정을 통해 서쪽의 군벌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불만을 갖던 국민당극단주의자들의 봉기로 인해 중국 전체가 거의 내전 상태에 빠지게 되고[3] 이는 이전에 점령하여 관리하던 영토가 줄어들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역설적으로 관리해야할 영토가 줄었기 때문에 더욱 더 안정적인 환경을 만들수 있었고 군대를 좀 더 효율적인 방향으로 재정비할 시간을 가지게 된다.이후 안정적인 경제 발전과 재정비한 군대를 바탕으로 순조로운 서정으로 장제스 정권은 높은 지지를 바탕으로 정권을 계속 이어간다.


2차 세계대전

1941년, 월인의 지구 침공으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월인들의 공격을 받은 중화민국은 초기 대응과 전시체제로의 전환이 형편없는 수준이였다. 월면전쟁의 주요 전장 중 하나였던 중국 남부의 피해가 막심해지면서 장제스의 무리한 북벌과 서정으로 복속한 중앙정부의 점령지들은 이미 중앙정부의 행정력이 닿지 않는 유명무실한 무법지대가 되어버린 상태였고, 이는 평소 국민정부에 불만이 많았던 북양 지역의 파시스트 성향 군벌들이 하나의 거대한 세력으로 규합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통합된 파시즘 북양정부가 완충지 역할을 하던 직예군벌을 깨부수고 중화민국을 공격하면서 대아대전이 발발하고, 설상가상으로 장제스 총통이 사천 전투에서 사망한다. 장제스의 사망으로 구심력을 잃은 국민당 내부의 혼란이 가중화되면서 사기를 잃어버린 국민혁명군은 대한-일본 이중제국의 군사적 지원과 중화합중국의 경제적 지원에도 불구하고 북양군과 싸우는 족족 패전하기 일쑤였고, 북양군에게 난징까지 내주는 등 중화민국은 총체적인 패배로 수세에 몰리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왕징웨이라는 젊은 정치인이 이들을 통합하고 다시금 국가를 안정시키기 시작했다. 전시 체제로 전환된 경제에 대한 그녀의 획기적이면서도 진보적인 정책[4]들은 겉으로나마 국민들의 생활을 안정시켰고 공장들을 다시 가동시키기 시작했으며 경제가 이전보다 안정됬다. 그녀의 제안들은 처음엔 국민당 내부의 반발과 경직된 관료주의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제안된 일부 정책들이 나름 가시적인 성과를 보이면서 전면적으로 채택된다. 이로써 중앙정부 내부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게 된 왕징웨이는 점차 장제스의 빈자리를 채워가며 국민당의 거물로 성장한다.

그러나 사망한줄 알았던 장제스가 기적같이 다시 돌아오고, 잠시 인기를 얻던 왕징웨이는 장제스에게 밀려 다시 좌천된다. 하지만 왕징웨이의 성과를 눈여겨보던 일부 관료들과 국민당 인사들은 여전히 그녀를 지지했고, 이로 인해 국론이 조금씩 분열되기 시작한다.


현재

장제스가 다시 돌아와 실권을 장악했지만 왕징웨이 지지자들은 여전히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북양정부는 이미 2차 세계대전의 말엽 국부군과 한국군의 협공으로 멸망했지만, 장제스의 편집증적인 군벌 혐오로 인해 불필요하게 계속되는 토벌 계획은 여전히 중화민국의 국력을 쓸데없이 낭비하고 있으며,왕징웨이의 지지자를 늘리고 있다.

국민정신

빈약한 첨단기술력
  • 기갑 연구 속도: -20.00%
  • 항공 연구 속도: -20.00%
  • 전자기술 연구 속도: -15.00%

중국의 공업력은 세계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만, 이 공업력을 받혀줄만할 기술력이 부족한 상황입니다. 이 때문에 첨단 기술을 요구하는 기갑, 항공, 전자기술 같은 연구 속도는 더디어지는 상황입니다.

국민당 내부갈등
  • 안정도: -30%
  • 정치력 획득: -0.5

한 때 국민당을 좀먹던 내부갈등은 중원대전 이후 끝난 것 같았지만, 2차대전 이후 장제스와 왕징웨이의 갈등으로 다시 재점화 되었습니다. 이를 해결하지 못하면 국민당 뿐만 아니라 나라 전체가 두쪽이 날 것 입니다.

지금은 겉으로는 안정되어 보이지만, 외부에서 사건이 터지거나 당의 갈등이 극심해지면 파멸이 일어날 것입니다.

두뇌유출
  • 연구 속도: -10%

중국은 인구가 많기 떄문에, 중원 곳곳에 숨어사는 천재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의 열약한 사정과 연구원들에 대한 국가의 푸대접 때문에, 중국의 석학들은 이곳을 벗어나 이중제국이나 미국으로 이민을 가는 상황입니다.

내부 부패
  • 소비재: 10%

현재 상황: 보통

국민당 내 부패는 항상 존재해왔으며, 이는 국가를 좀먹고 있는 상황입니다. 지금은 부패가 약간 존재하는 상황이며, 이는 우리 국가에 작은 영항을 끼치고 있습니다.

장제스의 훈정
  • 안정도: +10.00%
  • 전쟁 지지도: -10%
  • 저항도 -20.00%
  • 이념 변화 방어 +20.00%

민주주의를 위한 쑨원 박사의 훈시에도 불구하고, 장제스는 군벌의 준동과 외부 위협을 명분으로 훈정을 진행시키고 있습니다.



정치

국민당 일당 독재 체제로 현실의 소련이나 중국과 약간 비슷하게 볼수있다.

헌법에는 오권분립을 명시하고 있지만 사실상 정치적으로는 3개의 기관이 권력이 있으며 그중 하나는 헌법상으로는 일개 정당이여야할 국민당이 포함되어있다.

그러나 장제스가 훈정을 내세우며 입법원을 억압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국민당의 세가 우세하다.

입법원

비국민당 의원들이 다수 포함되어있으며 실질적으로 여당이자 권력기구가 된 국민당이랑 대립상태에 있다.

현재 입법원장은 후스다.


국민당

당연히 국민당원들로 이루어진 단체이며 이들은 입법의원들과 대립관계라고 생각하면 된다.

현재 국민당의 당수는 장징궈다.


행정원

국민당 내부의 유력자가 당원들의 추천을 받아서 정부의 각각 부처에 후보자로 나서게 되는데, 여기서 국민들의 투표를 받아서 찬반을 나눈다. 물론 부정투표가 생기는 경우가 있으며 이 뿐만 아니라 임의로 고위자가 낙하산으로 지인에게 자리를 준다는등의 부패도 심각한 편이다.

현재 행정원장은 왕징웨이다.


외교

과거부터 중국의 정통 정부 역할을 해왔고 국제적으로도 그렇게 인식이 되고 있다. 하지만 중국 내부에 개별적인 군벌과 정부들은 국민정부의 영향력을 위협하려 하고 있으며 또한 국민당과 정부 내부의 분열로 인해 가면 갈수록 영향력이 좁아지고 있지만, 여전히 중국내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으며 이는 아직도 무시할수 없는 수준이다.

한-일 이중제국과의 관계

과거 신해혁명시절부터 쭉 같은 편에 섰던 익숙한 동맹이지만,조차지 개설과 일부 사건들로 인해 현재는 이전보다 어색해진 관계이다.

군벌과의 관계

중화합중국과의 관계

과거에 독립 직후에는 전쟁까지 치뤘지만 다른 군벌새세에 대항하기 위해 서로 연합을 한 상태이며 지금 이 상태가 얼마나 지속될지 모른다.


홍위병단과의 관계

국민정부측은 중국 공산당을 최악의 테러리스트로 지정하고 어떻게든 없애버리려고 궁리중이다. 이는 홍위병단 내부에서도 마찬가지라서 중앙정부가 지배하는 영토의 주요도시에 테러를 하는 등의 방법으로 맞서고 있다.


태평천국과의 관계

정신나간 신정국가인 태평천국은 중국 전역에 테러를 일으키고 있으며 중앙정부는 이들을 3년 이내로 침공하며 소멸시킬 계획을 갖고 있다.

호국군과의 관계

과거 반란을 일으켰던 주동세력이라서 아직까지 그들을 경계하고 있으며 호국군 소속의 국민당원은 이미 다 제명이 되어버린지 오래다. 그러나 홍위병단과는 다르게 세가 약하기도 하기 때문에 천천히 없에도 될 군벌로 보고 있다.

군사

군대의 전신은 이전 중화혁명당 시절부터 있어왔던 국민혁명군이다.


역사

초기 국민혁명군은 한일제국의 군관학교에서 졸업한 젊은 장교들로 채워져있어 유연한 군사 교리를 추구해왔고 또한 참모들의 구성이 대부분 소장파여서 새로운 전술의 도입을 꺼리지 않았으며, 이는 북양군을 격파하는데 중요한 요소중 하나가 된다.

그러나 국민당이 정권을 잡고나서는 점점 부패하기 시작했고, 군대는 약해지기 시작했다. 젊은 장교가 늙어가면서 군사에 대한 고정관념이 생겨갔고 유능한 장교가 해임되면 그 자리를 낙하산 인사가 차지해버리는 등 과거 북양정부 군대의 악습을 그대로 담습하고 있다. 그럼에도 중국 내에서 가장 큰 규모의 무력집단이며 중국내에서 비등비등하게 겨뤄볼수 있는 군벌은 거의 없는 편이다.


마도사

중국은 예로부터 유럽의 마도사들에 해당하는 무림수련자들을 반갑게 여기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이전 왕조시절에 그들로 인해 중국 전역이 500개[5]로 쪼개진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과거 왕조시대의 군대와 단절되어있는 국민혁명군에도 예외가 아니라서 초기 국민 혁명군은 그들을 징집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러 연구와 시험으로 인해 그들이 유럽의 마도사만큼의 능력이 있다는것이 입증되자 국민당 내부에서도 기용의 필요성을 끊임없이 제기해왔고 현대전으로 나아가는 시대의 흐름은 무시할수 없었기에 통제가 가능한 국민당 내부의 무림능력자들을 군대로 배치시켜 유럽의 마도사들과 비슷한 수준의 능력을 발휘하려한다.

장비

과거 청나라 시대부터 많은 변화를 보이던 부분으로, 아편전쟁 이후로 부터 양무운동의 일환으로써 외국의 장비를 가져다가 사용하는게 익숙해졌고 이 때문에 전통적인 중국의 장비보단 여러 나라의 무기들을 역설계,카피해서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1856년에 설계되어 꾸준히 쓰였던 청나라의 56식 보총을 버리고 1914년 국민혁명군 창설과 함께 영국군이 주력으로 채택했던 총기인 FAL을 도입하여 혁명을 성공시켰던 전적이 있다. 또한 군벌 시대에도 각각의 군벌은 다른 세력보다 우월한 위치에 서기 위해 경쟁적으로 장비를 증강시켜 왔다. 예시로 안직전쟁 당시 직예군벌 소속의 차오쿤의 군대는 여전히 FAL과 같은 구식소총에 강철 방탄복과 30년이나 더 된 AD-1 헬멧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상대편인 안휘군벌의 군대는 훨씬 단단한 티타늄 방탄장구에 FAL에 비해 안정적인 M16을 도입하여 안휘군벌이 압승을 거두는데 일조한다.

최근 국부군은 과거 2차세계대전 당시의 북양 제 2제국의 장비였던 독일식 장비를 전부 몰수하여 역설계후, 카피하여 쓰고 있다. 그 이유는 원래 중국에서 사용하던 영국군의 오래된 군복과 소련의 랜드리스로 들어온 티타늄 방탄복,AD-3 헬멧보단 슈탈헬름 41년식과 신식 위장군복및 강화 캐플라 방탄장구등이 더 성능이 좋기 때문이다.

또한 야포와 같은 지원 장비 또한 외국에서 들여온것이 많은편인데 이는 주로 한일제국의 도움을 받는 편이다.

중국은 첨단기술력이 부족한 편으로 파워아머를 만들 기술력이 없어 외국에서는 퇴출 직전인 기갑전력을 강화시켜 사용해나가고 있다.

이는 중국 군벌 대부분에도 해당한다. 국민혁명군의 기갑전력은 45년식 전차가 있는데 이는 과거 소련의 아포칼립스 전차의 설계를 바탕으로 쌍렬포와 MD 체계및 강화장갑,무인기관총좌 2정이 배치되어있는 전차이다. 이는 타 유럽의 전차 못지 않은 성능을 자랑한다.

이정도 성능으로만 해도 외국의 군대를 이기긴 쉽지 않지만 중국내에서는 여전히 우위에 있을수 있는데 그 이유는 몇몇 군벌을 제외한 다른 군벌들이 주로 굴리는 전차는 이들보다 더 노화되거나 체급이 작은 설계를 가진 경우가 적잖게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태평천국은 과거 한일제국의 설계를 훔친적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K21 장갑차이다. 이는 태평천국의 유일무이한 기갑전력이지만 당연히 장갑차이다보니 방호력과 화력에서 밀려난다. 하지만 중화합중국이나 홍위병단 같은 체급이 되는 군벌의 경우는 만만치 않은 전차를 굴린다.

해군은 과거 청나라시절때부터 내려오는 북양함대가 이들의 전신이다.

경제

전쟁으로 국토가 누더기가 되었어도 많은 인구를 바탕으로 여전히 아시아내에서 손꼽히는 경제력을 자랑하고 있다. 이전에 열강들에게 조차지로 주요항구인 상하이,칭다오,톈진등을 내줌으로써 어쩔수 없이 저장성부근이 집중적으로 개발되어 국민정부 최대의 항구도시가 되었다.

주요산업

주요한 산업은 중공업과 컴퓨터 산업으로 외국의 하청을 받고 일을 하는 경우가 많다. 컴퓨터 산업은 나름 아시아에선 알아줄 만큼 강한데, 국가가 체계적으로 육성한 국영,공영기업들 덕분이다. 또한 중공업 부분에서는 아시아 최고라고 자랑할만큼 산업이 발달되고 세분화 되어있다. 중공업을 바탕으로 찍어낸 차량들은 험지에서 강하며 고장이 잘나지 않는다.

하지만 파워아머등 첨단 군사 부문에서는 약한 모습을 보이는데, 그 이유는 두뇌유출이 심각한 원인이다. 많은 첨단 부문 과학자들이 더 나은 대우를 받기 위해 한일제국,미국,독일등으로 가서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1. 심지어는 다른 파벌의 군대끼리 교전이 일어나는 등 이 시점부터 국민 정부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2. 이때 만주와 신강을 비롯한 과거 청나라시절의 소수민족들이 민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며 떨어져나가게 된다.
  3. 이 사건을 중원대전이라 부른다.
  4. 주요정책으로는 뉴딜정책식 인프라 개발, 주변 군벌에게 몰수 아편 매각, 군인을 징집하여 봉급을 주고 주변군벌 공격 및 약탈, 국채,전시채권 무효화, 부실기업 국유화 및 강제 매각
  5. 이 시기를 16호 500국 시대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