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타니아 제국-대동아제국 상호방위조약: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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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체 ===
=== 정체 ===
평행계 전이통로의 정체에 대해서는 꾸준히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도대체 알 수 없다는게 현재로서는 지배적인 평이다.
역사를 되돌아보자면 진나라 이후로부터 본격적인 언급이 시작된다. 진시황제 당시에 중국 정부에게 존재가 알려졌다는 것이 고로 정설이지만, 이것을 진시황이 "만들었"는지 "발견"했는지 확실하지 않다. 태사공서에 기록된 사마천의 진시황릉에 대한 기록은 사실 훨씬 더 크고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제2의 전이통로라는 말도 있다.
무엇보다도 어려운 것은, 이 전이 통로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 두 제국을 합쳐도 100명이 안되기에 그중 학자들은 2~30여명 정도에 불과하여 양측이 합동으로 조사를 하더라도 한계가 있는 수준이다.


== 조약문 ==
== 조약문 ==


== 전망 ==
== 전망 ==

2022년 1월 6일 (목) 15:32 판


욱일승천

브리타니아 제국-대동아제국 상호방위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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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서력 1956년 1월 25일 (브리타니아 황력 35년, 대동아 황력 선화 22년) 브리타니아 제국대동아제국 상호방위조약이다.

일반적인 조약과 달리 대중에게 브리타니아와 대동아의 연합은 철저히 기밀 사항으로 붙여져있으며, 양측에서 이 조약을 아는 사람들의 수를 합쳐도 50명이 채 되지 않을정도로 극비리에 부쳐져있는 조약이다. 브리타니아와 대동아제국이 각각 다른 평행세계에 위치해있고 몇몇 특정한 장소를 통하여 이동할 수 있기에, 평행 세계의 존재가 알려질 시 민심이 걷잡을 수 없이 동요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평행 세계의 존재가 알려진 것은 1940년대 후반의 일로, 브리타니아 제국과 대동아제국은 각자의 평행 세계에서 서로를 적대하였기 때문에(브리타니아 제국-일본 전쟁, 대동아전쟁) 양측의 존재가 서로의 평행 세계에 알려질 경우 전쟁이 일어날 수 있었다. 1950년대 초반 기준으로 극초강대국으로 부상한 브리타니아 제국과 대동아제국은 전쟁을 할 시 양측의 우세를 가릴 수 없는 상태에서 두개의 평행 세계가 모두 초토화될 것이라고 우려하여, 서력 1956년 해당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배경

두 평행 세계를 잇는 평행계 전이통로의 존재는 꽤나 오래전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며, 브리타니아와 대동아의 정부가 비밀리에 합동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한나라 시대에 시안에서 평행계 전이통로가 사용된 흔적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한나라가 이 전이통로의 정확한 사용 용도를 알고 사용하였는지는 의문이며, 정확하게 기록에 남아있는 것은 당나라 시대의 일이다. 이후 평행계 전이통로는 오대십국 시대를 거쳐 북송 시대까지 사용되었으나 금나라와 송나라의 전쟁 도중 파괴되어 사용되지 못하게 되었고 이후 중국의 역사서 기록에 평행계 전이통로의 언급은 없다. 역사학자들은 당나라와 송나라가 역사상 최고의 강대국으로 성장한 것은 이 평행계 전이통로를 사용한 것의 영향이라고 추정한다.

이후 두 평행 세계를 잇는 통로의 존재는 수세기동안 잊혀졌으나, 프레더릭 3세에 의한 브리타니아 제국의 청나라 정벌 당시 브리타니아 제국의 동양사학자에 의해 우연히 시안에 위치한 평행 통로의 존재가 발견되었다. 이때가 1923년의 일이었고, 당시 시안은 제2차 일중전쟁의 전쟁터로서 대일본제국군이 점령해 주둔하고 있었다. 브리타니아 제국의 조사단은 통로를 이용하여 대일본제국을 조사하였고, 이는 브리타니아 제국에 의해 극비리로 부쳐졌다. 하지만 대동아전쟁이 발발하며 대일본제국의 대영미 첩보망이 강화되자, 브리타니아 제국은 더이상 대일본제국을 조사하기 어려워졌고 대일본제국 측에서도 브리타니아 제국의 존재가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것이 확신으로 굳어진건 1948년의 일이지만, 이미 대일본제국 정보성에서는 브리타니아 제국과 평행 통로의 존재를 늦어도 1941년 12월이나 1942년 3월에는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에는 브리타니아 제국이 일본과 브리타니아 제국-일본 전쟁을 치루고 있었고 반대로 대일본제국은 대동아전쟁으로 영국과 전쟁을 치루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두 나라는 서로를 견제할 수 밖에 없었으며, 대동아전쟁의 승전으로 국호를 대동아로 바꾼 대동아제국은 평행문을 이용하여 브리타니아 제국을 무너트려야한다는 여론도 일었다. 하지만 두 나라의 국력이 엇비슷하였다는 점은 양측의 정보 조사를 통해 양측 수뇌부에 익히 알려져있던 바였고 에드워드 7세는 당시 대동아제국의 황제였던 선화제에게 비밀리에 특사와 친서를 보내 두 나라의 화친과 동맹, 상호 방위조약의 체결을 제안했다.

이에 1956년, 두 나라는 시안의 평행계 전이통로의 중앙에서 만나 양측의 친선적 동맹 관계 구축, 군사 기술 공유, 소련이나 지구외 세력의 침공 등 잠재적 적국의 공격 시 군사적 협력이라는 세가지 목표를 최우선시하는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게 된 것이다.

두 나라의 비교

국호
브리타니아 제국

대동아제국
본국 영국 일본
수도 임페리얼 캐피톨
필라델피아
도쿄
공용어 영어, 라틴어 일본어
인구 50억 7,454만명 30억 212만명
정치 체제 전제군주정, 군사독재정, 황정제 파시즘
국가 원수 조지 5세
브리타니아 제국 황제
선치제
대동아제국 황제
군대 황제 폐하의 제국군 대동아제국군
평행계
전이통로 위치
베이징, 뤄양, 시안, 마다가스카르, 실론, 위구르, 그린란드
콘스탄티노플, 컬럼비안 아일랜드 교쿠호쿠, 오타가와

군사력, 기술력, 정치, 경제 등에 있어서는 브리타니아 제국대동아제국에 비해 약소한 우위를 점하고 있다. 그러나 브리타니아 제국이 국가간 연합에 가까운 체제로 50억의 인구를 유지하고 있다면, 대동아제국은 인도 등의 명목상 독립국 / 사실상 속국을 제외하고도 단일국가로 30억명을 유지하고 있기에 실제 국력은 비등하다는 말도 나온다. 게다가 대동아제국과 브리타니아 제국은 양측의 기술 동맹을 통하여 거의 비등한 군사 기술력을 갖추고 있다. 다만 대동아제국의 경우, 군부의 보수성으로 인하여 아직 브리타니아와 달리 실전에 최신식 무기들을 배치하지는 않고 있다. 이는 선치 반정을 통해 개혁파 군부가 집권하였으므로 조만간 해결될 문제로 보인다.

특이한 것은 둘 다 중화 황제국의 계승국임을 자처하고 있다는 점인데, 이는 영국과 일본에서 비롯되어 문화적으로 너무나도 상이한 두 나라의 격차를 매꾸어주는 하나의 수단으로서 작용하고 있다. 각 나라의 국교는 황제교국가신토로 상이하나 두 종교가 불교/유교에서 큰 영향을 받았기에 신앙적 공통점도 존재한다. 이 때문에 실제 양측의 회의에서는 일본어도, 영어도 아닌 중국어(지나어)가 사용되며 조약의 내용도 반드시 중국어로 적는다.

또한 정치적으로 두 나라 모두 전제군주제와 군사독재정, 그리고 황제 중심의 파시즘적인 요소를 띄고 있기에, 정치적으로 두 나라는 반자유주의, 반사회주의적 조직을 궤멸시키는데 공조하고 있다. 실제로 1970년대 이후 과격한 사회주의 조직은 물론, 식민지 독립 운동이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두 나라에서 모두 처참히 분쇄된 것은 대동아제국 정보성브리타니아 제국 정보부가 서로 협조한 결과라는 설도 나온다. 두 나라는 소련이라는 공통된 적을 두고 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두 나라간의 결속을 강화하고 자국민을 통제하기 위해 존속시키는 대외의 적에 가깝다. 소련이 어느 한쪽이라도 침공하면 반드시 다른 한쪽이 도와줘야한다는게 상호방위조약의 핵심이기에, 역설적으로 소련의 존재가 두 나라에게 있어서는 필요 악이 되었다.

평행계 전이통로

평행계 전이통로는 브리타니아가 위치한 세계와 대동아가 위치한 세계를 잇는 제3의 세계로, 그 어느 세계에도 속하지 않고 외부와는 단절된 시간이 흐르는 알 수 없는 장소이다. 브리타니아 제국의 기술부와 대동아제국의 문부과학성이 40년에 걸친 철저한 조사를 하였으나, 현재까지 그 존재는 전혀 알 수 없으며 개발도 불가능하다.

그러나 발견 자체는 가능한데, 현재까지 중국 본토에서 베이징과 뤄양에서 평행계 전이통로가 발견되었고 1980년대에는 실론, 마다가스카르, 위구르, 그린란드에서 발견되었다. 그린란드를 마지막으로 현재까지 또다른 전이통로는 발견되지 않았다. 상기된 통로들은 양국을 잇는 통로인데, 그 외에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발견된 콘스탄티노플과 컬럼비안 아일랜드, 교쿠호쿠(시베리아), 오타가와(페루)의 평행계 전이통로는 대동아나 브리타니아중 한쪽의 영토가 아니기 때문에, 양측에서 각자의 이익에 맞게 사용하고 있다. 양국을 잇는 전이 통로는 브리타니아 제국 정부와 대동아제국 정부가 공동 관리한다.

평행계 전이통로는 지역마다 다르지만, 평균적으로 700m에 달하는 긴 통로로 구성되어있다. 최초로 발견된 평행계 전이통로인 시안 평행계 전이통로는 과거 진나라의 수도였던 셴양에서 남쪽으로 12km 떨어진 야산에 위치해있다. 통로의 입구는 야산의 지하 120m에 위치해있고, 출구는 지하 153m 지점에 달한다. 통로는 완전한 수평으로 그 어떠한 기울임도 발견되지 않으며 불이 없어서 별도의 조명 기구를 설치해야 볼 수 있다.

한나라 시대에 처음 발견되었을때는 폭이 5m, 높이가 4m에 불과한 좁은 통로였으나, 당나라 시대에 대대적인 정비를 거쳐 폭 20m에 높이 5m에 달하는 현재의 모습으로 개조되었다. 이후 브리타니아 제국과 대동아제국이 별도로 시안 평행계 전이통로에 회담장과 간이 편이시설들을 만들면서 현재는 과거의 모습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넓어진 상태이다. 어떠한 시간적, 물리적인 법칙도 외부와는 단절되는 공간이지만 공간 자체를 넓히는 것은 자유자제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입구와 출구를 제외한 다른 곳은 땅을 아무리 파도 통로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어 미스터리함만을 더욱 자극하는 것으로 작용하고 있다.

시안 평행계 전이통로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의 전이통로는 비상용으로 존재하며 아예 개발이 되지 않은 곳도 있다. 주로 급한 일이 있을때나 군사적, 기술적인 용건을 간편히 건네받을 때 사용된다.

정체

평행계 전이통로의 정체에 대해서는 꾸준히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도대체 알 수 없다는게 현재로서는 지배적인 평이다.

역사를 되돌아보자면 진나라 이후로부터 본격적인 언급이 시작된다. 진시황제 당시에 중국 정부에게 존재가 알려졌다는 것이 고로 정설이지만, 이것을 진시황이 "만들었"는지 "발견"했는지 확실하지 않다. 태사공서에 기록된 사마천의 진시황릉에 대한 기록은 사실 훨씬 더 크고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제2의 전이통로라는 말도 있다.

무엇보다도 어려운 것은, 이 전이 통로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 두 제국을 합쳐도 100명이 안되기에 그중 학자들은 2~30여명 정도에 불과하여 양측이 합동으로 조사를 하더라도 한계가 있는 수준이다.

조약문

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