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국 (아침해의 원유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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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국장은 한국 황실 가문의 문장으로서 관습법상 대한국의 국장으로 사용되는 오얏꽃 문장을 가리킨다. 황실과 관련된것들에 보통 새겨지며, 해외 군주국가들에서도 한국 황실의 대표문장으로서의 입지를 가지고 있다.
한국의 국장은 한국 황실 가문의 문장으로서 관습법상 대한국의 국장으로 사용되는 오얏꽃 문장을 가리킨다. 황실과 관련된것들에 보통 새겨지며, 해외 군주국가들에서도 한국 황실의 대표문장으로서의 입지를 가지고 있다.
==황실==
[[파일:daihan.png|300px]]
==정치==
===입헌군주제===
1893년 고종 광무제 이연의 칙서를 받은 제 2대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이 ''''대한제국헌법''''을 발표하면서 귀족정과 황제를 위시로 하는 프로이센 방식의 입헌군주제가 초기에 도입되었다. , 순종 효황제 이윤의 치세 당시에 자유주의 열풍과, 이웃나라 일본의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영향으로 조금 더 민주주의적인 체제로 변화하였다.
본격적으로 황제의 권력이 약해지기 시작하였다고 평가받는 시대는 1938년 [[김창암]]의 대한백의단이 순조 성덕제 이인황의 재가를 받아 정권을 잡은 시기로, 파시즘의 열풍과 이인황 본인의 소심한 성격이 합쳐진 결과 김창암의 권력이 황제를 압도하는 일도 벌어졌었다<ref>다만 백범일지의 내용 등을 분석해보면, 집권 초기의 김창암 본인은 개인적으로 황제를 자신보다 상관으로 인지한 것 같기는 한것으로 보인다.다만 집권 후기부터 황제의 권위를 깔보는듯한 모습도 보였는데, 예시로 《순조실록》中: 금일 대막리지 김창암이 황상께 아뢰길 '작금과 같은 비상시국에선 미풍양속을 철저히 하고 국론의 단합이 필요하니 사관을 아국의 정세와 알맞은 이로 교체하는것이 알맞을 듯 하옵니다'. -성덕 10년(서력 1942년) 4월 3일-같이 본인이 황실의 권한인 사관 임명에서 우위를 가지려 한 모습을 보여주었다.</ref>. 대금민국을 비롯한 한국 제국주의의 피해국들이나 한국 내부의 보수파들은 순조를 대한제국의 침공 선봉에 서 있던 마왕 등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있는데, 상징성으로는 선봉이 맞아도 과연 건강이 심각할 수준으로 좋지 않던<ref>순조는 역대 조선왕조 국왕들 중에서 건강이 좋지 않은것도 있지만, 어릴때부터 정치보다는 학문에 관심이 더 많았다고 기록될 정도로 서정적인 성격이었다고 전해진다.</ref> 순조 본인이 제대로된 판단을 내렸을지가 의문이라는 이야기 또한 존재한다. 순조가 상황으로 물러나고 사망한 지금 진실은 저 너머에.
내전 이후 들어선 민주주의 세력도 황실인사가 지도부인 성격을 띄고 있었고, 이에 따라 친미파인 정치적 지도자 의친왕 이강이 권력을 잡은 한국보다는 기반이 적은 일본과 러시아 차르국에 더 신경을 써야한다 판단한 맥아더 장군의 환태평양 사령부의 결론은 한국의 황제를 ''동아시아 북방 민주주의의 수호자''와 ''반공의 정점''으로 이용하는 것을 택하였고, 몇년 뒤 성덕제에게 양위를 받아 즉위한 이강과의 협의로 헌법을 개정한것을 마지막으로 한국에서의 영향력을 하나 둘 철수해나갔다.
이강 개인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은 약화된 황권과 합쳐져, 구국자로서 황실의 권위를 높이는 대신<ref>단, 전범이나 김창암 세력에 적극적으로 부역한 황실 인사들에 대한 격하작업이 이루어지기는 하였다.</ref> 권력을 낮추는 성과를 내었고, 이강의 치세가 종막에 저물 무렵에는 완전한 민주주의에 기반한 입헌군주제 확보에 성공하였다.

2024년 1월 15일 (월) 19:09 판

대한국
大韓國 | Korea
국기[1] 국장
광명천지
光明天地
동시베리아 전쟁 이전 부산 강화조약 이후
대한제국 대한국
상징
국가
애국가
국화
무궁화, 오얏꽃
황실 상징
이화문
역사
[ 펼치기 · 접기 ]
1392년 대조선국 건국
1875년 대한제국 선포
1904년 한러일전쟁
1930년 한성진군으로 김창암 집권
1936년 4국 동맹 체결
1941년 동시베리아 전쟁
1944년 헌정복귀
1950년 박헌영 쿠데타 시도
2000년 명화제 이청 즉위
지리
수도
한성부
최대도시
한성부
면적
340,744km
위치
동북아시아 한반도 및 부속도서
주변국
일본국, 대금민국, 러시아 차르국
인문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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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인구
약 1억명
공용어
한국어 (법정 공용어)
공용 문자
한글, 한자 (법정 문자)
민족
한국인 95%
러시아인 3%, 그 외 2%
국교
국교 없음 (정교분리)
종교 분포
무교 54%, 기독교 19%, 불교 15%, 유교 11%, 그 외 1%
군대
대한 국군
정치 ·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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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입헌군주제, 의원내각제, 양원제
국가 원수
(황제)
명화황제 이청[2]
행정 수반
(총리대신)
안철수[3]
민주주의 지수
163개국중 17위
(완전한 민주주의)[4]
여당
대한사민당
경제 체제
자본주의 시장경제
통화
한국 원 (圓)
대한국 수도 한성부의 전경

개요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광명이 빛추는 천지가 되다.

대한국, 통칭 대한은 동아시아의 한반도와 남만주에 위치한 입헌군주제 국가이다.

동쪽으로 동해, 서쪽으로 황해에 면해 있으며 남쪽으로는 동중국해와 면하고 있다. 한반도의 본토는 8개의 도인 전라도, 울릉도, 경기도, 평안도, 황해도, 충청도, 경상도로 구성되어 있고, 나머지 남만주의 영토는 각각 심양도와 고려도로 구성되어있다.

전근대와 중세 시대에는 동아시아 문명의 중심지였던 중국 대륙에 지나치게 가까운탓에 중원국가들에게 국력을 억제받았으나, 1592년 왜란을 막아낸것과 명나라와의 합동작전인 만주대첩을 시작으로 국력을 점차 증강하여, 결과적으로 중국이 분열된 상태에서 만주를 울타리로 삼는 동북면 방면의 패권을 기반으로 상당한 국력을 모으는 데 성공했다. 19세기 중엽 프랑스의 개항 요구에 응하여 서양 열강들과 본격적으로 교류하기 시작하였고, 이 과정에서 서서히 모순점이 드러나던 안동 김씨 세도가[5]는 근왕개화파 세력에 의해 몰락하였다. 1860년에는 신미개혁을 단행하여 구시대적 대조선국 체제를 끝내고 대한제국 체제로 접어들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후금, 순나라와 후송보다는 먼저, 일본보다는 조금 늦게 서양의 제도와 기술을 수용하고 체화하는데 성공했으며 제 1차 동아시아 전쟁, 한러일전쟁에서의 승리를 통해 국제사회에서 일본에 버금가는 열강 중 하나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1929년 발발한 대공황으로 경제가 큰 어려움을 겪게 되자 1938년 김창암을 위시한 파시즘 세력의 집권을 시작으로, 1937년 중일전쟁에 참전해 중국과 몽골 침략에 나섰고, 1941년에는 독일의 비밀제의로 소려과 동시베리아 전쟁을 개시했으나, 결국 1944년 영친왕 이은의 김창암 세력에 의한 피살을 기점으로 황실과 문민세력의 합공작전으로 인한 김창암 내각이 붕괴하면서 평화협정으로 끝을 맺게 된다.

전후 한반도를 비롯한 만주 영토에는 군정이 들어섰으나, 이미 내전으로 파시즘 세력이 축출된 한국의 지역적 특성을 고려한 미국은 일본과 같은 직접지배보다는 보다 간접적인 지배를 택했다. 미군의 간접지배하에 헌법이 개정되어, 조선시대때 확보한 영토를 제외하고 모든 영토를 토해냈으며 한국의 황제는 아무런 실권이 없는 국민 통합의 존재로만 남게 되었다. 이후, 1949년에 체결되고 이듬해 발효된 부산 강화조약으로 완전한 국권을 회복하고 미국과의 동맹을 맺어 제1세계로 편입된 뒤, 많이 남은 편이었던 인프라들을 이용하여 중국 내전과 루스 차르국의 정상국가화에대한 투자 등으로 호황을 이룩하는데 성공하였다. 한국의 정치 · 외교는 이때부터 재형성이 되었다고 보면 된다. 대한국 헌법 제1조는 황제의 지위를 '대한국의 상징이고 한민족 통합의 상징'으로 규정하고 있으나, 일부 눈치채기 힘든 방면에서는 황제의 권력이 유효하다[6]. 실질적인 정치는 의원내각제로 운영되며 최고 실권자는 내각총리대신으로 현직은 안철수다. 외교에 있어선 미국과의 동맹 관계를 바탕으로 한 친미/친서방 외교를 고수해 왔고,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신냉전이 본격화된 2010년대 후반 이후론 서방 세계 내에서 신뢰받는 대중국 전략 파트너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7].

상징

국호

한국이 본격적으로 제국주의의 길을 걷기 이전에는 조선, 대조선국등의 국호가 사용되었고, 이후 삼한을 계승한 새로운 자주적 제국이라는 의미해서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신설하였다. 다만, 연합국과 평화협정을 체결한 이후에는 제국주의 색채를 뺀다는 명목으로 제국이라는 국호는 사용하지 않게되었다.

줄여서 부르는 말은 한국 또는 대한으로, 1960년대까지는 대한이 주로 쓰였으나 이후부터는 한국이 주로 쓰인다. 중국, 대금민국과 일본등 한자문화권에서는 ‘한국’이라고 표시하며, 루스 차르국에서는 ‘Корейская империя(대한제국)’이라고 예외적으로 제국이라고 표기한다.

국기

한국의 국기는 태극기로, 1876년 이전까지는 여러 양식의 태극기가 사용되다가 이후 완경군 이재황에 의해서 고안된 형태의 태극기가 정식 국기로서 정해졌다.

국장

한국의 국장은 한국 황실 가문의 문장으로서 관습법상 대한국의 국장으로 사용되는 오얏꽃 문장을 가리킨다. 황실과 관련된것들에 보통 새겨지며, 해외 군주국가들에서도 한국 황실의 대표문장으로서의 입지를 가지고 있다.

황실

정치

입헌군주제

1893년 고종 광무제 이연의 칙서를 받은 제 2대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이 '대한제국헌법'을 발표하면서 귀족정과 황제를 위시로 하는 프로이센 방식의 입헌군주제가 초기에 도입되었다. , 순종 효황제 이윤의 치세 당시에 자유주의 열풍과, 이웃나라 일본의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영향으로 조금 더 민주주의적인 체제로 변화하였다.

본격적으로 황제의 권력이 약해지기 시작하였다고 평가받는 시대는 1938년 김창암의 대한백의단이 순조 성덕제 이인황의 재가를 받아 정권을 잡은 시기로, 파시즘의 열풍과 이인황 본인의 소심한 성격이 합쳐진 결과 김창암의 권력이 황제를 압도하는 일도 벌어졌었다[8]. 대금민국을 비롯한 한국 제국주의의 피해국들이나 한국 내부의 보수파들은 순조를 대한제국의 침공 선봉에 서 있던 마왕 등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있는데, 상징성으로는 선봉이 맞아도 과연 건강이 심각할 수준으로 좋지 않던[9] 순조 본인이 제대로된 판단을 내렸을지가 의문이라는 이야기 또한 존재한다. 순조가 상황으로 물러나고 사망한 지금 진실은 저 너머에.

내전 이후 들어선 민주주의 세력도 황실인사가 지도부인 성격을 띄고 있었고, 이에 따라 친미파인 정치적 지도자 의친왕 이강이 권력을 잡은 한국보다는 기반이 적은 일본과 러시아 차르국에 더 신경을 써야한다 판단한 맥아더 장군의 환태평양 사령부의 결론은 한국의 황제를 동아시아 북방 민주주의의 수호자반공의 정점으로 이용하는 것을 택하였고, 몇년 뒤 성덕제에게 양위를 받아 즉위한 이강과의 협의로 헌법을 개정한것을 마지막으로 한국에서의 영향력을 하나 둘 철수해나갔다.

이강 개인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은 약화된 황권과 합쳐져, 구국자로서 황실의 권위를 높이는 대신[10] 권력을 낮추는 성과를 내었고, 이강의 치세가 종막에 저물 무렵에는 완전한 민주주의에 기반한 입헌군주제 확보에 성공하였다.

  1. 1902년 이재황에 의해 제안된 이래로 사용된 태극기
  2. 2023년 기준 가장 늦은 나이에 즉위한 황제다
  3. 대한사민당 출신으로 2021년 총리대신에 취임했다.
  4. 8.65점
  5. 대한제국 시기의 후작가 중 하나로도 알려져있는 가문으로, 현재 마지막 안동김씨 출신의 영의정을 초대 당주로 두던 직계는 단절됬다.
  6. 이는 국내에서 민주주의 세력을 결집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 거두가 당시 의친왕으로도 알려진 광덕황제 이강이어서가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다.
  7. 다만,일각에선 한국의 현 영향력이 제국 시대에 만주지역과 연해주에 기반을 다져 놓고, 그 기반으로 대금민국과 러시아 차르국을 조정해서 현 외교적 가치를 유지하고 있는게 아니냐는 주장도 존재한다. 반서방 기질이 강한 편인 러시아 차르국이 한국의 눈치를 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제 2세계 진영에 참가하지 않고 있는게 아니냐는것. 물론, 대금민국과 한국의 관계는 실제로는 껄끄러운만큼 단순히 주장 중 하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8. 다만 백범일지의 내용 등을 분석해보면, 집권 초기의 김창암 본인은 개인적으로 황제를 자신보다 상관으로 인지한 것 같기는 한것으로 보인다.다만 집권 후기부터 황제의 권위를 깔보는듯한 모습도 보였는데, 예시로 《순조실록》中: 금일 대막리지 김창암이 황상께 아뢰길 '작금과 같은 비상시국에선 미풍양속을 철저히 하고 국론의 단합이 필요하니 사관을 아국의 정세와 알맞은 이로 교체하는것이 알맞을 듯 하옵니다'. -성덕 10년(서력 1942년) 4월 3일-같이 본인이 황실의 권한인 사관 임명에서 우위를 가지려 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9. 순조는 역대 조선왕조 국왕들 중에서 건강이 좋지 않은것도 있지만, 어릴때부터 정치보다는 학문에 관심이 더 많았다고 기록될 정도로 서정적인 성격이었다고 전해진다.
  10. 단, 전범이나 김창암 세력에 적극적으로 부역한 황실 인사들에 대한 격하작업이 이루어지기는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