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러시아 제국 멸망 1922년 금관작전 시행 1923년 트란스아무르 공화국 건국 1932년 왕정복고, 러시아 제국 선포 1939년 방공협정 체결 1941년 동시베리아 전쟁 참전 1945년 항복 1951년 러소전쟁 발발 1960년 군사두마 시대 개막 1973년 군사두마 붕괴, 민주화 1974년 현행헌법 제정
러시아 차르국, 통칭 제 2차 러시아 제정혹은 극동러시아 동아시아의 연해주 지역에 위치한 입헌군주제 국가이다. 동쪽으로 일본, 서쪽으로 대금민국과 소련에 접해있는 지형을 가지고 있다.
현존하는 극동에 속한 지역중에서 백인 인구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은 국가로, 그 뒤를 만주인, 고려인, 한국인 및 일본인 인구가 따르고 있다.
문화적으로 한자 문화권의 특징과 과거 러시아의 문화가 혼재되어있는 양상을 띄고 있고, 여기에 일본인 인구가 남기고 간 문화의 특징을 고려하면 불교, 신토와 관련된 문화도 간간히 남아있다는 게 사회 전반에서 보인다. 다만, 종교의 경우 정교회가 압도적인 성향을 띄고 있어 인구의 80퍼센트 이상이 종교로서 정교회를 믿고 있고, 세속주의의 영향으로 무종교가 보이기도 한다. 불교 신자들의 비중도 꽤 큰 편인지라, 전체 인구의 약 5퍼센트 정도는 확실한 불교 신자다. 대부분은 연해주 공동통치령 및 괴뢰국 시절에 일본인 이민자들이 유입시켰다.
러시아 차르국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강대한 국방군을 보유한, 선진국의 최소치에 해당되는 국가로서 인정받고 있다. 대외적으로는 동양의 유럽, 눈의 나라라는 이미지를 홍보하여 관광객을 유치하기도 하고, 상대적으로 지서방, 반소 성향을 가진 정당들과 주변국들과의 영토 분쟁 등의 문제가 가끔 있지만 오늘날에도 동아시아의 질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중요한 서방 국가 중 하나로 평가받는 중이다.
역사
1917년 적백내전의 시작 이후부터 완충지대 역할을 맡은 방공국가의 필요성을 느낀 협상국 층게 의해 러시아의 극동 영토에 건국이 고려되었으며, 이후 대한제국 측의 금관작전으로 로마노프 황가의 인원들과 백군 주요인물들의 신변이 일부 확보되면서 1920년 적백내전이 완전히 소련의 승리로 끝날 조짐이 보이자 정식으로 연해주 자치령에 백러시아 망명정부의 뒤를 이을 트란스 아무르 공화국이 건국되면서 출범하였다.
그러나 말이 독립국이지, 국제정치적인 위치에서의 그 실체는 만약 제정 러시아가 살아있었을시 1980년 중에 반환 예정인 연해주 자치령에 영구히 발을 붙이고 싶어했던 한국과 일본이 짜고 만든 괴뢰국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에게 기대를 걸고 있던 영국을 위시한 서방의 지원 등으로 인해 어느정도 정상적인 국가의 꼴은 갖출 수 있었으며, 한국의 시베리아 출병 당시 이를 원조하여 소련과 소규모 교전을 벌이는 등, 나름 대외정책에도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1920년대 건국 직후에는 여러 지원들이 겹쳐들어오면서 유의미한 성장을 이룰 수는 있긴 했으나 정치적으로 영국이 지원하는 헌정파가 운영하던 내각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최대 지원국들인 한국과 일본의 불황이 시작되면서 다시 정국이 흔들리는 지경에 이를 수밖에 없었고, 이는 소련발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이 격화되면서 더욱 더 심해졌다.
그러던 중, 무능한 정부에 대한 실망감과 소련 체제로는 갈 수 없다는 사상들을 시작으로 1920년대 후반부터 로마노프 황가를 다시 왕좌로 복귀시키자는 의견이 서서히 대두되었다. 이윽고 주요 지원국 중 하나인 한국에서 김창암이 집권하여 주변국의 제정화를 정책 중 하나로 천명하는 과정에서 한일 양국 정부에서는 영국의 영향력이 약해진 틈을 타 황정파를 완전히 밀어 연해주에서의 세력을 공고히 하기로 합의했고, 이후 해당 2개국의 입김이 상당히 들어간 왕정의 복귀에 대한 투표가 실시된 뒤, 4표 차이로 차르정이 다시 복귀하였다. 이 이후부터 트란스아무르 공화국이라는 국명은 러시아 차르국으로 바뀌었고, 당시 가장 나이가 많은 황족 후계자이자 로마노프 황가의 차녀였던 타티니야 로마노바가 제 1대 러시아 차르국 차리나로 즉위하였다.
동시베리아 전쟁 당시에는 추축국에 가입하거나 한국을 도와 괴뢰국인 사하 왕국을 지원하는 등 반서방적 행보 또한 보였었으나, 결과적으로 소련이 밀고 들어오기 시작하고 한국의 해동성맹이 해체되자 러시아 차르국의 멸망은 기정사실화 된 듯 하였다. 하지만 영국 왕실이 관련되어 있던데다 극동에 영국의 간접적인 영향력이라도 유지되길 바란 처칠이 필사적으로 트루먼을 설득하여 차르국을 유지시킴과 동시에 극동에서의 대공산주의 냉전의 첨탑으로 쓰면 되지 않냐는 의견을 주장했고, 그의 마지막 계획이었던 이 전략이 성공하면서 러시아 차르국은 1951년 소련과의 전쟁이라는 대가를 치렀지만 서방에게 친선을 홍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도 정치적인 혼란이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고, 결국 전쟁 당시 권한이 강해진 군대가 5월 16일에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러시아의 군사 의회 시대가 개막했다. 해당 쿠데타로 집권한 콘스탄틴 로자예프스키는 이후 스스로 내각총리에 등극한 뒤 빠른 산업화와 개발독재에 기반한 경제발전을 실행시켰고, 결과적으로 그의 장기집권 기간동안에는 막대한 경제성장을 일궈 일면 '오호츠크해의 기적'이라고 불렸다. 하지만 콘스탄틴 로자예프스키는 독재자로서 수많은 민주주의 운동들을 탄압했고, 결국 이 사태는 그가 크리스마스 연회에서 저격당하고, 3일 뒤 그의 사망 소식이 전재지자 촉발된 군부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대규모 시위로 군사내각 시대는 끝을 맞이했다.
이후 다시 헌정이 복귀한 러시아 차르국의 의회는 쌓아놓은 산업력을 기반으로 대외 이미지 또한 홍보하는 정책 등을 실시했고, 이는 1980년대의 경제호황 및 1980년 경제 성장으로서 말미암은 하계올림픽의 개최지로서의 선정과 더불어 러시아 차르국의 국위를 높여주었다.
하지만 러시아 차르국의 정치는 아직 그만큼 선진화되지 못한 상태였고, 이것이 경제와 관련해서 호황만이 계속되자 분위기에 휩쓸려 개혁의 필요성을 잘 느끼지 못한 정치권의 경질화를 낳게 되었다. 결국 당시 베이징 증권거래서에서 시작된 중화민국발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성장가도를 달리던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경제가 본격적으로 침체되면서, 자연스럽게 러시아 차르국에도 암흑기가 닥쳐왔다. 다행히 당시 재무장관의 강경조치로 돌이킬 수 없는 수준의 재앙은 막아내었으나, 이 사태를 기점으로 러시아 차르국의 정계가 일부 우경화되기도 하는 등 아직까지는 영향이 남아있다고 판단받는 사건이다.
상징
국호
러시아 차르국의 국호는 차르가 군림하는 국가이되, 통치를 하는 제국과는 다르다는 의미로 새롭게 해석한 구 국호인 '차르국'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동시베리아 전쟁 이전에는 러시아 제국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종전 이후에는 이렇게 불리는 경우도 꽤 드물어졌다고 한다.
줄여서 차르국이라고도 불리며, 중화인민공화국, 타이완에서는 '구 제정 러시아'라는 부정적인 뉘앙스의 이름이 사용된다.
국기
쌍두독수리 삼색기 Двуглавый орёл Триколор
지위
공식 국기
채택시기
러시아 차르국 (1936년)
근거 법령
<러시아 헌법> (1936년 ~ )
색상
붉은색 (#C23729) 푸른색 (#061B79) 흰색 (#FFFFFF) 노란색 (#ffce00)
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флаг России — трехцветный двуглавый орел.。 러시아의 국기는 쌍두독수리 삼색기이다.- 러시아 헌법 제141조 1항
국기는 러시아 제국의 국기이며, 왕정복고 이전엔 단순히 황실 가문의 깃발이었다가 이후에 새로히 지목되어 국기의 지위를 얻었다. 해당 국기 말고 구 러시아 제국의 다른 국기들 또한 상황에 따라서 사용된다.
국장
쌍두독수리 엠블렘 Двуглавый орёл ерб
지위
공식 국장
채택시기
러시아 차르국 (1936년 ~ )
근거 법령
<러시아 헌법> (1936년 ~ )
사용처
외국·국제기구 또는 국내 외국기관에 발신하는 공문서
1급 이상 상당 공무원의 임명장
훈장과 훈장증 및 표창장
국가공무원 신분증
국공립 대학교의 졸업증서 및 학위증서
재외공관 건물
정부소유의 선박 및 항공기
화폐
그 밖에 각 중앙행정기관의 장이 국가표지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문서, 시설 또는 물자
황실과 관련된 사항
국장은 로마노프 황실의 문장인 쌍두독수리로, 1936년에 헌법 개정과 함께 국장으로서 공식화되었다. 해외 군주국들에게는 로마노프 황가의 상징으로 인정받는다. 황실과 관련된 물건이나 국가와 관련된 물건에 심심치 않게 부착된 것을 볼 수 있다.
제1조: Царь всея России правит на основе добровольного благоволения народа и искренней присяги Богу и как законный глава государства осуществляет полномочия правления в соответствии с настоящей Конституцией.
전 러시아의 차르는 국민의 자발적인 선의와 신에 대한 성실한 맹세를 바탕으로 군림하며, 정당한 국가원수로서 본 헌법에 따라 통치권을 총람한다.- 러시아 차르국 헌법 제1장 체제의 기초 中
전러시아의 차르(Император Всероссийский, 임페라토르 프세로시스키)는 형식상 러시아의 국가원수이자, 1721년 표트르 1세 때부터 계승되어온 로마노프 가문의 직계 후손이기도 하다. 현 차르는 니콜라이 3세다.
상단의 명칭은 대북방전쟁에서 승리한 표트르 1세가 이반 4세가 만들어 그 전까지 사용되던 "전러시아(대러시아(러시아)·소러시아(우크라이나)·백러시아(벨라루스))의 차르" 칭호를 서구식으로 바꾼 것이 유래이며, 1920년대의 제정부재시기동안에는 형식상 황족을 우대하는 공화정 체제였으므로 사용되지 않는 칭호였다. 물론, 1933년에 제정이 복고된 이후부터는 다시 로마노프 가문의 당주 겸 러시아의 국가원수를 칭하는 명칭으로 바뀌었다.
33년까지만 해도, 러시아의 헌법은 사실상 연해주로의 국부천대 이전의 제정 러시아 시절과 같은 전제군주적인 권위를 보장했었다. 당장 구 러시아 헌법의 초장 구절부터가 "전러시아의 차르는 독재군주이며 무제한군주이다. 황제의 최고 권위에 복종하는 것은 두려움 뿐 아니라 양심의 발로이기도 하다. 신께서 그리 명령하신다."라고 적혀있었으며, 실제로 당시 러시아 정계에서 차르가 가지고 있던 권한은 내각불신임권, 군 통수권 등 독일식 입헌군주제의 산물 뿐만 아니라, 위법행위를 저질러도 법적으로 저지할 수단 또한 사실상 없었다. 하지만 차르의 실질적인 권력은 한국과 일본의 지원을 받은 콜차크와 국가두마 내 황당파 관료들이 쥐고 있던지라 이미 이 시점에서도 헌법의 조항이 완전히 성립되지가 않았고, 러시아 차르국이 추축국으로서 패전을 맞은 이후부터는 주 러시아 미합중국군정 치하에서 헌법의 개정을 거쳐, 사실상 통상적인 유럽의 입헌군주와 비슷한 수준의 권한을 강제적으로 부여받았다. 그러나 이후 콘스탄틴 로자예프스키 정권 당시에 일본식, 한국식 군주신성화 정책이 일부 도입되어 권한이 약해진 대신 권위는 더 강해졌으며, 이는 군사두마시기가 끝난 현대에도 잔재가 남은지라 아직 러시아에선 황실과 황제를 비난, 혹은 조롱하는 것이 사실상 법적으로 금기시되는 풍조가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역사와는 별개로, 일단 러시아 헌법은 차르를 확실한 국가원수로서 인정하고 있다. 그래서 타국의 국가원수가 국빈방문할 시 이를 처음 맞이하는 것도 차르가 겸하고 그 후에 실무자인 총리와 접선하는 방식으로 회담이 이루어지며, 군 통수권 또한 차르, 혹은 차르를 대리하는 섭정의 승인이 있어야 효력을 가진다. 명시적으로나마 인증거부권을 가지고 있으나, 패전 이후에는 해당 권한이 사용된 적이 없는지라 사실상 없는 권한 취급이다. 다만 황실 사무에 대해서는 차르의 권한이 정부가 간섭하지 못할 수준으로 막강한 편이며, 동아시아 기준 기타 입헌군주제 국가인 한국, 일본도 뛰어넘는 재량권을 법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에 대한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가장 유력한 의견 중 하나는 황실에 대해선 보수적인 입장을 가지는 러시아인들이 정부가 차르의 일거수일투족에 간섭하는 것을 불경하게 여기는 풍토 때문이라는 가설이다. 실제로 러시아 언론에서는 차르의 발언을 기록할 때 극존칭을 사용하기도 하고, 태국과 비슷하게 차르의 얼굴이 그려진 지폐를 밟는것도 굉장히 불경하게 여기기 때문.
사회
러시아 차르국의 사회는 기존에는 꽤나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측면이 존재하였다. 전신인 러시아 제국도 개방적이라고 볼 수 있는 국가는 아니였으며, 건국 직후부터 한국과 일본의 간섭을 계속해서 받아온 것의 영향으로 각각 일본의 군사식 국민양성 정책, 그리고 일본보다는 군주의 권력이 강한 한국의 군주에 대한 유교적 충성 등을 도입하여 전반적으로 집단주의적인 경향을 보여왔었는데, 이 풍조는 지금은 보이지는 않아도 상당수가 남아 있다고 학자들에게 평가받고 있다.
치안은 수준급인 편이나 지방별 편차가 어느정도 있는 편으로, 전반적으로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치안이 약해지는 구조가 보여지고 있다. 이는 남부 위주로 개발이 진행된 러시아 사회의 특징이 남긴 부작용으로서 지적되고 있고, 그 탓인지 북부지역들을 진흥시키고자 하는 시도도 있었으나 여태까지 정치권 내에서의 예산문제가 계속 발목을 잡아 인구가 블라디보스토크에 몰리는 현상의 해결은 아직 요원해보인다.
아파트 거주자 비율이 유럽인계 국가들에 비해 높은 편이며, 선호도도 높다. 주택 공급, 재건축 등의 주거관련 이슈가 발생할 때마다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아파트가 핵심인 점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는 현대식 건축 선호, 편리함, 조망권, 집값상승 등의 인식이 결합된 러시아 차르국 특유의 집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는 과거 소련과 더불어 대규모 개발정책이 남긴 여파로 정의할 수 있다.
러시아 차르국의 정치는 입헌군주제이고, 국회의원들 중 선출된 총리가 실질적인 집무를 담당한다. 단원제를 시행하는 중이다. 의회로서 기능하는 정치기구는 러시아 차르국 제국두마다.
내각제 국가중에서 유독 총리의 위치가 독보적인 편으로, 이는 단원제라는 시스템의 특성상 나타난 것이기도 하나, 우선적으로 러시아 차르국이 패전을 맞은 이후 확립된 일명 '총리중심제도'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당시 차르의 사실상 전제군주적인 권한을 빠르게 축소시키기 위해 미국이 러시아 차르국이 도입했던 방법은 러시아 총리의 권한을 마치 미국의 대통령중심제와 같이 막강하게 만드는 것이였고, 그를 위해서 내각에 대한 압박은 몰라도 총리 자체에 대한 압박은 그에 걸맞지 못한 모순적인 시스템이 마련됐다. 쉽게 말해 몸에 해당하는 내각을 쓰러트리는것은 여타 의원내각제국가들과 다를 바 없으나, 총리에 한해서는 오히려 대통령제 국가들의 그것과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이 현상은 콘스탄틴 로자예프스키총리 시기의 유신체제와 군사두마시기의 종료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았는데, 학자들은 '강한 지도자'를 추구하는 러시아의 전통적인 정치문화가 지리적인 환경과 더불어 만들어낸 체제의 형태로 보고 있다. 실제로 영어 위키피디아에서는 러시아 총리의 권한을 프랑스 대통령과 비견하기도 했고, 기본적으로 러시아는 의원내각제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총리의 교체횟수가 꽤 적은 편이다.
다만 올가 로자예프스키 전 내각총리의 사례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민주주의가 작동하지 않는 시스템은 아니다. 특히 이 경우는 국민이 초법적으로 총리를 끌어내린 것도 아니고 정통적인 의원내각제 국가들처럼 총리가 법적인 절차에 따라 형을 집행하는 바람에 내각이 해산된 케이스기도 해서, 러시아의 법이 총리, 차르의 위에 있다는 것을 확인한 사례이기에 더욱 두드러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2010년대 후반 이후로 러시아 차르국 내 보수 진영에서의 올가 게이트와 혁신계 진영에서의 드미트리 비리 스캔들 등 여러 비리 문제가 발생하고, 여기에 정치 유튜버 등의 무분별한 활동과 내각 내 검찰 출신 의원들의 증가로 인해 2020년대 현 시점에서는 국민 분열과 정치극단주의가 굉장히 심해졌다.
러시아 차르국의 경제는 세계 20위의 GDP, 세계 12위의 PPP 등에서도 보이듯 꽤 높은 경제력을 가진 편이다. 주로 콘스탄틴 로자예프스키의 주도로 새마을운동이 일어난 1960년대부터 연 평균 8%의 경제성장력을 이뤄냈고, 여기에 70에서 90년대 사이 아시아 태평양 지역 인근에서 이루어지던 비약적인 경제성장의 특수까지 톡톡히 볼 수 있었다.
러시아 차르국 경제 구조의 두드러지는 특징은 완제품을 자기 영업망으로 내놓아서 전면 경쟁하는 전방 산업이 매우 적고, 대신 일본, 한국, 중국 등 아시아 경제 대국들의 후방 산업이 중심이 되는 하청 강국인 점이다. 러시아 차르국의 주요 제조업체들은 대개 하청이나 경제개발 시기 국가와의 커넥션으로 성장한 기업이고, 현재도 세계에서 파운드리 산업이 가장 거대한 국가 중 하나이다. 비슷하게 제조업이 대부분 하청으로 굴러가는 동남아시아가 외국 기업이 설계한 제품을 제조만 하는 OEM이 강세인 것과 달리 여기는 자체적으로 제품을 만들어서 상표만 원청업체 것으로 붙여 파는 ODM이 강세다.
다만 이럼에도 불구하고 2000년대부터는 성장률의 둔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여 2010년대 이후로는 경제성장률이 3% 아래로 고착화되었고, 현재는 아시아 태평양 일데의 경제성장력도 한풀 꺾이면서 경제가 침체기에 들어갔다는 평가가 주류다. 여기에 비슷하게 경제성장을 이뤘던 중화인민공화국과 대금민국이, 러시아 차르국의 제품 품질에 전혀 밀리지 않는 품질의 제품을 더욱 싼 가격으로 팔고 있어 하청 시장에서의 상당한 위협을 받고 있다.
외교
러한관계
러중관계
러일관계
러미관계
러소관계
원래는 최악의 외교관계였으며, 적백내전 이래 수교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문화
전반적인 문화
비록 위치는 극동이나 엄연히 러시아라는 정체성의 근원은 유럽이며, 그에 따라 러시아의 문화 또한 기본적으로 슬라브 문화가 바탕에 있다. 그러나 정교회 동로마 문화와 몽골 지배로 흘러들어온 몽골 문화도 러시아인들에게 강한 영향을 끼쳤다. 몽골의 지배(킵차크 칸국)는 서구화를 지향하는 러시아인들에게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되곤 했으나, 러시아 역사에서 전반적으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여기에 표트르 대제의 급격한 서구화와 트란스아무르로의 천대 이후 소련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되어 진행된 정체성적 갈라파고스화, 그리고 왕정복고 이전부터 막강한 영향력과 지배권을 연해주 지방에서 행사해오던 대한, 일본 등의 국가들의 크고 작은 영향 탓에, 오늘날의 러시아는 여러 문화가 혼합된 한편, 아시아와 서구의 보수성이 섞인 매우 특이한 문화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서양인들은 통상적으로 러시아 차르국을 서부에 인구가 밀집한 소련에 비해 동양적이라고 생각하고[4], 동아시아의 경우 러시아의 문화가 서구적이라고 보는 인식이 있다. 물론 이건 세부적인 이야기이며 세계적 인식으로 따지자면 러시아의 수도나 중심지가 유럽 땅에 있으며 인종(인도유럽어족), 문화적(기독교)으로도 러시아를 유럽으로 보는 편이 우세하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특징이 바로 러시아의 가정문화다. 정교회적 공동체주의를 간직한 채 일어난 농민들의 이촌향도 현상과 동양권 가정에서 종종 나타나곤 하는 자녀에 대한 엄격한 순종의 요구가 합쳐진 결과, 세계에서 손에 꼽히도록 보수적인 가정문화가 현상되어, 사회적 계급 내에서 '단정한' 순종을 적극적으로 요구하는 양상의 사회관이 발달하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했다. 실제로 이 현상은 유럽 관광객들이 러시아를 방문할 시 확연히 이질점을 느끼게 되는 부분이라고 알려져 있다.
역사적으로 러시아는 서유럽에서 많은 문물을 받아들여왔다. 나폴레옹 시대의 러시아는 왕족과 귀족들이 프랑스에 조그마한 땅이 있거나 잠시 활동하고 온 걸 자랑하기도 했으며 러시아어보다 프랑스어를 쓰는 것을 더 자랑스러워했다. 이러한 서유럽 우위의 패러다임은 천대 이후 기존의 서양 문화를 지키는 보수적 성향으로 이어졌고, 대신 새롭게 입지를 차지한 외국 문화는 당시 동양의 강대국이였던 한국과 일본이였다. 1945년 이후 한국과 일본이 패망하자 그 이후에는 미국의 문화가 상류층을 통해 들어오기도 하였고, 이러한 연유로 현재 러시아에서 영향을 끼치는 강력한 패러다임은 미국의 문화로 여겨지고 있다.
정리하자면 소련이 최신적인 러시아 문화의 집결체인 한편 러시아 차르국은 구 러시아 제국 시절의 문화에 동양적, 특유의 보수주의적 문화가 섞인 집결체라고 볼 수 있으며, 이 때문에 세계에서 러시아 제국이 가졌던 문학적[5], 과학적 위상을 어느정도 유지하고 있다고 평가받는 한편, 가장 유럽같지 않은 서구권으로 꼽히기도 한다.
언론, 대중매체
언론자유도가 꽤 낮은 편으로, 이 문제의 고질적인 원인은 근대 이후 확립된 보수주의, 순종주의적 사회 분위기와 1960, 70년대의 군사두마가 반공을 명분으로 언론을 국민통제의 수단으로서 쓰던 것에서 비롯됐다. 그나마 민주화 직후 언론에 대한 자유가 대거 보장되며 이후에는 조금 나아지는 듯 했지만, 상류계층 특유의 무책임한 순종 요구 문제는 아직 갈 길이 멀기도 하였고, 경제와 함께 기업들이 비대하게 성장함에 따라 일부 언론은 사실상 기업의 이미지메이킹을 위한 수단으로서 전락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러시아 언론의 가장 큰 문제는 러시아 차르국의 국민들이 뉴스의 내용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점으로, 대개는 결과에 승복하고 순종하기를 택하는 경우가 많다. 결국 이러한 악순환이 반복되다보니 아무도 반박을 하는 사람이 없어지고, 기업친화적 뉴스로 신문이 도배되는 일이 더러 발생하는 셈.
한편 서브컬쳐 및 현대적 대중매체 분야에선 동양권 기준 상당히 밀렸다는 평가가 강세다. 경제적 성장과정은 냉전시기 여느 경제적 동아시아 대국들의 그것과 비슷했으나, 제 아무리 동아시아의 영향을 근현대에 짙레 받았다 치더라도 민족, 문화적인 배경이 달랐기에 해당 문화적 분야의 발전은 정체된 경우다. 실제로 러시아의 애니메이션계는 본격적인 대중매체의 발달이 시작되기 이전의 중화민국과 비교했을때도 규모가 애매한 편에 속했으며, 현재까지 별 큰 도약 없이 머무르고 있다.
교육
학구열은 한국 등의 국가들에 비하면 약한 편이다. 다만, 사회 특유의 수직적인 교육 방침은 교육열의 그것과 비스무리한 수준이라서, 현재까지도 러시아 내에선 체벌이나 몇몇 오래된 교칙 등이 유요하다.
학제 방면에서는 특이하게도 동아시아의 6-3-3학년 구조를 따르고 있으며, 대전기와 군사두마 시기에는 사상검증을 주기적으로 받아야 했으나 현대에 들어서는 국가주의적인 색채를 조금씩 빼는 작업을 진행하는 추세가 간간히 보이고 있다. 다만, 소련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서술하는 교과서가 주를 이루는 건 여전하다고 평가받는 중.
대중매체에서의 러시아 차르국의 모습
전반적인 매체에서
패러독스 인터랙티브 사의 게임인 <하츠 오브 아이언>에서도 등장. 민주주의 루트, 비동맹주의루트도 모두 차르를 옹립하는 시스템이고, 공산주의 루트의 경우 소련과의 편입을 시도한다. 파시즘 루트의 경우, 방공협정에 가입하는 등 원 역사와 동일하다.
워게임 <레드드래곤>에서 러시아 차르국과 소비에트 연방의 전쟁을 상정한 시나리오인 '시베리아의 소총수' 루트가 있다.
대체역사에서
대체역사소설 <복고38>에서는 기적적으로 러시아의 영토를 대부분 수복하는 데 성공해서 소련과 시베리아를 양분하고 있다. 반면 중국의 경우 중화인민공화국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했고, 중화민국이 대만으로 도망간 것이 특이점.
↑소련에게 종종 던져지곤 하는 조롱적 의미에서의 아시아 표현보다는 진짜로 동아시아에 가깝다고 체감하는 것이 알맞다. 예시로 러시아를 방문한 어느 유튜버는 전산화, 분위기나 거리 풍경 등을 보고, '마치 유럽을 어찌 흉내내는 아시아 대도시를 보는 기분'이라는 답사를 낸 적도 있었다.
↑실제로 고전 미술계에서 러시아 차르국이 가지는 입지는 국제적으로 인정받을정도로 높은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