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금민국 (아침해의 원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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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개 ]  
아침해의 원유관
아침해의 원유관은 임진왜란 축소로 인해 뒤바뀐 한국의 근현대사를 다룬 세계관입니다.
청화대에 이화문이 꽂혀있는 이 세계의 국가, 사회, 정치 및 문화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대한국

일본국

대금민국

러시아 차르국

중화민국

티베트 왕국

중화인민공화국

소련

마다가스카르 왕국

몽골

타이완민주주의인민공화제국

대한제국

대한 공화국

예케 몽골 울루스

대청제국

만주 사회주의 공화국

대금민국
大金民國 | Republic of Manchuria
국기[1] 국장
다섯 민족의 약속된 땅
ᠡᠮᠣ ᠷᠠᠲᠢᠯᠠᠨᠳ ᠣᠹ ᠹᠢᠥᠡ ᠺᠢᠨᠳᠰ
민주화 이전 민주화 이후
만주 사회주의 공화국 대금민국
상징
국가
전진하는 만주가
국화
보춘화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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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8년 후금 건국
1896년 대청제국 선포
1909년 청조멸망
1945년 한국의 내전으로 통제력 약화
1948년 만주 사회주의 공화국 건국 및 만주 인민위원회 수립
1954년 만주 인민위원회의 전쟁 발발
1975년 개혁개방 정책 실시
1985년 만주 민주화 운동을 통한 다당제 및 선거 확립
2000년 신징 올림픽
지리
수도
묵던시
최대도시
묵던시
면적
약 970,000km2
위치
북만주 일대 및 부속도서
주변국
대한국, 중화민국, 러시아 차르국,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인문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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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인구
약 5600만명
공용어
중국어, 한국어, 러시아어 (법정 공용어), 만주어
공용 문자
한글, 한자, 키릴 문자 (법정 문자), 만주 문자
민족
만주인 40%
러시아인 21%, 중국인 10%,몽골인 9%, 한국인 9%,그 외 11%
국교
국교 없음 (정교분리)
종교 분포
무교 51%, 불교 26%, 기독교 20%,그 외 3%
군대
대금민국 국군
정치 및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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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수상제, 이원집정부제, 다당제
정부 수반
수상
국가 원수
(수상)
미하일 하이쥔
행정 수반
(수상)
미하일 하이쥔
민주주의 지수
167개국중 61위
(결함있는 민주주의)[2]
여당
대금민주당
경제 체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명목 GDP 전체 GDP 4150억 2500$
1인당 GDP 5,838$
GDP(PPP)
전체 GDP 6430억 4300$
1인당 GDP 12,5411$
통화
대금민국 아이신(₳)
위치
수도 묵던시의 전경

지린시의 전경

개요


여러분, 수없이 멸망해도 우리는 다시 일어설 것입니다. 저희의 선조들 또한 그래왔으니 말입니다.
니어후루 아이싱가

초원 위를 달리며 떠오른 황혼

대금민국, 통칭 금나라 혹은 금국은 북만주 지역에 위치한 공화국이다. 동쪽으로 러시아 차르국, 서쪽으로 중화민국과 접해있으며 남북으로 각각 대한국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동아시아에서 가장 다양한 민족들로 이루어졌다고도 볼 수 있는 국가로, 크게 여러 부족들을 포함하는 만주인 및 몽골인, 러시아인, 중국인, 그리고 근세 및 근대에 넘어와 만주에 잔류한 조선인[3]이 대표적이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유목민계 아시아 국가들 중에서는 후금 왕조 시절에 들여왔던 중국식 정주문화의 영향과 근대에 대한제국 식민지 시절 유목생활에 대한 제국주의 한국의 무자비한 탄압을 받은 여파로 비교적 완전 유목생활이 약한 편이며, 여기에 공산국가 시절 빠른 근대화와 산업화를 추진하던 정부와 공산주의 특유의 유물론적인 사고가 사회에서 지배적으로 변하며 유목전통이 꽤 소실되었다. 다만, 역사적으로 외지에 속했던 갸무시 같은 지역의 경우 전체 인구의 40퍼센트 이상은 그래도 반 유목으로 생활하고 있는 상황. 또, 어느정도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긴 이후부터는 정부가 전통 유지에 어느정도는 신경을 썼던지라,그래도 동아시아 한자 문화권에 속하는 면모를 일부 가지고 있다.

역사

중세에는 여러개의 부족들로 분열되어 있다가 1618년 후금을 건국, 중국침공을 시도하였으나 조명연합군에 의해 누르하치가 죽고 전세도 불리해지면서 결국 다시 내분의 시대를 맞게 되었다[4]. 이후 1700년대에 훙리 칸의 강력한 카리스마 아래에 다시 통합할 수 있었고, 남만주의 맹주로 떠오른 조선을 피해 연해주 및 몽골 일대로 원정과 정복전쟁을 펼쳐 중흥기를 이룩했었다. 그러나 1721년 러시아 탐험대를 겨우 격퇴한 이후 강경화되던 국가의 여론이 결정적으로 동방전교회를 믿게 된 만주인 기독교도들의 반역모의가 적발되고, 간신히 복속시킨 몽골에서 일어난 반란에서 패퇴당하면서 후금은 완전한 쇄국 정책으로 들어섰고, 이후 이 쇄국의 풍조는 금 문종의 병세가 약화된동안 왕비 예허나라 힝전이 실권을 장악, 조선과 중국으로부터의 관계까지 경직시키면서 절정에 달했다. 결국 1800년대 중반 한국의 국서를 거부하는 사태가 일어나자 한국군의 침공이 일어났고, 이 침공에서 패배해 불평등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이후 정국을 역전시키기 위해 예허나라 힝전은 순나라와의 관계를 밀착시켜 일본과 한국을 모두 격퇴할 계획을 구상하였으나, 결과적으로 제 1차 동아시아 전쟁에서 순금 연합의 패배를 기점으로 금나라 덕종의 아관파천 등이 일어나면서 예허나라 힝전의 세력이 약화되었다. 후일 러시아에서 돌아온 덕종은 국호를 대청제국으로 바꾸고, 근대화 계획인 광서개혁을 실시하였으나, 결국 울며 겨자먹기로 택한 친러 외교가 한러일 전쟁으로 무의미해지면서 1908년, 대청제국은 대한제국에 정식으로 병합되었고 만주라는, 한국의 일개 지역으로서 불리게 된다.

이후 한국은 만주 영토의 관리를 위해 무단통치 등을 시행하였고 자국 내 빈민과 농촌 인구들을 만주로 보내는 정책을 실행하여 만주인들의 토지 대다수를 강탈하였다. 여기에 적백내전 이후 러시아인들도 들이닥치면서 국제사회의 눈치를 본 한국 정부의 정책으로 만주인의 사회적인 신분이 더 내려가자, 3월 1일에 만주의 중심부인 신징시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이에 대한 대처로 한국은 만주인에 대한 정책을 바꾸어 '교화통치'라는 이름의 동화작업을 실행하였으나 효과는 미미했었고, 오히려 당시 한국에 번지던 정치적 자유에 대한 인식이 만주에도 전파되던 중 스탈린에게 반대한 소련 인사 일부들이 몰래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졸지에 공산주의 세력들의 온상 중 하나가 되었다. 이후 김창암이 집권하면서 만주는 전쟁을 위한 발판으로 서서히 탈바꿈 되기 시작하였고, 동시베리아 전쟁 도중에는 작황이 최하치를 기록하거나 러시아인들에 대한 우대가 철폐되는 등 상태가 좋지 못했다. 결국 한성내전을 시작으로 북만주 지역에 대한 통제가 약화되자 곧바로 만주 내 무장 공산주의 세력과 만주 독립운동 세력은 신징시를 접수하였고, 이후 소련군이 남하한 뒤 다급해진 한국이 해동성맹 해체와 더불어 해외 식민지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하면서 독립을 맞게 되었다.

그러나 소련이 점령한 만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과 만주 사회주의 공화국은 이념적으로 거리가 있는 이들이었고, 끝내 이 불편한 관계는 전쟁으로 치달았다. 하지만 전쟁 결과는 치열한 저항과 , 결국 1956년 소련이 모든 만주 영토에서 퇴각하면서 전쟁을 승리로 끝맺었다. 전쟁이 끝난 후 황폐화된 국가를 복원해야하는 문제와 복잡하게 얽혀있는 민족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만주 공산당에게 강요되었고, 그렇게 1963년 공식적으로 만주가 다문화국가라는 사실을 공표했다. 1975년부터 개혁개방 정책등을 시행하여 서서히 경제적인 성장 또한 이룩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개혁개방 정책의 영향으로 만주 국민들은 사실상 소련의 유사국가가 아니냐는 데에 동요하였고, 결국 내부에서 아시아계 민족이 러시아계를 탄압하는 등의 사태 또한 벌어졌다가, 결국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이 러시아의 영향을 짙게 받은 공산당이라고 판단한 국민들이 만주 민주화 운동이라고 알려진 시위를 정부 청사 앞에서 진행하였다. 더 이상 공산주의 노선의 고집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당시 서기장은 ,시위 3일 후 사회주의 공화국 체제의 종식을 공식적으로 선언하였고, 이에 따라 사회주의적 이념보다 만주의 풍토에 더 걸맞는 국명, 오늘날의 '대금민국'이 정식으로 수립되었다.

오늘날의 대금민국은 수상제 및 의회제도의 성향을 띄고 있어 기존의 공산당 시기와 비슷하게 내각 중심으로 돌아가는 정치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여기에 국민들의 대표자를 원활히 선출하기 위한 민주주의가 결합된 형태를 가지고 있다.

상징

국호

국기

국장

사회

다민족 국가

정치

경제

외교

금한관계

역사적으로 한국과 만주 지방에 세워진 국가들은 문화적, 군사적으로 한국이 우위를 가지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남만주 일대의 여진들이 태조 이성계에게 충성을 바치기도 하였으나, 중기부터는 후금이 만주에서 부상하고, 이를 조선이 명과 함께 진압한 뒤 요동을 강탈하면서 관계가 전적으로 악화되었다. 그래도 후금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였던 강희제, 옹정제의 대에서는 조선과의 관계개선이 이루어졌고, 이후에는 후금의 본진이라 할 수 있는 건주여진과 조선이 직접적으로 충돌하는 일은 적어졌다.

그러나 1860년대에 한국이 먼저 프랑스에게 개항당한 뒤 만주로의 확장을 국가정책으로서 정하면서 양국의 관계는 악화될 조짐이 드러났다.


금일관계

금중관계

금러관계

금미관계

문화

전반적인 문화

언론, 대중매체

교육

대중매체에서의 대금민국의 모습

전반적인 매체에서

대체역사에서


  1. 오족공화기
  2. 7.00점
  3. 통상적으로 소련 내에서 고려인이라 불리는 이들이나, 재캐나다 한국인들과는 계보가 다르다.
  4. 이때 무주공산이 된 남만주에 한국의 영향력이 잔류하였고, 조선 후기쯤으로 가면 공식적으로 주변국들로부터 남만주 일대가 조선의 영토로 인정받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