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의 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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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융성(이필제)의 난(정묘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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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 및 귀족령
력사
무신양요 이전
1847: 조선국왕 이환(실제 역사 헌종)의 계비 효정왕후가 건강한 세자를 출산.
- 이환은 어의의 조언대로 정력제 복용을 중단하였으며, 이로 인해 건강의 악화가 멈춘 한편 정력제 과다복용으로 인한 죽음이 취소되었음. 한편, 의지를 다시 되찾은 이환은 정력적으로 장동의 세도가를 칠 준비를 시작함. 이 무렵, 비변사가 혁파되며 조짐이 생김.
당시 조선에 숨어있던 페레올 대주교의 서신이 인도차이나 및 남중국해 인근에서 항해중이던 프랑스 함대에 닿는 데 성공. 이롷 인해 조선으로의 출항에서 사용될 예정인 영국의 해도가 잘못되어있을 수도 있다는 현지의 정보가 전해지며 출항 시간이 늦춰졌으며, 이후 몇 번의 준비를 더 거친 라피에르 제독의 함대는 다른 항로를 통해 최대한 안전한 항로를 새로 몰색하기로 함. 그리고 예상대로, 4월 27일 경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식민지에서 출항하여 기존 항로로 가자 함대의 훼손이 시작되며 기존 노선이 안전하지 않다고 판단한 함대는 함선 수리+해도가 재검토를 위해 다시 상하이로 회항.
상하이로 회항한 함대는 해류의 위혐성을 실감한 탓에 본국의 추가적인 인력 요청을 고려하기로 하였으며, 이 작업의 첫 번째 작업으로 홍콩 내에 있는 조선의 교단들을 통한 조선해 인근의 수운에 대한 상세한 정보 파악 작업이 이루어졌음.
흑선 입항
1848년: 조사를 이어가던 라피에르 제독은 당시 홍콩에서 머무르고 있던 최양업 신부로부터 조선에 대해 들으면서, 한강 수운에 대해 알게 됨. 또한, 한강의 환경 등에 들으면서 한번에 한강을 틀어막고, 이를 통해 물자를 차단하여 조선 조정의 항복을 최대한 빠르게 받아낼 전략을 구상. 이를 위한 본국의 지원대 도착과 정보 파악을 준비하며 때를 기다린 라피에르 함대가 이내 1848년 1월 2일 상하이를 떠나 재차 조선으로 출항, 결국 강화도에서 교전이 벌어짐(무신양요).
사전에 기획한 대로 프랑스 함대는 한강 수운을 봉쇄하여 사실상 조선군의 보급로 및 수운을 차단하였으며, 한편으로는 정족산성에 대한 포격과 당시 최고의 해안 요새였던 강화도 남부에 상륙하여 압박을 진행함. 아직 세도가의 철폐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던 탓에 군사적인 대비가 미비했던 조정은 패닉에 빠졌으며, 여기에 기세를 얻은 프랑스군이 서서히 강화도 전역을 차지하려는 조짐을 보인 한편, 통제된 물길을 타고 올라온 협상단이 한성 인근까지 올라갔다가 돌아오는 등의 사태가 벌어지자[1] 서서히 전쟁을 계속할 경우 사직의 보전을 당부할 수 없다는 여론이 조정 내에 확산됨.
장동 김문은 권력의 유지를 위해 강화도를 수복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삼정의 문란으로 인한 군사력의 심각한 유출 및 되화 탓에 동원 가능한 인력에 한계가 명확했음. 결국 몇몇 개화파는 화친을 하여 와신상담하자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고[2], 이에 이환은 슬그머니 장동 김문이 지지를 한 것처럼 조서를 반포한 한편, 박규수를 접견관으로 파견하여 개항을 받아들임.
강화도에서 개항 협상이 진행되는 와중, 뒤늦게 프랑스 함대 측에 2월 혁명 소식이 들려옴. 본국으로 귀항하기로 결정한 프랑스 함대는 떠나기 전 간단한 약식 조약(조불화친조약)을 체결하고 돌아갔으며, 이 사태를 계기로 조정 내부에서 혼란이 일자 이환은 세도가에게 외교 참사와 패배의 책임을 물어 1차적으로 중앙 정계에서 과도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장동 김문 세도가 세력을 상대로 숙청을 단행한 뒤 개혁을 시작함(무신환국).[3]
- 조불화친조약 (2월 31일)
조선측 전권:접대관 박규수, 통역가 최양업 프랑스측 전권:조선원정함대 사령관 라피에르 제독 - 영구친선 한양-빠리 - 제물포와 원산이 개항되었으며, 개항장에서는 신아의 자유가 인정되는 한편 프랑스 함대에게 조선 측이 물자를 관료들이 결정한 가격에 따라 보급할 의무가 생김. - 거래 허가와 간단한 물물교의 합법화 - 프랑스에 대한 편무적(片務的)인 최혜국 대우 - 프라읏의 조난자 및 시민은 타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조선에선 어느 정도 수준의 법률을 따를 필요가 있음 - 기타 등등
- 한편 사태에 상하이와 홍콩에 있던 조선인들이 연류되었다는 정보를 조약 당시 입수한 이환은 암행어사(조사시찰단)들에게 홍콩에서 서양인들의 동향에 대해 샅샅이 파악하라는 밀령을 내렸으며, 이들은 서양의 실태를 파악하기 위한 원정에 나섰음.
1849년: 조선이 프랑스에게 개항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광둥의 미국 동인도 함대장 가이징거 제독이 일본으로의 진출을 위한 중간거처 및 태평양 영향력 확대를 위해 조선의 개항 계획을 수립함.[4] 한편 조정 내에서는 척화파들의 목소리가 보수적인 유림과 장동 김문을 중심으로 커질 조짐이 보였으나, 은근히 주화론을 지지하는 한편 서양의 병기와 기술에 큰 경각심을 느끼고 있던 이환의 태도와 무력을 통해 입증된 실질적인 증거 탓에 어느정도는 목소리를 내는 것에 한계가 있었음. 때문에 척화파는 기술과 정보는 들여오되 오로지 복수를 위해 사용해야 할 것이며, 교류는 이전처럼 하지 말자는 입장으로 선회하게 됨.[5]. 한편, 민간에서는 흑선에 대한 갖가지 괴담이 확산.[6]
한편 상해로 파견나갔던 조사시찰단이 정보와 함께 1849년 9월 16일 경 귀국하였으며. 제 1차 아편전쟁으로 청나라가 심하게 수탈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환의 지시에 따라 서양과의 연결을 위한 단체인 교린사가 설립됨.[7] 교린사는 조사시찰단의 정보, 최양업 등 가톨릭 인맥, 선교사, 외교관들의 도움을 받으며 서양에 대해 지식을 정리하고 저서를 발행함.[8]
이후 척화파들의 불만도 달랠 겸 명목상 국방 강화를 위해 이환은 강화도의 방비를 다시 다졌으며[9], 한편 프랑스의 영향력이 애매하게 변한 조선에는 미국, 영국, 독일 등 기타 서구 열강 세력들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함. 한편, 이 시기 헌종은 박규수와 흥선군을 중앙 정계로 포섭하여 세도가를 쓸어버릴 준비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풍양 조문을 정치적 이득과 아들과의 정략혼을 담보로 주화론 진영으로 끌어들여 세력견제를 이루어내는 계획에 착수했음.
1850년: 청나라에서 태평천국의 난이 발발한 사이, 청나라의 시선이 조선에 끌리지 않은 동안 속전속결로 일을 끝내야겠다고 판단한 가이징거 제독이 이끄는 미국 동인도 함대가1850년 6월 25일, 강화도 앞 해역에 찾아와 통상을 요구함. 이에 잠시간 더 이상의 침공이 계속되지 않으면서 조용했던 조정 내에선 다시 '주화파 or 주전파'로 의견이 갈리기 시작하였음. 지난 해 동안 주화파로 대거의 개화파가 유입되면서 주화파에는 개화파 및 국왕의 친위 세력, 풍양 조문 세력이, 주전파에는 장동 김문 및 척화파, 유림이 몰리게 됨.
흥선군, 박규수 등 실학파와 풍양 홍씨는 주화를, 이항로 등 위정척사파와 잔존 안동 김씨는 항전을 주장함. 이환은 애매한 태도로 주화파의 편을 들며 주화론이 우세를 점하는 듯 하였으나, 유림들로부터 지난 무신환국의 명분이 '존왕양이'아니였냐는 지적이 들어온 탓에 명분론적인 타격을 입음.결국 최종적으로, 미군에 대한 조치는 척화가 결정되었고, 이에 조선군이 강화도로 다시 출병하여 미국 함대와 전투를 벌임. 강화도의 방비를 다진 덕에 2년 전보단 잘 맞섰으나 중과부적인 전선의 유지로 인해 타개가 힘들었으며, 결국 본국에 지원을 요청한 가이징거 제독의 조치로 추가 함선으로 함대가 불어나자 항복. 7월 15일,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 한편 조선국왕 이환은 위정척사파에게 책임을 물어 요직에서 대거 해임하였으며, 국왕과 결탁한 세도가를 제외하면 사실상 장동 김문의 영향력이 거세됨. 이 결과 주화파가 조정 내 파벌싸움에서 승리하며 개화파들이 대거 요직에 앉게 되었으며, 한편으론 환국 이후 개화파를 등용하고도 여전히 조정에 남은 빈 자리를 메꾸기 위해 개혁의 일환으로서 인재들의 대규모 편입이 이루어짐.(경술경장). 이 시기, 충청도에서 지방 관원 생활을 하던 이필제가 중앙 조정으로 올라오는 것에 성공하였음.
한편 은결을 색출하여 농민들으이 생활을 안정시키는 작업이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의 설치를 통한 개혁과 함께 진행되며, 삼정의 문란에 왕실의 손이 닿기 시작함. 또한, 조세의 금납화가 이루어지면서 쌀이 아닌 금속으로 조세가 치러지게 되었음.
1851년: 프랑스와의 접촉 이후 약 3년의 시간이 흐른 시점, 2월 17일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이 설립되며[10] 군제와 정치에 대한 대규모 개혁이 감행, 조선의 본격적인 개화와 근대화 추진. 양전의 실시가 은결의 색출에 이어져 진행되었으며, 서구의 세금제를 참고하여 국가재정 확보를 위해 조세 개편이 이루어졌음. 한편, 일본에 조선이 양이에게 개국당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였으며, 서서히 대정봉환에 대한 건의가 올라오기 시작함.
1852년: 프랑스 제2제국이 건국되며 조불관계가 다시 재개됨. 조선은 공화국이 아닌 재정이 들어선 프랑스에게 우호적인 모습을 보였으며[11], 이에 국가적 위신을 채울 기회라 파난한 나폴레옹 3세는 조선을 상대로 서양식 무기의 수출과 군사고문단 파견을 건의함. 그러나 아직까지 남아있던 척사여론 탓에 이 요청은 지연되었으며, 대신 유학생의 파견과 서양어 교육을 위한 인력이 제공됨. 이때, 조정으로 막 올라왔거나 미처 올라가지 못한 중인과 서얼 계층들이 크게 활약하고, 일부는 유학에 동참하며 점점 위상이 오르기 시작했음. 한편, 이 시기 개화의 물결에 동참한 양반들과 그렇지 않은 양반들을 기점으로 서서히 빈부와 출세의 격차가 갈리기 시작함.
그러던 중 조선이 프랑스, 미국과 개항한 소식을 알게 된 영국이 조선에 개항을 요구하였고, 당시 정세를 시찰하고자 청나라로 파견가있던 은정사가 영국이 어떠한 나라인지에 대한 대략적인 무력의 정보를 전달함. 이에 속전속결로 조영수호통상조약이 체결, 비록 후발주자였지만 영국도 한반도에서 조약을 통한 이권을 보장받기 시작하였고, 거문도에 영국을 위한 별도의 개항장이 설치됨.
이후 통리기무아문이 서양식 무기 수입과 중앙군 개혁, 프랑스와 영국, 미국 등의 지원을 받아 한양 병기참의 설치, 화폐 개혁 등 시책들이 추진되면서 일전의 개혁과 함께 민새으이 회복, 국가의 발전이 증진되기 시작함. 한편 민간에서는 서양 상인들과의 개항장 무역이 활성화되며 돈이 흘러들어오기 시작하였으며, 조세제도의 개편과 경기 부흥을 통해 조정은 개혁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음.
- 다만 이러고도 장기적으로는 채무가 상당해질 것이 예상되었던 탓에, 기존에는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던 서북 지역에서의 광산개발이 흥선군의 주도 하에 이루어짐. 이 때 일부 광산은 채권을 위해 미국, 프랑스 등에게 판매되었음.
1853년: 내부 상황이 안정된 프랑스가 재차 조선에 접근하였고, 이에 따라 조불수호통상조약 체결. 미국과 영국에 이어, 프랑스도 수호통상조약을 통한 이권 확보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음. 프랑스, 조선에 본격적으로 군사고문단의 파견을 개시.한편 기존의 5군영이 왕실의 시위를 담당하는 무위영(武衛營)과 한양의 경비를 맡는 장어영(壯禦營)으로 개편이 완료되었으며, 교련국에서 교련병대(敎鍊兵隊)를 창설, 프랑스식 군사교육이 진행됨. 당연히 척화파와 유림 세력의 분노는 극에 달했으나, 장동 김문이 거세된 와중에 양란을 구실로 군제의 개편이 조정에서 주요 담론이 되면서 함부로 반박하는 것이 불가능했음. 일이 틀어지자 위정척사파는 노선을 변경, 전면 근대화를 지연시키고 자신들의 입지를 키울 목적으로 북벌론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함.
조선 영국 총영사관 설립. 영국과의 외교가 본격화되는 한편, 당시 대조선외교를 담당하게 된 해리 S. 파크스는 조선 조정에 영국식의 급진적인 근대화 및 서구적인 개혁을 할 것을 제안함. 한편, 청나라 내부에서는 소속방토(所屬邦土)인 조선이 침공당해 완전히 식민화되는 게 아닌 이상 당장은 방기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 태평천국의 난으로 인해 어지러운 내부 사정에 집중하게 됨. 이북과 이변, 유배 해제.
한편 청나라에선 태평천국군이 난징을 함락시키고 화북으로 북벌을 시작함. 페리 함대, 3월 31일 경 조선에서 출항하여 일본과 일미화친조약 체결, 뒤이어 영국군, 프랑스군도 출병하여 화친조약을 맺으면서, 잇달아 화친조약을 세 개나 체결한 막부의 권위가 흔들리기 시작했음.
1854년: 유학생과 개혁만으로는 아직 서구화가 부족하다고 느낀 조선에서 조약 개정을 겸할 겸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수교를 맺은 국가들로 젊은 왕족인 경평군 이인용을 필두로 유홍기, 오경석 등으로 구성된 보빙사를 1월 15일 경 파견함. 한편 조정에선 청나라, 서양의 동향과 앞으로의 국가적 방향을 두고 크게 경장과 북벌을 중심으로 한 ‘경북논쟁’이 시작됨. [12]
- 경장파(급진 개화파): “서양의 기계 수입과 제한적 제도 수립뿐만 아니라 제도적 개혁, 방향성을 정하고 전면적으로 시행해야”
- 북벌파(위정척사파 다수, 수구적 온건 개화파, 이필제): “지금까지의 정보들을 보아 청나라는 이미 망조에 들었는데, 지금 당장 북벌을 추진하여 국위를 선양해야”(속내: 전면 근대화 지연 목적)
팽팽한 주장으로 인해 결론이 나지 않던 중, 당론으로 조정이 과열될 것을 우려한 헌종의 중재를 통해 보빙사 귀환 후 결론을 내리기로 함. 한편 이를 통해 차후 명분로에서경장파를 열세에 밀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개혁을 완수하는 대로 북벌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헌종은 군의 육성과 부국강병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게 됨. 한편, 일본에선 미일수호통상조약이 1년 일찍 체결되면서 동아시아 전체를 아우르는 역사의 변곡점이 생기기 시작했음.
- 1854년 오페르트 살인 사건: 1854년 조선으로 온 22세의 젊은 상인 오페르트가 척사파 유림에게 살해당함. 이에 따라 독일 측에서 희생자에 대한 배상 등을 조정에 요구하며 강화도 앞바다에 함대를 끌고 나타났으며, 이는 같은해 조독수호통상조약 체결로 이어짐.
1855년: 프랑스에서 1855년 파리 박람회 개최되었고, 보빙사 역시 이를 방문하여 관람함. 이때 경평군과 보빙사의 나머지 인원들은 서양의 발전된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으며, 전면적인 서구화만이 조선을 살릴 길이라는 생각을 품게 됨. (이후 경평군은 왕실의 근대화를 추진, 유홍기와 오경석은 지식인 양성, 관료들의 개화사상에 기여) 한편, 정치적으로 승자의 위치에 섰지만 완벽한 위세는 점하지 못한 풍양 조문이 해운업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음.
1856년: 서양으로 갔던 보빙사가 돌아오면서 경북논쟁이 재개됨. 처음에는 이인용의 주장으로 인해 문명개화론이 우위를 점하는 듯 하였으나, 애로호 사건으로 2차 아편전쟁이 시작되자 지금의 군사력이면 정예암흘 고려할 때 아무리 근대화가 완료되지 않았더라도 요동을 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지 않느냐는 여론이 득세하면서 ‘문명개화’에 우세하던 여론이 반반이 됨. 도저히 의견이 좁혀지지 않자, 이환은 지난 병자호란때와 같이 관전무관단을 파견하고 사오항을 지켜본 뒤, 정말 기회가 난다면 직접 출병하여 요동을 어낼 것을 선언.
이에 따라 2차 아편전쟁에서 영,불, 미 등의 서양 함대에 문무관전단(관전사) 파견되었으며, 청은 정보를 파악하지 못한 탓에 조선에 경계령을 내렸을 뿐 큰 조치를 취하지 않는 방향성을 보임. 유홍기, 서양의 정세 및 개화사상을 담은 "불란일기"를 집필. 한편 위정척사파 등이 만인소를 단체로 올리는 등 반경장 행보를 보였으나, 이환이 이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발표하며 만인소를 통한 개화에 대한 반대 움직임은 사실상 사문화되게 됨.
1858년: 중도에 텐진 조약 체결되는 동안 전쟁의 양상을 지켜보던 관전사가 귀환함. 이에 따라 청의 망조가 든 것이 확실해지며 이환의 명분론을 예고받은 개화파 또한 전면적 제도 개혁에 대한 생각이 확고해지는 한편 전면적 북벌론을 주장하기 시작했으며, 민중들 사이에선 청나라가 망조에 들었으니 북벌을 하잔 여론이 증가함. 한편 소수 개화파들 사이에서는 북벌 이후엔 '식민지'를 확보하기 위해서 막대한 인구수와 농토를 가진 일본을 쳐야한다는 주장이 올라왔으나, 당시엔 북벌론이 주류였던 탓에 주류 여론으로 자리잡지는 못했음.
1859년: 2차 대고포대 전투가 벌어지며 2차 아편전쟁 재개되었고, 이에 따라 조정 내에선 영국과 프랑스에 입조하여 만주의 고토를 되찾아오자는 북벌 여론이 우세가 됨. 개화파는 시간을 더 가진 뒤에 최대한 빨리 출병하자는 의견을 표력했으나, 함경도의 "조선-청나라 국경" 일대에서 상인들간의 압송문제를 두고 퍼진 말싸움이 팔기군과 조선군의 분쟁으로 번지게 됨. 이는 최대한 빨리 위신을 올릴 생각이였던 북벌파의 자작극이였으나, 이미 조정의 흐름 자체가 북벌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던 탓에 결국 이환이 직접 재가를 선언하면서 북벌 결정.
기미 북벌(己未北伐): 조선 신군과 양계 지역 포수들이 선전포고 없이 북진하여 청나라군을 격파한 뒤(이 과정에서 삼전비가 산산조각났고, 그 잔해를 주춧돌 삼아 훗날 조약문이 작성됨), 성벽에 오물을 발라 방비를 시도한 팔기군을 단숨에 북간도 및 동간도(연변, 용정 일대)를 점령. 본래 북벌파는 남만주의 핵심부인 요동에도 쳐들어가고자 하였으나, 전선이 너무 커질 것을 우려한 이환의 만류로 속전속결로 간도의 확보와 요령성 서부로의 진출만을 마무리하기로 함.
1860년: 1860년 10월 18일 베이징 조약 체결, 러시아가 강력하게 이권을 주장하며 연해주를 차지함. 한편 그 해 11월 13일 심양 조약이 체결되면서, 조약에서 조선은 “사대관계 폐지 및 동등한 외교권(대조선국, 대군주, 개국 기년 사용 등), 간도의 점진적 할양 및 요령 동부의 조차, 청나라의 배상금, 서양이 개항시킨 항구에 조선 상인 진출 허용(인삼), 서양과의 자율적인 외교 허용(자주국 용어 사용 가능)” 등의 이권을 얻어냄. 이 내용은 삼전도비 비석의 잔해를 다시 조립하여 요령통감부 일대에 새로 세워졌음.
북간도(연변 등)에 '변계경무청'을 설치하고, 이항로의 문인이자 북벌파 무관으로서 적극적으로 전투를 지휘한 양헌수를 '북변간도관리사', 한성근을 부관리사로 파견. 장차 영토를 조선의 것으로 편입하기 위한 조치의 일환으로서 간도로 조선인 진출 활성화. 요령 동부에는 요령통감부가 설치, 명목상 청과 조선의 공치가 이루어지는 지역으로 규정됨.
심양 조약의 체결에 따라, 북벌파는 경장 이래 일시적으로 조정 내에서 승리. 그러나 북벌이 실현된 탓에 명분을 유지하기가 힘들어진 북벌파는 여전히 근대화의 점진적 중단을 주장하는 보수파에게서 작게 두 파벌이 갈라져 나왔으며, 각각 정일론과 보수파로 불리게 된 이 파벌은 후방의 일본까지 쳐서 안정을 도모하자는 극단적인 주장과, 개화정책에 편승하여 최대한 의견을 반영하는 식으로 권력에 영향을 끼치자는 주장을 펼치게 되었음.
1861년: 북간도 일대의 합병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자는 북벌파의 주장에 따라 북간도독부의 설치가 이루어지던 중, 녹둔도와 북간도-연해주 간 국경선을 두고 3월 7일 “조러 국경 분쟁” 발발하면서 러시아에서 조선에 대한 적대적인 시각이 성장한 와중에 러시아인 살해 사건이 녹둔도 근해에서 벌어짐. 직후 브릴료프 함장의 러시아 군함 파사드닉 호가 무력 시위를 시작하면서 조정 내에선 영국과의 대립관계에 있는 러시아와의 전쟁 및 안보 위협에 대한 ‘공러증’이 돌게 되었으며, 한편 해리에 의해 친영파가 상당한 확산을 이루었던 경장파가 영국과의 친선을 주도하기 시작하면서 조선이 영국과 관계를 가까이하고자 함. 이 조치의 일환으로서 그 해 3월 11일 이환의 주도로 영국 총영사관이 공사관으로 승격되었으며, 얼마 뒤인 19일 경 영국의 중재 의사가 나오면서 호프 중장의 영국 동양 함대가 와서 대응한 덕에 국경분쟁이 해결됨. 한편,분쟁이 해결된 이후 북간도는 북간도 도독부로서 개편.(이후 대한제국의 본토인 용천도, 통강도 등으로 편입.)
한편 청나라에서는 신유정변을 통해 “공친왕-태후” 삼두정치 집권, 조선에게 국치를 당할 정도로 약해진 국위를 회복하자는 취지에서 양무운동 시작됨. 이에 대처할 겸 북벌파의 기세를 꺾어놓을 생각이였던 경장파는 “청나라가 개혁을 통해 강해지면, 조선에 복수하러 올 것이다”라는 내용의 보복론을 유포, 현재 확보한 간도독부의 점차적인 편입과 요령통감부에 집중하기로 함.[13]
결과적으로 1861년 기준, 북벌론이 사실상 승리를 거둔 가운데 ‘공러증’과 ‘보복론’으로 인해 조선 내 불안이 고조되었고, 이에 따라 북벌파의 파벌도 여러 갈래로 갈리기 시작하며 제도개편과 개화에 뜻을 뜬 이환에 대한 지지를 중심으로 단합한 경장파가 ‘경북논쟁’에서 최종 승리, 이후 정부체제가 개편됨에 따라 경장파가 북벌파를 대신하여 요직을 차지하였으며, ‘전면적인 제도적 근대화’를 위한 단계를 밟기 시작함.
- 신유개혁
기존의 6조를 6아문으로 개편하는 과도기적인 편성이였으며, 이 과정에서 기존의 예조, 호조, 병조, 이조, 공조, 형조가 통리기무아문을 필두로 한 내무아문, 외무아분, 병무아문, 탁지아문, 법무아문, 학무아문, 농상아문, 경무아문 등으로 완벽하게 개편됨. 삼정승 체제 또한 이에 맞추어 개편되면서 국내상(기존의 영의정을 대체)인 이 통리기무아문과 내무아문을 지휘하게 됨. 이유원이 국내상에 임명된 사이 실권자는 나머지 두 의정이 맡게 되었으며, 좌의정인 박규수는 탁지 및 군무아문을, 우의정인 경평군은 법무, 학무, 농상아문 등의 정책을 맡게 되었음.
한편 형조와 이조가 담당하던 치안과 종실에 관한 업무는 각각 양 포도청의 병합을 통한 경무아문의 신설로 이어졌으며(당시 지방에서 종종 일어나던 반개화 민란을 관리하고, 바뀐 행정체제에 쉽게 적응하기 위함), 이조는 직후 비서아문으로 개편되어 궁내부로 변환되기 전 일종의 과도기적 단계를 거치게 되었음. 또한 한성부의 호구조사 업무와 보건, 환경미화 업무 등을 담당하며 한성부의 행정업무가 수행되기 시작함.
1862년: 조선통신사, 정식으로 부활하여 혼란스러운 일본에 서구식 옷차림을 한 채 파견. 열렬한 환호 막부의 동요 및 조선을 근거로 하루빨리 서구의 마수를 피하기 위한 유신을 주장하는 존황파들의 부상이 시작됨. 통신사는 이번 출항을 기점으로 일본에 대한 직접적인 조사를 통해 향후 해양 방면에서의 정책을 결정하고자 하였으며, 한편으론 이 시기를 기점으로 정일론이 잠시 힘을 얻기 시작함.[14]
대조선국 조정, 서양의 '제도와 학문' 등 국가 시스템을 체계적으로 배우고자 김홍집, 박정양, 이변, 이욱등으로 인사가 구성된 사절단 '견서사'를 서양에 파견. 1862년 런던 박람회 방문, 후쿠자와 유키치 등이 포함되어 일본과 서구가 체결한 불평등조약을 개정하고자 했던 일본 분큐 사절단과 조우.
한편 사법제도를 개편하기 위해 법무아문 산하에 재판소가 설치된 한편 한성에는 근대적인 재판관의 양성소가 들어섰으며, 크게 진위재판소[15] 및 종심재판소[16], 조차재판소[17] 등이 설치되게 됨. 한편 신식군의 설치에 따라 일부 구식 군인들의 불만이 생기기 시작하였으나, 주로 시험을 통해 합격하지 못한 이들 및 영남 출신으로서 일부 차별을 당한 계층들이 보수파에 기대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함.
1863년: 경장이 본격화되면서 조정에서의 입지가 급격히 약해지기 시작한 척화파 세력들의 반발이 다시 올라가기 시작함. 다만 명분론적으로 부족했던 이들은 결국 폭력적인 수단인 지방에서의 암살 및 은밀한 활동을 통해 경장을 늦추고자 하였으며, 일부는 지방의 유림들을 통해 몇몇 백성들을 선동하여 반경장, 반개화 성향의 민란을 일으키기도 함. 초기엔 위정척사파가 주류였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보수파와 그 중심인 이융성(이필제)에게로 권력이 집중됐음.[18]
- 최양업 살인 사건: 1848년 조선의 통상 당시 통역을 맡고 조정 내에서 일하던 최양업이 1863년 살해당함.[19]
<앞으로의 계획> -1868년 위정척사파, 북벌파가 반란을 일으킴(K-세이난 전쟁. 1868년?). 이후 이를 진압한 뒤 더 이상 유의미한 반란을 일어나지 않음.
- 주요 인물들의 역사 개변
-최제우가 여기서도 1860년에 동학을 창설할까? 나온다면 동학의 역할은?(조정에서 통제 가능? or 반개화 운동의 구심점?)
A.동학이 창설되긴 하겠으나, 성질이 꽤나 변할 가능성이 높다고 봄. 신내림의 신화가 나라를 도우라는 입장이 나라의 팽창을 지지하라는 의미로 변경. 점진적인 동학의 겐요샤화
-1854년 기준 20세인 최익현은 '실제 역사의 1875년 이후 최익현'보다 더 생각이 열려있을까? 최익현의 역할은? (위정척사파의 마지막 구심점? 반개화 북벌파? 자유민권론자의 시초?)
A.유교적 사상과 자유 민권론, 북벌론이 모두 결합된 복잡한 인물이 될 예정. 그러나 1885년 이후부터는 북벌론자보다는 보수적인 성향의 경장파와 더 비슷한 성향을 가지게 될 것으로 보임.
-이융성(이필제): 조선의 사이고 다카모리?
A.정답.
- 조청 국경분쟁
-간도 이권의 보장 및 할양: 토문강을 경계로 그 이동 영토는 조선인이 조차, 차후 병합하는 것을 허용한다. -요녕 서부에는 통감부를 설치, 청과 조선의 공치를 실행하여 선린우호와 동등한 관계를 추진한다. 청국 황제는 황제의 자격으로서, 조선 대군주는 심왕의 자격으로 군림한다. -이후 확장이 진행된 이후: "청나라: 토문강 이동 영토는 연변 일대에 한정됨", "조선: 토문강 이동 영토는 송화강 이남 삼강평야까지 포함하는 것" -통감부 내에서의 알력싸움과 조선인들의 수탈 -1881년 청나라가 일리조약을 체결한 이후: "조선으로부터 간도를 돌려받고, 감히 만주족의 성지에 설치된 통감부도 뿌리뽑아야 한다."라는 주장이 대두됨. ->이러한 것은 1885년 '조청전쟁(조일청 전쟁)'을 유발할 수 있다.
- 추가적으로, 조청전쟁 이후 삼강평야를 영토로 편입하려 할 경우, "만저우리-치치하얼-하얼빈-쑤이핀허" 라인으로 동청철도(시베리아 횡단철도 지선)을 만들려는 러시아와 충돌하게 됨 -> 삼강평야와 항구적 요충지인 요동 최동단을 두고 러시아의 조청전쟁 전후협상 개입이 이루어질 수 있다(삼국간섭 포지션)
동시베리아 전쟁
동시베리아 전쟁 凍西伯利亞戰爭 한국어: 한소전쟁, 북방전선, 동시베리아 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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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1940년 3월 30일 ~ 1945년 6월 16일 | |
장소 | 아시아 · 시베리아 · 북태평양 및 사할린 해역 | |
원인 | 2차 동아대전으로 대표되는 대한제국의 팽창정책으로 인한 국제적인 제제와 공산주의에 대한 경계심이 합쳐진 대한제국의 소련 침공 | |
교전국 | 연합국 | 추축국 |
└ |
└ └ └ └ └ └ └ └ | |
지원국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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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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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 ||
피해 | 536,743명 전사 및 실종 1,240,000명 부상 민간인 16,000명 사망 9,780~12,031명 전사 및 실종 24,425명 부상 9,780~12,031명 전사 및 실종 24,425명 부상 민간인 20,000~30,000명 사망 9,780~12,031명 전사 및 실종 민간인 약 1,700만 명 사망 |
680,397명 전사 및 실종 1,304,200 부상 민간인 약 550,000 ~ 1,000,000명 사망 중한전선 제외 총 1,485,397명 전사 및 실종 |
결과 | 연합국의 승리 | |
영향 | 연합군에 의한 대한제국 강제 해체 소련의 초강대국 등극 아시아 북부전선 종결 만주를 비롯한 여러 민족의 독립과 점령으로 인한 러시아 차르국 0호 체제의 종식 |
옌시산노스
옌시산 관련 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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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촨 창업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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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제4대 행정원장 옌시산 | ||||||||||||||||||||||||||||||||
출생 | 1883년 10월 8일 | |||||||||||||||||||||||||||||||
(現 ![]() | ||||||||||||||||||||||||||||||||
사망 | 1960년 5월 23일 (향년 76세) | |||||||||||||||||||||||||||||||
![]() | ||||||||||||||||||||||||||||||||
국적 | → → ![]() | |||||||||||||||||||||||||||||||
재임 기간 | 제 1대 베이핑 국민정부 주석 | |||||||||||||||||||||||||||||||
1930년 9월 9일 ~ 1930년 11월 4일 | ||||||||||||||||||||||||||||||||
제 4대 행정원장 | ||||||||||||||||||||||||||||||||
1949년 6월 3일 ~ 1950년 3월 7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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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순나라의 혁명가,중화민국의 군벌, 군인, 정치가, 기업인.
장장 50년 가까이 중화민국 산시성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인사로 군림했으며, 오늘날 산시성에 본사를 둔 염계재벌의 창업주도 옌시산이다. 이 탓에 그에게 붙은 별명이 바로 산서의 토황제. 군벌 시절부터 당대 중국의 여러 군벌들 중에서는 드물게 경제성장, 사회개혁에 적극 힘썼기 때문에 모범 장관으로 불렸고, 정계에서 은퇴하여 재계활동에 몰두한 말년에도 막대한 이득을 벌어들이는 한편 양심적인 경영정책 덕에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후 노환으로 인해 자신의 사저인 염가대원에서 병사했다.
일본제국 총재대신
![]() 역대 대일본제국 총재대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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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파의 대부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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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초대 내각총리대신 박규수 朴珪壽|Bak Gyusu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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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07년 10월 27일 (음력 1807년, 순조 7년 9월 27일) | ||
(現 | |||
사망 | 1885년 7월 21일 (향년 78세) | ||
재임 기간 | 대조선국 영의정 | ||
1946년 1월 14일~1947년 11월 14일 | |||
초대 내각총리대신 | |||
1947년 11월 15일~1949년 8월 14일 | |||
홍문원 참의 | |||
1949년 8월 14일~1952년 2월 27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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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황국
대한국 大韓國 | Korea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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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 국장 | |||||||||||||||||||||||||||||||||||||||||||||||||||||
광명천지 光明天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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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TLD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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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코드 | ||||||||||||||||||||||||||||||||||||||||||||||||||||||
408, KOR | ||||||||||||||||||||||||||||||||||||||||||||||||||||||
국제전화 코드 | ||||||||||||||||||||||||||||||||||||||||||||||||||||||
+8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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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대한국(大韓國), 통칭 대한(大韓), 한국(韓國)은 동아시아의 입헌군주국이다. 북쪽으로는 중화민국과 러시아, 남쪽 해양으로는 일본과 인접해 있으며, 동쪽으로는 청해와도 인접하는 대한반도에 위치해 있다. 인구는 약 9천만명으로 세계 18위에 달하며, 국토 면적에 비해 인구가 많은 점, 산지 면적이 국토의 70퍼센트를 차지하는 점 탓에 인구 밀도가 높은 편이다. 특히 한성부를 중심으로 한 수도권은 인구의 약 40%가 몰려있는 세계 최대의 대도시권 중 하나다.
대한국은 정치적으로는 양원제 의원내각제와 입헌군주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대한국 헌법 1조에 의거하여 대황제를 한국인의 정신적인 군주로서 상징적인 국가원수로 하되, 실권은 정부수반인 내각리대신에게 있는 정치 제도를 정비하고 있다. 의결기관인 국회는 크게 비례대표제를 통해 의원을 선출하는 참의원(상원)과 국민의 직접 선거를 통해 선출된 민의원(하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평화의 희구에 대한 조항이 헌법에 존재하는 관계로, 정식 군대가 아닌 경비사라는 준군사조직을 통해서만 기본적인 경비권을 행사할 수 있다.
1871년 개항 이후 다사다난한 근대사를 대한제국 시대동안 보냈으며, 특히 1940년대부터 통감부가 설치된 이래 일본의 국권침탈이 심각해지자 1944년 내전을 통해 일본의 세력을 축출한 뒤 신속히 연합국에게 항복했다. 전후 대한반도는 연합군의 점령을 받았고, 국권 회복 이후 미국의 대(對) 아시아 정책의 일환으로 유엔의 지원을 받았다. 박정희 내각 시기 향촌진흥운동등 고도의 발전을 거듭한 한편 마셜 플랜의 지원하에 막강한 경제성장을 이룩하였으며,
대한국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선진국으로 알려져 있고 또한 지역강대국이다.한국 원은 대한국의 높은 경제 수준과 안전성, 거대한 자산 규모 덕에 안전자산으로 평가받기도 하는 신뢰성이 높은 통화이며, 이 때문에 원화는 미국 달러, 유로, 엔화, 위안, 영국 파운드와 함께 무역통화로 꼽힌다. 대한의 GDP는 프랑스에 이은 세계 8위이며, 금 보유고 세계 5위, 주식시장 규모 세계 7위, 대외순자산 규모 세계 3위 및 국제통화기금(IMF) 투표권이 세계5위를 차지하는 등 수준높은 경제력을 자랑한다. 비서양권 국가 중 일본과 더불어 유일한 G7 회원국이기도 하다. 광복 대한제국 국기.svg
- ↑ 해당 협상을 통해 조정은 프랑스의 목적을 확인하였고, 거부 시 한양까지 프랑스 해군이 올라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음.
- ↑ 당시 북학파 및 서양 사정을 알고 있던 관료 집단들이 주도하였음.
- ↑ 다만 장동 김문을 완벽하게 축출하진 못하였으며, 책임을 물어 정계에서의 영향력을 극도로 축소시키는 방향에 가까웠음. 이 탓에 잔존한 세력은 이후 척화파를 내세워 조정과의 대립구도를 이루게 됨.
- ↑ 가이징거 제독[1]
- ↑ 다만 이 시기까진 기술에 대한 회의적인 입장을 보이는 파벌도 존재한 탓에, 척화파 내의 파벌균형이 이루어진 형태라 볼 수 있음.
- ↑ 괴물같은 배가 입항했다거나, 포성 한번에 강화도 인근이 전부 불바다가 되어 염라국인나 다를 게 없었다는 등의 내용.
- ↑ 교린사 용어 유래[2]
- ↑ 다만 아직까지 서양의 제도를 전면 도입하자는 정도는 아니였으며, 정보를 확보하여 대응을 준비하는 것에 가까웠음.
- ↑ 양란 이후 기술과 재정이 부족했던 만큼 주로 일부 서양식 무기의 도입, 재례기술의 재정비 정도로 조치가 이루어짐.
- ↑ 수장은 해당 기관의 총재관인 영의정이 담당하며, 좌의정과 우의정이 그를 보좌하며 사실상의 실권을 쥐는 역할.
- ↑ 난신적자들의 공화정이 폐지되고 제정이 바로 세워지면서 국가의 환란이 종식되었다는 입장
- ↑ 읻르의 주장이 모두 일리가 있는 말이였기에 헌종도 한부로 논쟁을 중단시키는 것이 불가능했으며, 당시 두 번의 환국 이후 국왕에 대한 공포가 신하들 사이에 퍼지고, 일부는 경외감을 보인지라 이 논쟁을 힘으로 멈출 시 상당한 파장이 예상되는 상황이였음.
- ↑ 이 시기 요령통감부는 말이 청나라와의 공치지역이지 사실상 조선의 영토였으며, 하물며 만주족의 고토인 요동반도로의 인구유출까지 벌어지기 시갇하면서 조청관계는 주기적으로 험악해지고 있었음.
- ↑ 이 파견으로 인해 에도 막부는 조선이 양이에게 입조한 와중에도 중국이 아닌 우리와의 우호를 강화시키려 왔다며 내부에서 선전여론을 주도하였으나, 이에 질세라 존황양이파도 조선처럼 빠르게 개화하지 않으면 국체를 온전히 보존할 수 없다고 주장함.
- ↑ 지방에서의 재판을 담당
- ↑ 종친들의 범죄를 담당
- ↑ 개항장에서의 재판을 담당
- ↑ 척화파는 한편으론 정일론과 북벌론을 내세워 한시라도 빨리 대외팽창을 해야 한다는 논지를 내세웠으며, 이 탓에 몇몇 지역에선 백성들의 지지를 받기도 함. 다만 이것을 제외하면 논리적 기반이 상당히 약하고, 이환의 정통성에 미치지 못한다는 문제가 있었음.
- ↑ 이는 척화파가 벌인 짓으로, 실질적인 복수를 노렸다기 보단 분풀이형 복수에 가까운 양상을 띄었음
- ↑ 서부전선의 당사국이기도 했던 만큼 패망 이전까지 지원을 유지했다.
- ↑ 전쟁 초반에는 일소불가침조약에 의거하여 직접적인 지원을 하지는 않았으나, 1942년부터 북태평양 일대에서 대한제국 해군을 끌어들일 목적으로서 일본령 코리히치(캄차카 반도)에 주둔한 일본군을 중심으로 마가단에서의 극동합작을 통한 지원을 유치.
- ↑ 2024년 기준
- ↑ 8.65점
- ↑ 영어로는 House (of) Y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