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암 (아침해의 원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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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해의 원유관
아침해의 원유관은 임진왜란 축소로 인해 뒤바뀐 한국의 근현대사를 다룬 세계관입니다.
청화대에 이화문이 꽂혀있는 이 세계의 국가, 사회, 정치 및 문화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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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제 22,23, 24대 내각총리대신
대한제국 제국호국경 겸 구국자
김창암
金昌巖 | Kim Changam
출생 1876년 8월 29일
대한국 황해도 해주목 백운방 텃골
사망 1945년 10월 3일
대한국 한성부 파고다공원
국적 대한제국 대한 공화국 대한국
최종 당적 대한호국회
재임 기간 1931년 7월 28일 ~ 1944년 12월 12일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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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김순영 곽낙원
배우자 최여옥, 최준례
자녀 슬하 2남 3녀
학력 고등학교 졸업
병역 대한제국군 (아침해의 원유관) 육군 만기전역
종교 개신교
신체 180cm
연하(蓮下), 창암(昌巖), 창수(昌洙)
백범(白凡)
소속 정당 대한호국회

개요

대한제국의 정치인, 군인, 호국경, 독재자 겸 사상가.

아돌프 히틀러, 도조 히데키, 베니토 무솔리니와 함께 추축국 대표하는 인물이자, 그의 호를 따라 한국에서 '하얀 호랑이'로 불리기도 했던 인물이다.

1931년부터 1944년까지 총 13년동안 한국의 정권을 잡고 있었으며, 첫 임기와 두번째 임기가 끝난 이후엔 아예 총리직을 폐직하고 새로운 직책을 만들어 전시체제를 명분으로 그 자리에 앉았다. 짧게나마, 죽기 전까지 1년 간 일본 제국이 지원했던 대한 공화국 정부의 대막리지 또한 겸임했었고, 이후 파고다 공원에서 총살됬다.

위의 이력과는 별개로 현대 한국 사회에서 '민족주의'와 '반공주의'가 극에 당했을 당시의 시기를 상징하는 인물인 것은 확실하다. 악명과 이름이 동시에 알려진 유명 정치인이자 업적에 비해 허무한 죽음, 한국 민족주의의 총본산이라 불릴 만한 신천지 계획을 위해서 추축국 가담을 지도하고, 소련과의 전쟁도 불사르지 않은 점 때문에 이러한 이미지는 확고하다.

생애

평범한 어린시절, 그리고 교사생활

1876년 8월 29일 대한국 황해도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김순영, 모친은 곽낙원. 방계 조상 김자점 때부터 몇 대가 지나도록 숨어지내야 했던 아픈 과거가 있다. 인조 대의 영의정 김자점은 효종과의 갈등 끝에 북벌론을 청나라에 누설했고, 하마터면 만주로 압송될 뻔한 효종은 김자점을 처형했다. 동시에 김자점의 후원자였던 소용 조씨(인조의 후궁), 김자점의 손자이자 조귀인의 사위 김세룡 등도 함께 처형됐고, 김구의 11대조 김대충은 당시 개성으로 피신했다가 다시 해주 텃골로 낙향해 양반 신분을 숨기고 살았다. 이 때문에, 1880년대에 사족제도가 제정되고 난 이후에도 사족이 되기를 거부하고, 계속 신분을 숨긴 상태로 살아왔다.

이후 출세를 위해 계속 공부하였고 처음에는 신식교육에 잘 적응하는 듯 했으나, 한계로 인해 결국 고등학교 졸업에서 끝을 맺고 목표로 하던 한성제국대한 입성은 포기했다. 대신 이후 학교에 일시적으로 취학하여 교사를 맡기도 했으며, 그에게 수강을 받은 학생들에 따르면 꽤 엄한 교사였다고.

또한, 서양 서적에 관심이 많아 여러가지 책들을 종종 유교서적과 섞어서 읽곤 했다고 한다. 사회주의의 이념적 추구에도 어느정도 관심이 있어서, 자본론 등을 읽기도 했는데, 훗날 이 경험이 그의 사상에 영향을 끼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병역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김창암은 나라를 위해 이 전쟁에 참전할 것에 동조하며 교사직을 사퇴한 뒤, 군인이 되었다. 얼마 뒤 그는 육군 보병으로서 독일령 칭다오에 파견되었고, 이곳에서 상등병까지 진급했다. 이후, 전쟁이 끝나자 전역하여 일상으로 복귀했고, 그의 이력에 군인으로서의 명성이 추가되었다.

이후 청도 재향군인회에서 꽤나 유명해지면서 그의 이름이 한국 사회에 점차 알려졌고, 1920년대에는 군인들과 청도동지회라는 모임을 창설하는 등 꽤나 적극적인 활동을 이어나갔다. 당시 김창암은 전쟁에서의 경험담과 자신의 사상 등을 담은 책을 집필하거나 학술적인 탐구를 하면서 생계를 이어갔고, 일이 잘 풀리면서부터는 국내에서 문학적으로도 꽤 명망이 높은 인물로 거듭났다.

그러나 이 집필기간과 재향군인회와의 지속적인 모임을 가지면서 그의 사상에는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바로 파시스트적인 면모였다. 어느 순간 그는 자신이 읽은 서적에 담겨있던 내용들을 합쳐서 나름대로 독창적인 사고를 개창하였는데, 금관작전 시행 당시에 황족들이 구출되자 왕도정치의 모범을 대한이 보인 순간이라고 주장하는 등, 국수주의적인 성향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고, 이후 이 성향을 다른 방향으로 뻗쳐나가게 된다.

입당, 그리고 쿠데타

1920년대의 대한제국은 경제적으로 엄청난 호황을 맞았으나, 그와 동시에 공산주의자들의 움직임도 활발해진 상태였다. 이 움직임이 가장 활발해진것은 일본 위기와 검은 목요일로, 경제적으로 사람들이 침체되기 시작하자 마치 들불마냥 대한제국 사회에 번져나갔고, 집회를 벌이는 회수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였다.29년에 김옥균 총리대신이 사퇴하자마자 새로 임명된 총리대신은 부도로 인해 상심한 폭도에게 몇칠만에 암살당하는 등,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이 무렵,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증오심을 품은 김창암은 이를 제거할 방법을 모색하던 도중, 민족주의자 염동진에 의해 창당된 단체인 '대한백의단', 다른 말로는 '백의사'에 대해 알게 되었다. 대한 백의단은 당시 이탈리아에서 집권중인 국가 파시스트당의 영향과 한국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은 폭력적 정치조직, 그러니까 속된 말로 정치깡패 조직으로, 당원들의 회의에서 흰색의 양복 셔츠 위에 흰색의 한복을 걸치는것으로 이러한 이름으로 불리는 동시에, 그들이 이런 이름을 자처하고 있었다.

김창암이 오기 전까지만 해도, 백의단의 세력은 중규모 정도였지, 눈에 띄게 큰 수준은 아니였다. 그러나 김창암의 입당 이후부터 그의 카리스마 아래 본격전인 체계화와 조직 세분화, 그리고 이념 정립 등이 이루어졌고, 세력을 키운 이후에는 군 내 사조직인 북진회와도 접촉하여 세력 확장을 도모했다.

그렇게 1930년, 이제 때가 되었다고 판단한 김창암은 백의단 부단장인 염동진, 북진회의 수장인 이범석과 접촉하여 '애국활동'을 도모하기로 결의, 본격적인 쿠데타 계획인 한성진군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만인지상이 되다

한성진군의 끝은, 결국 겁에 질린 성덕제가 우선 더 나은 선택지가 없다고 판단하여 그들을 구국자로 임명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처음에 이들은 전면적으로 자신들이 정치에 나가지는 않는 방식으로 정권을 뒤엎는 쿠데타가 아니라는 명분을 만든 뒤, 얼마뒤 공식적으로 의회에 입당, '대한호국회'로 명칭을 바꾸고, 기존의 백의단은 무력조직으로 개편되었다.

김창암은 전쟁을 통한 영토 확장, 각 계급의 연대를 통한 경제발전, 국민들의 생활수준 향상과 반공 등을 주요 이념으로서 주장했고, 이는 빠른 속도로 여러 계층에서 인기를 얻을 수 있게 하는 동력원이 되었다. 결국 기존 내각인 김희선 내각이 직무태만과 비리를 이유로 총사퇴하게 되었고, 아예 한성진군 당시처럼 '부패정치인'으로 낙인찍혀 모든 것을 뻣기거나 한성 내에서 또 다른 난장판을 내선 안된다고 판단한 정치인들은, 결국 김창암의 위세에 굴복하여 최고원로인 김옥균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그를 총리대신으로서 승인, 그렇게 1931년 9월 김창암 내각이 출범하게 되었다.

처음에 이 내각의 출범이 일부 인사들의 분노와 부정투표라는 말이 돌자 김창암은 아예 총리를 처음부터 다시 선출해볼 것을 제시, 얼마 뒤 총리대신에서 물러나고, 겁에 질린 중추원 윈로들을 압박해 아주 쉽게 재임명되면서 반발하는 인사들을 침묵시켰다. 그의 이러한 정치적 퍼포먼스로 인해 반발 인사들은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고, 그렇게 김창암은 짧은 몇달간의 제 22대 총리대신으로서의 임기를 끝내고, 다시 23대 총리대신으로 임명되어 자신의 이상을 계속하려고 하였다.

출범 이후부터, 김창암 내각은 본격적으로 전 국가의 파쇼화를 시도했다. 대표적 예시로 대규모 인프라 건설 등을 통한 국가적 단결을 도모한 5개년 계획 등이 이 당시에 실행되었고, 계획경제적인 측면을 통해 노동자, 기업들의 소득을 늘리는 등 파시즘 국가의 면모가 경제적으로 먼저 보이기 시작했으며, 군사적으로도 몇년 뒤 몽골 출병을 실행하는 등 적극적인 확장성향을 보였다.

그의 계획

폭주, 그리고 최후

평가

의의와 영향력

기타

전 세계에서 재임한 추축국의 지도자들 중 가장 연장자였다.

평상시 군복 정장이나 백색 두루마기를 주로 입고 다닌 바람에, 제 2차 동아시아 전쟁 당시 대한제국과 전면전을 벌였던 소련군이 만든 한국인의 이미지가 안경을 쓰고 흰 도포와 군모를 착용한 파시스트로 각인되는데 영향을 줬다. 이는 미국에도 어느정도 영향을 줘서, 당시에 나온 선전만화들을 보면 비슷한 한국인 캐릭터 묘사들을 볼 수 있다.

어록

오늘은 우리 민족이 해동을 일통하여, 우리의 과거를 다시 한 번 찾아가는 그런 시기를 맞았습니다. (중략) 모두 기립합시다. 대한제국만세! 대황제폐하 만세!
동시베리아 전쟁 개전 이후 광화문 광장에서
나는 나의 조국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내가 인생의 암흑기에 마음 아팠으니, 내 나라가 또다른 암흑기에 마음 아파하는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다시 한 번 대한 역사 반만년이 지나도 배 곯는 이 없을 정도로 부강해야 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세계에서 손에 꼽아 그 국위가 동서남북에서 빛나고, 삼척동자에게 물어봐도 대답을 할 수 있는 위대한 나라일 필요가 있다.
백범일지, 나의 조국에 대한 바람 中
미군의 지원을 받는 그들은 경찰을 시켜 사회를 미영과 빨갱이, 지나놈들의 퇴폐사상으로 다스리고, 조국의 업적을 유린하고 있다. 내 나이 68세, 이제 치욕스럽게 무릎을 꿇을것이냐? 더구나 위정자들 아래에서 조국을 버릴 것이냐? 나는 강건한 조국을 건설하려다 저 멀리 외지의 대마도에서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위하여 소위 대한국 신정부에 협력하지 않겠다.
팔천만 동포에게 읍고함 中

대중매체에서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