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묘개화 1867년 5월 18일 내외칭제의 대호령 및 대계림제국 출범 1868년 1월 15일 폐주구도(藩州具道)령 반포 1870년 6월 4일 대계림제국 국헌 시행 1890년 7월 17일 연합군의 점령 1945년 9월 3일 계림국 국헌 공표 1946년 10월 3일 계림국 국헌 시행 및 계림국 출범 1947년 8월 15일 국권회복 1952년 4월 18일
한성 시대에 계림을 통치했던 세정으로, 계림사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세정인 한편, 최후의 무신정권이다. 이 시대를 호칭할 때에는 주로 당대 중심지였던 한성의 이름을 따서 한성세정으로 부르지만, 당시 덕풍왕이자 병마도원수였던 인물들의 성씨인 덕씨를 따 덕문세정이라고도 부른다.
실질적으로 세정이 개막된 시기는 여러 관직들을 겸직하고 있던 진훤이 신라 조정에 입조하여 병마도원수에 임명된 시기인 937년이지만, 그 이전부터 896년에 일어난 적고적의 난을 진압한 견훤의 권세는 여전히 커지고 있었기에, 실질적으론 그가 신라 서면도통에 임명된 뒤 태봉을 평정한 918년부터를 실질적인 진씨세정의 시작으로 본다.
계림사 역사상 최초의 세정인 동시에 국호의 개칭, 금성 금씨 종묘신궁의 종주의 명칭을 성황으로 하는 한편 병마도원수의 종씨들이 대대로 왕작을 하사받도록 하는 등, 훗날 이어질 계림의 문화적 제도들을 정비하였으나 말대에 이르러 고려왕을 겸직한 병마도원수들 섭관청정사들의 종횡이 이어지던 중, 결국 또 다른 유력가인 개성 왕씨 출신의 섭관청정사이자 무인인 왕희가 정변을 통해 임금에게 왕작을 하사받아 고려왕으로서 등극한 뒤, 새로운 세정을 개막하면서 1097년에 멸망했다.
↑대외적으로는 병마도원수 집안이 대대로 임금에게 하사받은 왕작을 근거삼아 계림의 국왕(國王)을 자처했다. 다만 세정 말기에 이르러 본가의 종통 단절과 병약한 도원수의 취임 등이 이어졌으며, 이 탓에 도원수를 보좌하여 정무를 담당하는 체찰사들의 권력이 커지는 현상이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