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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튿날인 11월 6일, 난주현<ref>현 당산시 난주현</ref>인근에서 차를 타고있던 회선왕 일행 앞에 괴한이 나타나 총기를 난사했고 회선왕 및 측근 3명, 차를 몰고 있던 운전수등 5명이 그 자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괴한은 즉시 현장을 떠났고 그 정체는 현재까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회선왕의 유해는 사건 발생 약 4시간 뒤 인근 마을 사람들이 신고한 경무관이 도착하고 나서야 수습되었으며 살아남은 측근 한명의 확인으로 사건을 증언이라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튿날인 11월 6일, 난주현<ref>현 당산시 난주현</ref>인근에서 차를 타고있던 회선왕 일행 앞에 괴한이 나타나 총기를 난사했고 회선왕 및 측근 3명, 차를 몰고 있던 운전수등 5명이 그 자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괴한은 즉시 현장을 떠났고 그 정체는 현재까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회선왕의 유해는 사건 발생 약 4시간 뒤 인근 마을 사람들이 신고한 경무관이 도착하고 나서야 수습되었으며 살아남은 측근 한명의 확인으로 사건을 증언이라도 할 수 있게 되었다.


11월 15일, 심양으로 유해가 이송되어 장례가 치러졌고 시호를 회선(懷宣), 능호를 후평(厚平)으로 올렸다. 만왕위는 동생 [[김성|현문왕]]이 이었다.
11월 15일, 심양으로 유해가 이송되어 장례가 치러졌고 시호를 회선(懷宣), 능호를 후평(厚平)으로 올렸다. 이후 만왕위는 동생 [[김성|현문왕]]이 이었다. 능묘인 후평릉은 아버지 [[광서제|공종 경황제]]가 묻힌 숭릉 옆에 위치해있다.  


= 누가 회선왕을 시해했나? =
= 누가 회선왕을 시해했나? =
회선왕 시해 배후에는 크게 한국정부설, 반복벽파설, 옹청설, 일본설이 대두되고 있다.
회선왕 시해 배후에는 크게 한국정부설, 반복벽파설, 옹청설, 일본설이 대두되고 있다.

2024년 2월 9일 (금) 02:44 판


동방의 불란서 세계관

만옹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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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대 만주왕
회선왕 | 懷宣王
출생 1908년 10월 3일
청나라 직예성 베이징 자금성 내전
사망 1939년 11월 6일 (31세)
대연국 당산시
능묘 후평릉 (厚平陵)
재위 만주왕
1930년 10월 28일 ~ 1939년 11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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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제2대 대한국 만왕으로, 시호는 회선왕(懷宣王). 청의 말대 황제인 공종 경황제 성고왕의 장남이며, 정식으로 책봉되지는 않았지만 실질적인 청의 마지막 황태자였다.

아버지가 한국에 의해 강제로 퇴위한 것에 대해 나중에서야 깊은 반감을 갖고 있었으며 중국 본토의 복벽세력 군벌들과 접촉하여 청 황제로서의 복위를 꿈꾸었다가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 비운의 왕이기도 하다.

생애

회선왕 탄생 직후에 청은 이미 멸망 직전이었다. 청은 의화단의 난 이후 사실상 열강에게 사분오열 당했고 조정은 한국의 꼭두각시가 되어있었다. 여러 어려움 때문에 한국은 청을 통해 중국 대륙 전체를 간접통치하려는 전략을 포기, 황하 이북과 산동 일대를 직접통치하기로 결정하여 청을 멸망시키기로 했다. 결국 한국의 압박에 1909년 광서제는 광종에게 양위하였고 청은 멸망했다. 회선왕을 비롯한 그의 일가는 납치되듯이 자금성에서 심양에 있는 인경궁으로 이주했다.

한국의 우대로 어린시절에는 평안하게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측 경호로 위장한 감시역은 어떻게든 만왕실 일가를 철저히 감시하고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했지만 회선왕의 초년기인 1910년에서 1918년 사이의 관련 기록들은 소실되어 다른 기록을 통해 간접적으로 알아낼 수밖에 없는데, 어릴적부터 활쏘기에 능하고 영민했던 것으로 보인다. 12.10 운동 시기에는 아버지 광서제에게 북경으로 돌아가자고 며칠동안 칭얼거렸다고 한다.

1920년, 12살의 나이에 만왕세자로 봉해졌으며 광종실록에는 자라날수록 더욱 진중해지고 기품이 날로 더해가 제왕의 풍모를 갖추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미 이때부터 황제 복위를 꿈꾸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어릴적부터 속을 감추는데 능했던 것인지 관련된 발언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그는 대한한림원 중등부에 입학하였는데 영어와 독일어에 대단한 재능을 보였고 수학과 스포츠에도 능한 만능이었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모든 과목에서 상당히 좋은 성적을 받았다.

1938년 아시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회선왕은 만주족의 참전을 독려하던 어머니와 아내 효선왕후 및 몇몇 귀족들과 크게 갈등했다. 회선왕에게는 자국을 멸망시킨 세력에게 협조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일본은 한국의 내부 갈등을 부추기기 위해 회선왕에게 접근했지만 옹청이 일본과 적대한 이상 그에게도 일본과 협조할 명분 또한 없었기에 큰 성과는 없었다. 한국내 만주족 사회에서 회선왕의 입지가 점차 좁아지자 그는 최후의 수단으로 삼촌이 지도자로 있던 옹청으로의 탈출을 결심한다. 실제로 헌무제는 제위에 오르라는 부하들의 만류도 뿌리치고 30년 가까이 감국섭정왕(監國攝政王)으로 있으면서 이복형과 그의 자녀인 회선왕을 반드시 복위시키겠다는 뜻을 공공연하게 내세우고 있었다.

회선왕은 측근을 이용해 북경에서 옹청측과 계속 접선하였고 서안으로 건너가 옹청 황제로 즉위할 채비를 했다. 1939년 10월 30일, 회선왕은 느슨해진 감시를 피해 측근들과 함께 심양을 떠나 북경으로 가는 열차를 탔다. 당시 한국 정부는 전쟁때문에 회선왕을 제대로 감시하고 있지 않았는데 그가 잠재적으로 일본과 협조할 가능성을 매우 낮게 보고 있었던데다 그의 모후인 효목경황후가 전쟁 수행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탑승한 열차는 어째서인지 계속 고장나 도착은 차일피일 미뤄졌고 11월 5일 난하[1] 인근에서 끝내 멈춰섰다. 회선왕 일행은 결국 차를 대절해 북경으로 향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튿날인 11월 6일, 난주현[2]인근에서 차를 타고있던 회선왕 일행 앞에 괴한이 나타나 총기를 난사했고 회선왕 및 측근 3명, 차를 몰고 있던 운전수등 5명이 그 자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괴한은 즉시 현장을 떠났고 그 정체는 현재까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회선왕의 유해는 사건 발생 약 4시간 뒤 인근 마을 사람들이 신고한 경무관이 도착하고 나서야 수습되었으며 살아남은 측근 한명의 확인으로 사건을 증언이라도 할 수 있게 되었다.

11월 15일, 심양으로 유해가 이송되어 장례가 치러졌고 시호를 회선(懷宣), 능호를 후평(厚平)으로 올렸다. 이후 만왕위는 동생 현문왕이 이었다. 능묘인 후평릉은 아버지 공종 경황제가 묻힌 숭릉 옆에 위치해있다.

누가 회선왕을 시해했나?

회선왕 시해 배후에는 크게 한국정부설, 반복벽파설, 옹청설, 일본설이 대두되고 있다.

  1. 진황도와 당산 사이를 가르는 강
  2. 현 당산시 난주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