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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는 140년 3월 헌법 개정을 통해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의원내각제로 개편하였으나 일부 우익 인사들이 반발하여 임시정부에서 이탈하는 등 약간의 갈등이 있었지만 144년 [[민중해방결사단]], [[전국노동자정치해방협의회]], [[조선사회당]], [[사회민주당 (대한민국 임시정부, 어나더어스)|사회민주당]] 등의 진보/사회주의 정당, [[자유당 (14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어나더어스)|자유당]], [[조선인민당 (145년)|조선인민당]] 등의 중도/보수정당들이 [[전국대한인공화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여 본격적인 정부 수립을 준비하였으며 동시에 임시정부는 해산된다.
임시정부는 140년 3월 헌법 개정을 통해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의원내각제로 개편하였으나 일부 우익 인사들이 반발하여 임시정부에서 이탈하는 등 약간의 갈등이 있었지만 144년 [[민중해방결사단]], [[전국노동자정치해방협의회]], [[조선사회당]], [[사회민주당 (대한민국 임시정부, 어나더어스)|사회민주당]] 등의 진보/사회주의 정당, [[자유당 (14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어나더어스)|자유당]], [[조선인민당 (145년)|조선인민당]] 등의 중도/보수정당들이 [[전국대한인공화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여 본격적인 정부 수립을 준비하였으며 동시에 임시정부는 해산된다.


반면 유상민의 전 측근이었던 [[신익규]]를 중심으로 하는 우익 정치단체인 [[대한인민국립촉성민주협의체]]가 유상민의 좌경화, 공준위에 반발하면서 [[대한민주당 (144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어나더어스)|대한민주당]]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보수파|보수파]]를 결성하면서 공준위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국민들은 보수파보다 공준위를 더 선호하면서 영향이 미미해졌고, 결국 145년 7월 임정 헌법을 개정한 [[대한민국 헌법 (어나더어스)|헌법]] 제정을 통해 이원집정부제로 전환, 정부 수립을 선언하였다. 현행 헌법 전문에는 이원집정부제를 기반으로 한 민주공화국으로 서술되어 있으며 여기에 임시정부, 공준위의 법통을 계승한 공화국이라는 문구가 삽입되어 있다. 이후 유상민은 초대 대통령이 되고, [[강문규]]가 초대 총리가 되면서 정권을 다스리기 시작했으며 149년 8월 건강 악화로 대통령직을 사퇴했으나 [[149년 후반기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후반기에 열린 대선]]에서 장평구 무소속 후보가 당선이 되었다. 이후 유 전 대통령은 [[154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8대 대선]]에서 다시 출마하여 당선되었지만 국총협이 유상민을 격하게 지지함에 따라 선거구 곳곳에서 표 날치기, 무효표 무더기 사태가 터지면서 부정선거 의혹이 제기되었으며, 결국 국민들의 반발로 [[대한민국 3월 혁명|3월 혁명]]으로 물러나게 된다. 이후 조경윤 전 임정 총리가 대통령을 맡아 유상민의 남은 임기를 채우려 했지만 조선공산당의 파생 단체와 국총협 간의 좌우 정치테러를 막지 못했고 결국 내각 인사 일부의 압박으로 사퇴하게 된다.
반면 유상민의 전 측근이었던 [[신익규]]를 중심으로 하는 우익 정치단체인 [[대한인민국립촉성민주협의체]]가 유상민의 좌경화, 공준위에 반발하면서 [[대한민주당 (144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어나더어스)|대한민주당]]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보수파|보수파]]를 결성하면서 공준위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국민들은 보수파보다 공준위를 더 선호하면서 영향이 미미해졌고, 결국 145년 7월 임정 헌법을 개정한 [[대한민국 헌법 (어나더어스)|헌법]] 제정을 통해 이원집정부제로 전환, 정부 수립을 선언하였다. 현행 헌법 전문에는 이원집정부제를 기반으로 한 민주공화국으로 서술되어 있으며 여기에 임시정부, 공준위의 법통을 계승한 공화국이라는 문구가 삽입되어 있다. 이후 유상민은 초대 대통령이 되고, [[강문규]]가 초대 총리가 되면서 정권을 다스리기 시작했으며 149년 8월 건강 악화로 대통령직을 사퇴했으나 [[149년 후반기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후반기에 열린 대선]]에서 장평구 무소속 후보가 당선이 되었다. 이후 유 전 대통령은 [[154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8대 대선]]에서 다시 출마하여 당선되었지만 국총협이 유상민을 격하게 지지함에 따라 선거구 곳곳에서 표 날치기, 무효표 무더기 사태가 터지면서 부정선거 의혹이 제기되었으며, 결국 국민들의 반발로 [[대한민국 3월 혁명|3월 혁명]]으로 물러나게 된다. 이후 조경윤 전 임정 총리가 대통령을 맡아 유상민의 남은 임기를 채우려 했지만 조선공산당의 파생 단체와 국총협 간의 좌우 정치테러를 막지 못했고 일부 내각 인사의 압박으로 사퇴하게 된다.


[[159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5대 대선]]에서 [[박경열]] 대통령이 집권하자 유례없는 독재를 시작한다. 박경열은 민주당계 정당들을 반국가단체로 간주하고 정치 활동과 선거 참여를 금지시켰고, 선거마다 집권당인 [[유신당 (대한민국, 어나더어스)|유신당]]을 지지해달라는 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져 일부 국민들의 불안감이 커졌다. 문화예술계에서는 큰 타격을 입었는데, 정부에 비판적인 문학, 출판, 방송, 언론 등을 탄압하였고, 163년 [[제1차 언론통폐합]]을 강행한다. 이후 우리나라의 공영방송인 [[한국공영방송공사]]와 민영방송으로 불렸던 [[명화방송]]도 여기서 등장하였다. 또 정부는 문예계에 강력한 정부 홍보를 강요하면서 정부 홍보를 진행하기도 하였다. 한편 박경열은 경제 활성화를 위해 [[대한민국 신경제계획|신경제계획]]을 추진하기 시작했고, 170년 3월
[[159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5대 대선]]에서 [[박경열]] 대통령이 집권하자 유례없는 독재를 시작한다. 박경열은 민주당계 정당들을 반국가단체로 간주하고 정치 활동과 선거 참여를 금지시켰고, 선거마다 집권당인 [[유신당 (대한민국, 어나더어스)|유신당]]을 지지해달라는 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져 일부 국민들의 불안감이 커졌다. 문화예술계에서는 큰 타격을 입었는데, 정부에 비판적인 문학, 출판, 방송, 언론 등을 탄압하였고, 163년 [[제1차 언론통폐합]]을 강행한다. 이후 우리나라의 공영방송인 [[한국공영방송공사]]와 민영방송인 [[명화방송]]도 여기서 등장하였다. 한편 박경열은 경제 활성화를 위해 [[대한민국 신경제계획|신경제계획]]을 추진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국민소득은 3만 달러를 넘었고, 국민총생산은 3,000달러를 기록했으며 경제성장률은 16.9%로 증가, 실업률은 0.3%로 나타나 경제대국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168년 3선 개헌을 통과시켰고, 172년 국회를 해산시켜 [[제10대 대한민국 국회의원 선거|10대 총선]]을 무효화시키고, 총 650석의 정원으로 구성되어 있고 625석을 각각 지역구:비례로 나뉜 [[대한민국 국가평의회|국평]]을 형성시킨다. 박경열 정권 시절 재야, 학생 세력, 노동운동계, 문화예술계 등 각지에서 민주화 운동을 전개했으나 정부의 탄압을 받았으며 최대 노동조합이었던

2020년 7월 29일 (수) 12:42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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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Republic of Korea
大韓民國
국기 국장
상징
국가 번영을 위하여
국목
소나무
국화
무궁화
위치
width: calc(100% + 5px)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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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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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한경특별시
최대 도시
부성시
면적
1,967,185㎢
접경국
중화북양민주국, 앵본
인문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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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총 인구
46,193,049명
밀도
23.48명/km2 | 세계 28위
인종
한국인 97%, 기타 민족 및 외국인 3%
출산율
15.49명
기대 수명
94세
공용어
한국어
지역어
사투리
공용 문자
한글
종교
국교
없음 (정교분리)
분포
무종교 94.8%, 그리스도교회 3.1%, 기타 0.6%
군대
대한민국 국군
하위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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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역지방자치단체
12개광역시·특별시·도
기초지방자치단체
445개시·군·구
광역특별자치단체
4개특별구·자치구·특별자치구
비자치단체
6,503개읍·면·리
정치
[ 펼치기 · 접기 ]
정치 체제
민주공화제, 이원집정부제, 단일 국가, 양원제, 다당제
민주주의 지수
57개국 중 16위 (완전 민주주의)
국가 원수 (대통령)
권남국
정부
요인
총리
문영준
민의원
의장
정인철
참의원
의장
민경석
헌법재판소장
박영남
대법원장
황정열
여당
연립 여당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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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체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GDP
(PPP)
전체 GDP
$6억 9,918만
1인당 GDP
$97,615
GDP
(명목)
전체 GDP
$9억 4,431만
1인당 GDP
$86,924
무역
수입
$674억
수출
$725억
신용 등급
이코노미스 A+2
화폐
공식 화폐
대한민국 원(현실 대한민국 혼용)
ISO 4217
KRW
단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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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연호
이세계년
시간대
UTC + 09:00 (한국 표준시)
도량형
SI 단위
ccTLD
.kr
국가 코드
KOR, KR
전화 코드
+82


대한민국(大韓民國, 영어: Republic of Korea 리퍼블릭 오브 코리아[*], Korea)는 유로아스피아동아스피아에 위치한 민주공화국이다. 서쪽으로는 중화민주북양국이, 동쪽은 한앵강을 사이에 두고 앵본이 있으며 북쪽에는 루스키아 제국이 있고 남쪽에는 남앵본과 맞닿아 있다. 수도는 한경특별시이며 국기는 태극양괘기, 국가는 번영을 위하여, 국화는 무궁화이다. 공용어는 한국어로 국내에선 간단히 한국(韓國)이라고 부른다. 연호는 이세계년을 공용으로 사용한다.

현실 한국과는 달리 경제발전, 사회통합과 국가성장률이 매우 뛰어나 아스피아 내에선 앵본과 함께 모범국으로 평가되며 유엔에이 안전보장이사회 비상임이사국으로 유엔에이, 아스피아 경제 연합, 어나더어스 국제평화조약기구, 유로아스피아 무역 기구에 가입되어 있고 현재 경제 규모에서 15위를 기록하고 있다. 또 국경 없는 기자회가 집계하는 어나더어스 내 언론 자유 지수에서 자유도가 높으며 OECD 집계 자살률은 39위로 기록되고 있다.

국명

국명은 현실 한국과 똑같이 대한민국이라고 칭한다. 대한(大韓)이라는 국호도 이와 비슷하다. 과거 공동체 사회인 한조족(韓朝族)이 국명을 정하려고 했을 때, 영종은 지하에서 발견된 세계 지도에서 조선이라는 나라를 발견했고, 이에 국명을 조선으로 하자는 의견을 통해 조선(朝鮮)이라 칭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불분명하다. 99년 청조가 즉위했을 때, 기존 명칭이 새 국명에 적합하지 않다며 조선 대신 고유 이름인 한(韓)을 사용하여 "대한제국"이라고 칭했다. 119년 대한제국이 몰락하자 임정수립연대 측은 새 헌법에 "대한민국 림시정부는 민주공화제로, 대한국 인민이 주인인 국가임을 명시한다"라고 서술하여 "대한민국"이라고 결정되었다. 하지만 임시정부 형태이기 때문에 임시정부라는 명칭을 써야만 했다. 이후 145년 7월 정부 수립을 계기로 공준위는 임시정부를 뗀 "대한민국"으로 국명을 고쳤다.

현실 대한민국에서는 혼동할 가능성이 있어 "AE한국", "AE대한민국"이라고 칭하고 있으며 해외에서도 어나더어스의 약칭인 AE를 붙여서 "AE-Korea"라고 부르고 있다. AE한국 외교부 측은 "사용하기에 적합한 이름"이라고 반응하였다. 어나더어스 역사 교과서에서도 대한민국을 AE대한민국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우 AE한국이라는 명칭과 그 나라에 대한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AE한국이 현실 한국의 속국이라며 "괴뢰조선"이라고 칭하고 있어 AE한국 외교부 측의 반발이 일어나기도 했다.

앵본, 중국의 경우에는 한국(일본어: 韓国 간코쿠[*], 중국어(중국대륙): 韓國 한궈)라고 부르며 이클리우시아 내 일부 국가에선 카이리야(Kairiya)라고 부른다. 전 세계에서는 코리아(Korea)라고 부른다.

역사

한국은 IY 11년부터를 한국사로 보고 있다. 당시 어나더어스 내 한민족들은 다른 공동체보다 영토가 큰 아스피아족 공동체의 일부였으며 19년 한조족으로 분리되면서 따로 공동체를 형성시킨다. 25년 9월 영종이 초대 왕이 되면서 조선을 건국하였으며 공동체 형식에서 왕국으로 발전하였다. 조선의 문화, 사회, 문화 등은 현실 조선에 영향을 받았고 성경부를 중앙정부로, 현재의 경인도의 소재지인 선경시(옛 이름 경인부)를 행정지역으로 삼았다. 초기 조선에는 안정적인 국가발전을 이끌었고 동양 문학 등의 전파로 아스피아의 문화에도 동양 문화가 널리 발달하게 된다. 그러나 군조, 영락군, 궁종 집권기에서 30년 간 혼란과 부흥의 시대를 겪으면서 백성들의 피로감과 불만은 이어져만 갔으며 영락군 시대에서 등장한 영인당서인당을 몰아내고 거대 정당으로 부상하면서 급진적인 정책을 실시하자 백성들의 반발이 커졌다. 이후 궁종 사후에도 계속 집권당이 되면서 사실상 일당 정치를 펼쳤다. 하지만 인종이 탈군주를 주장하자 내부 갈등이 커져 반인종파는 조선회의로 분열되었으며, 의회주의를 주장하는 세력들이 의회학파를 조직하면서 정치적 혼란이 이어졌고, 개화 세력들의 서양삼개론개화론을 통해 탄생한 서양개화파가 등장하면서 전국적인 개화운동을 벌였다. 89년 춘조가 집권하면서 개혁 정책에 집중하였으나 백성들의 불만은 여전하였다. 결국 반춘조 운동이 일어났고, 99년 12월 춘조가 퇴위하고 청종이 초대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청종 선언문을 발표했으며, 이 과정에서 대한제국을 수립하였다.

현실 대한제국과는 달리 황제는 유지하되 총리를 신설하고, 입법부인 의정원을 설치하면서 입헌군주제의 기틀을 닦았으며, 경진개혁을 통해 백성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켰다. 또 영나라, 앵본 입헌왕국은 물론 영어권 국가, 서양과 교류하면서 외교 열강에 들어올 수 있었다. 101년 청조의 후임인 훈종이 집권하면서 중립적 외교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고, 103년 조선공산당을 포함한 사회주의 단체들을 탄압하자 사회주의 세력들은 무장 투쟁, 봉기를 벌이기 시작했다. 107년 황종이 집권하면서 12년간 대한제국을 이끌었으나, 117년 임시정부수립연대를 중심으로한 임시정부파가 성경부에 진군하면서 2년간 황종 내각과 협상을 가졌고, 119년 4월 황종이 물러나고 유상민-조경윤 내각이 들어서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한다. 임정은 기존의 입헌군주제에서 민주공화제로 전환했는데 이러한 민주 운동은 124년 나가야마 히로나가 앵본 행정총리대신이 시도했던 나가야마 데모크라시, 131년 영나라를 무너뜨린 북양혁명에 정치적 영향을 미쳤다.

임시정부는 140년 3월 헌법 개정을 통해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의원내각제로 개편하였으나 일부 우익 인사들이 반발하여 임시정부에서 이탈하는 등 약간의 갈등이 있었지만 144년 민중해방결사단, 전국노동자정치해방협의회, 조선사회당, 사회민주당 등의 진보/사회주의 정당, 자유당, 조선인민당 등의 중도/보수정당들이 전국대한인공화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여 본격적인 정부 수립을 준비하였으며 동시에 임시정부는 해산된다.

반면 유상민의 전 측근이었던 신익규를 중심으로 하는 우익 정치단체인 대한인민국립촉성민주협의체가 유상민의 좌경화, 공준위에 반발하면서 대한민주당보수파를 결성하면서 공준위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국민들은 보수파보다 공준위를 더 선호하면서 영향이 미미해졌고, 결국 145년 7월 임정 헌법을 개정한 헌법 제정을 통해 이원집정부제로 전환, 정부 수립을 선언하였다. 현행 헌법 전문에는 이원집정부제를 기반으로 한 민주공화국으로 서술되어 있으며 여기에 임시정부, 공준위의 법통을 계승한 공화국이라는 문구가 삽입되어 있다. 이후 유상민은 초대 대통령이 되고, 강문규가 초대 총리가 되면서 정권을 다스리기 시작했으며 149년 8월 건강 악화로 대통령직을 사퇴했으나 후반기에 열린 대선에서 장평구 무소속 후보가 당선이 되었다. 이후 유 전 대통령은 8대 대선에서 다시 출마하여 당선되었지만 국총협이 유상민을 격하게 지지함에 따라 선거구 곳곳에서 표 날치기, 무효표 무더기 사태가 터지면서 부정선거 의혹이 제기되었으며, 결국 국민들의 반발로 3월 혁명으로 물러나게 된다. 이후 조경윤 전 임정 총리가 대통령을 맡아 유상민의 남은 임기를 채우려 했지만 조선공산당의 파생 단체와 국총협 간의 좌우 정치테러를 막지 못했고 일부 내각 인사의 압박으로 사퇴하게 된다.

5대 대선에서 박경열 대통령이 집권하자 유례없는 독재를 시작한다. 박경열은 민주당계 정당들을 반국가단체로 간주하고 정치 활동과 선거 참여를 금지시켰고, 선거마다 집권당인 유신당을 지지해달라는 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져 일부 국민들의 불안감이 커졌다. 문화예술계에서는 큰 타격을 입었는데, 정부에 비판적인 문학, 출판, 방송, 언론 등을 탄압하였고, 163년 제1차 언론통폐합을 강행한다. 이후 우리나라의 공영방송인 한국공영방송공사와 민영방송인 명화방송도 여기서 등장하였다. 한편 박경열은 경제 활성화를 위해 신경제계획을 추진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국민소득은 3만 달러를 넘었고, 국민총생산은 3,000달러를 기록했으며 경제성장률은 16.9%로 증가, 실업률은 0.3%로 나타나 경제대국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168년 3선 개헌을 통과시켰고, 172년 국회를 해산시켜 10대 총선을 무효화시키고, 총 650석의 정원으로 구성되어 있고 625석을 각각 지역구:비례로 나뉜 국평을 형성시킨다. 박경열 정권 시절 재야, 학생 세력, 노동운동계, 문화예술계 등 각지에서 민주화 운동을 전개했으나 정부의 탄압을 받았으며 최대 노동조합이었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