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종 (동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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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의 불란서 세계관

대한국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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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국 5대 황제
선종 의황제 | 宣宗 懿皇帝
출생 1912년 2월 16일
대한국 길림부 목단강시
사망 1978년 1월 8일 (65세)
대한국 천도부 평안궁 명정전
능묘 광릉(廣陵)
재위 대한국 황태자 겸 조선왕
1924년 5월 11일 ~ 1961년 3월 9일
대한국 황제
1961년 3월 10일 ~ 1978년 1월 8일
연호 순화(淳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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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대한국 제5대 황제. 묘호는 선종(宣宗), 시호는 의황제(懿皇帝).

어린 시절

1912년 당시 황태자였던 세조 황제와 정부(情婦) 신분이었던 정현무황후 유근숙 사이에서 태어났다. 탄생지는 세조가 유씨와 함께 전국 유람을 다니다가 유씨의 요양을 명분으로 머물던 길림부 목단강시(現 용강성 목단강시)다. 세조는 당시 41세로 매우 늦은 나이였기에 선종의 탄생은 국가적 경사였다. 세조의 문란한 삶을 자주 꾸짖던 광종조차도 선종의 탄생에 대해 매우 기뻐하며 곧바로 축하 전보를 보냈을 정도였다. 선종의 탄생 소식은 순식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그럼에도 흉흉한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축하분위기가 형성되지는 않았다.

세조와 유씨는 목단강시에 남아 몇개월 요양한 후 그해 7월 한성부 동궁으로 돌아왔다. 아울러 광종은 곧바로 유씨를 태자의 가장 높은 후궁 지위인 재인(才人)에 봉했다. 세조는 광종에 아뢰어 선종을 유모가 아닌 재인 유씨가 직접 양육할 수 있게 조치했다. 이는 유씨가 원했던 것이었고 선종은 역대 대한국 황제중 최초로 유모가 아닌 친모의 손에 자라게 되었다. 하지만 4년후 둘째인 헌친왕, 셋째 정혜공주가 연달아 태어나자 재인 유씨의 건강을 위하여 원자인 선종을 제외한 나머지 자녀들은 유모들과 보양청 관리들이 양육하게 되었다.

1914년 태자비 신씨가 세상을 떠났다. 그럼에도 친어머니인 재인 유씨는 태자비로 승격되지 못했고 무려 16년이 지나서야 정실황후로 인정받게 된다. 선종은 많은 병에 걸려 여러번 죽을 고비를 넘겼는데 3살즈음에는 홍역에, 5살즈음에는 폐렴에 걸렸는데 며칠간 사경을 헤매다 간신히 살아났다. 이때문에 몸이 약해졌고 14살이 될때까지 제대로된 후계자 공부를 수행하지 못했다. 그래서 선종의 유년시절에 대한 기록은 그다지 남겨져있는게 없고 실록과 궁내성 일기에도 칭병, 와병, 황제가 친히 병문안을 다녀왔다는 기록으로 점철되어 있다.

치세

평가

춘추관인 서목희[1]황제에게 말했다.


선황의 치세 이래 백성 모두가 서로에게 두터운 덕을 자랑할 수 있게 되었고 신료들이 기민하게 움직이게 하지 아니하여도 그들 스스로 알아서 움직여 요순지절에 버금가는 시대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이는 모두 선황의 성스러움이 국가 전체에 널리 알려진 덕이니 묘호는 선종(宣宗)으로 올리는 것이 맞겠습니다.

이에 황제는 그리하라 명했다.

익종실록 순화 17년(1978) 1월 12일 세번째 기사

선종의 치세는 무위지치(無爲之治)로 요약된다. 혼란스러웠고 온갖 굴곡진 로 점철되어 있던 들의 치세 이후 평화롭고 안정적인 한국의 6,70년대를 이끈 황제이다. 이 시기 한국은 전쟁이 가져온 피해를 모두 수복하였고 소련과 대치하며 아시아의 맹주로 군림하기 시작한 때였다. 세조의 카리스마와 정치적 활약을 통해 초법적으로 유지해나가던 황제의 전제적 권력이 완전히 의회로 넘어가는 시기였고 국민당의 장기집권으로 정치적 안정성이 높은, 그야말로 안정되고 평안한 시대였다. 한마디로 군주가 통치하지 않아도 모든 것이 알아서 굴러가는 ‘무위의 도’가 실현된 시기인 것이다. 이런 무위지치는 익종 치세인 90년대 후반까지 이어지다가 동남아발 경제위기의 여파로 한국 경제도 덩달아 휘청이며 끝났다.

선종은 선황들처럼 막강한 전제 권력을 보장받은 것도 아니었고 아버지 세조 같은 카리스마로 권력을 휘어잡는 타입도 아니었다. 선천적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던 탓에 화려한 대외활동을 자제하며 조용한 선비의 삶을 영위했으나 평화로운 시기를 이끈 덕에 무위의 도를 실현한 황제로 존경받고 있다.

이야깃거리

후궁 제도가 선종 치세에 폐지되었다. 아울러 법적으로 일부다처제(처첩제)가 금지된 것도 1962년의 일이다. 선종 황제 본인이 몸이 약해 여러 후궁을 거느리기 힘들었던 탓도 있었지만 1930년대부터 이미 여러 아내를 두는건 그다지 좋게보지 않는 풍조가 확산되었고 1960년 조사결과 전체 가구의 0.02%만이 여러 아내를 두고 있는 가정이었다고 하니 관습상 폐지 수순을 밟고 있기는 했다. 즉위 후에는 선황처럼 선황의 모든 후궁이 궁을 떠나살 수 있고 재가를 허락하는 상징적 조처를 내렸다. 이것이 왜 상징적이냐하면 세조에게 정식으로 책봉받은 후궁이 은귀비 장씨와 영귀비 금씨밖에 없었는데 은귀비 장씨는 1892년생으로 이미 일흔이 다 된 노인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 41세였던 영귀비만을 위한 조치였지만 영귀비도 중년이 된 나이라 결과적으로 아무도 궁을 떠나살게되지 않았다. 선종은 두 귀비를 '작은어머니들'로 모시며 극진하게 대접했고 모후이자 친어머니인 효현무황후에게 먼저 문안인사를 간뒤에 작은어머니들에게도 꼭 문안인사를 갔다.

  1. (1911~1990), 문화인류학자.